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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출발’을 위해(2007.01.02.)

‘즐거운 출발’을 위해

 

13년간의 인연

 

벌써 13년이 됐습니다.

한노정연이라는 ‘연구소운동’과 인연을 맺은 지가.

1993년 말 경이었습니다.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2년 반 정도 징역살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징역을 사는 동안 세상은 확 바뀌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함께 운동했던 많은 동지들이, 혹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념적인 지표를 상실하면서, 혹은 90년대 초반 투쟁과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실패에 좌절하면서, 혹은 당장의 생계와 가족 문제 때문에,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변혁 이념을 ‘청산’하는 것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80년대 신군부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그 모진 세월을 함께 버텨왔던 조직들도 하나둘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변혁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동지들은 생활 속으로, 대중조직 속으로, 지역으로, 부문 단체 등으로 ‘잠복’해 갔습니다.

 

후배 연구자들로부터 함께 연구소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은 때가 바로 1993년 말이었습니다.

80년대의 변혁운동이 ‘청산’하고 ‘해체’하고 ‘잠복’하고는 있었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전노협을 중심으로 두 차례의 총파업 투쟁을 전개할 만큼 성장하고 있었고, 노동운동의 성장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 때 두 가지 점을 고민하고 토론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성장을 이론 정책적으로 지원해 나갈 단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하나요, 노동자 대중운동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변혁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이론적으로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그 둘이었습니다.

좌파 교수와 석박사 연구자들, 그리고 노동운동 내 좌파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연구 주체들이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을 연구소의 기치로 내걸기로 했고, 각종 연구 세미나팀의 조직, 월례발표회와 심포지움의 개최,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의 발간, 현장조사 프로젝트, 단행본의 발간 등 각종 사업을 계획했습니다.

이런 준비 끝에 1995년 7월 마침내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가 출범했습니다.

 

당시 한노정연의 출범은 단순히 하나의 연구소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운동’이었습니다.

흩어진 좌파 연구자들을 연결하고, 연구자들과 현장의 활동가들을 소통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성장하는 민주노조운동과 결합하여, 실천적인 긴장을 동력으로 그 속에서 변혁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찾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3년간 한노정연의 연구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현장과 결합하며 연구를 해왔고,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한노정연은 유지되어 왔습니다.

끝까지 한노정연과 고락을 같이 한 연구자들과 현장의 활동가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노정연을 떠난 연구자들 모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한노정연은 그간 그나마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한노정연과 맺은 13년간은,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그야말로 청춘을 다 받친 세월이었습니다.

13년간 한노정연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많은 선배 동료 후배 연구자들로부터 배웠고, 또 노동 현장과 노동 운동의 활동가들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 왔습니다.

이 점 이 글을 빌어 선배․동료․후배 연구자들과 현장․지역의 활동가들에게 “그간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활동비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호주머니돈 까지 써가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연구자들, 현장의 프로젝트 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 혹은 <현장에서 미래를>에 기고할 원고를 마감하느라 밤샘을 밥 먹듯이 했던 연구자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현장이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 지원했던 연구자들, 회원 관리와 회계 정리와 자료 정리라는 고달프지만 티도 안나는 실무를 묵묵하게 하던 연구자들, 그리고 한노정연의 일을 자신의 일보다도 더 소중하고 챙겨주고 걱정해 주었던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 ---.

한노정연이 지난 13년간의 활동 결과로 남은 소중한 성과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연구자들과 현장 지역의 활동가들일 것입니다.

저에게도 지난 13년간 한노정연과 맺은 인연이 가져다 준 가장 소중한 성과는 바로 이 분들입니다.

 

역사적인 소임과 역할

 

분명 한노정연은 지난 13년간, 아니 지난 10여 년간 명실공히 한국의 ‘좌파’ 노동이론연구의 대표 연구단체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랑스럽습니다.

