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이유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상대방도 노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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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6/27 00:36 2010/06/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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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에 관한 독서 노트 1

한번 날잡아서 제대로 읽겠다 맘만 먹은

미구엘 바터의 마키아벨리 연구를 읽고 있다.

바터의 책은, 박사논문을 출판한 거라 그런지,

처음에 관련 문헌을 한참 열거한 후 자기 얘기를 하는데

워낙 문헌에 대한 소양이 없다 보니까 앞 부분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본론에 못 들어가고 중단하곤 했는데

이번에 맘을 다잡고 더듬더듬 읽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앞 부분을 읽는 건 쉽지 않았다.

대낮에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졸았는데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뒷 부분 내용이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virtù-fortuna 도식

(전자는 (변)덕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은데

후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운세'(運勢)라는 말이 자구적으로는 매우 정확하고

또 '정세'(政勢) 개념과 의미적으로 친화적이라는 점을 가리킬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운세' 따위의 기존 용법이 너무 강력해서 문제지만...

그러나 fortuna도 원래 그런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게 꼭 단점은 아닐 수도 있다.)

전통적인 '자유의지-필연'의 이율배반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변)덕과 운세를 각각 자유의지-결정론이나 주체/주관-대상/객관 등의 도식 아래

포섭해서는 안 된다.


바터는 다른 개념을 도입해 전체 도식을 복잡하게 만들어 이런 위험을 극복하려 하는데

action-times(행위-시대) 개념이 그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운세는 위의 두 개념이 후자의 우위 하에 결합한 상태,

곧 시대에 부합하는 상태로 행위가 길들여진 즉 '행실'(behavior, 또는 '행태')로 된 상태를 말한다.

반면 (변)덕은 전자의 우위 하에 두 개념이 결합한 상태,

곧 시대를 주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행위 개념이 능동화된 상태를 이른다.


즉 (변)덕과 운세는 자유의지/주관-결정론/객관의 도식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통상 자유의지/주관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행위가 (행실의 형태로) 운세에도 속해 있고

행실이 행위로 길들여지면 (변)덕의 역량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라는 모래알 하나로 전체가 무너지는 결정론,

모든 행위를 결정론에서 벗어난 자유의지로 맹신하는 관념론 대신

이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행위 개념 자체의 분할이며,

따라서 유형화된 행위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반성과 함께

행위 일반이 아닌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난문이 출현한다.


이 같은 접근은 철학적 구조주의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는 역으로 철학적 구조주의 덕분에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할 때

그가 제출하는 것은 자유의지/주관/능동/행위 등의 항에 속한다고 간주된 주체가

실은 구조를 재생산하는 수동성의 담지자일 수 있다는 반성이며

지배는 행위 일반을 억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 양립할 수 있도록 행위를 유형화하고 길들이는 데 있다는 통찰이다.


마키아벨리와 철학적 구조주의는 근대성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근대성이란 결국 '변화의 정상화'(월러스틴)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제 문제가 질서와 변화, 그 정치적 대응물로서 보수와 진보의 단순화된 이분법

이 아니라 정상화된 변화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로서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이며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길들여진 변화를 지향하는 '중앙파' 자유주의인 것은 이 때문이다.

맑스가 분석한 것이 자본주의라는 '(정상화된) 변화의 구조'이고

맑스주의 안에 개혁-혁명의 대립이 항상 따라 붙는 것,

그람시가 혁명과 구별되는 '수동 혁명'을 개념화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요컨대 마키아벨리에서 맑스주의를 거쳐 철학적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변화와 행위에 대한 반성이며,

변화에 대한 변화, 행위에 대한 행위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이단점이 있겠지만

나름 하나의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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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15:49 2010/06/2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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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 감독의 2004년 강연 중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인데, 당연히 물은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돌 위에 새겨야 하고 그러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26840&mm=005004002)

(양익준 자신의 표현은 이거였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흘려 보내는 것이다.

바위에 파서 새겨 넣어라."

이 말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요새 집에 케이블이 나와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양익준 감독을 보았다.

거기서 그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말을 인용했는데

인상적이어서 기록해 둔다.

 

기록과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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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23:37 2010/06/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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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와 공화주의

"On peut se placer dans une perspective, si vous voulez, quasi républicaine. On peut essayer de lutter pour que se développe un pouvoir constituant qui ne soit pas enfermé dans des frontières nationales, et des pouvoirs constitués le plus représentatifs possible. (...) Le coeur même de l'idée du pouvoir constituant, c'est de ne pas tendre à la prise du pouvoir, de ne pas tendre à opprimer les autres, mais de tendre à la limitation des excès du pouvoir. Non pas exercer, s'emparer du pouvoir pour opprimer les autres mais essayer de faire en sorte qu'il soit le moins oppressif et le moins absolu possible."

- Etienne Balibar, Cosmopolitisme et Internationalisme aujourd'hui, Marx contemporain : Acte 2, Espaces Marx, 2008, p. 356.

