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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41회 – 더없이 불안하고 행복한 순간

 

 

 

1

 

대학생이 된 조카는 홀로서기를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노력했던 일이 잘 안 됐지만

이번 겨울에는 면허증을 땄고

이어서 한국사 능력시험을 준비하는 등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역량을 키워가며 홀로서기를 위한 노력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만

성인으로서 홀로 서는 과정은 관계에서도 거리감을 두게 됩니다.

 

중학교 때부터 저를 서먹하게 대하더니

고등학교 때부터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더군요.

그런 조카의 태도가 서운했지만 사춘기여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저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삭막하고 살벌한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가난한 시골 농부는 별로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조카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많이 많이 많이 서운했습니다.

 

세상 밑바닥에서 오랫동안 살아와서

무시당하는 것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제 마음이 출렁이는 걸 보면

알량한 자존심이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그 자존심에 기대 성질이라도 부렸다가 나만 피 봤던 경험이 많기에 성질도 못 부립니다.

잘 보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러려니 하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꿈을 키워가고 삶의 의지가 충만한 이들은 저처럼 별 볼일 없는 존재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반기고 따르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나이 들어 기력이 약해진 채 홀로 살아가는 어머니는 아직도 저를 걱정합니다.

주위에 벗도 없이 오로지 저만 믿으며 살아가는 노견인 사랑이도 저를 항상 반겨줍니다.

해마다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며 소통에 매번 실패하는 감귤나무들도 의연하게 저를 지지해줍니다.

그리고 좀 더 귀를 기울여보면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결국 제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의 품속입니다.

 

 

2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날

날이 밝기 무섭게 하우스에 들어가 감귤나무들을 살펴보는데

열풍기가 고장이 나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온도계를 보니 하우스 안은 영하 1도였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급하게 열풍기 수리업체에 연락을 했지만

도로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눈이 녹아야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걱정되는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봤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감귤나무 동해’에 대해 검색을 해봤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나무가 적응을 못한 상태에서 영하 3도 이하의 추위가 지속될 경우 동해가 발생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열풍기를 점검했을 때는 영하 1도였지만 밤 사이에 기온이 얼마나 떨어졌을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나무에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있을 경우 나무가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고도 했습니다.

올해 감귤이 너무 많이 달려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이 사실을 접하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나무가 동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고, 날씨가 풀린 후 2주 이상 지나서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보름에서 한 달 동안은 속앓이만 하며 나무를 살펴봐야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작년에 마지막 물 관리를 잘못해서 한해 농사를 망쳤었기에

한 해 동안 많은 고민 속에 심란해하면서도 열심히 해왔습니다.

중간 중간 병충해 피해가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었죠.

이제 두 달 후면 수확인데 만약에 동해 피해를 입게 되면 열매를 전부 버려야 합니다.

특히 올해는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있기 때문에 내년에는 열매가 거의 달리지 않게 되어서

올해 피해를 보면 내년까지 그 여파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3년 연속으로 제대로 된 수확을 못하는 꼴이 되는데...

 

고민을 할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집니다.

그렇다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걱정에 사로잡혀 불안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명상이라는 것을 어설프게 해오고 있는데

아직도 머릿속 상념을 제대로 정리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도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노력해왔던 공력을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불안한 내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 불안이 가라앉기를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한파가 물러간 다음날

기온은 급속히 올라갔고

햇볕까지 비췄습니다.

하우스 주변에 쌓인 눈들은 빠르게 녹기 시작했고

하우스 안은 초봄처럼 포근했습니다.

 

하우스 주변과 안을 둘러보며 시설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봤습니다.

시설에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곧 해결됐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감귤나무도 둘러봤지만

나무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더군요.

의자에 앉아 포근한 날씨를 만끽하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시골집 내 정원의 꽃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르방에서 아이들과 보냈던 시간.”

아이들이 어렸을 적 산책을 나갈 때마다 들꽃을 따서 할머니이게 건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고마워했고, 들꽃을 정성스럽게 물 컵에 꽂아두었다. 낡은 스웨터 차림으로 잔디밭에 누워 아이들과 뒹굴던 할아버지, 해 질 무렵 정원에서 함께 마시던 아페리티프, 짭조름한 소시송 맛과 함께, 나는 처음으로 ‘가족적인 삶’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묻는다.

“스위스로 가기 전에, 모르방 시골집에 가보고 싶지 않니?”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입 안에서만 맴돈다.

“불가능해. 하지만 난 매일 그곳을 떠올려. 정원 앞 돌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던 순간들...”

 

 

이화열씨가 쓴 ‘고요한 결심’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 대목이 제 마음에 와 닿더군요.

늙고 병들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겠다며 스위스에 있는 기관에 조력사를 신청했습니다.

그 노인과 나눈 대화 중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로 한 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소중하게 곱씹는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제 마음에도 전해지는 듯 하더군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초록으로 뒤덮은 잡초들 위로 화사한 햇살이 비추고

감귤나무에는 노란 감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사랑이는 그 아래 앉아 더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더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두게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을 곱씹으면서 행복해하겠죠.

이런저런 고민과 불안들이 주위에 널려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시절이기에

가슴 속에 선명한 사진처럼 넣어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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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4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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