비록 지금 ‘발전적 해소’라는 명분으로 해체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노정연은 2006년 지금, 변화하는 정세에 걸맞게 연구소를 새롭게 재편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유야 어쨌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내는 데도, 스스로를 발전적으로 재편해 나가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한노정연이 해왔던 역할에 대해 너무 쉽게 판단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만약 한노정연의 역할에 대해 평가하시려면, 실제로 현실에서 그만한 역할을 입증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역할을 기대합니다.

문제는 한노정연이라는 틀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이, 혹은 좌파 진영이 이러한 운동 양식을 어떻게 새롭게 창출해 낼 수 있을가입니다.

 

한노정연은 특정한 운동 발전의 소산물이었습니다.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발전의 소산물이었습니다.

민주노조의 발전이 모든 운동의 발전을 대표할 때, 한노정연은 그 일각에서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은 한노정연의 모토였습니다.

한노정연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그간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의 전망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노동운동을 어떻게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지의 문제는 여전히 모두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더더욱 노동조합 수준의 전망으로는 노동운동의 민주적 계급적 발전 전망을 구체화시켜내는 데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노정연은 스스로를 한 단계 진전시켜 내지 못했습니다.

 

모든 조직은 자신을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한노정연 역시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노정연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뭣보다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노동운동의 전망에 대해 한노정연은 구체적인 전망을 만들어나가지 못했습니다.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현실과 호흡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는 한노정연만이 감당해야 하는 몫은 아니지만, 한노정연 역시 이러한 현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한노정연은 변혁운동 진영 내부의 여러 견해의 차이를 조율하거나, 그러한 차이를 뛰어넘는 이론적 전망을 구체화해내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안을 찾아내지도 못했고, 또 그런 능력을 갖춰내기에도 너무 부족했습니다.

현실의 노동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노동운동 자체만이 아니라 전체 변혁운동의 전망을 요구하고 있었고, 변혁운동의 전망을 어떻게 현실화해 낼 것인가는 한노정연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였습니다.

물론 한노정연이 이러한 과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변혁운동의 전망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21C 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논의까지 진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까지였습니다.

한노정연의 역사적인 역할과 소임은.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있습니다.

아직도 뭐라고 똑 부러지게 정리하여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한노정연이라는 틀로는 더 이상 진전은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 가지 수준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연구역량들이 당분간 자신의 연구 활동에 좀 더 전념할 수 있는 구조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연구소가 그동안 출판 사업부터 정기간행물 발간, 각종 교육사업, 프로젝트 사업 등을 해왔는데 여기서 많은 사업들이 연구소라는 틀 안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좀 더 전문화해 질적으로 버전업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최근 몇 년간 좌파운동이 정체 내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타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는데, 좌파의 정치운동과 이론운동에 새로운 지형들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가 좌파진영의 이러한 이론적 실천적 지점에서 하나의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자신의 마지막 역사적인 소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발전적 해산의 시기를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출발을 위한 기다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이 만들어 지든지,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할 때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불가피한 논리만을 따른다면, 이러한 바램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를 결정(결단)하면서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고 여러 이유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어떤 일을 하든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무겁고도 엄중합니다.

특히 이러한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좌파의 현실은 더더욱 무겁고 엄중합니다.

그러나 무겁고 엄중한 현실을 그대로 무겁고 엄중하게만 받아들여서는 결코 현실을 변화시켜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좀 더 가볍고 경쾌하게 현실과 마주할 수는 없는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 운동의 발전과 일치할 수는 없는가.

사실 이런 의문은 80년대를 살았던 저나 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돌이켜 봅니다.

한노정연을 만들 때, 참으로 가볍고 경쾌한 심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을 세웠어도 힘들었어도 기뻤고,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너무 들어서인지 어떤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면, 그 출발은 어떤 ‘당위’나 ‘책임’이 아니라 ‘즐거움’으로부터 시작됐으면 합니다.

아직 인생을 오랜 산 것은 아니지만, 즐거운 것이 오래 간다는 판단이 듭니다.

