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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뜨거운 가슴으로 돌아보고, 차가운 이성으로 봐야 할 뉴코아 합의서

[기고] 지못미, 뉴코아 노조

오도엽(작가) / <참세상>2008년09월08일 0시47분

 

8월은 끔찍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싸움이 천일하고도 백일이 넘어가고, 김소연 분회장은 차마 기록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의 시간을 단식으로 항거하고 있다. 새마을과 KTX 승무 노동자가 서울역 40미터 철탑에 고공농성에 들어가고 부산에서도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강원도 문막의 도루코 비정규 노동자도 정문 앞에 철탑을 세우고 목이 빠져라 공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충청도 오창의 하이텍씨알티코리아 노동자도 공장에 천막을 쳤다. 길게는 삼천일 이상을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이다.

 

생계를 잃은 노동자에게 하루란 목숨이 달린 시간이다. 이들 노동자를 거리로 내몬 사업주들은 법원에서 부당해고와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법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사업주들은 아직도 공장을 돌리고 주식과 부동산 투기를 통해 이익을 취득하고 있다. 하지만 법으로 복직 판결을 받은 노동자는 공장 앞에서 한뎃잠을 자야하는 비극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8월의 무더위보다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분노마저 타버려 가슴 속이 하얀 잿가루가 되었다.

 

쉽게 뉴코아 합의를 이야기하는 언론과 사람에 가슴이 아팠다

 

끔찍한 팔월의 마지막 날을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뉴코아 노동자들의 협상타결 소식이다. 사백일이 넘는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이 끝났다는 말에 기뻐 만 할 수 없는 협상안을 들여다보고 어금니를 으스러지게 꽉 깨물어야 했다. 이것은 사업주가 사백일 넘게 싸워온 뉴코아 노동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내용이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협상의 대상은커녕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와 사업주의 관계가 아니라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주가 노예에게 가하는 채찍만큼 가혹하였다.

 

뉴코아 노동자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보내고 싶었다. 당신들이 이런 사업주와 400일 넘게 싸운 게 얼마나 힘들었으며 위대한 몸짓이었는지 뜨거운 가슴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다. 당신들의 가슴에 노예주의 채찍에 맞아 깊게 생긴 생채기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신문과 인터넷 언론을 뒤적이며 분노를 하였다. 보수언론은 싸우는 노동자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있고, 진보언론은 그런 협상안에 도장을 찍은 안타까움과 함께 ‘백기투항’이니 ‘굴복’을 들이대며 또 한 번 뉴코아 노동자에게 채찍을 내리치고 있지 않는가. 한 진보 인터넷 언론에서는 인터뷰이를 밝히지 않은 채 따옴표를 쳐서 “뉴코아노조 간부들이 자기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말을 서슴없이 기사로 내보냈다. 같은 기사에 뉴코아노조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 위원장의 목소리로 “이랜드일반노조의 파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그것도 ‘막대한 영향’이라는 기사를 썼다.

 

지난해 여름 뉴코아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싸움을 위해, 외주화 저지를 위해 정규직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싸운, 그것도 처절하게 434일을 싸운 그 소중한 흔적은 다 지우고 가려한다. 상급단체는 다른 사업장에 ‘막대한 영향’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 싸움을 지켜주지 못한 반성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팔아넘겼다’는 코멘트를 딸 것이 아니라 뉴코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데 상급단체가 슬슬 꼬리를 뺀 정황을 먼저 다루고 지적해야 옳지 않는가. 노사 합의문의 도덕적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손해배상과 가압류만을 해결하고 노조와 연대조직의 손해배상은 모른 체했다’는 지적이 있다. 노동자들의 피해를 막으려고 서비스연맹도 민주노총도 만든 것이다. 당연히 상급단체에서 그 문제는 싸워야 하고 풀어야 할 문제이지 뉴코아 노동자를 평가하는 도덕의 잣대는 아니다.

 

말하고 싶다. 뉴코아노조의 정규직 노동자만큼만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과 상급단체들이 싸웠더라면, 아니 그 절반이라도 싸웠더라면 최소한 기륭전자의 김소연 분회장이 80일이 넘는 단식을 하는 일은 이 땅에서 없었을 거다.

 

지난 금요일 기륭전자 단식장에 갔더니 지금 단식을 중단하면 도루코 노동자의 싸움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멈출 수 있겠냐는 말을 들었다. 어떤 기사에서는 “뉴코아 노사의 합의가 이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장 뉴코아노조와 함께 파업을 시작한 같은 이랜드그룹의 유통업체 홈에버의 비정규직 문제도 직격탄을 맞게 됐다.”라고 썼다.

 

과연 홈에버 노동자는 어떨까? 추석맞이 집중투쟁을 하는 홈에버 상암점을 찾아갔다. 이랜드 노동자의 얼굴을 보았다. 겉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 여유로운 모습이다. 이남신 이랜드 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직격탄을 맞을 걱정보다는 뉴코아 간부들이 이 힘든 시간을 어찌 이겨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하루빨리 만나 함께 풀고 싶다는 동지의 애정이 담긴 걱정을 하였다. 협상에서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이랜드 자본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보여주었기에 싸움의 정당성과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 우려만 하지는 않았다.

 

맞다. 회사와 합의한 내용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것은 아니다. 너무도 쉽게 합의내용을 이야기하고 재단하는 언론과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노동조합의 항복문서였다는 표현에서 다른 장기투쟁사업장에 미칠 파급 효과를 들이대며 비판하거나 안타까워했다. 그 마음은 이해하면서도 화가 났다.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를 싸웠는지 백일을 싸웠는지 천일을 싸웠는지 숫자로 계산하는 일만큼 서러울 때가 없다. 이 숱한 날들이 어찌 노동자가 싸운 날짜이겠는가. 사업주가 싸우게 한 날짜이자 버틴 날짜이지. 노동자에게 그것도 비정규 노동자에게는 단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가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도 질기게, 끈질기게 싸워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임금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알면서도, 노동자에게 이 시간은 죽기보다 어려운 시간이기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은 뉴코아 합의서

 

뉴코아 노동자의 사백일이 넘는 항거를 돌아본다. 그 항거의 순간순간을 뉴코아 노동자의 마음이 되어 바라본다. 이 시간을 ‘뜨거운 가슴’으로 본 뒤에 이번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합의서를 ‘차가운 이성’으로 보았으면 한다. 그 합의서에 인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의 핏발 선 눈을 보았으면 한다.

 

뉴코아 노동자의 투쟁은 많은 희망을 주었다.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시작된 뉴코아 노동자의 파업은 보이지 않는 숱한 곳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일터를 지켜주었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지난해 6월, 파업을 선택했을 때 달려갔듯이 이번 합의서의 선택에도 사랑으로 찾아가 뉴코아 노동자를 만났으면 한다. 그 다음에 비판도 하고 평가도 하고 비난도 하였으면 한다. (다만 뉴코아 노동자에게 시간을 준 뒤 만나고 이야기 하자.) 어차피 노동자는 목숨을 건 끝없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니까. 앞으로도 지난 1년보다 더 어려운 선택을 뉴코아 노동자는 끊임없이 해야 하니까.

 

이제는 당분간 뉴코아 노조에서 보내 올 문자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제 문자를 받을 게 아니라 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당신의 집과 적금통장이 손해배상에 가압류를 당해야 하던 순간, 가정이 파괴되려던 순간, 생계에 허덕여야 했던 순간, ‘지 못 미’ 였다고.

 

어렵게 뉴코아 조합원과 인터뷰를 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이미 8월 초에 지부 조합원들과 현장에 복귀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며 말을 아꼈다. 18명의 해고자 문제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평생 응어리로 안고 살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물론 외주화 부분도 아쉽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 어찌되더라도 마지막까지 간부들이 비정규 노동자의 고민을 놓지 않은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뉴코아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얻은 것 하나 없다. 하지만 뉴코아 노동자의 434일의 투쟁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싸움으로 남을 것이다.

 

싸움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타협도 있고 굴복도 있다. 노동자의 싸움은 그 결과를 떠나 그 과정이 너무도 귀중하다. 그 귀중함을 스스로 지울 필요가 없다. 박양수 위원장과 함께 술 한 잔 할 날을 기다린다.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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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자가 꼭 봐야할 영화 목록

노동자가 꼭 봐야할 영화 목록

 

 

노동자뉴스제작단

 

 

- 작품 소개 -

 

명멸하는 불빛 (1996, 50분)

<랜드 앤 프리덤>을 감독한 바 있는 영국의 좌파 감독 켄로치의 작품으로, 항만업에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1995년 회사로부터 부당 해고된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올해 1월에 마침내 종료된 이들의 투쟁은 임시직 고용에 대한 반대투쟁, 새로운 차원의 국제 연대의 조직화, 노동자 부인 조직의 활동 등과 관련해서 풍부한 문제의식을 제시해줍니다.

 

로저와 나 (1989, 1시간 30분)

1988년 제네럴 모터스 회사의 회장이 저임금 노동력 확보를 위한 멕시코 공장이전 계획에 따라 미국 플린트 시에 있는 11개 공장을 폐쇄하면서 노동자 3만명은 대책없는 실업상태에 빠지고 플린트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GM의 사장을 플린트시로 데려오고야 말겠다는 마이클 무어의 집요한 노력을 따라 진행되는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리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항구를 뒤흔든 노동자들 (1997, 30분)

탄압에 처해있는 노동자들에게 통찰력과 가능성을 선사해주는 영국 작가 앤 매리 스위니의 작품으로 영국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해고된 항만노동자들의 아내들로 구성된 ‘항만노동자 지지 여성모임’의 각오와 투쟁을 소개하고, 국제연대활동과 연대투쟁에 동참한 환경운동 활동가들이 추진한 길거리 캠페인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철 노동자의 인권 (1994, 17분)

사회변혁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비디오를 제작, 배포하는 활동에 주력하는 일본의 대표적 단체인 비디오 프레스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일본 국철회사의 민영화로 인한 노동조건의 악화, 대량 해고에 맞서 싸웠던 고쿠로 투쟁을 보여줌으로서 민영화의 폐해, 그리고 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을 차분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로사 (1995, 31분)

일본의 오가와마치 영화클럽에서 제작한 비디오 작품인 과로사는, 연 3000 시간 이상의 노동으로 매년 1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과로사로 죽고 있는 일본의 현실을 주시하면서, 과로사의 원인과 구조 그리고 일본적 경영체제의 문제점, 기업과 정부의 과로사 희생자와 가족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우스콘신 (1994, 7분)

미국의 노동만화가 마이크 코노파키의 작품으로 노동영화제 당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입니다. 마우스콘신이라는 쥐의 마을에서 언제나 고양이가 쥐의 대표로 선출되어 그들에게 불리한 정책들만을 행한다는 것을 꺠달은 쥐들이 이제 자신들 스스로가 대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를 통해서,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가 왜 필요한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코믹 애니메이션입니다.

 

아웃 앳 워크 (1996, 55분)

미국의 노동자 TV 로그램의 제작자이자 대학 교수이기도 한 테미 골드와 캘리 앤더슨이 만든 이 작품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해고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세명의 동성애 노동자의 삶을 5년동안 추적한 연대기 형식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이성애자들이 보여주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 노동자들과 동성애자들의 연대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원숭이가 아니다 (1997, 5분)

토착민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 아리안족을 하누만(힌두전설에 나오는 원숭이신)으로 나타내는 라마야나(인도 2대 서사시중 하나)를 하층계급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형상화한 노래로, 인도의 야만적인 카스트제도가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지고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방직공장 노동자들 (1997, 16분)

봄베이 시내 방직공장 폐쇄에 맞서 노동자들이 방직공장을 점거한 사건을 담은 작품으로, 오랜동안 녿동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온 인도의 아난드 파트와드한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메트로 투쟁의 날 (1997, 28분)

캐나다에서 노동자 TV인 Working TV를 운영하는 줄리어스 피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항해서 벌어진 캐나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의 시위를 담고 있습니다. 신속한 속보성을 중심에 놓으면서 투쟁의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조망하는 이 작품을 통해서 노동운동이 TV채널을 소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히 운영할 수 있음이 입증됩니다.

 

아일랜드 문제의 근원 (1983, 1시간 40분)

영국노동운동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던 크리스 리브즈의 작품으로, 최근 수십년 동안 지속되어온 아일랜드 내전의 근원을 풍부한 인터뷰와 역사적 사료들을 통해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내전을 역사적으로 거슬러올라가면서 우리는 종교적인 광신이라는 허위의식의 이면에,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차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패스트푸드 우먼 (1992, 28분)

미국 아팰라치아 지역을 기반으로 탄광 노동자, 농업 노동자 등 다양한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조명하는 어팰숍이라는 독립 제작 단체의 작품입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내밀하게 관찰하면서 패스트푸드점에서의 단순 임시직 노동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고용 불안정, 사회보장혜택의 결여 등에 대한 시선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어업 논쟁 (1997, 23분)

남아프리카의 식품 산업 노동조합 연맹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의 어업에 제안되어진 변화와, 이러한 변화들이 산업 전체에 그리고 비공식적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라는 주제를 둘러싼 논쟁을 특화시켜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라는 독특한 노조 체계를 지닌 남아공 노조의 교육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나를 위한 모두 (1997, 20분)

노동자를 위한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국 네트워크인 UPPNET과, 노동아 비디오 단체인 레이버 비트가 함께 만든 작품입니다. 1997년 1월 20일 동경에서 샌프란시스코, 스톡홀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항만노동자들이 영국 리버풀 항만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시위와 작업중단 투쟁을 수행하는 장면들을 모아서 보여줍니다.

 

- 이들 작품외에, 노동영화제에서 전세계 참가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바 있는 노동자 뉴스 제작단의 두 편의 작품도 함께 배급합니다.

* 총파업 투쟁 속보 (1997, 50분) - 1997년 베를린 영화제 초청작

* 해고자 (1997, 1시간 45분) - 1997년 야마가따 영화제, 1998년 프라이부르그 영화제 초청작

* 파업전야(1990, 1시간 50분) - 장산곳매 제작. 드라마

 

 

- 노동자를 위한 비디오 자료 목록 -

 

 비디오의 홍수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시대에 좋은 비디오를 찾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비디오를 소개하는 책자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흥행위주로 소개 되고 있는 이런 소개책자속에서 좋은 비디오를 발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노동자 뉴스 제작단은 노동조합에서 비디오 활용응 위하여 좋은 비디오 목록울 선정하였다. 많은 비디오를 수록하지는 못했지만 수록된 비디오만이라도 함께 감상하여 영화에 대한 올바른 토론문화를 활성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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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큐 멘 타 리 <다큐멘타리>

 

1. 원진레이온투쟁기 (1993, 푸른영상)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에게 발생한 심각한 산업재해 문제와 투쟁

 

2. 풀은 풀끼리 늙어도 푸르다 (1996, 푸른영상, 58분)

비전향 출소 장기수들의 끝나지 않은 여정

 

3. 상계동 올림픽 (1989. 푸른영상)

상계동 철거민들의 투쟁을 다룬 작품.

 

4.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 (1995, 푸른영상)

양심수와 장기수 어머니들의 삶과 투쟁의 이야기.

 

5. 미디어 숲속의 사람들 (1995, 푸른영상)

TV의 홍수속에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드라마와 다큐로 만든 작품.

 

6.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1995, 푸른영상)

도시 부랑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작품.

 

7. 결혼전 이야기 (1993, 푸른영상)

결혼 40일 전부터 결혼까지 여성의 심리적 변화를 그린 작품.

 

8.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1993, 푸른영상)

아시아지역 매매춘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

 

9. 약속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1995, 푸른영상)

강경대 열사의 죽음과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가족들의 삶을 다룬 작품.

 

10. 봉천동 이야기 (1997, 푸른영상)

봉천9동 철거반대싸움을 1년동안 하고있는 대책위의 활동과 주민들의 삶을 다룬 작품.

 

11. 명성 그 6일의 기록 (1997, 푸른영상)

1987년 6월, 명동성당에서 4박 5일의 농성 전개 과정을 통해 6월항쟁의 의미를 재조명한 작품.

 

12. 53일간의 기록 (1993, 서울영상집단)

1993년, 울산, 현대정공노동조합, 직권조인에 맞선 조합원들의 53일간의 투쟁의 기록

 

13.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 (1995, 서울영상집단)

폐교 위기에 처해있는 두밀리 분교를 둘러싼 주민과 교육부의 갈등을 통해 아이들의 교육환경 문제를 그린 작품.

 

14. 낮은 목소리 (1995, 보임)

일제하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현재의 생활을 통해 우리사회에서 소외된 정신대 문제를 재기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을 그려낸 작품.

