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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약속장소에 1시간이나 먼저 도착해서 어쩔 수 없이 이번 주 <씨네21>을 열심히 읽었다.
허진호 감독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었다.
허진호 감독, 하면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2005년 여성영화인축제에서 <엄마...>를 상영했었다.
그 때 나는 gv를 위해 하돌을 업고 갔었다.
상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료집을 읽었다.
그리고 내 영화에 대해 평론가가 쓴 글을 보았다.
그 기분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사이코 드라마 또는 피학적 노출극'이라는 그 글은 읽는 내내 내 심장을 후벼팠고
나는 울고 싶을 정도로 서러워졌다.
"그녀들은 기괴하게 엉겨붙어 연민과 체념을 연대로 착각하며"
라는 문장을 읽을 때에는 내가 영화를 못 만들어서 엄마와 언니까지 기괴하게 만들어버렸구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gv를 위해 하돌을 안고 객석 앞으로 나갔을 때
거의 비어있는 좌석들 앞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방금 읽은 글 때문에 나는 초라했고 불쌍했다.
거기다 아기까지 안고 있어서 비참했다.
앞자리의 남자는 내내 삐딱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나는 그 남자가 나를 한심해한다는 걸 느꼈다.
그 남자의 얼굴이 기억 속에 깊이 박혔다.
이번 주 <씨네21>에 나온 허진호를 보니 그 때 그 시간이 화르륵,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남자가 허진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갑자기 그 시간들이 화르륵 살아온다는 거다.
<친구>를 만들고 나서 나는 카메라가 권력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미워했던 사람은 관객들도 미워했다.
내부 시사회 때 "네가 00를 미워하는 게 느껴져"라는 말을 들을 때 그러니? 하고 웃고 넘어갔지만
관객들과 만난 후 나는 내가 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미영은 말한다.
"내가 생각할 때 영화를 만들 때 '용기'가 있는 것은
찍기 어려운 어떤 대상을 찍었는가의문제가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자신을 영화 속에 과연 얼마만큼 드러내는가의 문제인 것같다"
감독이 '나'를 등장시키는 게 단지 스타일의 차용이나 노출증 때문은 아니다.
나는 절대자가 아니라는 것.
당신(관객)이 보는 것은 감독인 내가 만든 세상이니 의심하고 회의해주기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권력자로서의 나는 싫은 거다.
나는 네번째 영화에 이르러서야 내 등장인물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심지어 엑스트라든 그들은 스스로 세상 속에서 주인공인데
나는 내 영화 속에서 비중을 정한 후 각자의 캐릭터를 만든다.
나의 기준으로 내러티브를 만들고 그렇게 퍼즐맞추기를 한다.
내가 좋아했던 방식.
그런데 지금 나는 그게 하기 싫은 거다.
내가 본 세상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절대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거다.
메시지를 위해 예의를 포기해야하는 건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건가?
그래서.....용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중이다.
당신들을 보이는 만큼 나도 보이는 게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울을 보면서 매무새를 다듬는 것처럼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위선이거나 위악이거나.
그래서 불편하다.
나를 숨기고 나의 카메라가 벽에 붙은 파리가 되어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 것처럼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그 방식 그대로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유혹에 자꾸 빠진다.
부산에 갈 것이고
가서 눈이 빠지게 영화를 볼 것이고
그리고 돌아와서 열심히 내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 때까지 정리해야할 문제.
내가 본 세상을 어떻게 당신과 나눌 것인가
지금 나의 절실한 화두.
댓글 목록
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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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감독같은 사람도 있는데 뭘 그러세요. 아니 페미니스트들은 왜 현실을 증오하는게 아니라 김기덕을 증오하는지 모르겠어요. "악어"라고 어떤 여자가 남자 두명한테 보호를 받음과 동시에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영화가 있는데 그걸 보고 분개하니까 김기덕이 그 여자 그 남자들이 보호안해주면 열명한테 더 당한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지. 예전에 정은임씨가 하던 라디오프로에서 정성일씨가 해준 얘긴데 어떤 영화감독이 분개를 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군요. 너희 평론가들은 배우들의 눈물에 대해서 아냐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서 아냐고. 물론 쓰레기 영화는 있어요. 하지만 쓰레기 평론가들도 있어요. 전 그 방송 들으니까 제가 배우라면 그런 감독과 같이 영화하고 싶을것같아요. 정성일씨도 그러더군요. 영화는 결국 사람에 대해서 배우는거라고.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부가 정보
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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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들은 십자평이나 쓰면서 먹고살면서. 그런건 나도 쓰겠어.부가 정보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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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러 그런 기억을 떠올려요?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했는데... 당신에겐 당신의 수많은 팬보다 거놈이 더 거슬리나요? 기운내요.부가 정보
kirehi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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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팅이삼ㅎㅎ부가 정보
넝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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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엄마...> 참 재밌게 봤는데.. 그렇게 솔직할 수 있는 감독의 태도에 놀랐고, 감동했어요. 굉장히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요. 영화를 만들 때 자신을 영화 밖으로 벗어버리고 마치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재가며 스스로 (거의)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이 더 사이코 드라마라는 생각이...; 이미 스스로가 카메라 뒤에서 옷 매무새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훈늉하시다는 생각이...!!ㅎㅎ;부가 정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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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itas/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런데 제 영화가 다큐라서 제가 영화를 잘 못 만들어서 등장인물들이 우스워보일까봐 걱정이예요.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등장인물에 대해 조소하거나 한심해하는 게 걱정되어요. 내가 무능한 감독이 되는 건 괜찮지만....나를 믿고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할까봐 그게 걱정이예요. 그래서 가끔은 다큐멘터리 말고 다른 뭔가를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곤 해요. 어쨌든 열심히....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재원/고마워요. 그날 제가 전화기가 바뀌어서 재원 전화번호를 몰랐어요. 같이 밥 먹으려고 찾다가 사무실에 전화해서 재원 전화번호 물어봤는데 아쉽게도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요. 반가웠고 더 이야기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우리는 지금까지 제대로 얼굴 마주보고 이야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네요. 또 만나요
kirehiais/고맙삼. 당신도 화이팅~!
넝쿨/훈늉하시다고 하시나 몸둘바를...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시간에 쫓겨서 객관화하지 못한 부분이 좀 있는 것같아요. 이번엔 좀 더 정리된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빨리 끝내고 넝쿨처럼 june처럼 거기에 있고 싶어요.
모두들 즐거운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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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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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쨈 너무 잘먹고 있어요. 고마워요 ^___^부가 정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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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가 정보
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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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벽에 붙은 파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근데 파리가 계속 꿈틀거리면서 벽에 붙어있을 생각을 하지 않아서 고민이에요.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물컹한 상황속에서 시간만 흘러가고 있어요. 흑. 하루의 고민이 저에게 위로가 되네요. 저도 더 열심히 고민을 해야...(한다는 압박만이...)부가 정보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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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좋아요. 그리고 저도 또 고민하네요. '내 영화'라는거. 아직은 까마득하지만요..부가 정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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깅/저도 뒤늦게사 한 고민이라...아마 편집 내내 촬영본들 보면서 속상해하지 않을까 싶지만 뭐 다음엔 더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만... ^^나비/부산에 오신다고 해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못 봤네요. 나비의 영화, 또 볼 수 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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