자신이 즐거워야 동지들도 즐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또다시 뜬금없는 바램일지는 모르지만, 한노정연의 발전적 해소가 서로를 다시 즐겁게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과 서로에 대한 기다림이 필요하겠지요.

 

2007.01.02.

사당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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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가락의 비밀(2006.12.29.)

새끼손가락의 비밀

 

 

우리 몸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부분이 ‘손’과 입술입니다.

가장 감각이 둔한 부분은 등이라고 합니다.

손가락, 손바닥, 손목이 정확한 동작을 통해 얻은 감각을 척수를 통해 뇌에 전달할 때 우리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비밀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손의 기능은 3가지입니다.

주먹을 쥐는 것, 물건을 잡는 것, 그리고 손을 펴는 것입니다.

이 3가지 기능 중 어느 하나라도 손상되면 손은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엄지와 주변 근육은 물건을 집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엄지손가락이 움직이는 범위도 가장 크고 화려하며 근력도 가장 셉니다.

나머지 손가락도 3가지 기능에 나름대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의 기능과 관련해서 우리가 잘 모르거나 잊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역할입니다.

다른 손가락에 비해 별 쓸모없을 것 같아 보이는 새끼손가락이 사실은 손동작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하고, 손힘을 사용할 때 기본축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떠한 동작을 하던 반드시 고정된 중심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적인 동작을 할 수 있습니다.

 

손동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손힘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새끼손가락이 사실은 묵묵하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과 약속을 할 때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고 엄지끼리만 하는 약속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건강한 감각

 

하나의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위치에서 드러나지 않게 묵묵하게 새끼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심축이 있어야 그 조직은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역동적인 힘은 이러한 중심축이 얼마나 잘 세워져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이 중심축, 기본축이 무너지면 그 조직은 전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의 화려한 동작도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거꾸로 이러한 중심축과 기본축이 탄탄하다면 엄지손가락은 물론 다른 손가락들도 힘 있고 자신감 있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조직이 위기나 어려움에 처했다면, 위기와 어려움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중심축이자 기본축의 역할을 해 왔던 활동가들이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 금방 드러나지 않고, 그래서 소홀하게 판단하거나 지나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파급력은 만만치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다 새끼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다 스스로 새끼손가락 같은 역할을 자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조직은 현실 변화의 예민한 지점들을 읽어내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 조직의 생명력과 건강함이 달려 있습니다.

건강한 감각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200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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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2007.11.30.)

‘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

 

 

지금은 다시 기억하기도 끔찍하지만, 꼭 4년 반전에 아내가 교통사고로 척추신경을 다치고, 몇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재활치료를 통해 조금씩 걷기 시작했을 때, ‘경직’과 ‘통증’이라는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경추 3번과 4번 신경이 손상을 입었지만, 그나마 다행히 신경이 전부 끊기지 않아 완전 전신마비는 모면할 수 있었고, “걸을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재활 치료를 받는 중에 맞닿게 된 ‘도전’인 셈이었다.

사실 배설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즉 똥오줌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완전마비’가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힘겨운 물리치료의 결과로 근력이 생기고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근력과 함께 ‘경직’이, 신경이 살아난 만큼의 ‘통증’이 동반된 것이다.

 

당시 재활 치료과정에서 알았지만, 마비에는 ‘경직성 마비’와 ‘이완성 마비’가 있었다.

‘경직성 마비’는 불필요하게 신경이 극도로 긴장하면서 온 몸이 뻣뻣하게 되는 것이고, ‘이완성 마비’는 몸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경직성 마비’였다.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이 뻗쳤고, 사지 전체에 팽팽하게 긴장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경직만큼 통증이 수반됐다.

손상으로 흐트러진 신경은 온갖 알 수 없고 가눌 수 없는 통증을 뇌로 전달했다.

