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님의 [걷다 -100402 터키] 에 관련된 글.
# 앙카라에서 이스탄불로 넘어오는 동안 가이드는 이스탄불의 역사, 주로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에 앞서 청동기와 철기 시대까지를 포함한 터키 서부의 역사도 설명해줬다.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를 하며 청동보다 강한 철이 싸워서 이겼다는 내용. 들으며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검 생각이 났다. 청동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나 철은 녹슬어 부스러진 채로 형태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남아있던 모습. 청동이 이긴 걸까, 철이 이긴 걸까.
# 터키에서의 실제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빨래비누가 비싸고 질이 떨어진다, 세제에 특소세가 붙는다, 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있는 놈만 쓰라는 말"이라며 가이드가 잠시 흥분한다. 히에라폴리스에서 들었던 "있는 것들"이라는 말이 겹치면서 도대체 저 말이 가리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해외여행상품을 구매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있는 놈"들이 아닌지, 일행들 대부분은 일본, 중국, 동남아, 서유럽, 동유럽 정도를 이미 다녀와서 "또다른" 갈 곳을 찾아 터키를 온 사람들이었는데 가이드의 말을 듣는 일행들은 어떤 느낌이었을지. 움찔하거나 불쾌했을지, 아니면 올커니 맞장구치면서 있는 놈들에 대한 불만이 새삼 솟구쳤을지. 사실 이번에 다니면서 해외관광상품이 어떤 건지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그런데 그 구매욕의 실체는 어떤 것일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 엄마가 산 건 비슷한 지역을 다니는 상품 중 저가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함께 다닌 일행들도 '있는' 티가 자르르 흐르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을 뿐더러, 엄마도 막상 "있는 놈들"의 무리 중에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빈곤을 떠올릴 때 엄마가 '없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른 일행들도 더더욱 그럴 듯. "있는 놈들"이라는 레토릭은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보다는, 매우 부유한 소수의 사람들(대체로 소득10분위의 9~10분위에 해당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매우 흔하지만 전체 인구의 20% 정도인 사람들)에 대한 선망의 다른 표현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있는 놈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에, 딱히 있다기도 없다기도 애매한 수많은 사람들과 빈곤이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는 고민도 살풋. 아마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은 지 얼마 안돼서 들었던 고민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복잡하지만 단순한 현실을 단순하지만 복잡하게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싶었다.
# 이스탄불로 들어왔다. 지나는 길에 차츰 도시로 들어오면서 산자락 위로 계곡 아래로 다닥다닥 들어앉은 집들이 눈에 띄었다. 이스탄불은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한다. (아마 구시가지를 말하는 듯) 서울에도 구릉을 따라 밀집한 주거지역들이 있는데(지금은 워낙 많이 아파트 촌으로 바뀌긴 했다) 그런 구릉들이 훨씬 가깝게 닿아있어 울룩불룩한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집들이 정말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느낌이고, 겉으로 봤을 때 낡아보이는 집들이 꽤 많았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한 명이(메흐메드 몇 세 쯤이었던 것 같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구시가지)을 점령하고 싶어 안달이 나던 참에 대포를 구하게 되어 한 곳만 몇날 몇밤을 줄곧 쏘아대 성을 함락했다는, 그 허물어진 3중 성벽이 가는 길에 보였다. 참 잘 남아있었다. 신기했던 건, 성벽 바깥으로, 농사를 짓는 것으로 보이는 자투리 땅도 있고 천막을 치고 거주하는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도 보였다. 나름 고대 유적인데 그렇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점심식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점에서 했다. 오랜만에 김치다운 김치를 구경했고 고등어 조림은 꽤 맛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매일같이 먹던 올리브절임 맛이 머릿속을 간질였다. 그 며칠새 현지식에 익숙해졌나 보다.
# 오후 일정은 히포드롬 광장, 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 그랜드 바자르, 피에르 로티 언덕이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가이드가 한 가지 당부를 한다. 자기는 장기거주 비자를 받고 터키에서 살고 있지만 취업비자는 아니기 때문에 가이드라는 것이 밝혀지면 벌금을 수백만 원 내야 하는 데다가 추방될 수 있다고(어디서나 불안한 이주노동자-가이드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의 현실), 이스탄불에서는 간혹 단속이 이루어지기도 해서, 지금부터 가이드는 야샤르(첫날, 동행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현지인)고 자신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일행인데 터키말을 할 수 있어서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 야샤르에 대한 궁금함이 풀리면서, 동시에, 여행사와 인솔자와 한국인 가이드와 현지인 가이드와, 소위 '고객'인 여행자들은 돈을 매개로 어떻게 얽혀있을지 궁금해졌다. 이 모든 것을 조직하는 자본으로서의 여행사는 어떤 관계를 통해 이윤을 뽑아내고 있을지 흠.
