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가 했다는 말

이번 구로사와 회고전 부대 행사 중 하나로

<카게무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데뷔한 이래 그의 작품에 꾸준히 출현한

유이 마사유키 대담이 있었다.

 

구로사와에 얽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 줬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

구로사와는 여름에 겨울 장면을, 겨울에 여름 장면을 찍는 걸

그 반대 경우(즉 제철에 촬영하는 것)보다 더 선호했다고 한다.

까닭인즉슨, 여름에 여름을, 겨울에 겨울을 찍게 되면

당연히 기대하는 장면이 나오겠거니 생각하여 느슨해지기 쉬운데

그 반대 경우가 되면 무엇이 여름을 여름답게,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지 고민하게 되며

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것.

 

내면이나 본질 따위가 아니라 '외양'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니

그는 천상 예술가다. 거기다 한 마디를 덧붙인다면

그를 탁월한 유물론자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정신에 대해 물질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군주의 정치적 실천의 요체로 외양을 지목한다는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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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30 14:40 2010/07/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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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 비판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른바 ‘스피노자 르네상스’가 그 생산성을 입증한 오늘날엔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한때 알튀세르에 대한 가장 상투적인 비판은
그가 스피노자를 따랐기 때문에
논리주의나 규약주의(conventionalism) 결국 관념론으로 미끄러졌다는 것이었다.

요새 관련 글을 읽다 보니 새삼 이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반박할지 알튀세르 자신 및 그의 제자들의 글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아직 엉성한 부분이 많지만 뭐 블로그에 단상을 올리는 거니까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에서 제기한 다음 명제인 것 같다,
“(일단 과학이) 참되게 구성.전개되었다면 이 과학이 산출한 인식이 ‘참’이라고, 즉 인식이라고 선포하기 위해 외부적 실천에 의한 입증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는 이른바 ‘적합성’(adequacy)이라는 관념을 정의한 『윤리학』 2부 정의 4
와 관련되는데, 여기서 스피노자는
“대상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생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관념을 나는 적합한 관념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는 모두 참/진리를 ‘관념과 관념대상의 상응’으로 정의하는
인식론의 지배적 전통을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사람 모두 이 상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이 상응을 참/진리의 ‘정의’로 삼는 것이다.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60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참된 관념과 적합한 관념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점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된’이라는 단어는 오직 관념과 관념대상ideat 사이의 합치convenientia와 관계하는 데 비해 ‘적합한’이라는 단어는 관념 자체의 본성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이 외생적 관계가 문제라면, 이 두 종류의 관념 사이에는 아무런 사실적인 차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어떤 관념이 적합한다면 이는 반드시 관념대상과 상응한다.
하지만 어떤 관념이 관념대상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적합한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합한 관념과 그 대상 사이에는 분명 상응관계가 존재하지만, 이 두 항 사이에 존재하는 통상적인 관계는 전도된다. 곧 참된 관념은 자신의 대상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참된 관념이 적합하기 때문에, 곧 필연적인 방식으로 자체 내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대상에 상응한다.”
즉 상응은 적합성의 필연적 ‘부산물’일 뿐, 그것의 ‘본질’을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소박 실재론을 넘어
보다 정교한 사고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객관성’, 곧 대상과의 모든 관계를 상실하지 않는가?
곧 논리주의나 규약주의 따위의 관념론으로 빠져들지 않는가?
마슈레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관념 자체가,
실체의 모든 변용들처럼 인과적으로 규정되는 한에서,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즉 관념은 굳이 관념대상을 불러들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객관적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다시 물을 것이다. 세상에는 관념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관념,
간단히 말해 거짓된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는 관념과 관념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수많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답변을 내놓는다.
“신과 관련된 한에서 모든 관념은 참되다.”(『윤리학』 2부 정리 32)
즉 모든 관념은 그 자체로는 적합하며 어떤 대상에 상응한다.
하지만 이 관념은 자신과 상응하는 대상과 분리될 수 있고,
다른 대상이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이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 곧 절단되고 혼란스러운 관념이 된다.
즉 진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진리는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곳과는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 오류 효과의 이유가 있다.