그 때마다 아내는 ‘경직’과 ‘통증’의 고통을 호소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는 점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기 재활치료 과정에서는 이완성 마비에 비해 경직성 마비가 빨리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경직’으로 걷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잘 서고 잘 걷는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경험이 풍부한 물리치료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통증’에 대해서는 “통증은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이라 위안해 주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허리를 굽히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면서 그 탄력으로 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에 안주하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했다.

지팡이나 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즈음에, 물리치료사는 “지금 몸이 완전히 고정된 상태다. ‘안정’된 것과 ‘고정’된 것은 다르다. 몸통이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고, ‘고정’된 몸과 ‘안정’된 몸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양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몸통’을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혼자 걸으려면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병원은 온실이고, 바깥세상은 현장이기 때문이다.”

4년 반이 지난 지금, 아내는 아직도 양 손에 힘을 빼지 못하고 있고, 몸통이 자유롭지 못하며,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없어서, 혼자 서서 걷기는 하지만 ‘제대로’ 걷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모든 사람이 갓난아기 시절에 이미 마친 걷기 학습을 아내는 지금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있다.

제대로 걷기 위해.

4년 전 6개월간의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을 나설 때 물리치료사가 했던 마지막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경직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경직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한번은 넘어질 것이다. 그 때 어떻게 순간적으로 대처하느냐가 혼자 걸을 수 있는지에 관건이다.”

 

2007.11.30.

관악산 남쪽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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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고추나무는 일으켜 세우지 말라!(2003.08.19)

쓰러진 고추나무는 일으켜 세우지 말라!

 

몇 달 전 개인 사정으로 농가주택으로 이사 온 뒤, 계속 눈에 거슬렸던 것이 텃밭에 심어져 있던 고추였다.

좋은 종자로 심었다는 고추가 집주인의 관리 소홀로 쓰러져 방치되고 있었고, 농사에는 애초부터 무지랭이인 나는 집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쓰러진 고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바라만 보지 않고 쓰러진 고추나무를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어줍지 않은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쓰러진 고추들이 막 썩기 시작할 때에서야 였다.

 

고추나무 세우기

 

쇠막대기를 땅에 박고 비닐끈으로 쓰러진 고추들을 묶어 세우면서 내가 놀란(?) 것은 고추나무가 너무 좋은 종자여서 풍성하고 실하게 열린 고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졌다는 점이었다.

이웃집 농부들이 고추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때’를 놓치지 않고 지지대를 받쳐 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놀란 이유는 ‘때’를 놓쳤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고추나무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열매를 맺어, 결국 사람이 지지대를 받쳐 주지 않으면 자신이 맺은 열매의 무게마저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썩을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릇 이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더 많은 수확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한 종자 ‘개량’의 결과였다.

이 ‘개량’된 고추나무는 주인을 잘못 만나 다 자라기도 전에 쓰러져 썩게 됐지만, 주인을 잘 만나 ‘때’를 맞춰 풍성하게 수확된 고추들의 운명은 어떨 것인가?

다 팔려서 소비되지 않으면 그대로 밭에서 썩거나 창고에서 썩을 것이니, 결국 고추의 운명은 ‘자연의 때’만이 아니라 ‘시장의 때’와도 궁합이 맞아야 온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고추나무 하나 세우면서 드는 괜한 상념에 마음이 씁쓰레 해졌다.

 

밭 여섯 이랑이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둘이서 한나절을 끙끙대야 간신히 쓰러진 고추나무를 세울 수 있었다.

‘때’를 놓쳐 아쉬웠지만, “남은 고추라도 건질 수 있겠지”하는 조금은 흡족한 마음으로 밭두렁에 주저앉아 매판장에서 사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데, 마침 곁을 지나가던 뒷집 통장 아저씨 왈(曰),

 

“쓰러진 고추는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여, 뿌리가 흔들려 바람이 들어가면 고추가 다 죽어. 괜한 일들을 했구먼.”

