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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살다

족보를 보며 오케이를 체크하다가 오케이가 너무 많아져서 길을 잃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써치록을 봐야겠다.

그것을 봐도 이런 상태라면 테입을 다시 봐야한다.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 활자들을 보면서 이건 큰일이다 싶었다.

지겨워지려고도 하고 따분해지려 하는 순간, 나는 지금 노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있고 이건 나의 직업이고 이 일을 하기 위해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여기 이렇게 앉아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자리, 이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를 기억해낸다.

지난 여름, 써치작업을 하면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담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던 그 순간들을

한순간 흘려보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그 느낌을 찾아야 한다.

 

촬영을 하는 건 그 순간에 없는 것과 같다.

하돌의 운동회를 찍을 때면 나는 아이의 달리기에 환호하지 못한다.

앵두의 울음을 찍을 때면 나는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다.

그 순간을 담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 없다.

그리고 찍힌 화면들을 보면서 나는 나중에 그 시간을 느낀다.

그래서 생각했다. 누구에게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그 촬영본들을 다시 한 번 보면서 두 번 살아야할 것같다.

어쩌면 세 번 네 번이 될 지도 모르겠다. 멀리 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착실하게 줍자.

 

교회 분들이 <엄마...>를 보자고 하신다.

2005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교회 분들을 초대했었는데 그 때 보신 두 분이 영화를 좋아했었다.

요즘 다시 큰 교회로 나가고 있는데 그래서 그 분들이 내게 영화얘기를 하시고...

그러자 다른 분들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다.

나는 독립영화는 소리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극장에서 봐야하고

그래서 상영이 있으면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상영 따윈 있을 리가 없다.

시네마달에서 인터넷 상영을 하자고 했을 때에도 나는 거절했다.

나는 누군가 <엄마...>를 우연히 보게 되는 게 싫다. 

그 영화는 영화로만 소비되었을 때 조악한 음질과 화질, 구성의 삐걱임과

함부로 드러내는 상처들 때문에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가장 무서운 건 현실의 나를 아는 어떤 사람이 그 영화를 보고

"당신, 그런 집 딸이었군요"라고 말하는 거다.

 

이전 블로그를 닫게 만들었던 사건 때 00재단 사람들은 그 많은 기사 중에서

"바람난 엄마 카메라에 담은" 아무개라는 글만 자기네 블로그에 올려두었었다.

그 행위의 의미를 안다. 나의 고백은 비수가 되어 나를 공격한다.

여성동아에 기사를 삭제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문제는 스크랩된 기사는 어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일일히 지워달라고 부탁을 해야한다는 거다.

00재단 사람들이 아닌 이들에게는 부탁을 했지만

00재단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무섭다.

 

지금의 작업도 사실은 그런 위험이 짙다.

나를 드러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2005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2009년 지금은 버거워한다.

내년에 만들어질 영화를 훗날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그래도 나의 사회적 배우들에 대해서 좀더 신중해야함을 배웠다는 데서 이 시간의 의미를 찾고 싶다.

 

2. 유이카와 케이 <사랑해도 사랑해도>


누구나 마침표는 자신이 찍고 싶어하지. 나는 너하고 결혼하면 내가 어떤 득을 볼까, 그것만 생각했어.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편해질까 하는 생각 뿐이었지. 하지만 정작 너한테는 해줄 게 아무것도 없어. 솔직히 말하면 뭔가를 해주겠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나는 그저 내가 끌어안고 있는 불안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야.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지. 나는 네가 뭔가 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너한테도 제대로 뭔가를 해주고 싶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여유가 없어. 내 앞가림도 못하는 걸. 언제쯤에나 그런 여유를 갖게 될지 지금은 나도 모르겠어.

 

나의 결혼도 사실은 그랬다. 나는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탔고 선배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얘야, 연애를 해도 결혼을 해도 자기만의 외로움은 있는 거란다. 그러니 제발 작업을 해라.

서른 세 살 까지는 절대로 연애는 하지 마. 연애하지 말고 죽어라 작업해서 영화 두개는 만들어."

그 말을 들었던 게 28살이었는데 나는 서른에 결혼했다.