 

이 오류 효과 중 알튀세르가 즐겨 인용한 스피노자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태양을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것으로 지각하고 상상하는, 곧 ‘체험’하는 인간이다.
이 표상은 분명히 오류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오류라고 무시하지 않고
왜 이런 표상이 생겨나는지를 탐구하다 보면 새로운 인식이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마슈레에 따르자면, 이 관념은 그것이 목표로 삼는 대상 곧 ‘태양’과 관련해서는 거짓이다.
하지만 이 관념은 태양이 아닌 우리 신체의 실존적 배치상태(disposition),
예컨대 열을 느끼는 신체의 지각력과 우리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 종교적 표상체계 등
은 참되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같은 참됨이 있는 한에서
인간과 태양 사이의 거리에 관한 객관적 인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 관념, 그리고 이를 기초 짓는 상상과 체험은 소멸하지 않는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이 상상은 객관적 현실(reality)보다 더 실재적(real)이다,
즉 집요하게 존속하며 자의로 조작할 수 없다.

 

내가 볼 때 이런 접근에서는
관념과 관념대상 사이의 상응이 어떻게 보장되는가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 질문에서는 관념대상에 비해 관념은 덜 실재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이렇게 되면 더 강한 실재성을 지닌 관념대상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이 상응을 따라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착될 수 있다.
일체의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에 깔린 게 바로 이런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게 있어
관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객관적 사물이며 따라서 관념대상과 동등하게 실재적이다.
이런 접근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질문은
그런데 왜 관념과 관념대상이 상응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느냐일 것이다.
즉 전자의 중심 질문이, 관념대상에 비해 덜 실재적인 관념이
어떻게 참된 곧 관념대상과 상응하는 관념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라면,
후자의 중심 질문은, 관념대상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관념이
어떻게 거짓된 곧 관념대상과 상응하지 않는 관념이 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의 관심이 ‘진리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면
후자의 관심은 ‘오류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이때 후자가 제기한 개념이 바로 (부)적합성 개념이고,
이는 전통적인 상응 및 보장이라는 문제를 부차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적합한 관념에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부산물로 전위시킨다.
그리고 이제 좁은 의미의 ‘물체’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러나 동등하게 물질적인
사고 과정, 지식 대상이라는 종별적 구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이때 이 구조 안에는 사고를 지지하고 그 수단 노릇을 하는 ‘물질적 물체’
예컨대 ‘실험 장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장치’들이 포함된다.
소박 실재론자들이 보기에 이는 모순일 것이다. 이들이 생각할 때 관념은 관념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물체’도 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관념의 문제를 관념론적으로 다룬다는 증거다.
관념대상과의 상응이나 보장의 문제설정을 폐기한다고 해서
물질성, 심지어 물체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념의 상응물로서가 아니라 관념의 지지대이자 수단으로서 물체,
관념에 의한 관념대상의 전유(상응이 아니라!)를 과잉결정하는 물질성의 문제는
사고 과정의 종별성을 중심 의제로 제기하는 한에서 오히려 전면화된다.
즉 한 물체는 그것이 물체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 속에서 점하는 위치 및 역할
과 별개로 관념들 사이의 사고 관계 안에서 종별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역으로 관념 역시 그것이 하나의 사물인 한에서 관념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응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고 내 (부)적합성 개념을 제기하여
인식과 진리에 대한 전통적 접근을 전위했다고 하여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관념을 사물로, 사고 과정을 고유한 물질성을 갖는 과정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관념대상과의 상응으로 해소되지 않는 관념 자체의 객관성을 제기한 것이
규약주의인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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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18 05:47 2010/07/18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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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과 이론, 철학과 과학

"To recognize the concept is to remain faithful to the question and to its nature as a question instead of seeking to realize it, hence, instead of having done with it without really having responded to it. This requirement is as important for the procedures of science as for the history of science, without their being reduced in this way to a common measurement or a point of view. "What matters to us is less to furnish a provisional solution than to show that a problem deserves to be posed."(Canguilhem 1989, 177.) It is in this way, astonishingly, that the formula that turns philosophy into "the science of resolved problems,"(Canguilhem 1955.) in a sense that Brunschwicg never meant the expression to have, is retrieved: philosophy ― and it must immediately be said, although this can only be made entirely clear in what follows, that philosophy is history ― is the science of problems independent of their solution. It is the science that is not preoccupied with solutions, because in a certain way there are always solutions, the problems are always resolved at their level; and the history of solutions is only a partial history, an obscure history, and obscuring everything it touches, by giving the illusion that one can dissolve ― and forget ― problems. Passing behind the accumulation of theories and responses, history is really in search of forgotten problems, up to their solutions."
- Pierre Macherey, "Georges Canguilhem's Philosophy of Science: Epistemology and History of Science", In a Materialist Way: Selected Essays by Pierre Macherey, Verso, 1998, p. 177.