 

조급한 기대와 설레임

 

이날 이후, 나는 집을 드나들 때마다 어설픈 마음으로 세운 고추나무들이 하나씩 둘씩 누렇게 시들어 가고, 붉게 익다가 병이 들어 썩은 채 무게를 감당 못하는 시든 나무에 메달린 고추를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러길 보름가량 지났을까?

여름 장마가 끝나가자 고추밭을 하루 빨리 뒤집어엎어 김장 배추와 무우를 뿌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씩 긴장되고 흥분되어 갔다.

누렇게 시들어 빠진 고추나무를 뽑아내고, 밭이랑을 뒤집어엎어 고른 다음, 거기에 새로 김장 배추와 무우 묘종을 심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해지는 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대와 셀레임이 가볍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시들어 빠진 고추나무와 붉게 익다말고 썩어가는 고추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밭을 뒤짚어 엎고, 새로운 묘종을 심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벌써 내년 봄에 파릇파릇 솟아날 배추와 무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런 기대와 설레임으로 자랑삼아 장모님한테 이야기했는데, 정색을 하며 장모님 왈(曰),

 

“고추를 버리지 말고 일일이 다 따야 혀, 얼마나 좋은 고추인데. 썩은 부분만 도려내면 돼.”

 

2003.08.19.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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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간 베를린 묵언기행(黙言紀行)

25일간 베를린 묵언기행(黙言紀行)

 

몸이 불편했지만 발도로프 교사자격 취득을 위한 마지막 연수과정을 포기할 수 없다는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보호자 자격으로 연수생 일행과 함께 동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월 21일경이었다.

 

출발 이전부터 이미 각오하고 예상도 했지만, 독일어라고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 25일간 눈만 부릅뜨고 입은 꾹 다문 묵언기행(黙言紀行)이 시작됐다. 간혹 통역자로 함께 간 동갑나기 이(李) 선생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처음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서 멀리 가는 것조차 두려워, 아내가 교육을 받고 있는 낮 시간 동안 숙소와 학교가 있던 동베를린의 중심가인 알렉산더프라츠(광장) 근처만 걸어서 돌아다니곤 했다.

 

독일어를 모르니 궁금한 것을 누구에게 물어 볼 수 없고, 책이나 자료도 읽을 수 없어, 그냥 발 가는대로 돌아다니면서 가벼운 눈요기만 하던 어느 날, 낯선 거리와 광장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로자 룩셈부르크 스트라셰(거리)’, ‘칼 리히프크네히트 스트라셰’, 그리고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아니 자본주의체제로 흡수 통일된 지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과거 동독 시절의 거리 이름이 그것도 자본주의체제를 혁명을 통해 타도하려고 했던 사회주의 사상가와 지도자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북한이 남한 자본주의체제로 흡수통일된다면 ‘김일성 광장’, ‘김정일 거리’ 등등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미 내전을 통해 분단된 체제에서 태어나 숨막히는 반공 반북의 메카시즘적 제도와 문화 속에서 47년간 살아 온 남한의 한 활동가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런 정도였다. ‘동서독의 분단체제는 남북간의 6.25.와 같은 대량살육의 내전을 겪지 않아,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가 보구나.’ 아니 ‘과거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소련의 도덕교과서로 박제화됐던 것처럼, 로자 룩셈부르크나 칼 리히프크네히트의 사상과 실천도 그 생생한 혁명성이 거세되어 아스팔트 거리 이름으로 박제화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머릿속을 맴도는 이런 저런 상념과 궁금증에 대해,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 후배의 답변은 나의 알량한 상상과 추측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독일인은 칼 마르크스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동서독 분단 이전의 ‘독일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 이름과 광장 이름을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과거 동독에 있던 구소련의 잔재들은 이미 대부분 정리했다.”