 

15. 로저와 나 (마이클 무어)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 GM사는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플린트시의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고 공장을 싼 임금의 맥시코로 이전한다. 이로인해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탄에 빠지고 플린트시는 점차 황폐화 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반면 이러한 상황을 지역 부유층들은 얼마나 왜곡되게 바라보가 있는가를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

 

16. 아메리칸 드림 (바바라 코플)

미국 식품노조의 한 사업장에서 인금삭감 반대하여 시작된 기나긴 파업투쟁 과정과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갈등과 산별노조와 지역노조의 갈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

 

극 영 화 <극영화>

 

1.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투쟁

 

1) 전함포템킨 (1925,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67분, 명화클럽)

러시아 혁명을 전후하여 전함 포템킨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항거와 오뎃사 민중들의 짜르체제에 대한 투쟁을 다룬 영화.

 

2) 1900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40분, 우일영상)

1900년대 초 이탈리아 북부의 한 농촌지역을 배경으로 지주계급과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농민의 투쟁을 지주와 소작농의 아들의 서로 다른 인생의 궤적을 통해 그린 대서사극

 

3) 메이트원 (존 세일즈, 135분)

1920년대 광산 노동자들의 조합결성과정과 투쟁을 그린 영화. 참담한 노동조건과 노조파괴자, 구사대, 조합의 내부배신자속에서도 인종과 국적을 넘어서 단결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4) 워터 프론트 (1954, 엘리아 카잔, 108분, 대우)

한 항만 노동자가 폭력적이고 반노동자적인 부두노동조합을 폭로한다

 

5) 파업전야 (1990, 장산곶매, 110)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때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어느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치열한 투쟁 끝에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촬영은 실제 파업중인 한독금속 공장내에서 했으며 한독금속 노동자들과 함께 제작했다.

 

6) 뉴스보이 (1992, 케니 오르데카, 신한)

1930년대 대공황의 미국, 신문팔이 소년들이 언론재벌에 조직을 만들고 투쟁하는 모습을 뮤지컬로 형상화한다.

 

7) 호파 (1992, 대니 드 비 토, FOX)

남미계 이민 노동자에서 전체노동자의 지도자로 성장한 카리스마적인 인물 지미 호파의 삶

 

8) 하얀 외침 검은 태양 (1990, 에릭 바르비에, 140분, 영성)

2차대전 전야의 유럽, 한 탄공촌 도시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노동자들과 폴란드인 노동자들의 집단적 적대감. 그것을 조장했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 계급 전체로부터의 봉사와 착취를 이끌어내는 자본가계급의 본질을 드러낸다.

 

9) 노마레이 (1979, 마틴 리트, 114분, 대우)

노마레이라는 평범한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가 노동현실을 직시하면서 노조위원장으로 선정 투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블의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위해 투쟁해 가는 노마레이의 삶이 인상적이다.

 

10) 실크우드 (1983, 마이크 니콜스, 131분, 대우)

핵공장에서 일하다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진 카렌 실크우드의 실화를 영상화한 작품. 핵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면서 평범한 노동자가 핵 누출로 위헙받고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회사측의 허술한 관리를 비난하면서 적극적으로 싸워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1) 투쟁의 날들 (1978년, 노만 주이슨, 145분, SKC)

미국 트럭기사노조연맹을 이끌어 가는 2명의 주인공을 통해 당시 미국적 환경에서의 노조운동 문제점을 그린 영화.

 

12) 랜드 앤 프리덤 (1995, 켄 로치, 110분)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당시 파시즘정권에 대항했던 국제사회주의자들의 투쟁과정을 진실되게 그려낸 명작.

 

13) 살바도르 (1986, 올리버 스톤, 123분, 스타맥스)

1980년대 엘살바도르 내전을 배경으로 우익정권의 만행과 미 CIA 개입을 미국인 종군기자의 눈으로 고발. 제3세계 정치적인 문제를 서구 감독들이 영화화 하고는 하지만 민중들의 투쟁의 관점보다는 양심적인 지식인 수준의 한계를 갖고 있다.

 

14) 비정성시 (후 샤오시엔, 금성)

1945년 이후 49년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옮기는 4년간의 격동기에 역사적 질곡으로 인해 비극을 맞게되는 한 가족의 삶을 담담하게 그림. 잘못된 역사를 질타하고 역사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힘’을 나타내는 작품.

 

15) 전태일 ( 1995, 박광수, 100분)

1970년 근로기준법과 8시간 노동쟁취를 외치며 노동현장에서 분신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

 

16) 붉은 시편 (1971, 미끌로쉬 얀초, 88분)

현재의 억압속에 1989년이 오면 헝가리 농민들이 더이상 노예상태로 살수 없어 일어난다는 상징적인 내용.

 

17) 단스 (1985년, 벨기에, 성베네딕트)

벨기에의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그린 작품으로, 파업투쟁을 함께하다 처형을 당한 단스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2. 자본주의 사회의 풍자와 본질

 

1) 모던 타임즈 (1936, 찰리 채플린, 110분, 우진)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으로 전락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묘사

 

2) 베를린 천사의 시 (1987, 빔 벤더스, 미디아트)

천사의 눈으로 지상의 세계, 그 밑바닥을 시적 정서로 바라본 작품

 

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 (1984, 세르지오 레오네, 223분, 리빙홈)

돈을 최대의 목표로 여기는 마피아의 생리를 뒷 골목에서 도둑질하던 소년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4)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1989, 울리 에델, 스타멕스)

브룩클린이라는 한 거리의 창녀 트랄라를 통해 구원받지 못하고 썩어가는 미국의 단면을 보여준다

 

5) 블레이드 런너 (1982, 리들리 스코트, 114분, SKC)

21세기를 무대로 인조 인간들과 그들의 반란에 맞서는 인간의 모호한 싸움을 그린다

 

6) 자하정 (1986, 관금붕, D&C)

시간이 멈춰버린 홍콩에서 생각하는 낙태당한 희망

 

7) 보이즈 엔 후드 (1991, 존 싱글턴, 콜럼비아)

총, 마약, 살인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젊은이들의 초상화

 

8) 십계 (1988, 키에슬로프스키, 분도시청각)

성서의 십계명의 뜻을 현대인의 일상 생활을 통해 묻는 옴니버스 영화

 

9) 차이나타운 (1974, 로만 폴란스키, CIC)

한 사립탐정이 부유층 여성의 남편을 조사하다 엄청난 음모를 알게된다

 

10) 헐리우드 출세기 ( 1989, 크리스토퍼 게스트. 97분, RCA 콜럼비아)

꿈 많고 야심만만하며, 순수로 가득찼던 한 감독지망생이 또 하나의 자본주의 시스템인 헐리우드의 생이레 상처받고 적응하며 세상에 순응하는 “개싸움”에 관한 영황.

 

11) 그들도 우리처럼 (1990, 박광수, 영성)

탄광촌에 숨어든 운동권 수배자와 다방레지, 탄광사장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삶을 그림.

 

12) 꼬방동네 사람들 (1982, 배창호, 라이프)

달동네 사람들을 다룬 사회성 짙은 드라마

 

13) 하수인 (1973, 알란 브릿지스, 103분, 대우)

한 남자와 한여자가 있다. 여자는 상류층 미망인이고 남자는 전형적은 프롤레타리안 택시 운전수이다. 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있는 일은? 하수인을 채우는 것은 소통의 가능성없는 고정된 계급들의 순환이며, 남자와 여자,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를 통하여 개안들의 관계를 선행하는 계급을 들여다 본 작품.

 

14) 파고 (1996, 코엔형제, 120)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실재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든 작품. 아내를 납치해 장인을 통해 돈을 만지려 했던 한 소시민의 행동은 결국 우연치 않게 수많은 사람의 살인을 불러온다. 작가의 냉철한 시선으로 미국사회의 한 단면을 섬뜩하게 보게된다.

 

3. 혁명, 전쟁, 파시즘

 

1) 위대한 독재자 (1940, 찰리 체플린, 130분, 우진)

체플린이 유태인 이발사와 독재자 힌켈의 1인 2역을 하며 히틀러의 야망을 비난한다

 

2) 무방비도시 (1945, 로베르토 로셀리니, 93분, 시네마떼크)

제2차 대전중의 유럽. 제3제국의 기세는 꺽이지 않고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이 활발한 이 시기에 공산주의자와 카톨릭 신부도 하나의 적에 맞서기 위해 연대한다.

 

3) 지옥의 묵시록 (1979, 프란시스 코폴라, CIC)

월남전에서의 인간의 광기를 극적으로 묘사하여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

 

4) 레즈 (1981, 워렌 비티, CIC)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현장을 취재한 [세계를 뒤흔든 10일]의 저자 존 리드의 일생을 그린 영화

 

5) 컴앤씨 (1983, 엘렘 클리포드, 105분, 우진)

2차대전말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소련인민 학살을 다룬 영화. 표현주의적인 영화기법에도 불구하고 투쟁적인 전사로 변해가는 한 소년을, 역사속에서의 한 개인의 변화와 훌륭히 결합시키고 있으며 제국주의적 파시즘의 비인간적인 본질과 만행을 비판하는 감독을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6) 한나의 전쟁(세경)

2차대전 당시 한나 쉐네시라는 실제인물의 지하활동을 그린 이야기로 파시즘의 비인간적인 고문과 학대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강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7) 유로파 (1991, 라스 폴 트리에, 골든베어)

전쟁의 후유증과 이념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그림. 형식적 실험이 돋보인다.

 

8) 등대선 (1985,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86분, CBS폭스 비디오)

60년대 이후 서방세계로 망영한 아버지와 아들의 얘기를 통해 전쟁과 아나키즘, 80년대 동구 사회주의의의 표류를 심리적으로 다룬 영화.

 

4.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 (정치, 언론, 역사, 교육, 인권)

 

1) 허공에의 질주 (1988, 시드니 루멧, 120분)

60년대 학생운동을 했고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FBI의 추격을 받는 부모와 15년간 도피생활을 해온 아들이 부모의 전력 때문에 음악에의 열정을 속으로 삭혀야 하는 심정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

 

2)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뜻하지 않게 상원의원이 된 순진한 촌뜨기 스미스가 정가의 비리를 알게되고 혼자 힘으로 워싱턴의 타락한 민주주의에 도전한다

 

3) 장비빛 인생 (1994, 김홍준, 드림박스)

80년대 뒷골목 만화방에서 만화방여주인, 깡패, 노동운동가, 쫓기는 청년등 그들이 처한 삶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

 

4) 이지 라이더 (1969, 데니스 호퍼, 우일)

두 히피 청년이 오토바이로 여행하며 겪는 사건을 그린 로드무비

 

5) JFK (1992, 올리버 스톤, SKC)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끈질기게 파해친 한 검사의 시선

 

6) 벽 (1980, 알란 파커, 우일)

학교는 표준화된 인간을 상품처럼 찍어내는 공장에 불과하기에 현대 교육체계는 해체되어야 한다

 

7) 나는 살고 싶다 (1958, 로버트 와이즈, 우일)

그레이햄 사건이 사회적 편견. 법의 부조리에 의한 희생을 그림.

 

8) 자전거 도둑 (1948, 빅토리오 데 시카, 명화클럽)

전후 이탈리아, 어려운 시절 생계를 위해 겨우 마련한 자전거를 도둑맞은 아버지와 아들의 자전거 찾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9) 말콤 X (스파이크 리, 240)

인종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미국 사회파 감독인 스파이크 리가 만든 말콤엑스의 생애를 다룬 작품, 비타협주의자라 불리우는 말콤엑스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변화과정과 당시의 사회상황을 읽어낼 수 있다.

 

10) 프론트 (1976, 마틴 리트, 95분, 대우)

1947년 미 의회는 메카시 상원의원의 지도하에 이른바 빨갱이 축출작업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그때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매카시즘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다룬 영화.

 

11) 코드네임 콘돌 (1975, 시드니 폴락, 118분, 대우)

CIA를 소재로 한 추리물로 의문에 쌓이 살인사건을 통해 정보기관의 냉혹함과 암투를 그린 서스펜스물. CIA를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10년간 상영금지 됐었다.

 

12) 당통 (1982, 안제이 바이다, 136분, 삼부)

로베스삐에르와 당통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갈등, 마침내 공화파가 다시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기 직전의 상황을 연극적인 묘사로 다룬 영화, 18세기 현장에 카메라를 갖다 댄 듯한 현장감이 넘치는 다큐 드라마로 차가운 색채 중심은 당통의 성격과 전체 분위기를 형성한다.

 

13) 네트워크 (1976, 시드니 루멧, 121분, SKC)

치열한 취재경쟁 속에 점차 거대한 방송 메카니즘의 부품으로 전락해 가는 방송 종사자들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벌이는 살인, 자살을 그린 작품. 시청률을 위해 끔찍한 인간성 말상의 현장이 TV방송국을 무대로 형상화된다.

 

14) Z (1968, 코스타 가브라스, 127분, SKC)

그리이스 좌파의원 람브라키스의 정치적 암살을 주제로 한 거칠고 숨가뿐, 리듬감 넘치는 다큐형식의 드라마. 한때 정치영화의 최고로 떠받들어 졌던 영화로 1967년 군부대의 공격으로 그리스내 민주세력이 전멸당한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

 

15) 계엄령 (1973, 코스타 가브라스, 우일)

1970년 남미 우루과이에 파견된 미국인 납치사건을 영화화. 미국과 결탁한 군부 독재통치하의 억압과 그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의 투쟁을 기록영화처럼 다룸. 제3세계 정치현실을 읽을 수 있다.

 

16)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스타맥스)

칠레의 정치적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옮긴 영화. 이사벨 아앤데의 원작이 바탕, 남미 근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17) 플레이어 (로버트 알트만)

헐리웃 제작시스템, 그속에서 활동하는 영화인들의 작태에 관한 신랄한 야유를 담고 있는 작품. 꿈과 영광, 화려한 스타의 명예가 숨쉬는 동산처럼 보이는 헐리웃은 사실상 협작과 매수와 살인과 흥행을 위해 진실을 값싸게 흥정하는 자본의 논리가 숨어 있는 곳임을 이영화를 통해 환기시키고 있다.

 

18) 페이퍼 (1993, 론 하워드, CIC)

한 신문사를 배경으로 취재 경쟁과 야망을 위해 보도의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의 현실에 맞서는 한 신문기자의 얘기.

 

19) 프라하의 봄 (1987, 필립 카프만, 우진)

체코의 자유화 물결이 소련에 의해 무너진 1968년을 배경으로 그려진 젊은이들의 비극을 다룸.

 

20) 파워 (1986, 시드니 루멧, 우일)

전세계 선거전을 조정하는 정치광고 일인자의 사생활과 야망을 통해 정치세계의 비리를 영화화.

 

21) 케이지맨 (1992, 장 지량, 영성)

빈민가에 쓰러져가는 닭장같은 공간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다룸.

 

22) 저스티스 (1979, 노만 주이스, 대우)

이상에 불타는 젊은 변호사가 법조계의 비리에 분노하여 투쟁하는 법정드라마.

 

23) 어퓨굿맨 (1992, 로브 라이너, 우일)

쿠바 주둔 미해병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군 조직내에 팽배해 있는 권위적인 위계질서와 그로인해 벌어지는 사건은폐를 파헤치는 젊은 법무관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싸움.

 

24) 아빠는 출장중 (1985, 에밀 쿠스트리챠, 세종)

경찰에 연행된 아버지가 출장갔다고 믿고있는 어린이아이의 눈을 통해 유고의 정치 상황과 관료주의를 비판.

 

5. 인종차별, 여성

 

1) 똑바로 살아라 (1989, 스파이크 리, 콜럼비아)

이테리게 피자집을 중심으로 한 흑인들의 삶을 흑인 특유의 감각으로 그린다

 

2) 미시시피 버닝 (알란파커, 콜럼비아)

흑인 운동가의 실종사건을 수사하러온 두 FBI 요원을 통해 미국내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보여주는 작품. 실제 있었던 일을 토대로 미국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지만, 작음 양심이 승리한다는 전형적인 작품.

 

3)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코트, SKC)

남편의 구타에 시달리는 주부와 독립심 강한 웨이트레스가 여행을 떠나 벌어지는 사건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가지 폭력 상황들을 묘사하고 그에 저항하는 두 여성의 해방의 몸짓을 그림.

 

4) 정글피버 (1993년, 스파이크 리, 100분)

미국내 소수민족인 이탈리안 백인여성과 성공한 흑인남성의 사랑을 통해 인종간의 편견과 갈등을 그렸다.

 

5)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1997, 스티븐 프리어스)

영국의 중소도시, 인종차별과 동성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가선 작품.

 

6) 보이즈 앤 후드 (1991, 존 싱글턴, 콜롬비아)

미국 LA의 흑인 사회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리면서, 우정, 사랑, 생존의 문제를 진지하고 깊이있게 묘사

 

7) 꿈꾸는 도시 (1991, 존 세일즈, 129분, 콜롬비아 트라이스타)

정치가와 기업가들의 결탁으로 일어난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인종차별에 분개한 흑인들이 시청으로 몰려가지만 폭동이 아닌,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그 치유책을 동시에 제시하는 영화.

