사회적 방어로 평택을 지킨다평화가 무엇이냐 2005/07/07 23:24
동북아시아는 지구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평화의 가치가 절실히 필요한 지역이다. 지난 6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북아시아 평화 국제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평화적 수단으로 평화를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평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안보(security)란 말이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은 국가의 무력기관인 군대가 다른 사회적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지극히 군사화되어 있는 사회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안보라는 것을 자연히 군대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군사주의는 그 속성상 국가주의와 남성주의로 이어진다. 그 일례로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고장을 지키는 것과 국가를 지키는 것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지역이 아닌 국가를 지키는 역할은 여성도 노약자도 장애인도 아닌 젊은 비장애인 남성이 맡게 된다.
이렇게 안보가 국가화, 군사화, 젠더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즉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심각한 위협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가? 우리들은 다양한 답을 쏟아냈다. 이중 몇 가지만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밤에 마음놓고 길을 걸을 수 없는 것, 빠른 속도로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가난과 배고픔, 불확실한 미래, 환경오염, 어떤 첨가물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식품, 지진과 쓰나미, 핵무기 등.
이것들이 바로 나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들이다. 군사주의를 벗겨내 버린 '안보'라는 것은 원래 걱정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외부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는데, 이것이 바로 안보를 지킨다는 의미의 '방어'이다. 군사화된 한반도에서는 방어 역시 아쉽게도 군대를 생각하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나의 안보를 군대가 방어해줄 수 있는가? 특히 남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름철에도 마음껏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나의 안보 욕구를 군대가 지켜주는가? 환경오염이 없는 곳에서 자동차들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편안히 길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내 안보를 군대가 지켜주는가? 그렇지 않다.
민중들의 욕망이 제각각 다른 만큼 안보의 상 역시 제각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주입되는 안보란 내가 늘 보며 살고 있는 내 고장의 안보가 아니라 바로 국가의 안보를 의미한다. 국가는 실은 내가 느끼는 고장이나 마을을 훨씬 초월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상의 공동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를 침범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적'이 '만들어진다'. 군사주의 사회에서 안보와 이를 위한 방어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국가와 남성의 필요에 의해 위로부터 요구된 것이다. 국가의 안보라는 것은 진정으로 무섭고 위협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불특정 다수를 적으로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침략으로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서 저항세력으로 규정되어 미군의 폭격에 목숨을 잃은 셀 수 없는 사람들은 사실 자신들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아닌가.
국가라는 가상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세우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야 한다. 적이 생기면 국가안보라는 괴물 역시 부산물로 생겨난다. 나의 안보는 자질구레한 것으로, 시시한 것으로 주변화되어 무시되어 버린다. 내가 성희롱을 당하지 않고 회사에 다닐 권리도, 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안정적인 내일을 꿈꿀 권리도 사라져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북한 핵문제가, 일본의 우경화와 독도문제가, 중국의 패권주의적 동북공정이 똬리를 튼다.
그래서 국가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보의 출발이 된다.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안보가 아니라 이제는 민중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안심(security)이 중요하게 된다. 국가안보를 지키는 것이 군사적 방어, 군대에 의한 방어라면 나의 안보를 지키는 것은 '사회적 방어', 또는 '시민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국제회의에 참여한 브라이언 마틴 교수는 이 사회적 방어라는 개념을 깊이 발전시킨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젊은 남성이 주도하는 군사적 방어와는 달리 사회적 방어는 여성, 노약자 등 사회의 모든 계층이 참여한다는 점이 커다란 특징이다. 또한 방어의 대상 역시 군사적 방어는 국가인 반면 사회적 방어는 자신이 사는 마을, 지역, 고장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비타협, 비협조, 파업, 보이콧 등의 방식으로 점령자들을 물리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군인들은 전선에서 총을 쏘고 시민들은 방공호에 대피하는 것이 군사적 방어라면 주민들이 비폭력 수단들을 동원해 일치단결하여 군사적 침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사회적 방어다. 우리는 1986년 필리핀에서, 1968년 체코에서, 1960년대 활발히 일어난 미국 유색인종들의 인권운동 기간에,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영국 점령 기간 인도에서 이밖에도 많은 예들에서 사회적 방어를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평택에서 바로 사회적 방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300일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팽성 주민들의 촛불시위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즉 자신들의 안보를 위한 방어에 나선 사람들은 총을 든 젊은이들이 아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주름살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반면 국가는 그 구성원인 팽성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살아온 땅을 국가안보를 위해 내놓으라며 윽박지른다. 하지만 '자동차가 오면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안나가겠다'는 주민들에게 국가안보란 말은 아예 통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거대 집단의 안보가 개개인의 안보를 총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방어는 군대를 통한 방어가 아니기 때문에 비폭력적인 방법이지만, 군인들에게 자신의 안보를 지켜달라고 내맡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인 행동이 된다. 바로 나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기에 사회적 방어는 주민자치이며, 자기결정권을 갖는 행동이 된다.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 곧 사회적 방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국가와 군대가 오염시켜온 안보라는 개념을 '지역에 거주하는 개인들의 안심'이라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차별을 받으며 서럽게 살고싶지 않다는 것, 쫓겨나지 않고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싶다는 것, 배고프지 않고 안심하며 먹거리를 먹고싶다는 것 등을 의미한다. 안보를 이렇게 정의하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도 자명해진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국경과 민족이 아니라 평화와 인권이다.
평택의 팽성 주민들은 제국의 군대에 맞서 자결의 권리와 평화로울 권리를 사회적 방어를 통해 지켜내려 하고 있다. 사회적 방어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전 계층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브라이언 마틴 교수의 지적은 중요하다. 개발과 파괴에 맞서 사회적 방어를 통해 지역의 '안보'를 지켜낸 부안 주민들의 핵폐기장 건설 반대 운동과 다양한 비폭력 캠페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냈던 천성산 살리기 운동에서도 이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뭉친 주민들의 힘은 총과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사회적 방어의 많은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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