 

국제주의에 관한 발리바르의 글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한 문구다.

여기에서 공화주의, 더 정확히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이 짧은 문구에 지난 수십년간 발리바르가

맑스주의 및 근대 정치의 아포리아에 관해 고민한

핵심 문제의식 중 하나가 집약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 추적하는 것이 당분간 과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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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20:04 2010/06/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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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과 (사회)과학

"Si la philosophie politique, d'une certaine façons, 《disparaît》 dans la deuxième modernité post-révolutionnaire entre les philosophies du sujet et le théories de l'évolution sociales, il est tentant de penser que sa résurgence (avec la crise de la modernité, depuis les guerres mondiales et la 《guerre civile》 des systèmes socio-politiques) correspond à une 《fermeture》 de la question révolutionnaire (voire à une 《fin de l'illusion》 révolutionnaire, comme le dit François Furet). En réalité, il serait tout aussi juste de remarquer qu'elle traduit une nouvelle incertitude quant au sens de l'événement révolutionnaire, avec ses 《corrélats》 tendanciels dont la description a formé le coeur de la discipline sociologique (laïcisation ou 《désenchantement du monde》, individualisme et société de masse, démocratisation et 《règne de l'opinion》, rationalité bureaucratique, etc.)."

- Etienne Balibar, Qu'est-ce que la philosophie politique? Notes pour une topique, Actuel Marx N° 28 (Août 2000), p. 13.

 

'철학의 종언'은 근대 사회과학이 성립한 후

사회과학이 철학에 대해 제기한 가장 흔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철학자 중 누구보다 소리높여 과학의 중요성을 외쳤고

'철학의 전통적 실천'과 점점 더 멀어진 알튀세르가 지적했듯

진정한 쟁점은 철학의 종언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더욱이 사회과학의 탄생 자체를 규정한 근대성이 위기에 빠진 지금이라면 더더욱

"(사회)과학이냐 (정치)철학이냐"라는 양자택일은 전자의 쇄신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철학의 전통적 실천을 철학 일반과 같은 것으로 놓고

철학을 비웃는 것은 무척 손쉬운 일이다.

더욱이 철학의 전통적 실천이 오늘날 철학적 실천의 지배적 형태이므로

(이는 물론 (사회)과학도 예외가 아니며, 양자 모두

최종심에서 좌익에 불리한 세력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가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알튀세리앙을 자임하거나 알튀세르를 많이 읽었다는 이들조차

그런 태도를 보일 땐, 글쎄, 정말 알튀세르를 제대로 읽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알튀세르가 절대 진리는 아니다.

다만 그가 이론을 철학과 과학으로 구별짓고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되지 않는 양자의 자율성 및 생산적 긴장을 유지하려 한 것은

그의 직업이 철학자여서가 아니라 좀더 진지한 이론적, 더 중요하게는 정치적 쟁점 때문이며

그 쟁점은 오늘날에도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에게 "과학의 학교로 가라"고 말한 바슐라르,

현대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과학사가 중 한 명이었던 캉길렘 모두

여전히 철학자였던 이유가 무엇이며

레닌이 1917년을 앞둔 그 엄중한 시기에 헤겔을 읽으며 <철학 노트>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숙고해 봐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건 철학을 위해서가 아니다.

정반대로, 과학과 정치를 위해서다.

철학을 멀리 하고도, 또는 멀리 해야만

과학과 정치가 전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각자의 자유이며

거기에 간섭할 자격도 능력도 내게는 없다.

다만 이데올로기 외부에 있다고 여기는 순간이 가장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사로잡힌 순간이며

철학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은 '자생적 철학'의 충만함이라는 알튀세르의 경고를

그냥 흘려듣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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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2:24 2010/06/22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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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상적인 문구

"The love of country that inspired the verdict of the Roman people was a desire to stop an ambitious citizen who wanted to corrupt the laws and impose his own power over the city, thereby threatening the common liberty. In Machiavelli's interpretation of Livy's report, 'country' (patria) stands again for laws and common liberty. The civic virtue of the Roman people was, then, a love of liberty that gave them the courage and the strength to stand against powerful men who attempted to impose tyranny over the republic."

- M. Viroli, For Love of Country: An Essay on Patriotism and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32.

 

시민(권)의 문제를 다루려면

마키아벨리, 더 넓게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공화주의 전통을 결코 우회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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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00:01 2010/06/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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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중

"(...) it is not enough to distinguish the sciences and their orders: in life the orders overlap one another. True religion, true morality, supposing that they are excluded from the political orders as explanatory principles, do nonetheless belong to that order by the conduct and scruples they inspire!" (강조는 나)

- Louis Althusser, Politics and History: Montesquieu, Rousseau, Hegel and Marx, trans. Ben Brewster, NLB, 1977, p. 23.

 

요새 이런저런 이유로 알튀세르에 관한 글들을 다시 읽고 있다.