 

8) 비밀과 거짓말 (1996, 마이클 리, 120분,)

96년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영국사회의 인종문제와 계급문제를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6. 교육 현실 비판

 

1) 닫힌 교문을 열며 (1992, 장산곳매)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한 국어교사와 교지를 만들면서 진실된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학생들, 학교당국의 비겁한 태도, 국어교사의 해직 등 우리의 교육 현실의 문제점과 전교조 교사들이 실현하려는 참교육의 중요성을 묘사한 작품

 

2)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황규덕, 정우)

대학입시를 앞둔 2학년 4반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전 학생이 겪는 고교시절을 진솔하게 다룬 영화.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

 

3)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강우석, 110분, 세웅)

한 여고생의 자살을 통해 물질이 지배하는 조직사회에서 끊임없는 상승욕구는 목적보다도 수단을 합리화하면서 자기자신을 정당화시키지만 점차도 허위의식에 묶이는 것을 고발한 작품.

 

4)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워어, 드림박스)

전통, 엄격한 규율, 권위를 자부하는 미국의 한 학교를 배경으로 획일화, 비인간적 교육제도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불합리를 진지한 접근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

 

5) 위험한 아이들 (1996)

빈민가에 발령받은 선생님이 폭력과 마약외에는 아무 희망도 없는 학생들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게 돕는다는 내용.

 

6) 언제나 마음은 태양 (1967, 제임스 클라벨, 대우)

영국 한 빈민가에 발령받은 흑인교사가 학생들과의 갈등속에서 교육의 참 의미를 깨닫고, 학생들이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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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학교 6년을 마치며

이우학교 6년을 마치며

 

“요즘 느끼는 건데 절 ‘이우’라는 곳에 보내(준 용기-두 줄로 지워진 부분임)주기 위해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결이가 지난 해 크리스마스 때 카드에 적어 보내 온 글입니다.

결이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왜 엄마 아빠가 ‘갈등’했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결이가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결이가 지금 이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판단과 느낌을.

물론 궁금합니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그래서 졸업하는 날에 결이에게 물어 볼 생각입니다. ‘이우 학교, 어땠냐?’고.

아마 결이가 졸업하면서 느끼고 판단한 만큼, 꼭 그만큼 이우에서의 6년은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우학교를 보낼 때, 무슨 대단한 ‘용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딜레마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6년 전에 결이를 이우학교에 보낼 즈음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 ‘짧은 머리’를 강요했던 지난 세대의 억압에 맞서 소위 ‘민주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싸운 수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 엄마 아빠의 세대는 자녀들에게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과 물질적인 조건을 열어 주었지만, 동시에 그 ‘자유로운 개성’이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의 틀 속에서 경쟁의 승자와 패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 또한 남겨주었다.

그래서 아빠인 나는 갈등한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우리 애들이 패배하지 않도록 공부할 것을 부추긴다. 두 아이가 ‘자유로운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것을 바라면서도, 현실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진다.

머리를 빡빡 깎고 싶다는 결이에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윽박지른 것은 ‘빡빡 머리’에 대한 나의 ‘감성적 반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공부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소박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이‘들’이 시험 성적에 의해 평가되거나 재단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경쟁 논리보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 존중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습니다.

무엇보다 결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개성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길 원했습니다.

‘대안’학교 자체에 대한 여러 논란이나 그 실험의 성공 가능성, 그리고 결이‘들’이 그 실험의 첫 대상일 수 있다는 점 등 초창기의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우는 의미있는 하나의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결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06년 5월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고1이 돼서야 간신히 마련한 핸드폰으로 문자메세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빠 나 머리 좀 튀게 자를께” / “어떻게?”

“음 닭머리, ㅋㅋㅋ”, “아빠는 어떻게 생각해?” / “너무 튀지 않겠니?”

“음 그걸 노린건데 ㅜㅜ 해도 괜찮지?” / “니가 감당할 수 있겠니? 알아서 결정해라”

“나 닭머리 결심했어”

 

영국 축구 선수인 베컴의 닭머리를 생각했는데, 웬걸 결이는 그날 저녘에 가운데 머리털만 남기고 나머지를 다 밀어버린 ‘스킨해드’를 해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다.

당황 --- 분노(?) ---

그래서 결이를 붙들고 협박(?)했습니다. “스킨해드는 안된다. 스킨해드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이건 개성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킨해드족과 한 집에 같이 살 수 없다. 니가 아무리 니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비춰질 수 밖에 없다 --- 운운.”

결국 결이를 끌고 이발소로 데려가 머리를 빡빡 밀게 했습니다.

간신히 한 고비를 넘겨 안심하던 중, 열흘 뒤에 다시 결이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습니다.

 

“아빠 나 축구공 스크래치해도 돼?” / “축구공 스크래치가 뭔데?”

“음 그냥 해보고 싶은건데 머리에 축구공 모양으로 파는거야” / (심각한 고민 끝에) “결아, 네 개성이 꼭 머리로만 나타나야 하는 거니? 다른 것으로 개성을 표현할 수 없니?”

“음 나도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볼께” / “그래”

 

드디어 설득시켜 냈다고 안심하던 중, 다시 열흘 뒤 --- 문자메세지로 최후 통첩!

 

“아빠 저 오늘 머리 자를께요. 돈은 그냥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용돈으로 할께요”

 

그날 축구공 스크래치한 결이의 머리를 보며,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억지로 잘했다고 할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냥 무시해서 지나쳤는데 ---

다음 날 결이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결의의 한마디 ‘결정타’ 때문에 하루종일 넋을 잃고(?)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는 내가 곰곰이 생각한 결론이 꼭 아빠의 생각대로 되야한다고 생각하나봐”

 

이렇게 결이는 한 ‘인간’으로 커갔습니다.

물론 6년간 머리를 길렀다 밀었다 변화무쌍했지만, 그 내면은 아빠에게 ‘결정타’를 날릴만큼 쑥쑥 자랐습니다.

엄마 아빠는 결이 ‘속’에서 이우를 언뜻 보았고 느꼈습니다.

 

***

 

“아빠, 내가 잘하고 싶은 것과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작년, 그러니까 결이가 고2 때 가을이었을 겁니다.

갑자기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해서 밤늦게 들어 온 내게 결이가 뜬금없이 한 얘기였습니다. 얘기인즉슨, 1여 년간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온갖 열정을 쏟아 붓다가, 진로를 바꾼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은 노래와 연기를 잘 하고 싶어서 였는데, 잘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고민한 결과 과학을 잘 할 수 있고, 그래서 문과에서 이과로 바꾼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뮤지컬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은근히 부담이 됐었습니다.

그래도 본인이 원한다면 그러라고 했었습니다.

1년간 온갖 노력을 하다가 결국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방향을 고쳐 잡았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결정 때문에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판단이 또 달라질 수 있지만, 자신이 스스로 내린 선택과 결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 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우에서 결이가 얻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빠, 요즘 많이 헷갈린다. 나는 시간을 가지고 집중해서 문제를 푸는 게 내게 맞는 것 같은데, 수능은 잘 안맞는 것 같아.”

 

며칠 전, 개학을 앞두고 결이를 다시 학교 앞 자취방으로 데려다 줄 때 자동차 안에서 결이가 토로한 고민이었습니다.

“앞으로 80여일 밖에 안남았으니까, 그 때까지만 참고 일단 수능 준비에 전념해 봐. 대학에 들어가면 네가 하는 공부 방식이 커다란 장점이 될 거다”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 친구가 촛불집회에 같이 가지고 했는데, 가고 싶었는데 --- 안갔어. 한 번 가면 촛불집회에 계속 빠져버릴 것 같아서.”

 

“그러냐. ---” 그 날 차 안에서 저는 결이에게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이를 자취방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6년간 결이는 저렇게 자랐는데, 우리는 여전히 ‘원점’에 있구나.

엄마 아빠의 딜레마와 불안도, 우리의 교육 현실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

그래도 졸업하는 날, 아니 수능이 끝나는 날, 수능 결과에 관계없이 결이에게 이렇게 물어 볼 생각입니다.

“이우 학교 6년간, 행복했냐?”

 

***

 

(꼭 드리고 싶은 얘기)

이우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님들 그간 고마웠습니다. 사실 지난 6년간 저의 가족이 학교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무임승차한 기분입니다. 그래도 선생님과 여러 학부모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6년간 무사히 학교를 마치게 됐네요. 그래서 ‘학교에 대해’ 편지를 쓰라고 했는데, ‘결이’ 얘기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여러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저희는 졸업하는 날 결의로부터 이런 답변을 들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6년간 행복했다”고.

 

2008.08.27.

3학년 박결 엄마 유영란, 아빠 박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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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항쟁, '상상력'에 '계급'을

‘상상력’에 ‘계급’을!

- ‘2008년 촛불항쟁’과 좌파의 정치 -

 

 

 

‘100일 간의 축제’ vs ‘100일 간의 악몽’

 

“이 체제에 위기의 경향이 ---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그에 앞서 대중의 의식과 헤게모니 블록이 변화되어 이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면, 이런 폭발은 의심할 바 없이 엄청난 역사상의 퇴보를 야기할 ‘우파의 대규모 역공’을 촉진시킬 지도 모른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가운데서)

 

촛불항쟁이 8월 15일을 기해 100회째 집회를 맞았다. 7월 중순 이후 이명박 정권의 전방위 탄압에도 촛불은 꺼지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타오르고 있다. 초기의 발랄하고 경쾌한 동력은 잠시 모습을 감췄지만, 그 끈질김은 계속되고 있다. 그 출발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듯이, 그 어느 누구도 촛불이 언제 꺼질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언제 꺼지나, 꺼지지 않나”가 더 이상 쟁점이 아닐 것이다. 이미 ‘2008년 촛불’은 100일간의 타오름만으로도 자신의 역사적 몫을 충분히 다했다. 촛불항쟁의 지속 여부를 둘러싸서 ‘광우병 대책위’ 내부에서는 불매운동으로 전환, 지역에서의 생활밀착형 촛불집회, 서울에서의 집중집회 지속 등의 논란이 있다. 어느 방향으로 결정이 이루어지든, 혹은 각각의 방향으로 결정이 나든, 그것은 그 자체로 촛불의 파문이자 잔영일 것이다. 새로운 촛불의 준비일 것이다.

 

‘100여 일간의 악몽’을 지워버리기 위해 이명박 정권과 수구보수언론은 총력적인 반격을 펼치고 있다. 2008년 5월에 켜진 촛불이 이명박 정권의 취임 100일간의 초기 국정주도권 장악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듯이, 100여 일간의 촛불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 내 모든 변혁의 가능성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몸부림이 ‘공포의 칼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어떠한 치장도 미사여구도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8월 12일, “촛불시위자들도 미국에서 쇠고기 먹던 사람들로, 수입되면 먹을 것”이란 이명박의 발언은 차라리 치기稚氣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0여 명이 넘는 촛불집회 연행자들에게 벌금 폭탄이 예고되고, 촛불을 진압하기 위해 이명박식 백골단인 1,700명 규모의 ‘경찰관 기동대’를 창설했다.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고, 휴대용 분사기로 시위 참가자를 철저하게 색출하겠다는 경찰의 태세는 광장과 거리의 촛불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검찰을 동원한 MBC ‘PD수첩’ 강압 조사, 촛불집회의 진원지인 ‘아고라’가 속한 포털 Daum에 대한 세무조사는 아래로부터의 소통과 토론의 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100여 일간의 악몽’을 하루빨리 벗어던지고, 아니 철저하게 짓이겨 지워버리고 아직 권력의 힘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시급하고 차질 없이 하는 것, 그래서 공약대로 경제를 살리고 그 성과에 바탕하여 20% 안팎으로 추락한 지지율을 회복하고 747의 날개를 활짝 펴는 것,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을 원상회복하는 것, 아마 이것이 이명박 정권의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의 당선을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의 확인”으로 해석한 이명박 정권은 8월 들어서 ‘법과 원칙’, ‘개혁의 차질 없는 진행’을 내세우며,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거침없이 해나가고 있다.

그 첫 번째 수순이 방송장악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감사원, 검찰,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등 주요 권력기관을 총동원하여 정연주 KBS 사장을 해임시켰다. 이어 8월 11일에는 공기업선진화추진위원회를 통해 41개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통·폐합, 기능조정을 주 내용으로 하는 ‘1차 공기업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등 기업 규제완화 관련한 법안을 입법 예고했으며, 방송통신위원회는 대기업의 방송 진출 문턱을 낮춘 방송법 시행령도 추진 중에 있다.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장악하고,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국공유기업을 국내외 자본에게 내다 팔며,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교육시장화 정책을 다시 전면화하려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이러한 전면적인 반격 앞에서 100여 일간 끈질기게 타올랐던 촛불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일지는 모른다. 혹 그래서 촛불이 소진되기 전에 이 촛불의 동력을 시급히 국회로 가져가 촛불이 제기한 문제를 국회 내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턱없는 유혹과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물론 ‘거리와 광장의 촛불이 꺼지느냐 꺼지지 않느냐’, 혹은 ‘이명박 정권의 진퇴 여부’가 당장은 승패의 1차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2008년 촛불항쟁’이 100여 일간 보여준 역동성과 새로움과 풍부함을 당장의 성패 여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2008년 촛불항쟁’은 지난 10여 년간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해, 대중적 반격의 첫 라운드일 지도 모른다. ‘조직적 방어’가 아닌 ‘대중적 공세’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2008년 촛불항쟁’은 향후 10년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헤게모니 블록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그 한계와 약점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면.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체들의 주도로, 또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2008년 촛불’은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만큼 그 어떤 정치사회세력도 그 어떤 계급도 이 촛불이 제기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2008년 촛불’로부터,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100여 일간의 촛불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가 이후 촛불을 어떻게 진전시킬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때로는 당혹스럽게, 때로는 놀라움으로 촛불과 조우했던 좌파는 ‘2008년 촛불항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물론 2008년 촛불의 전모를 지금 온전히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금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2008년 촛불항쟁’으로부터 좌파적 ‘상상력’을 끄집어 내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좌파적 ‘상상력’을 ‘계급’이라는 주체와 결합시켜 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시대에, 좌파의 근본적인 자기 성찰과 좌표 설정의 계기이자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좌파는 진정 또 하나의 촛불로, ‘제2, 제3의 촛불’로 21c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이 열렸다

 

“이러한 자발성은 해체되고 흩어져서 탈주하는 자발성이 아니라 모여서 방향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발성이었다. 현장에서 바로 바로 토론을 통해 입장을 정리해 나가는 모습에서 대중은 직접행동을 통해 대리주의를 거부하였고, 현장에서 움직이는 대중의 ‘집합적 이성’이 오히려 이제까지의 어떠한 이론가, 운동단체, 정당 보다 우위에서 움직였다.”

(남구현, ‘촛불의 정치-몇 가지 쟁점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

 

‘광장’이 열렸다.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의 결과로 형성된, 숨 막힐 것 같던 보수 일방의 제도 정치구조의 틀을 무력화시키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5월 초 청계광장에서 여중고생들이 켠 촛불의 당당함과 발랄함이 20대, 30대, 4~50대의 부끄러움을 일깨워 100만 촛불항쟁으로 발전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에서 불붙은 촛불이 이명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과 항의로 이어지면서 출범 100일도 채 안된 정권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줄은.

그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거침없이 오가며 타오르던 촛불이 의제를 독점하며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해 온 조중동 언론 권력의 실체를 불과 한 달여 만에 폭로하여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릴 줄은.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촛불이 불러일으킨 촛불들이 경찰의 통제와 탄압을 오히려 비틀고 조롱하면서 무력화시키고, 수구보수세력만이 아닌 제도 정치권 전체를 패닉상태로 몰아넣었으며, 나아가 소위 ‘운동권’마저 하나의 촛불로만 머무르게 할 줄은.

 

5월, 촛불이 연 ‘광장’은 “바리케이트 없는 해방구”였다. 거기에서는 이명박 정권도, 제도 정치권도, 조중동의 언론권력도, 심지어 이른바 운동권도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하나의 촛불이 또 다른 촛불을 일깨웠고, 인터넷과 광장을 순식간에 오가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소통’과 ‘토론’과 ‘직접행동’의 광장이 형성됐다. 인터넷과 거리의 광장에서 이명박 정권과 경찰은 조롱거리가 됐고, 제도권 정당은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었으며, 디지털 생중계와 아고라에서의 토론은 보수언론을 무력화시켰다.

‘광장’은 그 자체가 ‘직접민주주의’의 산실이자 배움터였다.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거리에서 촛불들은 ‘직접 참여’해서 정보의 소통과 토론을 통해 ‘직접 결의’했고, 또 ‘직접 행동’했다. 촛불들은 정부의 폭력에 대한 공포없이 자유롭게 발언했으며, 다양함 속에서도 때론 발랄하고 명랑하고 유연하게, 때론 간명하고 단호하고 끈질지게 발언했고 행동했다. 광장에서는 어떤 권위도 인정되지 않았고, 또 누구의 참여도 가로막지 않았다.