 

지금껏 읽은 글 중에서

철학과 과학의 변별적 관계라는 내 오랜 고민을

가장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정리해 준 것이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가 그의 또 다른 스승 조르쥬 캉길렘의 작업에 관해

1964년(!)에 쓴 이 대목이었다.

 

이 글을 통해, 다소 거칠긴 하지만,

한편으로 문제-개념-철학, 다른 한편으로 해법-이론-과학

이라는 도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개념을 ‘한계 개념’(concept-limite)으로 이해하면

쟁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한계 개념이란 하나의 이론만으로는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하나 이상의 이론들이 동원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나아가 스스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이론들의 발전을 추동하는 문제

를 제기하는 개념을 말한다.

알튀세르가 즐겨 사용한 예를 들자면

프로이트의 ‘충동’(Treib) 개념이 대표적인데

이는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경계에 있는 개념이며

더욱이 현재보다 훨씬 발전한 정신분석학과 생물학의 힘을 빌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는 개념이다.

이 개념으로써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신분석학의 고유한 영역이 생겨나는 동시에

정신분석학의 자기충족성(self-sufficiency)이 불가능해지는 두 가지 결과가 산출된다.

 

사실 모든 개념은 경향적으로 한계 개념, 즉 하나 이상의 이론을 요청하며

하나 이상의 해법을 갖는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특정한 해법과 이론으로써

이 개념이 제기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문제를 억압하더라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해법과 이론 안에 출몰하며

때로는 이들을 위기나 심지어 파국으로 내몰 것이다.

'문제들의 과학/학문'으로서 철학이 독자적 존재이유와 효과를 갖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철학은 개념의 원천에 있는 문제로 돌아가, 해결책이 없는 채로 문제를 옹호한다.

이 때 철학은 문제의 새로운 해법을 예상하는 정식화(formulation) 즉

특정한 공식(formula)을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정돈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철학의 본령은

특정한 해법과 이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실은 그 해법과 이론 더미에 깔려 보이지 않는

문제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가지 개념, 따라서 문제를 제기했는데

가장 수수께끼 같지만 또 가장 집요하게 살아남은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

즉 '종속화'(subjection)이자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모순적 항의 불안정한 통일체인

'인간-되기'(becoming-man) 과정일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접근 곧 '이론적 인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한때 프로이트와 맑스, 정신분석학과 역사유물론이라는 두 과학의 '종합'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적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른바 '프로이트-맑스주의'라는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이 두 과학, 그것도 아직 불완전한 이 두 과학보다 훨씬 더 많은

과학을 동원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음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정 과학의 근원적 불충분성을 지시하는 부정적 지표라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즉 각각의 과학은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이데올로기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인식론적 의미의 '오류'로 환원될 순 없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오류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각각의 과학은 유한하고 유효한 자신의 영역 및 대상에서 진리를 생산하면서

그 필연적 효과로, 특정 오류가 발생하는 국지적 이유와 조건에 대한 설명 역시 생산하지만

오류 일반에 대한 설명을 목표로 삼거나 그를 수행하는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발리바르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대해 그의 스승 알튀세르 못지 않게 충실하면서도

이를 다루기 위해 스승과 얼핏 보기엔 정반대로 '철학적 인간학'이란 길을 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우선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예를 들면 경제적, 가족적, 교육적 관계들) 또는 사회적 관계의 다양한 차원들(개인적/집단적, 제도적/무의식적 차원들)에 대한 연구들의 접합점에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들(정확히 과학적이지도 않고 형이상학적이지도 않은, 말하자면 간(間)과학적(inter-scientifique)이거나 관(貫)과학적(trans-scientifique)인 질문들)의 공간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맑스와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이 대화하도록(서로를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즉 여기서 요점은, '인간-되기'라는 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전통적 실천으로서 형이상학으로 후퇴해서는 물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정의상 유한함을 통해 유효함을 성취하는 개별 과학 중 어느 한두 분과,

그것이 맑스주의가 됐든 그것을 대체하는 또 다른 과학이 됐든 간에, 그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프로이트-맑스주의'의 해체를 선언한 알튀세르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는 '인간-되기'를 설명하는 데 정신분석학이 필요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가 그 초보적 형태인) 역사과학을 '종합'한다면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절대과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야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과학들과의 대화이다. 물론 특정 과학이 특정 시점에서 주도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세적인 것이며, 정세가 바뀌면 자리도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학제간 연구'를 옹호하는 것인가?