읽으면서 생기는 고민 중 하나는,

1960년대 초 프랑스라는 정세에서 알튀세르가 제기한 문제 및 이론이

어느 정도까지 오늘 정세에서도 의미를 갖느냐 하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인본주의'(humanism) 논쟁일 것이다.

인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알튀세르가 제기한 그 날카로운 쟁점을

과연 오늘날에도 유지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를 '자구 그대로'(to the letter) 다시 읽은 결과

나는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1959년에 쓴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에서 알튀세르는

종교와 도덕, 곧 '이데올로기'는 설명의 원리 곧 과학으로서는 정치에서 배제되지만

행실과 가책 곧 주체화/종속화(subjetion)의 효과라는 실천적 활동으로서는 정치에 속한다고

말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이제 설명의 방법에서 설명의 대상, 그것도 매우 중심적인 대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결코 가치없는 오류나 무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논쟁의 한가운데 있던 맑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도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결코 인간주의의 역사적 실존을 소멸시킬 수 없다. (...)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주의를 그 존재조건들과 연관시키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인간주의의 필연성, 조건들하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한다. (...) 이러한 인정의 토대 위에서 맑스주의는 종교, 도덕, 예술, 철학, 법 그리고 특히 인간주의와 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 관한 정치를 확립한다.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변적인) 맑스주의적 정치, 즉 인간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거부, 비판, 이용, 지지, 개발, 윤리-정치적 영역에서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현재적 형태들의 인간주의적 재생일 수 있는 정치, 이러한 정치는 이론적 반인간주의가 그 선행조건인 맑스주의 철학에 기초한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역, 백의, 1997, 277쪽.)

 

즉 인본주의를 가장 비타협적으로 비판했을 때도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로서 인본주의의 의의와 효과를 부정한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지금껏 책장 '과학' 또는 (설명) '방법' 코너에 꽂혀 있던 인본주의를

'이데올로기' 또는 (설명) '대상' 코너,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꽂았을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알튀세르가 제기한 이론적 반인본주의가 이론적 반인본주의라는 점,

곧 이데올로기로서 인본주의가 아니라 이론으로서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을 잊곤 한다.

이 짧은 관형어를 놓친다면 알튀세르의 기획 전체를 놓치게 된다는 점을

함께 잊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를 알고 싶다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이 그에 관해 해석한 글을 접한 후에

(왜냐하면 이제 알튀세르는, 그런 해석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말의 강한 의미에서 '고전'(classic)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를 '자구 그대로'(to the letter) 읽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알튀세르에 관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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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0 23:43 2010/06/2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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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reading and no writing makes Jack a dull boy

"영화가 주는 행복은 영화를 보는 시간과 영화를 생각하는 시간이 만나는 순간에 있어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면서 계속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구하는 그 시간이 영화 보는 시간만큼 즐거워요. <카페 느와르>를 찍으면서 맹세한 것이 있어요. 매일 촬영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일기를 쓴다는 거였어요. 단 1회차도 빠짐없이 썼어요. 시네필 중에는 쓰거나 하지 않고 계속 시네마데크에서 영화만 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바보예요. 중의적 의미의 바보죠. 반면 어떤 학생은 줄창 책만 읽어서 모르는 이론가가 없어요. 하지만 영화 한편을 같이 보고 대화해보면 머리가 뒤죽박죽이에요. 결국 저는 보기, 읽기, 쓰기의 삼위일체가 계속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는 만들기, 읽기, 쓰기가 같이 가야 하고요. 쓰는 것을 멈추는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서랍처럼 느껴져요." (강조는 나)

 

- [김혜리가 만난 사람] 영화평론가·영화감독 정성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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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10:27 2010/06/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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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마지막회 은호의 나레이션

"가끔은 시간이 흐른다는 게 위안이 된다
누군가의 상처가 쉬 아물기를 바라면서
또 가끔 우리는 행복이라는 희귀한 순간을 보내며
멈추지 않는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어떤 시간은 사람을 바꿔놓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랑은 시간과 함께 끝나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언젠가 변해버릴 사랑이라 해도
우리는 또 사랑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우리는 늘 행복한 기억을 원하지만
시간은 그 바람을 무시하기도 한다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행운과 불행은 늘 시간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려든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애달파하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도 지나고 죄책감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시간도 지나고
희귀한 행복의 시간도 지나고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이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하기도 하고,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시간이라는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기록이다.

이렇다 할 기록 없이 1년 가까이 흘렀다.

사적인 공간에서 인터넷이 안 되는 탓도 있었고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갔고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만큼 기억도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시간의 덧없음에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은.

 

1년 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를 위로하는 것은 이하나의 노래, <그대 혼자일 때>다.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그녀의 노래와 아마 다시 마주치지 못했을 테고

지금 느끼는 위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기록하고, 기억을 만들고,

다시 살아갈 일이다.

어떤 운이 시간 속에 매복해 있다가

내게 다시 달려들어

삶을 장난감처럼 망가뜨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삶이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as if라는 위로와 치유의 가정법을 믿고

다시 시작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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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6/13 14:00 2010/06/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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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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