 

통일된 중앙지도부도 수직적인 위계체계도 없었지만, 촛불들은 스스로 시민기자단이 되었고, 의료지원단이 되었으며, 자원봉사자가 됐다. 모두가 전위였고, 모두가 배후였으며, 세대와 깃발을 뛰어넘어 오직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연대만이 촛불과 촛불을 이어주었다. 87년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민주주의의 동력은 의회민주주의 혹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에 갇히거나 소진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보존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광장에서의 직접민주주의라는 방식으로 역동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2008년 촛불의 ‘광장’은 저항과 축제가 어우러진, 정치와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정치의 장이었다. 저항과 축제가 서로를 배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항으로 형성된 공간이 곧 축제의 장소가 됐으며, 축제는 곧바로 저항의 자양분이 됐다. 정치는 문화에 의해 풍부해졌고, 놀이와 문화는 정치로 고양됐다. 비장함과 즐거움이 서로 섞였고, 분노와 해학⋅풍자가 서로 어우러지며 뒤엉켰다. 그래서 “예전에는 시위대와 구경하는 시민들 사이의 경계가 뚜렷했지만, 촛불집회에서는 서로 섞여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촛불 ‘광장’이 새롭게 열어젖힌 것은 공간과 주체와 그 방식만이 아니었다. 요구와 의제 역시 확장됐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협상이 계기가 됐지만, 그래서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와 ‘재협상’ 요구가 가장 주된 의제이자 동력이기는 했지만, 촛불은 자신의 요구를 ‘쇠고기’에만 가두지 않았다. 10대들에 의해 ‘미친 교육’이,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의해 ‘전기⋅가스⋅의료⋅물의 사유화 저지’가, 그리고 ‘건강보험 민영화 반대’⋅‘한반도 대운하 반대’와 ‘공영방송 사수’로 요구와 의제가 확장됐다.

그리고 이 모든 요구와 의제의 확장은 ‘이명박 OUT’으로 모아졌다. 집권 초기에 그 어떤 제도적 정치적 견제도 없이 거침없이 강행될 것 같았던 이명박 정권의 ‘프랜들리 비즈니스’ 정책은 불과 집권 100여일 만에 강력한 대중적 저항에 부딪히게 됐다. 그 결과 이후 어떠한 사안에 대한 대중적 저항도 ‘이명박 OUT’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와 의제의 확대에 두려움을 느낀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수구보수언론들은 6월 10일 이후에 “‘촛불집회’의 성격이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인 쇠고기 재협상 요구에서 이명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 즉 정치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국면을 전환시키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예고했고, 또 그렇게 했다. 그들이 의제의 확장을 두려워했던 것은 “고통받는 대중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화되는 것”이고, 몽매한 무지렁이 대중들이 의제의 확장 속에서 “특정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고 실천하게 만들기 때문”(이광일, ‘촛불정치와 민주주의, 공화국의 미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인 것이다. 의제의 확장에 대한 ‘탄압’은 곧 민주주의의 확대⋅심화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의 표현인 것이다.

 

2008년 8월, 우리는 촛불항쟁이 열어젖힌 새로운 ‘열린 광장’을 가지게 됐다. 그것도 세계사적인 유례가 없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직접민주주의의 광장을. 저항과 축제가 서로 어우러지고, 주체들의 직접 참여와 소통과 행동에 의해서 무한히 의제가 확장되는 광장을. 그리고 그 어떤 직접행동도 이제 이명박 정권과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직접 겨냥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광장을 가지게 됐다.

이 광장은 10대 촛불소녀가 발랄하게 열어젖힌 공간이지만, 어느 주체에게도 닫혀 있지 않다. 누구도 이 광장에 참여하고 소통하면서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광장에서 촛불들이 비록 ‘분노의 밧줄’로 이명박 정권을 간신히 지탱하던 ‘와이어’를 끊어 ‘명박산성’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해학과 풍자’로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고 비틀어서 정치적으로 고립시켰고 수구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폭로하고 무력화시켰다.

 

당장 촛불의 ‘광장’이 제도화된 의회주의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광장은 21c 한국사회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긴밀하고 신속한 연결을 통해, 저항과 축제의 융합을 통해, ‘제도의 정치’, ‘공간의 정치’를 뛰어넘는 ‘기동전의 정치’, ‘시간의 정치’의 가능성을, 그래서 의제를 선도하고 확장하면서 정치사회적 헤게모니를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시켰다.

그것은 단지 ‘고통의 호소’와 ‘비장함’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더욱 공세적이고 발랄하고 유연하고 다양하고 즐겁게 소통하고 직접 행동할 수 있을 때에야 열리는, 그런 광장이다. 비록 이명박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탄압으로 광장이 다시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지난 100여 일간의 광장의 경험과 기억까지 다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21c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아니 모두 거쳐 가야 할 ‘광장의 정치’의 시대가 열렸다. 여기가 로두스다. 바로 여기서 뛰어라!

 

 

‘밥상’위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정치의 확장과 새로운 정치 주체의 등장

 

“촛불의 외침은 우리 사회의 부자유나 음습함,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일거에 날려버린 유쾌한 반란이며 문화혁명입니다. 정치사회적 투쟁의 선도자는 성인 남성이라는 통념은 5월 2일 청계광장에 모인 촛불소녀들로 당혹스러울 만큼 깨졌습니다”

(박원석, ‘촛불은 혁명을 닮았습니다’, <<촛불은 민주주의다>> 가운데서)

 

먹거리의 정치화! 아마 이명박 정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의 복원의 대가로 ‘쇠고기’를 내주고 돌아온 이명박 정권이 “이제 우리 국민은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게 됐다”고 자랑스럽게 협상 결과를 발표하자마자,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와 ‘재협상’을 요구할 줄은.

그리고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시작된 촛불이 한반도 대운하 계획, 영어 몰입교육, 4⋅15교육자율화 조치, 의료⋅물⋅전기⋅가스의 사유화, 공기업과 은행의 사유화, 강부자⋅고소영 내각, 물가인상을 불러일으킨 고환율 정책 등 이명박 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로 확대될 줄을. 더욱이 그 가장 앞줄에, 그 가장 중심에 10대의 여학생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여성들이 설 줄은.

 

2008년, ‘쇠고기’라는 일상의 먹거리가 한국 정치의 최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먹거리가 정치화된 것이다. 쇠고기라는 일상의 먹거리가 정치화됐다는 것은 일상의 삶의 문제가 건강과 생명의 문제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일상의 삶의 문제, 먹거리의 문제가 위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곧바로 정치화하지는 않는다. ‘일상의 정치’, ‘생명의 정치’를 무매개적으로 혹은 초역사적으로 절대화시킬 필요는 없다. 2008년 이명박 정권 등장 직후, 쇠고기라는 먹거리 문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한 데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뒤에 보여주었던 모습과 정책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와 실망과 절망이다. 경제살리기에 대한 기대는 출범하기도 전에 꺾였다. 말로는 ‘경제 살리기’와 ‘서민 경제’, ‘머슴’ 등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독점 재벌과 부자들만을 위한 불도저 정권이라는 것이 취임 초기부터 투명하게 드러났다. ‘어륀지’ 영어 몰입교육은 물론, 강부자⋅고소영 내각, 한반도 대운하의 강행,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4⋅15교육자율화 조치, 전기⋅가스⋅물의 사유화, 규제 완화, 방송장악 시도 등, 최소한의 공공 안정망과 노동자 민중들 자신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급격한 시장화의 추진에 대중들은 절망했고 분노했다. 더욱이 국회의 2/3는 보수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대중들의 이해를 제도 정치권 내에서 대변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절망과 분노에 기름을 끼얹힌 것이 바로 4월 ‘쇠고기 협상 타결’이었다. 값싼 쇠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건강은 안위에도 없고, 검역주권마저 포기하면서 쇠고기를 내준 이명박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5년을 견뎌내야 하는데. 그래서 촛불을 들었고, 쇠고기라는 먹거리는 정치화됐다. 일상의 먹거리와 건강⋅생명의 문제는 현실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그것도 그 중심에. 정치는 쇠고기라는 일상의 문제로 확장됐고,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확장됐다.

그 일상의 문제, 건강⋅생명의 문제는 10%도 채 안되는 가진자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고 그래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자들의 일상의 문제이자 건강⋅생명의 문제였다. 영세 자영업자들과 농민들과 청년실업자들과 비정규 노동자들과 도시빈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촛불을 끈질기게 사수했고, 자유발언대에서 자신들의 삶의 현실을 남김없이 드러냈고, 이명박 정권과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2008년 촛불은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으로 호명된, 조직화되지 않고 자각되지 않은 계급투쟁의 맹아였다. 오히려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강남의 부유층들만이 자신들의 계급적 자각과 결집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먹거리의 정치화’라는 정치의 확장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10대 여학생들과 여성들의 전면적인 등장이라는 정치 주체의 확장과 맞물려 있다.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 주체의 확장’이다. 10대 여학생들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으로 가장 먼저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여성들 역시 먹거리 문제에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감이, 혹은 예민함이 모두를 곧바로 직접 행동에 나서게 하지는 않는다.

‘광우병 쇠고기, 너나 먹어’라는 당찬 말에서 드러나듯, 국가 권력의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권력의 폭력에 의한 공포의 경험이 없는, 그래서 자유롭고 발랄하고 당당한 10대였기에 가능했다. 여성들이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인 관계망을 형성해서 일상적으로 부담없이 소통하면서 자유롭고 다양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토론을 해왔기에 가능했다. 일상의 민주주의가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런 정치가 미국산 쇠고기와 함께 생활 속에 잘게 쪼개지면서 시민들 속에 들어왔다. 20이 80을 지배하거나 말거나, ‘정치에는 문외한이에요, 호호호’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아주머니들이 배운녀자의 살아있는 눈빛을 체득하면서 섹시한 여전사들로 변모했다. 성원의 변화는 시위의 본질과 양태를 변화를 필연적으로 가져왔다. 그러므로 2008년 촛불이 갖는 여성중심의 특징과 문화적 다양성의 특징은 불가분의 유기적 결합을 하고 있다.”(목수정, ‘촛불소녀와 배운녀자, 문화적 상상력을 운동에 풀어놓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

 

2008년 쇠고기라는 ‘먹거리의 정치화’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가 드디어 우리의 일상의 ‘밥상’ 위에 올라왔음을 뜻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의 실체가 일상과 삶의 정치적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2008년 촛불항쟁에서 그것은 국제통상에서 ‘검역 주권’의 문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수준에서 이해되고 있다. 좀 더 나아가 한미FTA 협상에 대한 미국 국회의 비준과 맞물려 있다는 점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아직 촛불 속의 대중이 쇠고기라는 먹거리와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간의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가 한미FTA 반대나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반대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이제 일상에서의 삶과 건강⋅생명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라는 자본의 운동과 일상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현실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과거에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에 맞선 저항이 있었다. 구조조정과 민영화, 그리고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간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서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투쟁을 힘겹게 전개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정규직의 구조적 양산과 고용불안의 제도화, 그리고 자본의 분할 통제에의 포섭이다. 그래서 노동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 역시 지속되고 있다.

이제 반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투쟁의 맹아가 일상의 영역, 소비의 영역, 건강과 생명의 영역에서 그 모습을 잠깐 드러냈다. 그것도 전혀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그러나 아직 그 맹아는 ‘검역 주권’과 ‘주권재민’이라는 강보에 싸여 있고,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촛불에 당혹스러워 하거나 낯설어 하거나 서운해 하고만 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는 인간의 삶을 생산의 영역만이 아니라 생활과 소비의 영역, 나아가 생명 그 자체도 파괴하고 있는데, 노동자에게 생산의 영역과 소비⋅생활의 영역은 여전히 분리되어 있고, 또 각각 자본의 논리와 법칙에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자본에게는 통일된 두 영역이 노동자 민중들에게는 충돌되거나 별개의 문제로 된다. 조합주의적 인식과 대응, 소비자주의적 인식과 대응만으로 이 두 영역을 결합시킬 수는 없다. ‘반자본’의 정치적 전망만이 이 둘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좌파는, 노동자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가 밥상위의 정치가 되는 현실, 권위와 폭력에 주눅 들지 않고 광장에서 해방감을 맞보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촛불의 주체들과 어떻게 대면하고 소통할 것인가? ‘광장’을 활용만 할 것인가? 새로운 주체들에 서운함만을 표현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바꾸겠습니까?”

-MBC100분토론, 나경원 한나라당 국회의원

“아니, 그럼 국민을 바꿔요?”

-아고라 네티즌

(아고라 폐인들,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 가운데서)

 

2008년, 두 개의 대한민국이 충돌했다. 두 개의 민주주의가 충돌했다. 두 개의 민주공화국이 충돌했다. 이명박 정권과 수구보수세력들의 대한민국⋅민주주의⋅민주공화국과 촛불항쟁에서의 대한민국⋅민주주의⋅민주공화국 간의 충돌이 그것이다. 이명박의 대한민국은 8⋅15를 건국절로 하여 대대적인 기념식을 했고, 촛불의 대한민국은 광장에서 거리에서 촛불로 타올랐다. 이명박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을 어떻게 바꿀 수 있냐”고 항변했고, 촛불의 민주주의는 “그럼 국민을 바꾸냐”라고 맞받아쳤다. 이명박의 민주공화국은 제도정치권 내 엘리뜨들만이 ‘공적’인 업무를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촛불의 민주공화국은 국민들이야말로 권력의 주체라는 것이었다.

이명박의 대한민국은 “촛불대중의 문제제기를 단지 수입쇠고기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기술적인 문제로 축소”시키고자 했고, 이에 촛불은 “쇠고기 수입 결정이 주권을 지닌 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관료적 방식으로 도출”(이광일, 앞의 책)된 데 대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드리대며 비판했다. 정치는 오로지 선택된 엘리뜨만의 몫이라는, 그래서 광장으로 나온 촛불에 대해 ‘촛불배후론’을 드리대며 탄압하는 이명박의 정치관에 대해, 촛불은 ‘내가 배후고, 우리 모두가 배후’며, ‘정당한 시민들과 싸움에서 정권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정치관으로 대응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08년 촛불항쟁 기간 동안에 가장 많이 가장 자연스럽게 불려진 노래이자 구호인 <헌법 1조>다. 2008년 촛불항쟁의 주 슬로건이자, 이념이다. 왜 2008년에 새삼스럽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구호가 외쳐지고, 노래가 불려졌는가? 왜 <헌법 제1조>가 60여 년간 활자 속에 묻혀 있다가, 촛불들에 의해 거리로 광장으로 불려나왔는가?

물론 쇠고기 협상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권의 “1인 중심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일방적 결정과 집행”, “국민건강과 직결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를 거치는 민주적 절차 부족”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과 행태가 지난 20여 연간 쌓아 온 민주주의의 성과를 파괴할 것이라는 위기감의 표현이다. “대한민국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임을 “국민은 종업원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정치적 주체”임을, 그래서 “대통령을 바꿀 수는 있지만, 민주공화국은 바꿀 수 없다”는 자각과 결의의 표현이다.

 

2008년 촛불이 단지 대한민국 국민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거듭남을 알리는 신호”만인가? 2008년 촛불이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 20여 년간 쌓아 온 민주주의만인가? 2008년 촛불이 ‘과거’만을 향하고 있었는가? 촛불 대중은 이명박 정권 들어 대한민국이, 국가가 ‘공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사적자본의 이해의 증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으며, 제도 정치권은 단지 자본간 이익의 분할을 위한 거래소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은 국내외 독점자본의 최고집행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짧은 기간 내에 간파했다.

그래서 촛불대중은 나섰다. 권력을 더 이상 제도정치권에 위임할 수 없다고. “내가 곧 정치의 주체”라고. 부와 권력을 가진자들에게는 관대하고 가난한 대중들에게는 고통일 뿐인 현실의 민주공화국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겠다고.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주권자인 인민대중이 공적인 것을 처리하는 정체인 민주공화국을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고. ‘주권을 지닌 인민대중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스스로 실천하고 구현하겠다고. <헌법 제1조>는 2004년 탄핵과정에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보수세력이 보여주었던 학습효과일 뿐이었다. 그들이 기대고자 했던 <헌법>을 거꾸로 드리밀며, 그 헌법의 수호자는 그들이 아닌 바로 촛불이라고 되받아쳤다.

 

이러한 촛불대중의 등장으로 이명박 정권과 수구보수세력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자유주의 개혁세력들은 무기력해졌다. 그들이 내밀 수 있는 것은 ‘벌거벗은 탄압과 폭력’, ‘촛불 배후론’, ‘폭력 시위’ 운운 정도였다. 촛불대중의 등장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것은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의민주주의이고, 직접 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빨리 촛불을 접고 여의도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어느 저명한 자유주의 정치학자의 훈수도 동원됐다. ‘제도화’된 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의 본령으로 바라보는 이런 주장의 근저에는 대중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담겨져 있었다.