내 생각에, 이 점에서도 발리바르는 학제간 연구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알튀세르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각각의 과학은 고유한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들이 유관한 한에서만 서로 만날 수 있다. 이 구체적 목표와 쟁점 없이

무작정 서로 넘나들고 통합한다고 해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과학철학/과학사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발리바르가 '철학적 인간학'을 주창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되기'가 됐든, '주체화'가 됐든, 또는 '이데올로기'가 됐든간에,

각각의 과학 곧 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의 권리를 옹호하고

이로써 각각의 과학에 새로운 연구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연구 과정에서 어떤 과학은 실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질 수도 있고,

어떤 과학은 다른 과학과 합쳐질 수도 있으며,

또 어떤 과학은 환원할 수 없는 독자성을 재차 입증할 수도 있다.

이는 연구 과정의 끝에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결과이지,

선험적으로 예단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율성'과 '통합'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식별하고 이를 사고할 수 있는 적합한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다.

 

발리바르가 철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철학이 이 사고 프로그램을 정립하고 진전시키는 데

특정 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철학의 개입,

'철학의 전통적 실천'이 아닌 '철학의 새로운 실천',

그 효과로서 과학과 정치의 발전.

결국 언제나 문제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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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14 10:28 2010/07/1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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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후네 도시로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채널을 돌리다가

<매트릭스 3>를 봤다.

기계와 인간의 대전이 나왔는데

인간편 장군의 이름이 '미푸네'(Mifune)였다.

 

우연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 보니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미후네 도시로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본 구로사와 회고전 상영작 중에서

두 편인가를 빼놓고는 모두 미후네가 나왔다.

내 기억 속에 미후네라는 인물을 기입한 영화는 <거미집의 성>인데

일본 영화배우 중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외웠던 사람이 그였으니

인상적(impressive)이라는 말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일본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말고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영화 약간밖에 본 적이 없어

지금도 내가 이름을 외우는 일본 배우는 서너 명을 넘지 않는다.

주위에 팬들이 많아 이름만 기억하게 되었을 뿐 얼굴하고 일치시키진 못하는 오다기리 조와

<노다메 칸타빌레>를 통해 알게 된 우에노 주리(꺅!) 정도?

물론 구로사와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시무라 다카시 이름은 외웠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이번 회고전 자료집에 따르면

<거미집의 성> 라스트신은 특수 촬영이 아니라

실제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명사수가 미후네를 겨냥하고 쏜 것이라고 한다.

촬영이 끝난 후 미후네는 위험한 촬영을 감행했다며 감독을 격렬히 비난했고

심지어 술에 취해서는 산탄총을 들고 감독 집에 찾아갔다고.

미후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구로사와의 위험한 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그 라스트신은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표현하며

이 장면으로써 <거미집의 성>이 원작인 <맥베스>를 뛰어넘는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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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12 09:25 2010/07/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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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통한 한 가지 반성

"On pense à Machiavel, dont l'influence s'est fait sentir dans les théories qui se sont efforcées de combiner une réflexion sur les perversionstotalitairesde la tentatives révolutionnaire avec une phénoménologie desnouveaux mouvements sociauxqui en formeraient comme la contrepartie positive, dans la mesure où ils ne chercheraient pas tant àprendre le pouvoirqu' à transformer les institutions existantes ou à pousser l'État vers sa propre démocratisation, dans la tradition des revendications de droits civiques. Il y a à cet égard unair de familleréunissant des penseurs aussi différents entre eux que Hannah Arendt, Claude Lefort ou Jacques Rancière. Tout doivent quelque chose à la thèse des Discours sur la première décade de Titre Livre, où Machiavel énonce que l'objectif des classes dominantes est toujours d'opprimer les dominés ou la masse, mais que celle-ci a seulement pour objectif de ne pas être dominée. Autrement dit, ce qu'elle cherche n'est pas, symétriquement, à devenirclasse dominanteà son tour, mais plutôt à neutraliser la volonté de puissance des dominants. Une telle représentation de la demande dejusticeen politique, qu'on peut dire négative, est peut-être encore plus significative dans l'èrepostrévolutionnaireactuelle."

- Étienne Balibar,La justice ou l'égalité, La justice bafouée : L'état des droits de l'homme en France, La Découverte, 2010, pp. 21~22.

 

돌이켜 보면 사회운동을 시작한 이래

운동 노선에 관한 두 가지 다소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항상 고민이었다.

