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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 고등학생이 된 첫째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해서
강화읍 서점에 가서 책을 골랐다.
책이 너무너무 많았고 내용도 너무 어려웠다.
아이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남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오랜만에 만난 서점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몬스터볼이나 얻자 하고 용흥궁으로 갔다.
볼만 모으고 대전을 하지 않으니
늘 '담긴 물건이 너무 많다'는 메시지가 뜨면서
힘들게 찾아간 포켓스탑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가방을 비우기 위해 효용가치가 적은 상처물약을 버리곤 하는데
그냥 버리는 게 아까우니 근처 체육관에 가서 대전이나 하자고 했다.
귀찮아하는 아이들을 끌고 용흥궁을 찾아가는데
포켓몬고 맵이 없었으면 길을 잃었을 거다.
성공회 강화읍 성당과(성공회 교회를 보는 건 늘 왜 이리 불편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담벼락 사이를 걸어올라가다
우리가 용흥궁과는 반대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맵에 의지해 찾아가다 정체모를 긴 담벼락이 바로 용흥궁 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됨.
용흥궁 바로 앞에 한옥집이 있었다.
아이들은 대전을 하고 나와 남편은 돌계단에 앉아있었는데
그 한옥집 안에서 "엄마, 가지 마"라는 절박한 애원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나는 곧 뛰어나올 어떤 여성을 위해
아이들에게 빨리 대전을 중단하고 가자고 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계속 흘러나오고 우리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나왔다.
서둘렀던 건 나의 마음일 뿐
평화로운 산책길이었으므로 아이들이 빨리 걸을 리는 없었다.
곧 방금 울던 아이의 엄마임이 분명한 어떤 여성이
한가로이 걷는 나의 가족들을 제치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갔다.
울타리가 깨지는 건 가족구성원의 죽음이나 병, 사고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식의 자잘한 다툼이 아이들의 마음에 그늘을 남기고
그것이 반복되면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 안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엄마, 가지 마"라는 말 한 마디에 내가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던 건
나도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삶은 망했다,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있으니 버티고 견뎠다.
길진 않았지만 그 순간이 아이들에게 깊은 자국으로 남지 않았기를.
지금도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면 남편이 밉다.
미운 남편을 어쩌지 못해
뭉게뭉게 피어나는 내 마음의 미움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울면서 거리를 헤매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던 시간들.
상처받고 상처줬던 시간들.
바닥까지 추락하고 나서야 함께 할 수 있게 된 남편.
2013년의 추락에 대해 노 사모님이 "하느님이 정말 그를 사랑하는것 같다"
라고 말했던 이유를 나는 그 후의 시간을 보며 이해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대화를 시작한 남편을 보면서
차라리 나는 지금이 좋다, 좋다라고 생각한다.
2.
4월의 시작과 함께 교육들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4월 1일 영종도
4월 3일 희망터
4월 6일 부산 복지관, 강화의 어떤 고등학교
4월 7일 스토리텔링
그 사이 나는 실행안을 확정해서 기관에 보내 오케이사인을 받고
교육에 필요한 장비들을 빌릴 수 있도록 협조요청서를 보내고
해당 교육지의 담당자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그리고 학생들을 만난다.
미디어교육은 독립영화감독으로서 실천이다,라고 학생들에게, 후배들에게
추천하면서
나 스스로에게도 그것이 합당한 말일 수 있게 하기 위해
가능한한 소외지역을 선택한다.
하지만 작년에 갑작스레 맡았던 서울의 혁신학교와
멍청해서 맡게 된 영종교육.
경제적으로 안정된, 높은 교육열을 가진 부모.
그래서 아이들은 똑똑하고 착하고 예쁘다.
작년 교육파트너 C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부잣집 아이들은 똑똑하고 예쁘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그래서 교육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그게 너무 슬프다고.
가정환경이 용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씁쓸한 소회.
우리들은 둘다 너무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집은 차비와 도시락만 제공해주었기에 우리는 한 번도 패스트푸드점에 가보지 못했다.
잠실 올림픽아파트의 여고생들을 가르치던 때,
과외비를 받은 날, 맛있는 걸 사달래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들어갔던 KFC,
그곳이 내 생애 최초의 패스트푸드점이었다.
C도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밤에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
강화의 아이들은 어떨까.
마음 아프지 않을까.
오전엔 영상대안학교, 오후엔 마이스터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작년엔
마음이 많이 아팠다.
오전은 너무 풍족했고(학교에 스튜디오까지 있었다!)
오후는 너무 부족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나는 늘 갓 구운 따뜻한 빵을 사갔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1년이더라도 따뜻한, 편안한, 하다못해 맛있는 시간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아이들,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구식 카메라 한 대만 있던 방송실.
그래서 센터에 사정하고 설득해서 최신의 카메라를 오래 빌렸다.
화질좋은 최신의 카메라에 기뻐하던 아이들이 소수라서 속상하긴 했지만
그렇게 보낸 1년이 그나마 괜찮았는데 올해는 어떨지 모르겠다.
강화의 아이들은 어떨까. 강화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이다.
장비가 하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게 스마트폰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종도에는 스마트폰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
2G 폰을 가지고 있는데 그나마도 자유롭게 쓸 수없다고 해서 단체방도 만들지 못했다.
두 개의 세계를 오가면서 자꾸 생각들이 많아진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오직 한 사람의 마음도 변화시키지 못할 거다.