 

2008년 촛불이 ‘대의민주주의’적 환상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직접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의 보완물로 여기고 있다. 또 촛불이 지배세력의 ‘폭력 시위’ 운운 공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폭력/비폭력 논란에서도 드러났듯이 “비폭력주의가 ‘저항’ 그 자체를 반대하거나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면서 촛불의 역동적인 진전 그 자체를 가로막기”(남구현, 앞의 책)도 했다.

“애초 대중 자체가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위협하는 무리, 폭도mob라는 그들의 오랜 대중혐오증을 확산”시키려는 ‘폭력시위’ 딱지, “대중은 자기결단을 할 수 없고, 그 어떤 엘리트나 리더들의 지도 혹은 대의를 매개로 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이광일, 앞의 책)라는 ‘촛불시위 배후론’ 등 지배세력의 공세는 여전히 2008년 촛불대중들의 머리 위를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다.

 

2008년 촛불이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현실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주권선언이자 직접행동이다. 그 속에는 “기존의 국가와 법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개인들의 삶을 파괴하는 그 공공성에 대한 저항이 잠재”되어 있다. “자본의 시녀가 되어버린, 시장과 경제 권력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이 촛불의 잠재적 역동성”(박영균, ‘촛불의 이념, 민주공화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이다.

2008년 촛불은 그 진전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집단 이성’의 힘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명박산성 앞에서의 폭력/비폭력 논쟁이 그랬고, 아고라에서의 소통과 토론이 그랬다. 물론 이 촛불의 광장에, 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에 노동자계급이 계급적 주체로 등장하고 있지는 못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장애인들, 여성노동자들, 여성농민들이 하나의 계급적 주체로 이 광장에 서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2008년 촛불의 광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작게 느껴지고, 여전히 소외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장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는 직접 참여하고 직접 소통하고 직접 발언하고 직접 실천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연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 자신의 전망을 직접 행동을 통해 ‘공적’인 것으로 정치화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 속에서, 계급은 촛불을 계급의 정치로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며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한편으로는 “국가주의라는 틀을 뛰어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해석되고 실천될 필요”(이광일, 앞의 책)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계급적으로 더 급진적으로 해석되고 실천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촛불은 더 지속되어야 한다. 더 급진화되어야 한다.

 

 

‘상상력’에 ‘계급’을! 그리고 ‘조직’을!

 

“역사적 과정을 구체화하고 강화할 수 있는 혁명지도부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이론은 공리공론에만 그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뿐이다.

이론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기초작업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론적 분석이 제공해 준 통찰력을 역사적 실제로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적 지식인’이 없다면, 이론은 실천에서 유리된 채로, 이성은 감성에서 분리된 채로, 그리고 에로스와 로고스의 통일은 깨어진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변증법적인 긴장이 존재할 때에야, 조직화의 문제가 생기 넘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가운데서)

 

2008년 촛불항쟁은 어쩌면 급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노동자계급은 지난 10여 년간 힘겹게 진행해왔던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성과인 촛불 앞에서 당혹해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08년 촛불항쟁이 과연 지난 10여 년간 노동자계급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직접적인 성과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촛불이 여중고생들이 앞장서서 쇠고기 재협상 요구라는 생존과 검역주권 요구로부터 출발했지만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전반에 대한 ‘대중적 반격’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촛불이 만들어 낸 새로운 정세는 잠깐 불이 붙었다가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국면과 맞물려 재점화됐을 때, 그래서 제도 정치 전반의 위기와 경제적 위기가 결합됐을 때, 그것은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국면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국면에서 대중들이 항상 직접 저항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삶에 대한 이기적 욕망 혹은 경제적 공포는 ‘강력한 권력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구체적 전망’, 그리고 그 전망을 현실화시켜 나갈 수 있는 역사적인 헤게모니 블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때론 파시즘적 권력이 강력한 유혹이 될 수도 있다. 다행히 2008년 촛불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환상을 일찍 접게 만듦으로서, 대중 자신이 급진화되고 새로운 역사적 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해 나갈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갑작스럽게 다가 온 촛불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아니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파업은 없었다. 촛불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 안지 못했다. 10여 년간 반신자유주의 구조조정투쟁에서 누적된 패배의식 때문인가? 그래서 정세의 역동적인 변화에 둔감해졌는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틀에 갇혀 수동화되어 있기 때문인가? 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고 패배의 대가는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혹할 거라는 판단 때문인가? 촛불과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지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촛불광장이 노동자들의 판이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인가? 정치적으로 너무 수동화되거나 탈정치화되어 있기 때문인가?

2008년 촛불은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둘러 싼,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를 둘러 싼 ‘정치’투쟁이다. 그것이 비록 10대와 여성이라는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촉발되고 확장되었지만, 그것이 비록 먹거리 문제라는 소비와 생활의 영역을 중심으로 촉발되었지만, 자본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세계화 공세에 맞선 정치투쟁이다.

 

노동자계급은 이 촛불 정세에서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자신의 촛불을 들어야 한다. 촛불과 함께 하며 소통하고 연대해야 한다. 촛불에 직접 참여하면서 촛불을 현장으로 지역으로 일상의 삶으로 실어날아야 한다. 현장과 지역과 일상의 삶의 문제를 촛불의 광장으로 실어날아야 한다. 이 촛불의 정치에서 기권해서는 안된다. 촛불은 다가오는 거대한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일 수 있다. 이 촛불의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이 최소한 역사적인 헤게모니 블록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새로운 주체들과의 연대 속에서 또 새로운 영역에서 의제를 확장하고 촛불을 계급적으로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 촛불의 상상력 속에, 그 정치적 문화적 상상력에 계급이 접속해야 한다.

“현재 촛불은 특정한 지도부가 이끄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자발적이고 즉각적인 거리토론과 인터넷을 통해서 의제를 형성하고 해결하고 일정을 결정한다. 모든 조직과 단체는 촛불에 일원으로 참여할 뿐이다. 현재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 현재 환경운동단체가 대운하로 촛불과 접속하고, 공공부문 노동자가 사유화로 접속하고, 언론단체가 공영방송 사수로 촛불과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 일단 촛불 분위기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촛불에 참여해서 조합간부나 조합원들이 촛불 분위기를 몸소 파악하고 촛불들과 함께 싸우면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국민적 의제인 쇠고기, 대운하, 교육, 의료, 공영방송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김동성, ‘촛불과 함께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 투쟁과 사회화투쟁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가운데서)

 

당혹하고 머뭇거리는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다. 좌파 역시 촛불의 광장에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욱 정확히는 이 새로운 광장에 개입할 준비와 역량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의제를 계급적 관점에서 신속하게 분석하고 전망을 제출할 정치 역량과 좌파적 전문성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실시간으로 이어주는 소통 공간도, 광장에서 직접 소통하고 연대하고 행동할 역량도, 노동자계급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내어 촛불의 역동적 진전을 가로막는 지점을 뚫고 나갈 물리력과 조직력과 정치력도, 공세적인 당당함과 발랄함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좌파의 무능을 자족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한가한 짓이다. 2008년 촛불로부터 좌파는 배워야 한다. 2008년 촛불 정세는 좌파의 정치가 가능해 지는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정세에서 좌파는 한편으로는 촛불을 급진화시키면서 좌파적 대중과 소통하고 연대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자신이 집단지성의 형성을 통한 역사적 헤게모니 블록의 한 축으로 서나가야 한다.

 

광장의 정치에서 정치적 전망에 대해 발언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정치적 전망’과 ‘정치활동가’가 필요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매순간 이론과 실천의 긴장을 창출하면서 집단 지성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쌍방향의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생산의 영역만이 아닌 생활과 소비 영역까지 포함해 의제를 생산하고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좌파적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 좌파의 문화와 상징과 이미지를 2008년 촛불에서 보여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광장으로 나온 10대와 대학생, 여성 등 새로운 급진적 주체들과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 모든 시도를 반자본 사회화와 직접민주주의⋅노동자민중통제를 결합시켜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진전해야 한다.

이 속에서 좌파는 정치적 활력을 새롭게 복원하고 능력있고 준비된 정치적 주체로 서 나가야 한다. 2008년 촛불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좌파 정치운동의 자성과 혁신의 계기로 삼아 나가야 한다. 그 혁신의 결과가 ‘계급정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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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대한민국잔혹사-손문상의그림세상-20080801

  


<찾아보세요> 이명박 교장, 공정택 학생회장, 공정택 엄마(강남 거주), 홍준표 교무주임, 신재민 교사, 어청수 체육선생, 최시중 방송반 담당 교사(나이는 교장보다 많음), 검찰 학생주임, 'PD수첩' 학생, 촛불소녀, 부시 장학사, 미친 소, 정연주 학생, 조중동 교사(교지 담당), 임시직 체육교사(경찰관 기동대 출신), 기타 등등….                                                                                                   <2008. 8. 1 프레시안  ⓒ 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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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불후의 명작, 촛불의 명 카피들

2008년 오월과 유월에는 ‘말’이 있었다

불후의 명작, 촛불의 명 카피들

미친 2MB, 명박산성 등 직설-은유 버무려 ‘말대포’

온-오프 넘나 들며 집단지성 상상·표현 ‘무한도전’

 

 

김미영 기자 / <한겨레신문>

 

 

2008년 5월과 6월엔 ‘말’이 있었다. 80년 광주의 5월과 87년 광화문의 6월에도 물론 ‘구호’가 있었다. 그러나 달랐다. 촛불은 ‘언어의 마술’을 지폈다. 온-오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전경차와 마주한 ‘경계의 광장’에서 ‘말의 향연’을 펼친 것이다.

‘2MB, 너나 쳐드삼!’ ‘미친 2MB, 너 때문에 우리가 미쳐! 2MB OUT!’ ‘조중동이 신문이면 우리 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

 

▶시위를 즐기고 즐거움을 ‘시위’하며 분노하고 저항

 

두달 넘게 도심에서 불타던 촛불은 잦아 들고 있지만, 촛불이 피워 올린 불후의 명 카피들은 여전히 온-오프라인에서 타오르고 있다. ‘촛불 시민’들 사이에 이명박 대통령을 지칭하는 단어는 ‘2MB’다. 단지 이니셜만이 아니다. 디지털의 저장 용량인 byte에서 따왔다. 2 메가바이트는 노래 한 곡도 채 담을 수 없는 용량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그렇게 빗댔다. IT세대들의 ‘말’이 능청스럽지 않은가.

 

 

‘광우병소’는 ‘미친소’로 더 많이 불린다. ‘이명박 정부’는 ‘미친 정부’로 통한다. 이명박 정부를 규정하는 프레임은 제도권 언론이 아니라 ‘거리의 언론’이 만들어 유통시켰다. 직설과 은유를 버물어 시위를 즐기고, 즐거움을 ‘시위’하며 분노하고 저항했다.

 

하나의 단어가 등장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고유명사화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일반적인 언어의 사회화 과정이다. 하지만 이번 ‘촛불 정국’에서 등장한 단어와 문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생산도, 공감도, 이해도, 습득도 새로웠다.

 

2003년 탄핵 정국에서도 ‘톡톡’ 튀는 패러디 문구와 사진, 포스터, 영상 등이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와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디시인사이드’, ‘웃긴대학’ 등에서 활약하는 누리꾼들이 패러디물을 만들었고,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이를 즐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촛불정국에서는 달랐다. 몇몇 누리꾼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문구와 카피를 다수의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개개인의 적극적인 의견 표출의 주제로 활용됐다. 청계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담은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나왔다. 문구 역시 기발했다. 그만큼 누리꾼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무한도전’했다.

 

▶Boys, be MB Shuts, 촛불 내 돈으로 샀다, 우리 이제 방학이다…본질 압도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Boys, be MB Shuts(소년이여, MB 입 좀 막아라)’, ‘Be the Cats.(‘쥐를 잡는’ 고양이가 되자)’, ‘미친 쥐에 경읽기:그래도 한다!’ 등이 5월 초가 지나면서 등장했다. 이때부터 이명박 대통령은 ‘2MB’, ‘쥐(박이)’로 더 많이 불리게 된다. 간명하고 명확한 구호는 현상을 넘어 본질을 찌르는 예리한 비수다.

 

6월10일 경찰이 세종로 네거리에 쌓은 콘테이너 바리케이드를 향해 붙여진 ‘명박산성’은 이번 촛불정국에서 등장한 카피 중의 카피라고 불릴 만하다. 시민들은 콘테이너 앞에 ‘경축!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이라는 펼침천을 내걸었다. 그리고 그 앞에 맞세워 쌓은 스티로폼을 ‘시민산성’이라 이름 붙였다. ‘청와대 행진’을 막아선 전경버스에 붙여진 스티커 ‘불법주차’ 또한 명 카피 중의 하나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연행이 진행되자 ‘닭장투어’라는 말과 행동으로 조롱했고, 경찰의 물대포를 ‘비데’라는 단어로 응수한 것도 명 카피라고 할 수 있다.

 

▶‘조중동이 신문이라면 우리 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재치 만발

 

촛불 시민들의 재치와 상상력은 정부와 보수언론이 제기한 ‘배후세력 음모론’과 ‘촛불 쇠퇴론’ 앞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 이제 방학이다”라는 카피다. 간단 명료하면서도 정부와 보수언론의 논리를 순식간에 무력화 시킨다. “이명박이 배후다”와 “촛불 내 돈으로 샀다” 같은 카피는 촛불에 대한 상투적인 흠집내기를 되받아치는 재치가 절묘하다.

 

보수언론을 꼬집는 카피들은 훨씬 냉소적이고 조롱에 가깝다. ‘조중동이 신문이라면 우리 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 ‘버럭! 님하! 저거 찌라시! 우리집 강아지는 조중동을 깔개로 주면 주인도 물어버린다!(찬조출연: ytn, sbs, 매경, 한경)’, ‘조선이 신문이면 똥파리는 독수리다’…….

 

카피라이터 정철씨는 “누리꾼들이 만든 표어나 문구들이 너무 기발해 놀랐다”며 “특히 ‘우리 이제 방학이다’의 경우 전문 카피라이터나 광고인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라고 평했다. 카피라이터 김하나씨는 “청계광장의 손팻말 속 메시지는 명료하고 유머감각이 살아 있으며, 전달 방식 또한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쳐난다”며 “촛불집회의 카피들은 정말로 훌륭했다”고 말했다.

 

 

▶“온수! 온수”, “노래해! 노래해”…무마 하려는 경찰 단숨에 ‘무마’

 

이번 촛불 정국에서 이같은 문구가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첫째,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이 한 단어, 혹은 한 문장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2MB, 너나 쳐드삼!’, ‘이명박, 넌 아~무것도 하지마!’, ‘공약 지킬까봐 겁나는 건 네가 첨이다!’ 같은 문구는 광우병 소와 부자만을 위한 정책을 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을 단숨에 드러내고 있다.

 

과거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카피를 통해 ‘대박’을 터뜨린 한 전자제품의 광고와 유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하나씨는 “‘넌 아무것도 하지마’ 안에는 ‘네가 하는 게 다 마음에 안들고 화가 난다’는 의미까지 포함돼 있다”며 “정말 기발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둘째, 재치가 넘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찰의 물대포가 쏟아질 때 “온수! 온수”라고 외친 것이 대표적이다. ‘온수’라는 말 속에는 물대포를 쏘는 경찰에 대한 비꼼과 시민들의 비폭력 지향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유머스럽다. 경찰이 시위대를 무마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면 “노래해! 노래해”라고 하거나 “개인기! 개인기!”라고 외쳐 경찰을 거꾸로 단숨에 ‘무마’해 버렸다.

 

정철씨는 “좋은 카피란 출중한 능력과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분명 한계가 있다”며 “마음으로 쓰고, 생활에서 느낀 것을 유머와 재치 속에 녹였을 때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촛불정국에서 등장한 카피들이 대체로 그랬다”고 설명했다.

 

 

▶‘쥐박이’ ‘이명박이 배후다…거침 없이 ‘생각대로 하면 되고'

 

셋째, 마케팅을 염두에 둔 카피와 달리 제약 없이 자유롭게 상상력의 날개를 펼 수 있었던 환경의 덕이다. 광고주나 광고회사의 입장, 소비자의 반응, 상품의 주 사용자를 밑바탕에 둬야 하는 광고 카피는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은 반면, 촛불 정국에서 등장한 카피들은 이런 것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거침 없이 ‘생각대로 하면 됐’다. ‘쥐박이’나 ‘이명박이 배후다’ ‘쥐를 잡자’ 등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만 해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넷째,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인터넷이라는 소통 창구를 통해 개방되고, 서로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끌어 주는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번 촛불 정국에서는 대체로 다음 아고라를 주축으로 해 다양한 의견들이 제안됐고, 반론과 댓글 등을 통해 의견이 정제되는 수순을 밟았다.

 

정철씨는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일방적으로 선보인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들이 더해져 많은 대중이 공감하는 최첨단의 카피가 생산됐다”며 “인터넷을 통해 소통과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쳐 좋은 카피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평했다.

