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원고를 끝냈다
꼬뮨 현장에서 2011/05/30 04:15이화여대 대학원 신문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었다.
나는 바빠서 거절했는데, 어쩌다보니 받아들이게 됐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이번주 내내 나는 공연만 다섯 차례를 뛸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첨언하자면 이번 주에 공연 다섯번을 했는데, 공연비는 아직 한푼도 없다. 두리반은 예외로 친다고 해도, 이것 참 너무하다. 아직도 공연 노동을 일방적인 희생 또는 당연한 연대로 이해하는 자들이 많다ㅠㅠ 공연 준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돈이 든다. 밴드 연습을 하려면 시간별로 지불하는 합주비를 내야 하고, 악기를 옮기려면 차비도 솔찮이 든다. 무엇보다 귀중한 활동 시간도 빼야 한다. 악기도 가끔씩 수리해야 하고, 공연을 위해 밥을 먹거나 선글라스를 구하거나 옷을 구하거나 하는 것들도 있다. 또한 공연을 하고나면 엄청 지치기 마련인데, 이것은 모인 사람들과 에너지를 쏟아내고 교감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공연비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나의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공연에 온 친구로부터 애정이 듬뿍 담긴 선물을 받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가끔씩 생기는 이런 일은 큰 힘이 된다. 내가 공연을 계속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차분히 앉아 글을 쓰기에는 매일 새벽 나는 너무 지쳐 집에 들어오거나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행사준비를 하러 나가야 했다.
오늘 새벽, 나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원고지 20매를 미친듯 몰아써갔다.
사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아둔 이야기들이라 술술술 흘러나왔다.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글을 썼다.
아, 이제 좀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지 싶다.
조약골 만세다.
내일은 좀 편한 마음으로 김귀정 열사 20주기 추모 콘서트에 간다.
그 자리에서 김귀정 추모 동영상이 상영된다는데, 내가 (일종의) 주인공이 됐다고 그 동영상을 만든 다큐 감독에게서 직접 들었다.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김귀정을 추모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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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대학원 신문 72호 기고
두리반은 지금 가장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조약골 (인권활동가)
서울 신촌과 홍대를 잇는 동교동 삼거리에 위치한 유명 칼국수집 두리반이 강제철거를 당한 날은 2009년 12월 24일이었다. 그날 나는 용산참사 현장에 마련된 ‘복합투쟁문화공간’ 레아에서 ‘불법음악회’라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난 후 가까스로 용산참사로 목숨을 잃은 철거민들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용산이라는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작은 용산’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특히 두리반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1년간 용산참사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고, 나 역시 그 현장에서 지내며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건설자본만을 편드는 법과 제도는 바뀐 것이 없고, 여전히 돈 한 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철거민이 되어 쫓겨나고 있었다. 끝이 언제일지 모를 투쟁으로 지쳐 있었지만 나는 토건 중심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개발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입게 될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더욱 더 질기고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폐허가 되다시피 한 두리반에서 느꼈다.
2010년 1월 말, 용산 현장을 나온 뒤 처음으로 찾아간 두리반 농성장은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은 비장한 결의에 차있었지만 분명 ‘철거용역 깡패들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한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생존권을 짓밟히고서 이대로는 내쫓길 수 없다는 각오로 철거 다음날 두리반 정문을 막아놓은 철제펜스를 뜯긴 했으나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공기는 무거웠다. 순수하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체제는 너무나 부당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안종녀와 유채림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었다. 용산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또 다른 철거민들이 절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활동가로서 뭔가 해야지 싶었지만 아직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쉬면서 오랜 농성으로 지친 몸을 추스르던 그해 2월, 두리반에서 몇몇 음악인들이 공연을 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용산 현장에서 자주 보던 엄보컬, 김선수 그리고 홍대 부근에서 활동하면서 사회 현안에 대해서도 활발히 참여하던 자립음악가들이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에 공연을 열어 두리반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나는 용산에서 지내며 무거운 농성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문화예술의 힘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나 역시 몇 년간 음악을 만들고 노래로 연대하면서 많은 현장 예술인들을 알게 됐기에 함께 힘을 모은다면 작은 도움이나마 두리반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요일마다 칼국수를 다시 먹게 될 그날까지, 즉 강제 철거된 두리반이 다시 식당을 열어 주인부부가 장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문화행사를 열며 두리반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게 3월 초에 칼국수 음악회가 시작됐고, 두리반 농성이 500일이 훌쩍 지난 바로 오늘까지도 이 행사는 이어지고 있다.