 

독일 민족이 위대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독일이 지배계급이 무섭다고 해야 하나? 25일간의 묵언기행(黙言紀行) 동안, 겨울 내내 검은 구름에 가려 햇빛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는 베를린의 날씨처럼, 무겁고 어두운 상념만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아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느라 매일 지나쳤던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에도 다른 거리와 마찬가지로 개똥들이 이리저리 뒹글고, 마르크스엥겔스 광장 주변의 건물도 다른 건물들처럼 온통 뜻 모르는 낙서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되돌아보니 단지 독일어만 몰라서 25일간 묵언(黙言)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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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뛰어넘는 관심농법(觀心農法)?(2004.08.31.)

[텃밭이야기] 천년을 뛰어넘는 관심농법(觀心農法)?

 

몇 년전 궁예와 왕건이 나오는 TV드라마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이 화제가 됐었습니다.

보기만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일컷는데, 이 관심법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저는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이 드라마에만 있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천년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관심법(觀心法)이 이 묻지마농장에서 관심농법(觀心農法)으로 부활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것입니다.

드라마처럼 펼쳐진 이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저는 참으로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만 보고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설레서 그 장면을 텃밭을 아끼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기로 결심했습니다.

 

며칠 전, 텃밭 한가운데 있는 목화밭에 항아리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목화밭 주위를 한바퀴 주의깊게 돌아본 후 그냥 가시려길레 물어 봤습니다.

"손 좀 써야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항아리 선생님 왈, "이 목화는 봐 주기만 해도 잘 자라요."

 

그 때 저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배추 모종을 심고 잡초를 뽑아내던 두 손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농법의 새로운 경지 아닌가?

이름하야 관심농법(觀心農法)의 경지 아닌가?

지난 봄에 무지개 학교 아빠들이 구사했던 태평농법에 이은 초롬아빠의 천공농법,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관심농법(觀心農法)의 경지가 아닌가?"

 

저는 이 어줍잖은 묻지마 농장을 경영하면서 불과 1년 사이에 관심농법의 경지까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에 이런 행운을 만끽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장면을 혼자만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나누어야죠.

 

목화나무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어도 오로지 목화꽃만 볼 수 있는 경지,

목화나무 밑에 잡초가 수북하게 자라고 있어도 그 잡초가 목화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을 거라는 목화나무에 대한 저 굳건한 믿음,

오랜만에 와서 물을 주지 않아도 주인의 따스한 시선만 받으면 목화가 잘 자랄 것이라는 저 확신 ----

농법의 새로운 경지, 관심농법(觀心農法)의 경지!!!

자라나는 잡초만 봐도 안절부절 못하는 저는 언제 저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

 

* 몇 집만 빼고 배추나 무를 다 심었네요.

아직 심지 못한 집은 빨리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빈 텃밭이 몇 개 남았으니 더 농사짓고 싶으신 분은 그냥 말뚝박고 쓰시면 됩니다.

무우나 알타리, 갓 씨는 중앙공원 옆 재래시장에서 1봉지에 2,000씩 팔고, 배추 묘종은 텃밭 아래 비닐 하우스에서 1개당 100원에 팝니다.

 

2004.08.31.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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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텃밭 앞에 서서(2004.08.16.)

[텃밭이야기] 황량한 텃밭 앞에 서서

 

가슴이 시원하고 흐믓할 줄 알았습니다.

로타리 쳐서 땅을 갈아 엎으면.

웬걸, 오늘 아침 텃밭 앞에 서자, 갑자기 황량함이 엄습해 왔습니다.

씨를 뿌린 후 단 한번의 손길(?)도 닿지 않았지만, "아이들 교육용으로 쓴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참사(?)를 용케 비껴간 목화 때문에 마음이 쓰라린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올 가을 까지는 정성껏 보존하면서 전시했어도 되는데, 급한 마음에 철거해 버린 '천공의 표주박'때문에 가눌 수 없는 자책감이 들어서도 아닙니다.