 

 

김하나씨는 “촛불정국에 등장한 카피 대부분은 사람들이 들고 나온 손팻말을 보고 웃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감하는 문구들을 가져다 다른 사람이 활용하고, 발전시킨 것들이었다”며 “집단의 아이디어가 결합되면서 더 나은 카피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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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2MB, 쥐(박이)

 

쥐(박이)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Boys, be MB Shuts.(소년이여, MB 입좀 막아라)

쥐를 잡자, 쥐새끼!, Be the Cats.(‘쥐를 잡는’ 고양이가 되자) 

미친 쥐에 경읽기:그래도 한다!

2MB 고마쎄리 들가라마!

미친소 미친교육 2MB OUT!

미친 2MB, 너 때문에 우리가 미쳐!

2MB, 너나 쳐드삼!

국민건강권 팔아먹고 미국에 박박기고 국민들은 2MB 당신을 팔고 싶다

우리집 햄스터가 2MB보다 똑똑하다(아고라당 아프리카지부)

 

▷ ‘배후세력론’ 일침

 

이명박이 배후다

촛불, 내 돈 주고 샀다. 스스로. 배후는 양초공장

뇌열이 개념이야, 배후세력=송아지

2MB는 각오하라! 우리 이제 방학이다!

 

▷ 조중동 비판 

 

버럭! 님하! 저거 찌라시! 우리집 강아지는 조중동을 깔개로 주면 주인도 물어버린다!(찬조출연 : ytn, sbs, 매경, 한경)

조선이 신문이면 똥파리는 독수리다

조중동이 신문이라면 우리 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

조중동은 쓰레기통에, 딴나라당은 다른나라에, 바퀴벌레는 세스코에

 

▷ 경찰의 과잉대응 및 굴욕협상 비판 등

 

(바리케이트로 세워진 경찰차에 붙인 스티커 및 포스터 문구) ‘명박산성‘ ‘불법주차’ ‘닭장투어’

물대포 안전하면 너네 집 비데로 써라!

해고통지서 : 해고대상자 이명박 (주) 대한민국

이곳은 국경선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미국의 코리아주입니다.

 

▷ 이명박 대통령 및 정책에 대한 불신

 

미안하다. 실수했다. 내려와라!!

대통령도 리콜이 되나요?

전두환은 난폭운전 노태우는 초보운전 노무현은 안전운전 2MB는 역주행… (그러라고 준 권력 아닐텐데?)

안돼. 하지마. 이명박 넌 아무것도 하지마!

공약 지킬까봐 겁나는건 니가 첨이다!

이름은 명박, 관상은 쥐박, 개념은 외박, 경제는 쪽박

명박이 점지하신 삼신할미 각성하라!

업무태만 직무유기 저승사자 반성하라!

 

▷ 기발한 신문광고 문구들

 

대한민국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입니다. (5월29일 <한겨레신문> 1면, ‘마이클럽’ 회원)

대한민국이여, 가슴에서 불을 꺼내라! (6월2일 <한겨레신문> 7면, 82cook나사모, DVDPrime, miclub, ppcmppu, slrclub 회원들)

국민을 소통을 하려고 하는데 불통이 되니까 울화통이 터집니다. (6월7일 <한겨레신문> 1면, 다음카페 ‘소울드레서’ 회원)

진정 나라를 위한다면 촛불 앞에 꿇어라! (6월10일자 <한겨레신문> 7면, 82cook나사모, DVDPrime, miclub, ppcmppu, slrclub 회원들)

잘 들어라! 국민이 아니라면 아닌거다! (6월11일자 <한겨레신문> 7면, ‘마이클럽’ 회원)

대한민국의 주인이 반대합니다! (6월24일자 <한겨레신문> 21면, 다음카페 ‘화장-발’ 회원)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6월25일자 <한겨레신문> 1면, 여성커뮤니디 ‘쌍코카페’ 회원 )

우리가 또 다시 과거로 회군할 수는 없습니다. (6월25일자 <한겨레신문> 9면, 디시인사이드 ‘밀리터리 내부반’)

한번은 경고지만, 두번은 퇴장입니다. (6월28일자 <한겨레신문> 1면, 다음카페 ‘I Love Soccer’ 내 참 언론 지지모임)

때리지 마세요. 당신의 국민입니다. 짓밟지 말아요. 당신의 주인입니다. (6월30일자 <한겨레신문> 1면, 다음 재테크카페 ‘맞벌이부부와 아름다운 미혼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7월5일자 <한겨레신문> 1면, 다음카페 ‘부산맘 아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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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기사등록 : 2008-07-25 오후 01: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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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변혁을 이야기하자 - 문제는 ‘자본주의’다! ‘변혁’이다!

21c 변혁을 이야기하자

문제는 ‘자본주의’다! ‘변혁’이다!(2007.11.07.)

 

먹고 살아가는 조건, 활동하는 조건이 바뀌고 있다

 

이번 교양강좌의 커다란 주제는 21세기 변혁에 대해 얘기하자입니다. 제가 문제는 자본주의다, 변혁이다라고 세게 얘기했어요. 왜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가, 동지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했어요. 동지들 일 마치고 힘드실 텐데 과연 이런 얘기가 어떤 의미 있을까 생각했어요. 당장 먹고 사는 문제 힘든 조건 아닙니까. 다들 노동조합 활동 열심히 하시는데 노동조합 활동 그 자체도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다 변혁이다 이런 얘기가 어떤 의미인가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12월 대선 앞두고 다들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얘기하는 상황에서 21세기 변혁을 어떻게 얘기 드릴건가 고민했는데요, 요지는 이렇습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먹고 살기 힘든 이유가 문가, 왜 노조활동이 어려워지고 있는가, 대선을 통해서 노동자 민중의 삶에 변화가 올 거라는 확신이 안 드는 이유가 뭘까, 이런 것에 대한 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지들과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에는 우리가 노력하면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었고, 노동조합도 나가자 하면 현장이 다 따라주고, 민주적으로 활동하면 조합원의 힘 모아낼 수 있었죠. 문제는 먹고사는 조건이 변화하고 있고 또 노동조합 활동하는 조건이 변화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이야기 못하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깁니다.

이번 다섯 번의 교양강좌도 이런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 결론은 지금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해 나가는 변혁의 전망 없이는 먹고사는 노력, 노동조합에서의 활동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얘기 드리고 싶습니다.

 

경제의 양적 지표가 아닌 구조적 위기에 주목해야

 

이제 21세기 아닙니까. 한국사회에서 자기노동을 통해서 평범하고 건전하게 살아가려는 노동자 민중들은 한국사회에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세 가지 점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가 경제에 관한 것입니다. 경제문제는 이번 대선에서도 가장 쟁점입니다. 이명박이 50% 넘는 지지를 받는 이유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고 풀어줄 것 같은 얘기를 하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이런 경제현실은 과거와 현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성장한 만큼 고용이 증가했습니다. 이런 구조가 지금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5% 가까이 되요. 이 한국의 경제규모에서 작은 수치가 아닙니다. 경제의 양적인 지표 문제만 보면 한국경제가 위기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민중들이 먹고사는 경제문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동지들도 알다시피 97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해서 경제구조가 획기적으로 전환됐습니다. 그게 신자유주의 세계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거죠. 이 자본축적운동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아무리 경제성장률이 높아져도 임금상승이나 고용보장이 안 되는 구조로 가고 있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는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도 정규직에게는 끊임없이 고용불안과 실업의 위협을 가하고, 비정규직을 생산해 내고, 중소자영업자 농민들을 끊임없이 해체시켜 하강분해 시키지 않으면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 구조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처럼 경제성장률에 높아지면 삶이 펴질 거다는 전망이 불가능한 구조로 변했습니다. 이 과정들은 우리사회를 양극화시켜내고 부와 재화를 소수의 손에 집중시켜내고 다수의 대중들이 빈곤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고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노동조합 활동도 쉽게 안 되는 거죠. 우리가 한국사회에 구성원으로서 사회 전체에 이 문제를 제기해 나가야 된다. 경제의 양적 지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자체에 문제제기하지 않게 되면 해답을 찾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게 첫 번째 판단입니다.

 

민주주의 문제, 계급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두 번째, 한국사회는 80년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월 항쟁 7~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서 일단 군부독재를 청산해 냈습니다. 그 이후에 20년간에 걸쳐 민주주의 문제는 일정정도 진전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성과의 하나로 지금 민주노조 민주노총도 있는 것이죠. 올 초에 노무현은 87년 20년 기념식에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고 말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노동자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거죠.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진전되었습니다. 군사독재 때 체육관에서 대통령 뽑다가 지금은 국민투표로 선출하는 것, 그리고 지자체 선거가 90년대 초반부터 실시가 되었죠. 지역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건 별개로 하더라도 어쨌든 형식적이고 절차적으로 민주주의 진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의 경우도 조합 위원장은 직선제로 뽑는데, 다 같은 맥락입니다. 국가 행정에서의 특권이나 부패는 조금은 없어지고 있죠. 그래서 노무현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죠. 그런데 과연 민주주의 문제를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문제로만 한정할 거냐는 거죠.

 

이런 형식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가 전면화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도 동시에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가 심화되면 저항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가 증가되거나 빈민층이 우범화되거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들이 쌓여나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때 국가 권력은 질서와 안전이란 이름으로 안보란 명분으로 과거와 달리 민주주의를 후퇴시켜나가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대테러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민주적인 기본권을 제약하는 시도를 하구요. 집회 결사와 관련된 이 부분을 제약하는 법률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노동자 빈민 민중들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권력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동지여러분도 신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노무현은 큰 정부를 지향하고 한나라당은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신자유주의 정권은 기업과 가진 자에게는 약한 정권이 됩니다. 자본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거든요. 그런데 노동자 민중에게는 강한 정부로 군림하게 됩니다.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의 논란은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는 문제의 초점이 아닌 거죠.

 

또 하나 민주주의 문제에서 주목할 점은 노무현정권이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 그런데 노동자 농민의 시위 때문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말해요. 이게 뭘 의미하느냐. 노무현 정권과 지배세력은 그 민주주의 문제를 의회 민주주의 체계로만 보는 겁니다. 지난 20년 동안 국회를 중심으로 협상하면 되는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노동자 농민은 의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집단적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과거에는 우리가 민주노조운동을 하면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진전시켜 왔죠. 그런데 지금은 이 노력이 민주화를 훼손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이라는 거죠. 그래서 언론을 통해서 집단이기주의다라고 공격을 받고 있는거든요. 이제 민주주의 문제는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계급적인 입장에 따라 분화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거죠. 의회민주주의 제도화시키려는 입장이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수렴하고 해결한다면 문제가 없겠죠.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하지만 의회 밖에서의 대중투쟁에 기초해서 우리의 이해를 관철하는 게 불가피한 상황인데 이것은 마치 민주주의가 아니 것처럼 왜곡되는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거냐. 민주주의의 생각을 계급적으로 잡아나가야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정세, 모순된 두 프로세스

 

세 번째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한반도의 정세변화입니다. 최근에 북핵문제에 대한 6자회담에서 2차합의서 작성했죠. 북핵문제는 올해 말까지 2.13조치를 진행시켜나가기로 했습니다. 과거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지금은 뭔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4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8개항 합의를 했죠. 이 합의를 통해 남북경협도 이루어지고 한반도 평화체제 진전의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북핵 문제의 진전과 남북 간 상황을 보면 뭔가 문제가 풀려나가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 가능합니다. 물론 북핵문제가 해결안 되고 남북한이 군사적인 긴장으로 가는 걸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상황은 진전된 상황입니다. 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정세변화는 우리가 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큰 변화가 이루어지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세가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묻고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평택 미군기지 이전투쟁에서도 드러났지만 한미동맹이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세계전략의 재편 계획에 따라 재편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동북아 지역 전략목표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입니다.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적국으로 설정해서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게 21세기 미국의 핵심적 전략적 목표인데요, 이 과정에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한미동맹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서 북한이 남침할 경우에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새롭게 추진되는 전략적 유연성 합의, 주한미군 평택기지로 옮기는 것, 전시작전통제권을 남한 측에서 환수하는 것은 바로 주한미군이 북한과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든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중국 동남아로 빠져 들었나 나갈 수 있는 군사기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지금 이미 정부 간의 수준에서 작년 올해 초까지 합의 이루어지고 있고, 그 바탕에서 여러 군사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미동맹의 성격이 지역동맹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대만문제의 경우 중국이 대만을 치면 자연히 미국이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미일 동맹에 따라 일본도 개입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한미동맹에 따라 한국도 개입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지역동맹화이고 중국을 겨냥한 침략동맹화하는 걸 내포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는 모순된 두과정이 진행되고 있는데, 하나는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적으로 나가는 걸로 보이는 부분도 현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그 이면에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성격을 지역동맹화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동북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과 군비경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동맹체계가 서 나가게 되면 어느 순간 전쟁의 상황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런 모순된 상황에 있죠. 이 점에 주목을 하고 북핵과 남북관계로만 우리의 시야를 가둬둘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 재편의 과정에서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바로 이 문제는 이후 우리의 삶과 행동, 노조활동에 다 연동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이런 부분에 어떻게 대응할 건가를 지금부터 분명히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자본과 지배계급의 출구, 한미 경제통합과 제2 구조조정

 

지금 21세기에 우리의 삶의 조건, 노조활동의 조건, 우리 생존의 조건에서 우리가 평범한 민중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이 세 가지 부분에 주목하고 이점에 대해 대응을 고민하고 방안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의 여러 정치사회세력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격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미 FTA의 경우를 보면, 이 문제를 한국의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이 이 현실을 극복할 것인가의 대답으로 제출한 것입니다. 핵심은 한국자본이 이 구조적 위기를 하나는 한미 경제통합을 통해, 즉 미국 중심의 자본질서에 깊숙이 편입해 들어가면서 동북아지역에서 한국 자본이 경쟁력을 가지고 이 위기를 돌파해 나가겠다는 전략이거든요. 이 힘을 가지고 중국이나 일본에 대응해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IMF 외환위기 때, 그때는 위기 공세에 바탕을 두고 구조조정을 전면화했죠. 그때 노동자들은 잘 몰랐죠. 그때 금모으기 운동 하고 그랬죠. 근데 그 과정을 통해 지난 10년을 보면 외환 빚은 3~4년 만에 다 갚았어요. 그 다음엔 기업 빚을 다 갚은 거에요. 부실한 기업 빚을 구조조정을 통해 갚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 기업은 현금보유고 많이 갖고 있습니다. IMF 10년을 통해 나라빚 갚고 기업빚 다 갚았어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당한 노동자 자영업자들은 실업상태나 비정규직 상태로 떨어지고, 개인빚으로 먹고사는 상황에 직면했죠. 지금 우리 국민 개인이 금융기관에 갖고 있는 빚이 600조가 넘습니다. 그런데 과잉유동자금의 경우도 600조가 넘어요. 한국의 자본은 이 과정을 통해 일정 위기를 극복했는데 이 정도 갖고는 세계화 과정에서 경쟁력 같기 힘들다고 판단한 거죠. 구조조정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구조조정 하려면 예전같이 외환위기 같은 계기가 없죠. 제2의 구조조정을 전면화하려면 외부충격이 필요한 건데 그게 한미 FTA라는 겁니다. 한미 FTA가 되면, 지금은 자동차 섬유는 이익이고 농업은 피해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그건 천만에입니다. 한국 전체산업이 전면적인 구조조정에 돌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어떠한 저항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수구보수세력이든 자유주의개혁세력이든 FTA 다 동의하고 있잖아요. 자유주의 개혁세력 일부만이 반대하고 있는 거죠. 이것이 신자유주의 지배세력 전체거든요. 이 세력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위기를 한미FTA의 전면화를 통해서 풀어나가겠다는 거죠.