 

첫 번째는, 사회운동이 '요구 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요구 투쟁이란 나보다 강한 자, 곧 지배계급이나 국가를 향해 제시되는 것으로

그 실현 여부를 타자에게 맡기는 수동적인 태도이며

설사 요구가 실현되더라도 사회운동의 자율성보다는

지배계급에 대한 의존 및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지젝은 요구 투쟁이 일종의 '히스테리', 즉

타자가 들어줄 수 없는 과도한 요구를 던져 타자가 실패하는 것을 즐기려는 목적

을 갖는다고까지 비판하기도 했다.

즉 요구 투쟁은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확대할 수 없는 실리주의 '로비' 활동에 머물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오히려 수동성을 강화시키는 '투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이른바 '개량 대 혁명', 또는 '사민주의 대 레닌주의'라는

전통적 구도를 되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지젝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책임을 떠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레닌주의 심지어 '스탈린주의'의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어쨌든 이런 입장이라면 비록 고전적이긴 해도 그리 이율배반적이진 않을 텐데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한 이후 운동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명제가 제시되었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그 두 번째 명제는, '국가 권력 장악'을 지상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하고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회운동의 국가주의 경향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가 장치를 우회하는 아나키즘은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집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 장치 전화/변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는 했지만

그 현실적 형태가 무엇인지는 사실 수수께끼에 가까운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두 가지 명제를 만족시키려는 모색의 일환으로

'자기 통치'나 '평의회', '자율적 사회운동' 등의 개념에 주목하게 됐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나키즘과 정말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는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고

이를 목적으로 제시된 개념들이 많은 경우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해결해야 할 문제를 흐리게 만드는 효과를 낳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나키즘이라는 논리적.실천적 궁지에서 벗어나려면

(역으로 아나키즘이라는 이름 아래 모순적으로 공존하던,

이 때문에 도매금으로 배척되곤 했던 어떤 긍정적 전통들을 급진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집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 장치 변혁'이라는 아포리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발리바르는 이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정식화한 공화주의 전통을 전유한다.

즉 그는 개량과 혁명, 아나키즘과 국가주의라는 대당에서 벗어나

국가 장치 더 일반적으로는 '제도'에 개입하는 국가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을 정식화하기 위해

'귀족과 평민의 욕망의 비대칭성' 및 이 비대칭적 욕망을 대표하는 제도적 개입,

평민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의지'에 대항하고 그를 중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개입('호민관'(護民官))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놀라운 통찰을 전유한다.

 

이로써 국가와 사회라는 대당은

귀족과 평민, '지배하려는 욕망'과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의 비대칭적인 대립으로 대체되고,

이에 따라 국가를 우회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주의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사고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이는 맑스주의의 위대한 전통, 곧 '만인을 해방시키는 계급 아닌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관념론적/이상주의적 전통을 좀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부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고민은 필요하겠지만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걸려 있다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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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09 16:01 2010/07/0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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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벤트 블루 5 - 천 개의 눈

“천안함 스모킹 건 '1번' 글씨, 국내 문구업체 매직 성분과 동일”
합조단, “국내 생산 잉크와 불일치”…네티즌, “모나미에서 1998년 출원”
 
2010년 07월 01일 (목) 16:55:06 권순택 기자 nanan@mediaus.co.kr
 

민·군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주장하는 어뢰에 쓰인 ‘1번’ 글씨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색을 나타내는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5’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잉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이를 뒤집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 쌍끌이 어선이 건져올렸다는 어뢰에 파란 매직으로 '1번'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있다ⓒ권순택  

합조단은 지난 29일 '천안함 의혹 관련 설명회' 당시 “북한 어뢰에 쓰인 ‘1번’이라는 글씨의 잉크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청색 유성매직으로 확인됐다”면서 “성분 색소는 ‘솔벤트 블루5’로 청색 유성매직으로 많이 쓰이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잉크와 비교한 결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합조단은 ‘1번’글씨에 대한 조작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국내 문구기업 (주)모나미가 1998년 ‘솔벤트 블루5’가 배합된 잉크를 특허청에 출원한 사실을 찾아내 합조단의 주장을 뒤집었다.  