아이들은 너무 바쁘고 나는 고작 일주일에 두 시간 만날 뿐이다.
(너무나 유능한 교육담당자가 있는 영종은 시간도 일주일에 세 시간이다)
그래도.... 쉽게 중단하지 못하겠다.
강화의 교육을 위해 인천센터 면접을 보던 날,
그룹면접이 끝난 후
처음 보는 다른 세 명의 교사들과
"우리 면접을 너무 잘 본 것같다, 또 만나자" 하며 헤어지는데
그 때 강사들이 다 그랬다. 강화는 너무 멀어서 가고 싶지 않다고.
방과후강사도, 아르떼강사도, 자유학기제 강사도 김포까지는 가지만 강화에는 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화의 학교들은 그다지 진행하고자 하는 뜻도 없다.
그런 곳에 내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고 있다.
그래서인지 4월의 일정표는 확실히.....잔인하다.
3.
집에 와서 아이가 처한 최근의 어려움을 들었다.
학원이나 인강같은 것 없이 교과서 위주로만 공부했던 30년 전의 내가
과목도 많고 교재도 많은 2017년의 고등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정말 없는데도
남편은 같이 이야기를 해보자 했다.
남편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 해줄 말이 없다.
남편은 뒤늦게 영어공부를 한다고 영문법 동영상파일을 반복해서 보더니
아이에게도 좋다고 권하고 아이도 좋아했다.
내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는데
그것도 포함한 이야기를 할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아빠가 준 파일이 좋긴 한데 시간이 없어"
사실 남편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조언이었겠지만
그래서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거지만 어쩔 수없이 입을 연다.
공부는 어차피 혼자 하는 거야.
좋은 강의 들으면 재미있고 고개가 끄덕여지겠지만
그건 강의들을 때 뿐이야.
누구가의 강의를 듣는 건 수업시간만으로만 제한하고
니가 다시 니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해.
기본내용을 숙지하고나서 문제를 풀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가 모르는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확히 체크해서 다시 그 문제를 만났을 때에는 그것을 풀고 넘어갈 수 있도록
내 구멍을 자꾸 메우는 게 공부야.
국어, 영어, 수학,
까지는 어떻게 얘기를 했는데(사실 요즘 변화된 상황에서 유용할지 확신도 없으면서)
과학은 정말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나는 생물선택이었고 그건 거의 암기 수준이었고
물리, 지학, 화학은 내신도 형편없었다.
100점 만점에 48점을 맞았던 2학년 중간고사때의 성적은 아직도 내게 충격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입도 뻥긋 못하지만 영어 때문에 성적이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교재가 하나 있었다.
다들 맨투맨이나 성문이 좋다고 해서 그걸 보다가
학교 보충수업 교재가 내게 맞아서 그걸 기본 교재로 삼았다.
종이로 싸고 비닐로 쌌는데도 너덜너덜해질만큼 많이 본 그 책의 이름은 포인트업.
나는 그 책을 너무 좋아해서 20대 내내 가지고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잃어버렸다.
신혼집 예정지였던 장애인센터의 공사가 늦어져서
남편의 옥탑방으로 몸만 옮겨갔기에,
몸만 옮겨가느라 모든 짐들을 광명 집에 두고갔었다.
그 책은 어디로 갔을까?
효용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공부법에 대해서 알려주고 나서
늦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꿈.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의 첫 수업 시간.
인도의 학교처럼 나이든 나무가 울창하고 땅이 푹신푹신했다.
내가 수업을 하는 곳은 애니메이션 전공의 학생들을 배려해서
만화방처럼 꾸며져있다.
부드러운 빛이 방을 채우고 한쪽 벽에는 낡은 만화, 헌책들로 빼곡한 책장이 세워져있다.
만화방이 그렇듯이 낡은 천소파가 나란히 놓여있고 거기에 아이들이 앉아있다.
아이들한테 "여기 분위기 너무 좋다" 하면서 책장을 보는데
거기에 낯선 표지의 영어교재가 있었다. 제목은 하일라이트 업.
꺼내서 펼쳐보는데 너무 반가웠다.
다시 표지를 보니 내 이름이 써져있었다.
그 책이 낯설었던 건 여고시절 내내 포장과 비닐로 표지를 싸두었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생각했다. 아, 내가 착각했구나. 포인트업이 아니라 하일라이트 업이었어.
나는 하은에게 그 책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나하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빌렸다.
아이들은 "그거 소품처럼 꾸민 거라 그냥 가져가셔도 돼요" 하며 안녕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 후로 잠깐 교장도 만났고(정운영교수님을 닮은 멋진 분이었다)
나이든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푹식한 땅에 나 혼자 서있었던 장면이 마지막 컷.
꿈이 참 재밌네.
그 시절, 태능시장과 휘경여고 사이를 오가면서
아침저녁으로 듣던 음악.
하얀색 AIWA 워크맨에 들어있던 테이프의 음악.
큰언니의 것이었다.
나의 음악들은 주로 오빠, 언니들의 것이었구나.
서른이 된 후부터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M을 떠올렸다.
1년 전 4월, 빗속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너를 그렇게 떠나왔다.
16년동안 다시 너를 만나면 나는 어떤 얼굴이어야할까 수백번 생각했는데
나는 어제 만났던 것처럼 안녕, 하고 인사를 하고
그냥 돌아왔다.
사랑이 지나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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