 

지난 10년에 걸쳐서 엄청나게 많은 유동자금이 600조가 넘게 흘러다니고 있습니다. 돈 되는데 몰려다니고 있죠. 어떨 때는 증시에 갔다가 어떨 때는 부동산에 갔다가 말입니다. 이 600조가 넘는 자본의 탈출구를 어떻게 마련해 줄 것인가가 정부의 중요한 정책의 하나가 됩니다. 그런 방안의 하나로 해외투자도 많이 풀었죠. 그리고 이 돈이 투자된 만한 가장 적합한곳이 북한인거죠. 그렇죠. 북한의 노동력과 이 자본이 결합하는 것이 유력한 탈출구인거죠. 이미 중국에 대한 투자는 한국자본의 입장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북관계의 진전도 사실은 유동자본의 출로를 찾는 게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번에 남북정상회담 할때 노무현이 누구를 데려갔습니까? 조선소사장, 자동차사장, 서비스 관광쪽 사장해서 대기업들로 포진했죠. 기존에 개성공단은 옷과 신발 만드는 중소규모였다면, 앞으로는 대기업 중심으로 남북경협으로 재편하는 과정인거죠. 이 과정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부가 요구되는 거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은 바로 FTA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을 전면화하고 이를 통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하나는 북한쪽으로는 자본수출의 출로를 마련해주고, 국내적으로는 제2의 구조조정을 전면화하면서 돌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전면화한다는 건 뭘 말하느냐, 외환위기와 비교할 수 없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민주화론’에 갇힌 진보진영

 

이른바 진보진영의 경우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응해 나갈 건가, 최근 몇 년 동안 논의가 이루어져 왔는데요. 진보진영도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죠. 노무현 정권이 그간 진보 개혁세력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듯하면서 이 과정을 다 말아먹은 거 아닙니까. 이제 민주화세력 진보세력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기댈 거 없다, 이런 상황을 만든거죠. 이런 과정에서 진보진영도 좌파진영도 독자적인 전망 못 만들어 냈어요. 민주노동당을 조차도 현 노무현 정권과 비슷한 세력으로 인식이 되지 이를 대체할 세력으로 안 되는 거죠. 대선과 관련해서 여론조사를 해보면 열린우리당 지지율 낮아지면 거꾸로 민주노동당 지지 올라가야 될 거죠. 그런데 그렇지 않죠. 민노당은 대안세력으로 서있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는 열린우리당의 대체할만한 새로운 정치세력이라는 걸 부각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몇 % 득표가 나올지 확인해봐야겠지만 만만치 않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진보진영도 지난 20년간의 민주화의 모든 성과를 바탕으로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아까 변화의 과정에서 진보진영 자체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해 왔습니다. 이것이 언론이나 학계를 중심으로 안들이 나왔는데 예를 들면 생태평화사회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자는 안도 나오고, 또 노동중심통일경제연방론도 나왔고, 사회투자국가론도 나오고, 사회연대국가론, 신진보주의 국가론 등등 이런 안들을 얘기하는 거예요.

좌파진영에서도 지난 6월 맑스코뮤날레에서 논쟁이 벌어졌어죠.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국가문제, 변혁의 주체문제 어떻게 할 거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진보진영과 좌파진영이 한국사회 발전방향 놓고서 논의했고요, 이번 대선과정에서 이 부분에 대한 방안을 얘기하는 거죠. 예를 들어 권영길 의원은 코리아연방공화국을 건설하자라고 얘기하고, 노회찬 의원은 제7공화국 건설 헌법개정운동을 하자라고 얘기하고, 심상정 의원은 3박자 경제론을 얘기합니다. 그다음 사회당의 경우는 사회공화국을 건설하자 얘길 합니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는 것들이 앞서 세 가지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할 지 말하는 겁니다.

 

이 논의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내용적으로는 87년 이후에 한국사회의 발전 민주화 과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거냐,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한국경제가 어떤 발전방향을 가져갈거냐,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는 어떻게 마련될거냐 등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부분을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논의들을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문제들 빈곤의 문제, 비정규직의 문제, 환경오염의 문제, 범죄의 문제 고용의 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 자체에 있다는 거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신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자본주의가 문제다 이런 거 없죠. 모든 대안모델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존속을 전제하고 있어요. 전제된 그 속에서 경제를 어떻게 할 거냐 복지를 어떻게 할 거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진보진영의 그동안의 논의가 그렇다는 거거든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다는 거죠.

 

두 번째로는 대선과 총선이라는 권력재편기와 맞물리면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형식으로 안과 정책이 제출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이렇게 하겠다, 그래서 국가 정권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논쟁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한국사회이 여론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소위 뉴라이트와 뉴레프트로 재편하려는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발전방향은 다들 뉴레프트의 발전방향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소위 자본주의가 문제다 변혁을 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제외시키는 겁니다. 물론 그건 좌파진영이 적극적으로 안을 내오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서 좌파진영도 발언해야 한다. 21세기 변혁에 대해 얘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87년도에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투쟁시기 한국사회 최대의 화두는 민주주의 문제였죠. 지난 20년 동안 모든 과정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노동조합의 민주화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또 한 가족 내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렇게 모든 것이 민주화의 문제였고 그런 민주주의란 잣대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봐라봤었어요. 현장 내에서도 그렇죠. 부모자식관의 관계도 그런 점에서 많이 바뀌잖아요. 이전의 가부장적인 관계들도 이제 애들이 그렇게 안 받아들이잖아요. 얘들도 이제 바뀌잖아요. 다 민주화의 성과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놓친 게 있습니다. 자본운동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를 놓쳤어요. 노동운동도 그렇습니다. 자본진영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축적전략을 변화시켰거든요. 그게 우리가 신경영전략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신경영전략이 나중에 신자유주의로 전면화되는 거든요. 좌파운동도 그렇고 노동운동도 그렇고 이 부분에 제대로 대응 못했어요. 김영삼정부때 신노사관계를 제안하면서 정리해고제 도입하고 노동법개정을 맞바꾸자라고 했을 때 다들 판단기준이 그때는 민주노총 합법화가 민주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꿀 수 있다고 지도부는 생각했던 거죠. 혼란에 빠져버린 거예요.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도 예전에는 민주냐 아니냐에서 이제는 자본에 의한 통제로 바뀌어졌는데 우리가 못 봤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자본의 흐름에 대한 대응은 이른바 반기업정서라는거 있었죠. IMF외환위기 이후에 재벌퇴진론 제기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죠. 지금 한국사회에서 영향력과 신뢰에서 가장 높은 곳이 삼성을 비롯해 독점대기업들입니다. 10년 동안에 완전히 역전되었어요. 바로 이러한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자본과 기업 자체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제기를 못하고 다 누수된 결과 지금 이런 현실을 맞게 되었다는 거예요.

 

문제는 ‘자본주의’다!

 

좌파운동 내부에서 신좌파라고 얘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결국 대안사회 얘기하지만 현실사회주의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도 역시 스탈린주의라는 현실로 떨어진 거 아니냐, 가령 권력관계라는 건 다 똑같은 거 아니냐, 노동조합도 나중에 보니 권력관계가 되더라, 그렇게 때문에 권력자체가 문제다라는 문제제기를 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했어요. 이게 소위 신좌파라는 흐름인데요. 물론 이들 문제제기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민주화하는데서 가부장제 극복이라든지, 조직 내에서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문제라든지, 또는 전체운동에서 스탈린주의라는 일당 독재체제나 개인숭배를 극복하는 문제라든지, 이런 부분에서 많은 부분 문제제기 해나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도 권력자체에 대한 문제로만 제기하면서 뭐를 놓쳤냐 하면 자본에 의한 지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거죠. 바로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거꾸로 외환 위기에서 척결해야 했던 대기업 재벌 등이 가장 신뢰 있고 앞서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어버렸다는 거예요.

 

IMF 외환위기 이후에 좌파진영 중심으로 반신자유주의 전면에 제기했어요. 요즘 들어 반신자유주의 문제는 진보진영 다 동의해요. 그런데 반신자유주의 전망을 어떻게 할 거냐를 놓고 내부에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문제를 정책수준으로 놓고 보는 경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회해서 사민주의적인 전망을 가져가자 이런 입장이 있고요. 다음에 신자유주의는 정책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그 자체의 문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제기의 결론으로서 크게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라크 전쟁은 전쟁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현실에서 확인시켜 줬는데, 이런 전쟁의 문제나 빈곤의 문제, 고용의 문제, 범죄의 문제의 핵심적인 근원에 자본주의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문제가 뭡니까. 결국 인간에 의해 인간을 착취하는 체계 아닙니까. 그건 생산수단을 소수가 독점하는 거죠. 그 소수의 이윤을 위해 모든 사회적인 재화가 소비되는 체제죠. 그 결과로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나타나고, 최근에는 80대 20사회, 10대 90사회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바로 그것의 결과로서 자본 간의 경쟁들이 격화되면 전쟁이 벌어지고, 또 투기자본들이 몰려다니다가 언제 또 금융공황으로 갈지 모르고 있는 상황, 전쟁을 통한 대량학살들, 그리고 한 사회 한 기업 내에서 고용불안 비정규직화, 노동유연화 아시죠. 성과급제 정리해고제 이제 거의 다 동원되고 있죠. 공무원 좀 남아있고 교사가 좀 남아있죠. 교사의 경우 교원평가제 도입돼 버리면 그건 유연화 끝나버리는 거죠. 공무원 쪽도 퇴출제라든지 연봉제등 전체 유연화시키고 있죠. 노동자의 삶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는 거, 자본에 돈이 되는 흐름에 노동력을 맞춰나가는 구조를 제도화시키는 것, 노동자도 당연히 이렇게 살아가는 거다. 자본은 그런 논리를 내면화시키는 거예요. 마치 자신의 욕구인 것처럼 가치관 자체도 바꾸는 거예요. 이런 흐름이 진행되고 있는거예요.

 

그런데 이 자본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건 현실에서는 참 어려운 문제에요.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어릴 때 교육받았죠. 너무 당연한 거죠. 주어진 이게 사는거다라고 생각하지, 이걸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라고 인식하는 건 일상적으로는 쉽지 않죠. 그러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저항을 하게 되면 즉각 통제와 탄압이 들어오죠. 무섭게 자르든지 그래서 그런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거죠.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체제는 유지해 들어가는 거죠. 그러나 이 자본주의라는 거는 인간의 인류역사에서 영원불멸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몇 백 년 전에 탄생한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거예요. 이게 인류 역사의 끝도 아니에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는 거거든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체계를 넘어서고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가능하다는 겁니다. 물론 다음번 강의에서도 나오겠습니다마는 현실에서도 그런 노력을 해왔고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본주의 모순이 누적된 상황을 보게 되면 10~20여년 내에 이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건 자본가진영 내부의 이론가들도 얘기를 합니다. 그들도 위기의식을 갖는 정도라는 거예요. 전쟁이라든지 공황이라든지 아니면 저항이 심화된다든지 하는 이런 상황에 다가올 거라는 거죠.

 

문제는 ‘변혁’이다!

 

어쨌든 자본주의가 문제고 이 자본주의는 영원불멸한 게 한계 아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기에 생긴 문제라는 겁니다. 예전에 우리는 한국자본주의가 천박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 주장 속에는 한국자본주의를 합리화시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자본주의는 전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고 있고 이미 굉장히 많이 합리화된 자본이거든요. 그런데 합리화되면 될수록 바로 여기서 얘기하는 문제들이 더욱 더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바로 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거냐에 대한 논의하고 실천방향 찾아내야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자각하는 시점이서, 바로 이것을 개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느냐 아니면 이것을 뒤집어야 하느냐, 즉 변혁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거죠. 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 그런 역사는 없습니다. 조금 조금씩 개혁을 통해서는 자본주의 근본문제 해결 안 될 거라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사회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혁할 것인가에 대한 걸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얘기하면 아직도 그 얘기 하냐,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 박혀있어요.

 

변혁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역사의 필연입니다. 현대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변혁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그런 국면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면 보통 공황이나 전쟁이나 이런 상황들이 창출되는 거든 요. 또 하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그 자본주의가 사회 전반을 시장논리로 재편해 들어가는 거잖아요. 환경문제든 여성문제든 인권문제든 이젠 자본과의 문제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건 노동운동뿐 만아니라 여러 부분운동들도 반자본이라는 전망 속에서만 해결방향을 찾을 수밖에 없고, 그런 주체들이 형성되어 나갈 거예요. 그런 점에서 현 시기에 변혁이라고 하는 문제는 꿈을 꾸는 문제가 아니고 역사적 필연의 문제라는 거죠.

 

그 다음에 이것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토론을 통해 가능한 방안을 찾아내는 거든 요. 그다음에 실천을 통해 검증해야 하죠. 지레 불가능할 것 같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변혁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때만이 현대자본주의가 만들어낼 지 모를 엄청난 참변이라든지 그런 걸 극복할 수 있다는 거죠.

대다수 노동자민중인 힘없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과정 속에서는 현실을 뭔가 바꿔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내 삶도 버겁고 현장 하나 바꿔내기도 힘든데 저 거대한 힘을 우리가 어떻게 변화시켜낼 수 있냐는 거죠. 근데 특정한 정세 하에서는 그런 위기의 국면에선 집단적 변혁에 그런 사람들이 전면에 나섭니다. 화려한 휴가 보셨죠. 그때 광주민중들 초기에 특전사가 총들이고 나올 때 처음엔 엄두 냈겠습니까. 학생들 일부가 먼저 시작해서 싸운 거잖아요. 어느 국면에선 그들이 힘이 없다라는 걸 넘어서는 국면이 있는 거거든요. 노동조합운동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한때 이 현장을 다 변화시킬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가질 때 있었잖아요. 현장의 조합원들도 그런 국면에선 전면에 나섭니다. 이게 변혁입니다. 변혁이라는 건 그 대상인 이 현실만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고 바로 변혁을 해나가는 주체를 변화시킵니다. 바로 그 주체는 변혁의 운동과정에서 변해나간다는 거죠. 인간도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변혁은 두 측면을 갖고 있고, 이 양측 면을 다 봐야 합니다. 일상적인 시기, 개혁적인 것으로는 대중들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죠. 자꾸 대리주의가 나오고 누가 위임해서 대신 해주길 바라는 거죠.

 

‘21변혁’을 이야기하고, 실천하자.

 

그래서 문제는 자본주의고, 이제 변혁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고 실천을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은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시 하고, 변혁에 대해, 변혁의 얘기도 그냥 변혁이 아니라 21세기 변혁에 대해 이야기와 실천을 시작하자고 얘기했습니다. 21세기 변혁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20세기 변혁의 시도들은 어떻게 되었고 왜 실패했는지, 어떤 교훈을 얻을 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실패한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죠. 우리는 이겨야 하죠. 또 실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20세기 변혁의 전 과정에 대해 평가하고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야됩니다. 그 내용이 다음 주 두 번째 강의가 될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21세기 변혁에 대해 얘기하려면 뭘 해야 되나 하면, 우리가 변혁은 머릿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자본주의 사회가 이만큼 이뤄낸 게 있어요. 우리는 그런 물질적인 조건을 갖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거죠. 이게 뭐냐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재료 물질적인 주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그러려면 현대자본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현대자본주의가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 약점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상들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그게 바로 세 번째 강의입니다. 현대자본주의, 21세기 변혁의 조건이에요.

 

그러면 새로운 21세기 변혁의 상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되냐, 우린 이런 세상을 꿈꾼다, 그건 옛날과 어떻게 다르냐고 얘기를 해야 하죠.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어떤 전략적 목표를 가져야 할 거냐, 어떤 경로를 통하고 주체는 어떻게 형성해 들어갈 거냐. 그게 네 번째 강의입니다.

우리가 변혁에 대해 토론하고 실천하고 현장부분 논의하고 방향에 대해 집단토론하고 검증하고 반성하는 뭔가가 필요하죠. 그러려면 조직이 필요하죠. 그건 규율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죠. 우린 보수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해야죠. 우리의 조직방식을 이해해야 하죠. 과거와 같이 억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해방시켜주는 관계여야 하죠. 그 조직의 과정들이 개인을 해방시켜주고, 개인의 능력을 고양시켜주고, 개인의 능력의 발전이 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이런 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그 조직을 움켜줬을 때 비로소 우리는 21세기 변혁을 위한 본격적인 출발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노동자계급정당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5강입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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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시대정신’을 구현할 ‘21c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2008.02.07.)

‘21c 시대정신’을 구현할 ‘21c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2008.02.07.)

 

민주노동당, 침몰하는 ‘타이타닉’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기정 사실화됐다. 2월 3일, 비대위의 혁신안 부결 이후 연일 대규모 탈당이 이루어지고, 진보신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진보신당 창당세력을 “분열과 음해 세력”이라고 강력하게 규탄해도, 민주노총과 전농 등 이른바 배타적 지지를 결의한 대중조직의 힘을 빌려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 해도, 그럴수록 침몰하는 ‘타이타닉’호가 일으킨 거센 파고는 대중조직 내부의 갈등과 정치적 혼란만을 더욱 확산시킬 뿐이다.

 

민주노총 등 4개 대중조직이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노동당에 대한 확고한 지지방침을 재확인하면서 단결을 강조했지만 파고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이미 민주노총의 주요 연맹에서는 배타적 지지 철회 방침을 공식적으로 제기했거나 할 예정이다. 비대위의 혁신안을 지지했던 전빈련의 경우도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할 가능성이 크다.

대중조직 내부에서는 배타적 지지 방침을 둘러 싼 격돌이 본격화되고, 사태의 진전에 따라서는 대중조직은 물론 노동자민중진영 전체에까지 재편의 회오리를 불러 올 것이다.

 

직무대행과 의원단까지 나서 “과감한 혁신, 전면적 재창당의 각오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다”고 선언했지만, 현재로서는 당 혁신과 단결을 위한 뾰족한 방안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럴수록 지금 당직자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탈당 흐름은 일반 당원 수준으로까지 확산될 것이다.

특히 민주노동당 전체당원의 40%(32,000여명)를 차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탈당이 본격화될 경우에 민주노동당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계속 ‘배타적 지지 방침’을 계속 강행하려 한다면 민주노총의 존립 여부 자체도 불투명해질 것이다.