잡초나마 푸릇푸릇했던 텃밭이 온통 흙빛으로 뒤덮이고, 그 한 구석에 열 몇 그루의 목화만이 외롭게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수 개월간 여러 사람들이 정성을 쏟았던 흔적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실 어제 로타리 치고 밭고랑을 낸 후, 이런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고, 팻말을 하나씩 다시 박으며 지난 기억을 되살려 봤습니다.

농사와 관련하여 숱하게 쏟아지는 물음에 무엇 하나 제대로 답변할 수 없어, 아예 텃밭 이름을 '묻지마 농장'으로 지어 버린 기억.

농사를 짓는 텃밭인지 술을 마시는 주막인지 구분이 안됐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눈치보지 않고, 또 마다하지 않고 사오는 막걸리나 맥주나 소주를 가리지 않고 마셨던 기억들 ---.

그런데 왜 농사지은 기억은 없고, 술 마신 기억만 남는 건지 ---.

 

아쉽지만 어제로 상반기 농사는 매듭졌습니다.

상반기에 농사지으신 분은 가을 농사도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텃밭이 조금 남습니다. 혹시 주변에 가을 농사를 지으실 분이 있으면 신청하시면 됩니다.

로타리비용은 15만원 들었습니다. 무지개학교팀이 7만원, 자유학교팀이 8만원 내기로 했습니다. 텃밭 당 1만원씩 내시면, 로타리 비용으로 내고, 나머지는 퇴비를 사다 놓을 예정입니다. 땅 상태가 좋다고 해서 거름을 다시 하지는 않았습니다. 필요한 분은 퇴비를 사다 놓을 테니까, 필요한만큼 가져다 쓰시면 됩니다.

이번 주중에 배추나 무를 심어야 속이 찬다고 하니,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참, 텃밭당 어느 정도 거름을 해야 하는지 묻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당혹(?)스럽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항상 다음을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묻지마 농장'이라는 점을.

 

2004.08.16.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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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天空)의 표주박’, 전시 마감 임박! (2004.08.08.)

[텃밭이야기] ‘천공(天空)의 표주박’, 전시 마감 임박!

 

텃밭에 오거나, 혹은 지나가는 분들이 항상 의아해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텃밭 한가운데 초롬이네 밭에 있는 구조물입니다.

정확하게 측정해 본 것은 아니지만 높이가 2.5m 정도되는 각목 구조물에 호박잎 같기도 한 잎들이 현란하게 위로 솟구치는 '무엇'입니다.

 

저는 오늘까지도 그것이 호박인 줄 알았는데, 초롬 아빠가 표주박 2개를 따는 것을 보고서야 그 잎들이 표주박잎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구조물이 ‘천공(天空)의 호박’이라는 예술작품인 줄 알았고, 워낙 '묻지마 농장'이라 물어 볼 엄두조차 내고 있지 않았는데, 오늘 초롬 아빠가 표주박 2개를 따내는 것을 보고서야 농사를 짓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저희같이 아둔하거나 굳어있는 머리로는 시도는 커녕 상상조차도 못할 기발한 농법에 감탄 외에 다른 할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다만 그 거대한(?) 구조물에 아직까지는 표주박이 2개만 달랑 달려 있었다는 점만이 아쉬웠을 따름입니다.

이 전무후무한 농법으로 제작된 ‘천공(天空)의 표주박’ 작품이 얼마 안있어 철거됩니다.

8월 중에 텃밭 전체를 갈아 엎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빠들 몇이서 하루종일 텃밭 잡초를 거의 정리했습니다.

몇 주간에 걸친 장마로 키만큼 자란 잡초 때문에 텃밭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오늘 작업으로 이제 안심하시고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상반기 농사의 마지막 수확물들을 빨리 챙겨가시기 바랍니다.

정리되는데로 가능한 8월 중에 밭 전체를 갈아 업겠습니다.

 

거름하고 로타리치려면 비용은 가구당 1~2만원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반기 농사는 대체로 배추나 무우을 심는다고 합니다.

가능한 8월 중에 심어야 배추도 속이 찬다고 합니다.