사실 언제든 철거용역이 쳐들어와 다시 한 번 강제철거를 자행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두리반 사람들은 24시간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무엇보다 ‘항상 이곳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도록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집중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답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소설가는 소설가의 방식대로, 음악인은 음악인의 방식으로, 종교인은 종교인처럼, 그리고 활동가인 나는 활동가의 방식으로 두리반과 연대해 싸우기로 했다. 일견 무서워 보일 수 있는 철거농성장에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대중적인 문화행사들을 계속 여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대 부근에 위치해 있는 두리반은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었고 두리반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행사들이 계속 열리면서 두리반은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됐고, 2010년 5월 1일에 열린 전국자립음악가대회에는 69밴드가 공연을 펼쳤고, 무려 3천명의 관객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조그만 철거농성장이 당당히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명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활력을 나누며 새로운 실험을 벌여나갔다. 나는 두리반 주변 무너진 건물 잔해를 걷어내고 땅을 일궈 도심 게릴라 텃밭을 만들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고추, 상추, 오이, 시금치, 쑥갓, 돌미나리, 얼갈이배추가 자라고 있다. 두리반을 내쫓고 이곳에 16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얻고자 하는 GS건설에서는 한국전력과 공모해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두리반 건물의 전기를 불법적으로 끊는가 하면 철거 현장에서 폭력성으로 이름이 높은 삼오진건설을 고용해 두리반을 여러 차례 협박해왔다. 마포구청은 부당한 개발 사업을 용인해주고 모른 체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고, 주중에 두리반 주변에서 매일 한 시간씩 생방송을 진행한다. 나는 이곳을 열린 학교처럼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수업을 배우고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며 가르칠 수 있도록 영어강좌를 개설했고, 이후 많은 수업들이 생겨나 두리반의 문턱을 낮췄다.
그래서 2011년 이제 두리반은 노는 사람들에게 놀이터가 되었다. 농성장이고, 공연장이었던 두리반이 라디오 방송국이 되었고, 도시농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 텃밭을 내주었다. 강연자에게 강당이 되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되었다. 교실이 되었고, 돈이 없어 시간당 13,000원을 내기 힘든 가난한 음악인들에게 연습실이 되어 24시간 큰소리로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들기고 노래를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가장 뜨거운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토론을 하고, 작당모의를 하며, 춤을 춘다. 이제는 매일 그렇게 한다. 평일 낮에도, 주말 저녁에도 두리반에서는 뭔가 쿵짝쿵짝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누군가 이걸 총괄 기획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연대를 했고, 나 역시 그랬을 뿐이다. 서로 자극을 받아 잘 되는 모습을 보며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운 작당을 벌여왔기에 두리반이 이렇게 커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폭염과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300일 넘는 단전과 500일 넘는 철거농성을 이어온 것은 물론 안종녀와 유채림 부부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연대해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인권을 위해 싸워나가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고귀한 의식이 두리반의 저변에는 흐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누구든 자유롭게 여기서 자신들이 계획한 것을 실험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한다. 그래서 운동권이 아닌 사람도 위화감 없이 어울릴 수 있다. 이 정부가 저지른 4대강 죽이기로부터 개발사업의 폭력성을 느낀 당신도 두리반에 온다면 어느 순간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눌린 목소리를 제각각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두리반에 남은 일은, 우리들이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목소리를 낸다면 반드시 값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은 두리반에서 벼룩시장과 돌잔치와 출판기념회가 동시에 열렸다. 내일은 두리반에서 또 다른 모임이 개최된다. 두리반에 모인 힘은 다시 팔당 두물머리로, 대학 청소노동자들과의 연대로, 청소년 인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두리반은 지금 질래야 질 수 없는 가장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