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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37회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1

 

어느 날 갑자기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언론과 정치권은 정신질환자 관리에 대해 무섭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자를 정신병원이나 수용시설에 보낼 수 있게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하지만 수용시설에 보내진 정신질환자들이 어떤 치료를 받고 사회복귀를 위한 준비는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정신질환자와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고립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아버립니다.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쌓아가며 ‘정신질환 범죄자’의 문턱까지 가봤던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혼자만의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얼마 전에 조은혜씨가 쓴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정신질환 범죄자들을 만나 상담을 해왔던 경험을 풀어놓은 책이었습니다.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이면서 사회에 의해 부서지고 방치된 피해자였던 그들을 만나 나눴던 얘기들을 정갈하게 써놓았더군요.

그들을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버린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순수한 내면에서 느껴지는 인간적 모습에 안타까워하다가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태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고

여러 노력 끝에 신뢰가 쌓여가다가 행정적 조치로 갑자기 이감돼 버리는 상황에 허탈함을 맛보기도 하고

상담과 치료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 사회로 복귀했지만 연계된 시스템이 부족해 다시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현실에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그저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기에 바쁘게 만들어진 세상은

수시로 정신질환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때어놓으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그 시한폭탄이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더 먼 곳으로 그들을 밀어버리죠.

세상은 점점 미쳐 날뛰는데

그런 세상에서 진짜로 미쳐버리는 순간 쓰레기처럼 멀리 버려지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한해의 시작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어지러운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란은 시위로 들끓고 있고, 베네수엘라는 대통령이 납치당하고,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리아와 예멘도 심상치 않고...

몇 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쟁과 시위 소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전쟁과 계엄이라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뻔 했으니 이 어지러운 세상의 일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면서 무시무시한 재앙을 현실로 보여주고 있는데, AI가 살길이라며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 모아 세상을 더 가속도로 몰아붙이려 하고 있으니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자동차는 고사하고 그 흔한 스마트폰 하나 없이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미 실시간으로 연결된 세상은 각종 정보를 정신없이 쏟아내고 있어서

세상의 소식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 정신없고 소름 돋는 소식들을 계속 접하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눈과 귀를 다 막고 이곳의 안락함에 조용히 파묻히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와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이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각종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향해 뭔 짓을 하든 제 행동이 가닿을 수 있는 범위는 초라하기 그지없기에

그저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 이태원 참사소식을 멀리서 접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말이 있는데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식들을 접하면서 그 말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

“외면하지 않기, 참견하지 않기, 몸으로라도 바람을 막아서 온기를 지켜주기”

 

 

3

 

<무소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난초 분 두 개를 정성스레 기른 스님은 난을 가꾸면서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길을 떠나지 못하고,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벽의 위쪽에 자그맣게 만든 창)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다. 난초를 내놓은 채 나갔다가 뒤미처(그 뒤에 곧 잇따라) 생각하고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난초에 집착한 스님은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하며, 스님이 얻은 깨달음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월간 작은책 2025년 9월호에 실린 이형진씨의 글 중 한 부분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랑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사랑이와 함께 지내며 정을 나누다보니

사랑이를 혼자 두고 외출을 할 때는 마음이 쓰이고

사랑이를 혼자 두고 외박이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산책은 빼먹으면 안 되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는 사랑이 간식을 꼭 사오고

사랑이가 심심해하는 것 같으면 틈틈이 쓰다듬어주며 애정을 표합니다.

법정 스님이 난에 보이는 애정 못지않게 사랑이게 애정을 쏟고 있습니다.

스님은 “이 또한 집착이다”면서 아끼던 난을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구했지만 저는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집착하는 것에 감귤나무도 있습니다.

사랑이만큼은 아니지만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고, 환기를 하고, 전정을 하고, 병충해 방제를 하고, 열매를 솎아내 거나 매달고, 겨울에는 보온을 하고, 시설을 점검하고, 잡초를 베어내는 등 신경을 써야할 일이 많습니다.

나무는 사랑이처럼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부족하고 넘치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불필요한지 하는 것들을 쉽게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끝임 없이 나무를 관찰하며 나무의 변화를 민감하게 살피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확히 알아내서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긴 호흡으로 나무와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려면 나무에 대해 공부하고 집착해야 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이 별로 없기에

특별히 집착해서 얽매일 것이 많지는 않지만

사랑이와 감귤나무에 대한 얽매임은 풀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얽매임을 통해 사랑과 소통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죠.

 

 

 

(브로롤리너마저의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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