실제 네티즌들의 주장에 따라 특허청 사이트에서 출원번호 ‘10-1998-0023008’를 입력하면 1998년 (주)모나미가 출원한 ‘유성 마킹펜용 잉크 조성물’이란 결과가 검색된다. 그리고 ‘공보보기’를 통해 확인한 결과 유성 마킹펜용 잉크조성물에 착색제 솔벤트 블루 5가 함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원내용에서 (주)모나미는 ‘발명의 구성 및 작용’에 대해 “본 조성물(유성 마킹펜용 잉크)에는 착색제가 배합되는데 그 함량은 조성물 총중량 기준으로 1~20중량% 정도가 바람직하다”며 “본 조성물에 있어서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2, 4, 5, 37, 38, 43, 44, 51, 64 및 베이직 블루(Basic Blue) 1, 7 등 같은 안료로 이루어진 군에서 선택되는 1종 또는 2종 이상의 혼합물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출원)청구의 범위’란에서 역시 “상기 착색제로서 솔벤트 블루(Solvent Blue) 2, 4, 5, 37, 38, 43, 44, 51, 64 및 70과 같은 안료로 이루어진 군에서 선택되는 1종 또는 2종 이상의 혼합물을 조성물 총중량 기준으로 1~20 중량% 함유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유성 마킹펜용 잉크조성물”라고 명시돼 있다.

   
  ▲ 특허청 사이트에서 검색한 (주)모나미의 출원 상세내용 캡처. (주)모나미는 착색제로 솔벤트 블루 5를 배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  
 

이에 네티즌들은 “난리가 났다”며 “이제 이 뒷수습을 누가하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합조단은 그동안 어뢰에 표기된 ‘1번’글씨는 북의 소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이야기한 바 있어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둘러싼 의혹은 깊어질 수 밖에 없게 됐다.

 

'솔벤트 블루 5'.

얼마나 전문적인 용어인가!

SBS나 중앙일보 등은 합조단 관계자의 말을 빌어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잉크와 비교한 결과와 일치하지 않아 한국산 잉크가 아니다"고 보도했다.

사실 저 정도 전문 용어를 쓰면서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잉크와 비교'했다는 근거를 들어

합조단이라는 어쨌든 공식 기구에서 한국산 잉크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을 믿고 보도했으니, SBS나 중앙일보 쪽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만한 정보망도 없고, 보도라는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 가는 것도 아닌 '일개 네티즌'이

특허청 사이트에 접속해서 모나미 출원 상세내용을 검색해 보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

(물론 그 네티즌의 노력이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조차 확인하지 않고 저 '스모킹 건'이라는 중대 사안에 관한 뉴스를,

그것도 '직업으로서 언론인'의 지위와 명예, 권한과 책임을 지닌 자들이 보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리라.

하다 못해 잉크 회사에 전화 한 통만 했어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주)모나미 관계자에 따르면, 이 성분은 모나미뿐만 아니라 국내 대부분 업체에서

사용하는 재료라고 한다.)

각자의 일에 바빠 매 사안에 대해 직접 알아볼 여유가 부족한 동료시민들이

자신들 대신 이런 일을 하라고 만들거나 지원하는('위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업이 언론 아닌가?

뭐 너무 당위적인 얘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좌우를 떠나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합조단에게 있다.

이게 지금 몇 번째 터진 일인데, 이렇게 무대포로 나갈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다.

이건 '무능'과 '무시'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합조단 쪽에서는 언론 쪽에서 오보를 한 거라고 책임을 떠넘긴다는데

네티즌이 밝히고 나서야 저런 변명을 했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

총리실에서는 사찰 대상자가 민간인인 줄 몰랐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변명을 하던데

얘들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 '일개 네티즌'이라는 '천 개의 눈'이 공론장을 통해 정보를 얻고 공론장에서 발언하지 않았다면

진보에 반하는 보수가 판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참에 반하는 거짓이 더욱 판쳤으리라.

비단 이 문제뿐이겠는가. 황우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그러나 용산참사를 비롯해

드러나지 않은 그보다 더 많은 거짓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결국 '천 개의 눈'이 더 활발하게 공론장에 들어오는 것만이

진보뿐만 아니라 참을 확대하는 유일한 길임이 새삼 분명해진다.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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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04 19:48 2010/07/0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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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

얼마 전 우연찮게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들렀다가

7월 1일부터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세한 일정은 http://www.koreafilm.or.kr/cinema/program/category_view.asp?g_seq=69&p_seq=429)

 

몇 년 전 구로사와 회고전에서 <거미집의 성>을 비롯 영화 몇 편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죽였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각색한 <란>의 경우

어떤 분의 말을 빌자면 '구름이 연기하는' 압도적인 장면도 나온다.

 

마침 요새 좀 시간이 나고

장소가 가까운 데다가 무료상영(!)이라니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명작을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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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01 00:49 2010/07/0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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