# 히포드롬 광장은 이집트에서 선물했다는 오벨리스크와, 뱀 세 마리가 얽혀 있는데 머리는 모두 떨어져서 각각 이스탄불 박물관과 유럽의 어느 나라 박물관으로, 또 하나는 분실됐다는 청동 조각과, 유스티니아누스 때 올린 탑이라는 것과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선물했다는 물 저장고가 있는 넓은(?광화문 광장보다는 좁다) 광장이었다. 놀라운 건, 이 유적들은 모두 지하 2미터쯤 되는 곳에서 올라와 있는데, 가이드 말로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항해 블루 모스크를 짓기 시작했던 술탄이 높이를 쫓아가기 어려워 땅을 아예 높여버렸다는 것.
# 블루모스크는 애칭인데, 원래 사원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걸 지었던 술탄의 이름을 따라 붙였을 거다. 지금도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동안은 관광객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줄을 서 기다리다가 예배가 끝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거대한 돔을 받치는 큰 기둥과 돔을 지지해주는 반돔과 작은 돔들,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햇살들, 모두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래도 블루모스크인 만큼 내벽을 장식한 이즈닉 타일들이 아름다웠다. 푸른 빛이 주로 사용된, 꽃이나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네모난 타일들이 블루모스크 내벽을 채우고 있었다. 푸른 빛이라 그런지 처음엔 약간 서늘한 느낌을 주었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마음이 잔잔해지고 마치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볼 때의 평안함 같은 것이 깃들었다. 이런저런 빛깔의 무늬들은 단조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만들었고. 여성들이 예배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는데, 원래 따로 해야 하는 건 아니고, 원하는 여성들이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로 마련한 공간이라고 한다. 교회나 성당처럼 의자가 놓여있지 않아 넓은 실내 광장의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꽤 큰 규모이고, 유일하게 첨탑(미나레)이 여섯 개인 사원인데 첨탑의 발코니(확성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사제가 직접 올라가 아잔 소리를 냈다는) 개수가 각각 다르다.
# 아야소피아는 동로마 제국 시대 성 소피아 성당이었다가 오스만 제국이 장악하면서 이슬람 사원이 된 곳. 지금은 박물관처럼 운영되고 있다. 돔 부위의 외벽이 빛바랜 붉은 빛을 띠는데 어떻게 보면 어설프게 칠한 페인트 색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색이기도 하다. 내부에 기둥이 없고 세 단계의 돔으로 무게를 지탱하고 있어 블루 모스크보다 훨씬 넓은 느낌이다. 사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네 귀퉁이에 술탄의 인장이 그려진 원판(뭐라고 부르는지 잊었다)이 있고 미흐랍, 밈베르 등도 모두 있었다. 동시에 성당이었기 때문에 천장(돔의 네 귀퉁이에는 날개가 여섯 달린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있는데 '천사'의 느낌이라기보다는 요물의 느낌이기도 해서 흥미로웠다)이나 2층 벽의 그림들은 예수와 관련된 그림이 있는 벽화 또는 모자이크화였는데, 다행히도 성화파괴운동이 한창이던 때 별로 훼손되지 않았고 사원으로 이용하면서는 회벽으로 덮어놓기만 해서(이슬람교는 인물의 그림은 성상 숭배라고 여겨 사용하지 않았다)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회벽 안에 갇힌 성당의 흔적들이 있는데 사원의 흔적도 간직해야 하기 때문에 회벽을 모두 벗겨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매우 적대적인 두 종교가 나름 적당한 선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중 한 모자이크화-예수의 왼편에 서있는 사도(요한이라고 했나?)의 안쓰러운 표정이 매우 인상적인-는 아래쪽부터 절반 이상이 뜯겨나갔는데, 기독교도들이 성지 순례하면서 몰래 하나씩 뜯어간 결과라고 한다. 종교라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이 그림들을 보는 동안, 종교에 대한 괜한 거부감(개인적인)이 슬 녹아내리기도 했는데, 여전히 예수나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그이들의 표정이 매우 온화했기 때문인 듯하다.
