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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26회 – 여유롭고 편안한 가을을 느끼며 내 마음속에 담아보는 것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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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여름 채소들을 다 정리하고 겨울 채소들을 파종했는데

아직 먹을 만큼 자란 것들이 별로 없어서 요즘에는 채소가 조금 귀합니다.

봄에 심어놓은 늙은 호박이 풍성하게 자라서 원 없이 먹고는 있지만

파릇파릇한 채소들은 아직 맛을 보기가 어려워서 많이 아쉽죠.

 

그중에 가장 빨리 자란 것이 모종으로 심어놓은 쌈 채소 종류입니다.

종류별로 몇 가지를 심었는데 이제 조금씩 이파리를 따서 먹을 정도로 자랐습니다.

심어놓은 양이 많지 않아서 얼마 동안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먼저 양보를 했습니다.

조그만 더 있으면 씨를 뿌려놓은 다른 채소들이 자라서 원 없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맛있는 것을 먼저 양보하면 생색도 낼 수 있고 기분도 좋습니다.

 

그렇게 양보를 하다 채소들이 많이 자라서 저도 조금 맛을 봤습니다.

종류별로 조금씩 뜯어 와서 샐러드를 만들어봤는데

그 싱싱한 식감과 향긋한 향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제철 채소를 가장 싱싱할 때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도 좋았지만

맛있는 것을 먼저 양보한 후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더 좋더군요.

이 가을이 좀 더 풍성해질 수 있도록 이 즐거움을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해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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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소설을 읽었습니다.

 

실직을 포기하고 게임에 빠져서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

외국에서 이질적인 문화와 부딪히며 사회 하층으로 살아가는 한인 이주노동자

치매노인을 대상으로 돌봄 노동을 하면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요양보호사

타인에 대한 배려와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갈등하는 방송국 PD

복지정책의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드는 시작장애인 안마사 등

팍팍한 현실에서 주눅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익히 아는 얘기도 있었고, 처음 들어보는 얘기도 있었고, 세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얘기도 있었고, 약간 거북한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 얘기들을 찬찬히 들으면서

과거의 나를 만나기도 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인물을 만나기도 했고, 언 듯 스쳐 지나기만 했던 이의 내면을 마주하기도 했고, 징하게 마주했던 이를 또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이들을 만나 그들의 고단한 삶의 얘기를 들을 때

제 마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며시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징징거리면서 푸념만 늘어놓고 있는 거야?”라고 짜증을 내거나

“그 또한 당신이 선택한 삶인 것을...”이라면서 애써 거리를 두려고 하거나

“내가 과거에 그렇게 소리 지를 때는 관심이 없다가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또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라며 냉소를 보내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제 마음은

“당신들의 그 고단한 얘기를 이렇게 편안하게 듣고 있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네요”라고 하더군요.

 

제 마음이 하는 얘기를 들었더니 오히려 더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더 미안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얘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3

 

어떤 노인이 죽은 뒤 염라대왕을 만나 항의했다.

“저승에 데려올 거면 미리 알려 주어야 하지 않소!”

“내가 자주 알려 주었노라. 너의 눈이 점점 침침해진 것이 첫 소식이었고, 귀가 점점 어두워진 것이 두 번째 소식이었으며, 이가 하나씩 빠진 것이 세 번째 소식이었노라. 그리고 너의 몸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계기로 몇 번이나 소식을 전해 주었노라.”

이 이야기가 노인을 위한 것이라면, 젊은이를 위한 것도 있다.

한 소년이 죽어 염라대왕에게 따졌다.

“저는 눈귀가 밝고, 이도 튼튼하며, 육신이 건강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저에게 소식을 미리 전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대에게도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그대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노라. 동쪽 마을에 40세 된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 서쪽 마을에 20~30세 된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 또한 10세 미만 아이와 2~3세 젖먹이가 죽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어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고 불평하는가?”

 

 

정운 스님이 쓴 ‘법구경 마음공부’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10년쯤 전부터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고 있어서

이 얘기가 가볍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늙어서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이라면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아직은 조금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가끔, 나이 들어 죽어가는 제 모습을 상상하면서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자성을 해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사고로 제가 죽게 된다면...

음...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제 죽음을 알릴 사람이 딱히 없습니다.

제 가족들이 황망한 죽음 앞에 당황스럽고 안타까워하겠지만, 제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뒷정리를 하고 잘 살아갈 겁니다.

제게 ‘돈, 사람, 명예, 지위’ 같은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애써 모아온 것들을 놔두고 간다”는 아쉬움이나 “남겨진 것을 누가 가져갈 것이냐”하는 골칫거리도 없습니다.

과거에 제가 줬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아파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제게 받은 상처에 복수하겠다며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제 죽음에 기뻐할 사람도 그다지 없겠죠.

물론 예전에 저랑 인연이 깊었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인연들도 이미 멀리 흘러가버렸기 때문에 제 죽음을 알게 되더라도 그리 슬퍼하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오롯이 저만 믿고 따르는 사랑이인데, 워낙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녀석이라 누군가 잘 거둬 주리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죽는다고 해도

주위에 거리낄 것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

조용히 사라지는 그 죽음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요.

 

해탈한 스님처럼 너무 폼을 잡았나요? 하하하

 

 

 

(Pidalso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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