 

스스로 혁신하지도 못한 채 대중조직의 배타적 지지에 기대어 위기 돌파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민주노동당의 현실! 민주노동당은 왜 이런 현실에 직면하게 됐는가? 이러한 현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17대선에서의 3% 득표라는 참패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민주노동당이 직면한 위기는 사실 출범 이후 10여 년간 누적되어 온 문제가 폭발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멀리는 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가깝게는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의 산물이었다. 즉 87년 이후 민주화체제에서 노동자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기층 대중운동 성장의 직접적인 산물이자, 노동자민중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적 과제를 직접적으로 체현한 현실태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정치세력과 사민주의 정치세력이 주도한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지구화와 구조조정이라는 국내외 초국적 자본의 전면적인 공세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총체적 대응을 정치적으로 조직해 내지 못했다.

민족주의든 사민주의든 정치적 전망의 협소함, 혹은 개량주의 때문이다. 국내외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자본 그 자체의 공세, 혹은 현대자본주의 위기의 표현으로 받아들여 반자본의 정치적 전망을 구체화하지 못한 채, ‘통일과 반미’, 혹은 ‘분배와 복지’라는 틀을 뛰어넘지 못했다.

반자본이라는 급진적인 정치적 전망 속에서 ‘통일과 반미’, ‘분배와 복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갖지 못할 때, 현실에서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 개혁분파들과 질적인 차별성을 가질 수 없었다. 자유주의 개혁분파들의 정치적 파산과 함께 민주노동당이 동반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16대 총선에서 의회 진출 성공의 결과로 의회주의와 합법주의의 늪에 깊숙하게 빠져들었다. ‘거대한 소수’를 외쳤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대의회 압력수단 정도로 수동화시켰다. 당권과 비례대표를 둘러 싼 이전투구는 민주노동당 상층이 부르조아 의회주의에 얼마나 오염됐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은 대중조직의 배타적 지지에 힘입어 노동자민중 진영의 유일한 정치적 대표체를 자임하면서 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에서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소위 자주파라는 특정 정치세력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전국민중연대에서 한국진보연대로 조직 전환을 할 때 보여준 그 조급함과 패권적인 태도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크게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17대 대선에서 참패를 계기로 한 민주노동당의 위기, 혹은 정치적 파산은 의회주의⋅합법주의에 갇힌 계급연합적 진보정당운동이 이제 그 역사적인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었다. 2월 3일 비대위 혁신안이 부결되고 민주노동당 분당이 기정사실화됐다는 것은 이제 기층 대중조직의 배타적 지지에 힘입은 진보정당운동이 그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현실에서 확인시켜 주고 있다. 노동자민중진영의 각 정치세력이 독자적인 정치노선과 정치적 역량에 기초한 정치운동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통한 10여년의 정치적 실험은 이제 이렇게 마무리됐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적 실험이 비록 실패로 귀결됐지만, 그래서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은 10여 년 전에 출발했던 그 지점이 아니다. 자칫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왔던 노동자민중들이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질 것을 우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의 정치적 경험,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파산과 분당이라는 경험을 통해 현장과 지역의 노동자민중들은 정치적 허무주의를 딛고 나올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새로운 독자적 정체세력화의 상과 정치노선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서 다시 현장과 지역으로부터 일어설 것이다. 민주노동당 10년의 정치적⋅조직적 성과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아니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진보신당, 우경화하는 ‘구명대’

 

진작에 신당을 걸고 나선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비대위 혁신안 부결 이후 탈당한 ‘혁신파’, 그리고 새 진보정당에 함께 하고자하는 사회당과 초록당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기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4월 총선 이전에 진보정당을 창당할 것인지, 4월 총선 이후에 창당할 것인지를 놓고 이견이 있을 뿐, 진보신당의 창당은 진행될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세력들은 민주노동당이 “통일지상주의 정당, 편향적 친북정당, 탈법.편법 회계운영에 눈감는 부도덕한 정당, 반민주적 패권주의 정당”이며, “지난 대선에서 3%의 득표율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들의 냉혹하고 준엄한 심판이자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의 요구”임에도, 2월 3일 임시당대회는 대선참패를 부정했고, 변화와 혁신을 정면으로 거부했다고 판단하면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진보정당이 “국민들 생활 속에 푸른 진보를 실현”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도시 서민, 이주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등 사회적 약자가 정치적으로 대변되고 풀뿌리 정치, 생활 정치를 뿌리내리는 정당”이며, 민생 우선과 21세기 진보적인 의제 설정에서 기존 민주노동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진보신당 추진 세력들은 창당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 합의를 하게 되면, ‘이명박 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진보야당’ ‘비정규직, 농어민, 사회적 소수자의 정당’ 등의 정치적·조직적 목표를 두고 총선 전략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려는 승객들을 구조”하는 구명대가 될 지, 그 구명대가 파산한 민주노동당운동을 대체할 새로운 진보정치운동의 구심이 될 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만, 수많은 암초가 가로 놓여 있다.

먼저 새로운 진보정당 추진 주도세력은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파산의 책임을 ‘종북주의’에 전가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역사적⋅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들은 민주노동당 참패의 원인을 ‘종북주의’로 규정해 버림으로써, “이념 논쟁의 심화가 아니라 그것의 파괴적 불모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현실화”시켰고, “반자본주의 정치운동을 구체적, 대중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노선과 방안을 둘러싼 논쟁”으로 진전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또한 그들은 민주노동당을 ‘민주노총당’, ‘데모당’, ‘운동권정당’, ‘종북⋅친북당’, ‘낡은 진보’ 등으로 비판하고, 스스로를 ‘새로운 진보’, ‘21c적 진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우경화와 개량주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기존 민주노동당에 대한 우경적 평가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비대위는 혁신안에서 반노동자법인 국가보안법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고, 나아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사회연대전략’은 계급해체전략에 다름 아니며, 정치적 기치로 내세운 ‘생활 속의 푸른 진보’나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는 생태 환경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듯하지만, 반자본의 정치적 전망과 결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노동자 계급정치를 개량주의로 후퇴시킬 것이다. 그들은 우경화와 개량주의화를 ‘새로운 미래’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진보정당 추진세력들 내부의 쟁점은 당장 총선 전에 창당할 것인지, 총선 후에 창당할 것인지에 모아져 있다. 총선전 창당을 서두른다면 “학계·시민사회단체 등 외연확대를 통한 세결집과 새로운 진보의 내용을 채우지 못한 채 ‘평등파 신당’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가 있고, 반면에 “총선 전 창당해 지역구 1~2석 및 최소한의 정당 지지를 확보해 현실 정치세력으로서 원내에 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당장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경쟁해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현실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창당 시기 논란은 그들에게 중요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들의 정치노선이다. 이미 서구에서도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사민주의 정치라는 구명대로는 ‘21c형 제국주의’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지구화라는 격랑을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칫 ‘국민들의 신뢰’라는 이름으로, 아제국주의로 진전하고 있는 남한 자본운동의 하위파트너가 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새로운 진보신당이라는 두 진보세력이 격돌해서 동반 몰락하는 상황이 우려되는 것이 아니다. 4월 총선에서 원내 진출을 위해 민주노동당 10년의 역사적 경험을 전체 노동자민중운동의 관점에서 총체적이고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 다가올 10년의 정세에서 반자본 변혁운동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이 우려될 뿐이다.

격랑에 휩쓸리는 것을 마치 정세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 향후 10년을 내다보는 노동자민중운동의 재편과 재구성은 ‘민주노동당 대 새로운 진보신당’, ‘민족주의 세력 대 사민주의 세력’의 기존 경쟁 구도와 틀을 넘어, 더욱 발본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의 재구성, ‘21c 사회주의/코뮤니즘’

 

어쩌면 민주노동당이 겪은 10년의 실험은 다가 올 계급정세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전초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으로 사회적 분업을 전세계적 수준에서 확장시켜 나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극도로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최근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한 전세계 금융 위기는 위기의 단초를 언뜻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세계경제의 불안성과 불확실성이 심화될수록, 제국주의간 경제⋅에너지 경쟁과 군비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동시에 초국적 자본은 국경을 뛰어넘어 초과 이윤확보를 위한 금융적 수탈과 착취를 강화할 것이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한 것은 바로 이런 세계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라는 정세 속에서 ‘경제 성장’을 통해 ‘민생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국민 대중들의 ‘막연한 바램’ 혹은 ‘경제적 공포’가 가로놓여 있다.

물론 이 경제성장에 대한 ‘막연한 바램’은 금새 깨질 것이다. 전방위 FTA의 추진, 자본의 상호 출자 허용, 금산분리법의 완화, 공공부문과 은행⋅우체국의 민영화, 자본통합법에 바탕한 은행⋅보험⋅증권회사 등의 자본통합, 한반도 대운하의 추진, 그리고 기업 규제의 완화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친자본적 행보를 할 것이고, 이 과정은 동시에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 사회복지의 축소, 주택가와 사교육비의 증가, 물가 인상, 빈곤과 양극화의 심화, 민주주의의 후퇴 등 노동자민중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런 현실에 빠트릴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선진화’가 결코 노동자민중들의 삶을 도탄에서 구할 구세주가 아니었음은 머지않아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그 때 노동자민중들은 이러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전망과 능력있는 정치세력을 요구할 것이다.

 

‘21c 진보의 재구성’이 “NL 대 PD라는 낡은 사상에 기초한 정파를 파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것이 “생태주의자, 평화주의자, 여성주의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등 21세기 새로운 진보 의제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 역시 그렇다.

그러나 ‘21c 진보의 재구성’과 ‘21c 진보 의제’는 그 근저에 ‘반자본 변혁’을 전제했을 때에만,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전망 속에서만 진정으로 그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현재 노동자민중들의 ‘민생 문제’라는 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이고, 생태⋅평화⋅여성⋅이주⋅비정규직 등의 문제 역시 현대 자본주의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모순의 근본적인 해결은 ‘변혁’을 통하지 않고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자본 변혁’? “그것이 가능하냐”고 한다. ‘사회주의’? “아직도 그 소리하냐”고 한다. 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화’ 자체에만 주목하여 ‘자본’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과 문제제기가 실종되거나 배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화 이행’과정 이면에 있는 자본축적체제의 변화, 즉 1987년 이후 신경영전략과 OECD 가입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지구화와 구조조정이라는 자본축적운동의 전환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 이후 노동자민중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 점에서 비롯됐다.

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하지 못한 채 청산하고 해체했기 때문이다. 이 사상 이론적 공백을 온갖 포스트류와 개량주의, 민족주의가 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낡고 어둡고 억압적인 것으로 내팽겨 쳐졌다.

 

‘반자본 변혁’!, ‘사회주의적 전망’! 현실성 없는, 낡고 고장난 라디오를 다시 틀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물론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 - 빈곤,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성, 환경파괴, 범죄, 차별과 억압, 전쟁 등 -은 바로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다. 그래서 문제는 ‘반자본’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반권력’, ‘반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특징짓고 있는 착취와 그 착취가 요구하는 지배를 철폐하지 못하고 단지 제한할 뿐이다. 그래서 ‘변혁’이다. 반자본의 변혁적 전망과 맞물려서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반권력’, ‘반신자유주의’는 그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반자본 변혁’은 메시아적 감상이나 꿈이 아닌, ‘현실의 요구’이자 ‘역사의 필연’이다.

 

‘21c 진보의 재구성’은 발전된 생산력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를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21c 사회주의 전망은 현대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현대사회 및 인간욕구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그릴 수가 없다.

그래서 21c 사회주의는 노동자 국제주의에 바탕한 ‘반제반자본 변혁’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대체권력’ 즉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결사체로 나아가는 이행기의 정치적 형태의 창출을 통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대체권력의 민주적 통제에 바탕하여 생산과 유통을 계획하며, 임노동에 바탕한 계급관계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철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 및 환경파괴적 생산력주의도 극복하는 복합적 사회주의/코뮤니즘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만이 현대 자본주의가 이룩한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고, 동시에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한 해방 과정이 될 것이다.

 

사적소유와 계급관계의 폐지는 사회주의/코뮤니즘의 주요한 일부이지만, 사회주의/코뮤니즘의 전부는 아니다. 21c 사회주의/코뮤니즘은 노동해방, 환경, (여)성 등 ‘복합적인’ 사회주의/코뮤니즘 이념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 모두가 사회주의/코뮤니즘의 기획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복합적 의제들의 해방적 기획도 정치경제적 기획만이 아니라 미시적 문화적 기획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경제적 사회주의와 생태문화적 사회주의의 결합, 즉 삶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사회주의/코뮤니즘이 되어야 한다.

 

정당 건설,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출발

 

이러한 반자본 정치변혁을 주도해 나갈 정치적 태세와 조직적 주체를 어떻게 형성해 나갈 것인가? 그 시작은 바로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선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현실의 정치 일정으로 올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하나의 정세적 계기일 뿐이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붕괴라는 충격으로부터 벗어나 지난 2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성장해 왔다. 이론적으로도 20c 사회주의 이론을 혁신하고 확장하고 재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고, 실천적으로도 비록 써클 혹은 정파 수준이긴 하지만 정치조직운동을 진전시켜 왔으며, 노동운동을 비롯한 지역, 사회 운동 영역에서도 조금씩 뿌리를 내려왔다.

 

물론 여전히 그 정치적 역량과 대중적 영향력은 미약하다. 특히 현실 제도권 정치에 진입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관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전체 역량으로 보았을 때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 내 여러 실천적 쟁점에 대해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기존 민주노동당 또는 또 다른 ‘신당 추진파’에게 노동자민중의 정치운동을 맡길 수는 없다. 특히 사회주의정당 건설이 단지 정파들 사이의 논의와 사업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대중적 근거와 기반을 형성하는 과정과 맞물려야 하는 것이 필수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정당 추진 세력의 정치적 태도와 정치 일정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축적도 없이 어떻게 사회주의 정당 건설이 가능한가? 당 건설은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최종 귀결점이 아니라, 그 출발점일 뿐이다. 또 건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변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변혁적 활동가들의 존재 형식이자 활동 양식일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반자본 변혁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을 건설하지 않고는 반자본 변혁은 상정조차 하기 힘들다.

네트워크 조직이면 되지 않는가? 네트워크 조직으로는 일관되고 지속적이고 총체적인 반자본 변혁을 추진해 나갈 수 없다. 대중을 주체로 세우려는 노력 없이 대중행동의 조직화 없이 당 건설이 가능한가? 대중을 주체로 세우고 대중투쟁을 조직하며 나아가 그러한 대중투쟁을 반자본 변혁이라는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 당 건설이 필요하다.

 

너무 이르지 않는가? 계급투쟁이 더욱 진전됐을 때 당 건설이 가능하지 않는가? 지금 계급투쟁의 정세가 그 계급투쟁을 반자본 변혁으로 안내할 정당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강령은? 이미 최근 몇 년에 걸쳐 이행기 강령, 과도기 강령, 대중투쟁 강령, 21c 변혁전략 수준의 준비는 됐다. 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소통과 논쟁의 접점이 형성 안됐을 뿐이다.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이야기하는데, 과연 지금의 노동자계급이 변혁의 주도세력일 수 있는가? 노동자계급 내부를 통일시키는 것이 변혁보다 더 어렵지 않는가? 생산의 사회화를 담지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서지 않을 때, 반자본 변혁은 물론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지 않다.

현실의 노동자계급이 변혁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거꾸로 그들이 자본주의 모순의 직접적인 담지체이기 때문이다. 계급적 단결의 결과로 당 건설이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당 건설을 통한 정치화가 계급적 단결을 위한 출발점이다.

 

지금의 사회주의 정치조직이 당 건설을 할 만한 역량이 있는가?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사회주의 정치조직이 여러 써클로 분화되어 있고, 또 그 분화는 나름의 역사성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역사성 때문에 정치적 신뢰가 문제되기도 한다.

그 판단은 그 자체로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간의 정치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당 건설의 방향에서 찾아내야 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써클주의이자 패배주의일 뿐이다.

 

왜 사회주의 정치조직만 이야기하는가? 수많은 개별 활동가들도 사회운동 활동가도 있는데. 사실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를 둘러 싼 대응을 보면, 기존의 사회주의 정치조직들의 대응이 훨씬 뒤쳐져 있다. 오히려 현장과 지역 활동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반응이 더욱 절박하고 신속하다.

물론 조직적인 의사결정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치조직은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절박하고 신속한 대응을 당 건설을 위한 새로운 동력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새로운 동력으로 받아 안을 수 있는 틀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한다. 그런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2007년 대선을 계기로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하던 ‘민주화’와 ‘개혁’의 시대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소위 ‘87년 체제’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운동의 정치적 파산과 분당으로 한 매듭을 짓게 됐다. 반자본 변혁세력도 이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통해 한 시대의 정치적 매듭을 분명하게 지어야 할 시점이다.

‘87년 체제’의 종언은 “민주주의의 제도화”, “생활 속의 푸른 진보”가 아니라, 반자본 사회주의 변혁을 위한 정당 건설로 매듭지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있음을, ‘21c 시대정신’이 바로 ‘21c 사회주의’임을 실천할 수 있는 정당 건설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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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물사유화저지 동영상-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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