결혼을 한 후에도 선배는 내 걱정을 오래 했다.

남편을 만나 얘는 너무 예민하니까 그걸 잘 배려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사무실을 떠날 때에는 보라매공원의 낙엽쌓인 벤치에 나를 불러내어서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빠져서 여자로만 살지 말 것을 부탁했었다.

작업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도 했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는 그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이라는 게 힘겹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외로울 시간 좀 갖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외롭다. 김연수가 말했던 '따뜻한 외로움'. 이 시간이 나에겐 축복인 것이다.

 

태양이 돌아갈 곳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고향집이 있다고. 할머니와 엄마, 유키오 네가 있다고. 그게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 어렸을 적에 저지른 실수나 모험담. 거기에는 항상 아사노강이 있고 우타쓰 산이 있고 비가 있고 눈이 있고 바람이 있었다. 그것들이 머릿 속에 떠오를 때마다 유키오의 가슴 속에 자리한 무수한 균열들이 하나씩 메워져가는 듯했다.

 

이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내 고향 바다와 들판과 산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들에게 가해졌던 악행들을 언니와 나는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하지만 나이와 기억능력에 따라 정도가 다를 뿐 어쨌든 어린 우리는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고향은 내게 위로를 준다.

몇년 전 남편과 함께 갔을 때 보았던 나즉나즉한 산, 황토흙 위의 파릇한 배추들,

그리고 초라하고 외로워보였던 아버지의 산소. 

 

어른들은 모깃불 옆의 평상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던 여름밤.

폭설로 쌓인 눈을 치우던 추운 겨울의 차갑고 상큼한 공기.

끝내주게 미끄러워서 정신없이 즐거웠던 저수지의 꽝꽝 언 얼음.

고향은 여전히 나에게 매혹이다. 그리고 위로를 준다.

 

자신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다른 누구와도 아닌 자신과의 약속이다.

약속한 일에 대한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것이 자기다운 삶의 길이라 믿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나는 매번 작업을 할 때마다 머리 속에 그렸던 생각들이 깨어지는 과정을 겪었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으나 이젠 그것들을 기다리고 바란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내 마음은 내 생각은 일밀리미터 정도는 자라는 것같으니까. 구르고 깨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것. 너덜너덜해진 구성안을 들고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의 덜컹임에 한숨 쉬는 것.

그것이 내 영화의 실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나의 영광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연애는 왠지 가장 잘 익은 부분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신현림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연애를 했던 적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받는 연애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모두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나는 실패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왔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사람 사이는 깨어지기 쉬운 뭔가로 이루어져있고 그것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깨지고 나면 끝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관계 따위는 없다. 소중한 뭔가를 깨뜨려버린 후에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냐고 얘기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서툴렀던 나의 연애에게, 그리고 그 파트너들에게 위로를. 하지만 사실 너희들도 결국은 나 때문에 성큼 자랐고 그래서 지금은 더 행복해졌겠지? 물론 나 또한. 그런데 제발 바람은 피우지 말아라. 감정이 북받치면 관계는 정리하는 게 옛 사랑에 대한 예의잖아...

 

사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깨달음을 얻고난 뒤에도 인생은 후회와 상처의 지뢰밭이다. 메마르고 개인주의적인 도시 생활이 몸에 밴 것같은 20대 후반의 두 여성 리리코와 유키오 역시 어느 순간 지뢰를 밟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렇게 폭발해 타버린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건 할머니와 엄마가 살고 있는 고향집 그리고 그곳에서의 아잇적 추억이다. 하지만 역시 믿을 건 가족 뿐이라는 뻔한 공식을 끼워 맞추기에 이 가족의 사연은 간단치 않다. 그 간단치 않은 사연을 무겁지 않게 펼쳐나가는 이 소설은 혈연이 아닌 특별한 인연으로서 가족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네 여자를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는 건 부드러운 연민의 시선이다. 이 진심어린 연민에서 나오는 속 깊은 위로야말로 가족을 가족이게 해주는 본질적 요소가 아닐까. 사랑의 결정체가 결혼은 아니며 결혼 또한 인생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김은형

 

그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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