시금치, 파 등을 심겠다는 분도 계십니다.

서둘러서 텃밭 정리를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참, 그동안 잡초 속에 묻혀 있던 목화가 자태를 드러냈으니, 항아리 선생님도 목화를 어떻게 하실지 빨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가을 농사도 농사지만,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천공(天空)의 표주박’이라는 작품 전시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혹시 그간 이 작품을 보지 못했거나, 봤더라도 작품인줄 모르고 지나치셨던 분들은 빨리 텃밭에 와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관람료는 따로 없고, 작품의 예술성에 심취하신 분은 초롬 아빠께 막걸리 한잔이라도 사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표주박이 2개밖에 열리지 않은 점에 대해 위로해 주시는 것도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이상 '묻지마 농장'에서 알려드렸습니다.

 

2004.08.08.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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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농장'의 분실물신고센터(2004.05.)

[텃밭이야기]'묻지마농장'의 분실물신고센터

 

어제 아빠모임이 끝난후에, 가방2(어머니용 까만가방, 어린이용 가방), 모자2(밀집모자, 어린이용 썬캪?), 그리고 어린이 신발1짝을 두고 갔습니다.

아빠든 엄마든 애들이든 늦게까지 노느라 정신이 없었던것 같군요.

물건은 현이네집 안마당 식탁위에 보관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모임에 고추대만 세우는 줄 알고 참여하셨던 아빠분들, 방과후 평균대를 만들고, 창고 정리하고, 방과후 방충망 수리하느라 수고했습니다. 참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한 수리작업도 마쳐서 조금은 편해질 것 같네요.

이상 '묻지마농장'에서 알려드렸습니다. 왜 '묻지마 농장'이냐구요?

텃밭에 농사지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 가령 "감자는 언제 캐느냐? 토마토 가지치기는 어떻게 하느냐? 지금 뭘 심으면 되느냐? 등등 -, 항상 이렇게 대답해 드립니다.

"어려운 거 더이상 묻지말고, 알아서 하세요"

 

2004.5.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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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들의 권리, 벌레들의 권리(2004.05.27.)

[텃밭이야기] 잡초들의 권리, 벌레들의 권리

 

5월 들어 몇차례에 걸쳐 제때 내려준 비로 텃밭에 있는 야채들이 몰라보게 성큼 자랐습니다.

제대로 자랄까하는 기우는 말끔이 사라졌습니다.

오고가며 보는 텃밭의 풍경은 너무도 마음 뿌듯하게 다가옵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자란 것은 정성껏 심고 가꾸어 논 야채들만은 아닙니다.

'야채반 잡초반'이라고 할 정도로 잡초들도 함께 성큼 자라고 있고, 그만큼 벌레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잡초들도 자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벌레들도 먹고 살 권리가 있다"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잡초는 돌보지도 않는데 그리도 잘 자라는지, 왜 벌레는 잡아도 잡아도 돌아서면 또 생기는지---."

 

잡초도 벌레도 다 생명이고, 생명에는 다 타고난 이유가 있다는 고매한(?) 생각을 가지신 분을 제외하고, '유기농'으로 제대로 된 야채를 키워서 먹어보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들은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 고추는 조만간에 막대를 세워줘야 할 것 같습니다. 단 경필이네 처럼 세운 막대는 조금만 지나면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가능한 긴 막대로 탄탄하게 지탱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철근이나 다루끼를 준비해 두려고 합니다.

 

* 방울토마토도 빨리 막대를 세워 지탱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가지 사이에 나는 새 순은 따줘야 방울토마토가 실하게 열린다고 합니다.

 

* 호박이나 오이도 지금쯤 옮겨 심거나 막대를 세워줘야 잘 자랄 것 같습니다.

 

* 깻잎은 현이네 텃밭에 모종이 자라있으니 필요하면 분양받아서 심으면 됩니다.

 

2004.05.27.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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