# 그랜드 바자르,는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 시장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규모는 훨씬 크다. 격자 모양으로 정돈이 되어 있고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쉽겠더라. 출구가 꽤 많다. 사실 여기도 그닥 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따로 블루 모스크를 좀 더 보고(좀 급하게 나왔던 터라) 근처를 둘러보고 시간 맞춰서 만나면 안되겠냐고 물었는데, 또 안된단다.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고 표지판 따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인데 안된다고 하니 또 마음이 좀 상했다. 엉뚱하게 엄마한테 짜증을 부리게 돼서 또 미안했다. 엄마는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쿠션 커버를 두 개 샀다. 터키에서 나는 면이나 실크에 손으로 수놓은 것인데 터키 돌아다니다 보면 자주 보인다. 정말 터키에서 수공예로 만든 건지는 모를 일이고. 여기 들어가면 일단 절반 가격을 부르고 흥정을 시작하라는 말에 엄마는 정말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샀다. 대단하다. 난 미련해서인지 그런 거 잘 못하겠다. 그런데 흥정을 자꾸 나더러 시키니까(안되는 영어지만 그래도 아는 단어들이 있으니) 괜히 짜증이 났던 게다. 내 성질의 바닥이 너무 쉽게 드러나는 여행이었어. 어쨌든, 패키지 관광은 맘에 안 드는 게 많다. 그래도 좋은 점 하나는 가이드가 함께 다니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다는 건데, 책을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읽어도 가이드가 말로 정리해주는 게 훨씬 잘 들어오더라. 가이드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게 패키지의 단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한데, 나는 터키를 잘 보고 느끼고 오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듯.
# 피에르로티 언덕은 피에르로티라는 사람이 터키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됐고 소설도 썼다나, 뭐 그런 얘기와 함께 소개되는 곳인데, 할리치(골든혼)의 한 켠 언덕에 카페가 있는 그런 곳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온다. 물론 걸어서도 갈 수 있다. 까페는 매우 오래된 곳이고 노천에도 테이블이 많아 사람들이 가득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살짝 봤더니 안은 개별 테이블이 따로 없고 넓은 방의 벽을 따라 긴 의자들이(붙박이인 듯) 놓여있고 가운데 널찍한 테이블 하나가 있는 그런 방이 몇 개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려는데, 따로 쿠폰이 있어야 타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쿠폰을 가진 야샤르가 한참 내려오지 않아 우리들 몇 명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지하철 개찰구처럼 한쪽 끝에는 그냥 열어서 다닐 수 있는 문이 있었는데, 터키인 두 명이 그리로 가볍게 지나가 케이블카를 관리(?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하는 사람과 친하게 인사를 나눈다. 그걸 본 일행 한 명이 "자기 친구들이라고 그냥 내보내주네" 라고 한다. 아마도 까페 등에서 일하는 직원이라 그냥 다니는 것 아닐까 싶었는데, 알 길은 없고, 다만 잘 모르는 상태에서 편견이 만들어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 아마 언덕으로 가는 길이었던 듯한데, 아닐 수도 있고, 오리엔트특급열차의 종착역이 보였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고 그냥 예전 모습 그대로 남겨놓았다고 하는데 펜스가 둘러져 있는 서울역 구 역사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비교됐다. 여기를 지나쳐 가는데, 일행 중 한 분이 "그런데 거지는 왜 안 보여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마 역사 주위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거지'라고 부르거나 생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질문 아닐까 싶어 허걱했다. 가이드의 답도. "여기도 거지는 있어요. 그런데 터키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면서 돈 달라는 건 안해요. 뭐라도 하고 대가를 요구하지. 그냥 거리에서 손 벌리는 사람들은 집시나 이주노동자들이에요." 잠깐 다녀가는 터키에서 얼마나 많은 걸 알 수 있을까 회의가 들던 참이었는데, 훨씬 오래 산 가이드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겠구나 싶었고, 자기가 태어난 곳에 있어도 모르는 건 끝내 모르는 거겠구나 싶기도 했다. 아니, 이쯤되면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노숙인에 대한 흔한 편견들, 일하기 싫어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손 벌리고 지저분하게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라는 편견은, 지독하게도 들러붙어있는 듯했다. 이주노동자나 집시(집시는 유럽에서 많은 차별을 겪는 소수자 집단으로 꼽힌다)에 대한 편견들, 그리고 그런 편견과 동시에 생성되는 경계와 배제도 짧은 대화 속에 묻어난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 호텔은 평생 못 들어가볼 듯한 수준이었다. 꼭대기층이라 전망도 좋았고 2인용 침대 크기의 침대가 두 개 있는, 꽤나 넓은 곳. 엄마는 참 좋아했다. 아침에 수영이라도 잠깐 할까 해서 일행 중 한 분에게 물안경을 빌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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