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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4/28
    오랫만에 자전거
    무화과
  2. 2009/04/27
    울면서 던지기
    무화과
  3. 2009/04/13
    목련, 벚꽃, 라일락
    무화과
  4. 2009/04/03
    꼴찌해도 괜찮아(1)
    무화과
  5. 2009/04/01
    사이
    무화과
  6. 2009/03/21
    한 시절
    무화과
  7. 2009/03/21
    오해
    무화과
  8. 2009/03/19
    2009/03/19
    무화과
  9. 2009/02/23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
    무화과
  10. 2009/02/16
    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무화과

오랫만에 자전거

아침마다 영어학원을 다닌다는 핑계로 방치해두었던 자전거를 오랫만에 끌고 집으로 왔다. 벌써 몇 달째 하늘을 바라보며 눈과 비를 맞느라 자전거는 퍽 피곤해보였다. 체인은 기름기 없는 푸석한 모습이었고 프레임은 산성비를 맡았는지, 한 때는 중후해 보이던 무광택의 피부에 흙먼지가 잔뜩 눌러 붙어있었다. 괜시리 미안해지는 마음...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이동하는 도중에 책을 읽거나(그러다 자거나) 음악을 들을 수(그러다 잠을 잘 수)있는 좋은 점이 있지만 자전거를 타는 일은 또 다른 좋은 점들이 있다. 아... 운동은 별로 안된다. 자전거가 운동이 될정도로 에너지 소모가 많은 기구였다면 좋은 교통수단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는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입안에서 자신감 없이 웅얼거리던 노래들을 크게 부를 수 있다. 내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못듣지는 않겠지만, 소리보다 빠르게 페달을 저어가면 내 부끄러운 음색과 얼굴을 들키지 않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제낄 수 있게 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혼자 울고 싶을 때나, 자기도 모르게 울컥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릴 것만 같을 때에도 자전거를 타는 일은 퍽 좋다. 너무 펑펑 울어 눈물에 앞이 흐릿할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화장실에서 문 잠궈놓고 수돗물 틀어놓을 필요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 번쯤 울상인 얼굴을 빠르게 스쳐가며 궁금해는 하겠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산책을 즐길 뿐이다. 게다가 바람이 볼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훔쳐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면 생각에 잠기기에 좋다. 물론 차도에서는 잡생각은 금물이다. 일단 살고봐야지... 한적한 밤의 자전거 도로는 아무런 근심 걱정없는 사람들에게도 한움큼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데, 하물며 무언가 골똑히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을때는 말 할 것도 없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로 스며들어 심각해진 머리를 식혀주니 어려운 생각에도 안성맞춤이고, 낮에 내린 소나기로 부풀어오른 풀내음이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니 슬픈 생각을 하기에도 적당하다.

 

문득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은 2009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을 벗어난 환상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갑자기 저 멀리 커다란 네온사인과 함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절이 생각나면, 도망치고 싶기만한 마음들이 생각나면, 억지로 인식하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이제는 떠나버린 것들이 갑자기 현실적으로 느껴지면, 갑자기 손가락 끝이 하나씩 아려온다. 열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아직도 아홉번이나 더 이렇게 문득 문득 이별을 실감해야 하나보다.

 

갑자기,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던 일본의 봄. 그래,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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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던지기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사람들은 과거라 부르고 때때로 그 과거의 것들 중에서 감성적인 기억들을 일컬어 추억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남기고 이제는 과거라 불리는 시간으로 사라진 동대문구장에서 벌어졌던 마지막 경기 장면들을 우연히 보게되었다. 그 경기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경기가 동대문 구장의 마지막 경기였다니 왠지 갑자기 서러움이 벅차오른다. 그 경기는... 2007년 대통령배 결승전, 서울고와 광주제일고의 경기였다. 고교야구에 커다란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라서 당시에는 잘 몰랐을 귀에 익은 선수들의 이름이 보였다. 먼저 이날 역전홈런을 포함해서 연타석 홈런을 날린 서울고의 3번 안치홍 기아타이거즈에 2차 1순위로 지명되어 올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2009 신인왕의 가장 강력한 후보이다. 그리고 올시든 두산베어스에 역시 2차 1순위로 지명된 허경민. 수비하나만은 최고라는 평가만큼이나 3루쪽 깊숙한 타구를 전성기의 이종범을 연상시키는 빨랫줄같은 타구로 잡아내곤 했다. 이 둘은 이 당시 각각 팀의 유격수였고, 아직 2학년이었다. 이들보다 한 학년 위에는 전국(?)에서 날리는 선배들이 있었다. 광주제일고의 에이스 정찬헌. 대통령배 MVP를 받게 되는 그는 광주제일고의 에이스였지만, 신인 지명에서 연고지인 기아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서울의 엘지에 2차 1순위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기아는 빠른볼을 가진 젊은 투수들이 이미 넘치고 있었기때문에 정찬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정찬헌은 분명 고교 랭킹 넘버를 다툴 훌륭한 투수였지만 그날은 1회에 구원을 나와서 바로 실점을 한 후, 잘던지다가 안치홍에게 역전 홈런을 맞는다. 그날 정찬헌의 상대는 당시 고교랭킹 1위의 투수 이형종이었다. 눈물의 역투로 유명한 이형종의 경기가 바로 이 경기였다. 아무리 초고교급의 투수라고 해도 거듭된 경기들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마운드에 올라서야 상대방을 압도할 수 없다. 게다가 3루수의 결정적인 송구 실책등, 고교야구 다운 실책을 연발하면서 서울고는 하지 않아도 될 실점을 허용하며 경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결국 9대6으로 리드한체 9회를 맞이한 서울고. 창단 첫 우승과 동대문구장에서의 역사적인 마지막 경기의 승리를 거머쥐기 직전 피로와 책임감이 누적된 어린 이형종의 어깨는 흔들리고 만다. 한 점을 내주고.... 아웃카운트는 하나가 남았지만, 이미 이형종의 어깨는 한계에 다다른 시점. 볼넷과 몸에 맞는 공등으로 루상에 차곡차곡 주자들은 쌓이고. 결국 동점을 허용하고 만다. 이형종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져 눈물이 없다해도 충분히 울고 있었다. 2스타라이크에서 던진 마지막 힘을 짜냈을 회심의 투구가 아슬아슬하게 볼판정을 받고, 이형종은 정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원망을 가득담은 표정을 짓고 애써 눈물을 참고 또 참고 있었다. 그 때 그 어린 에이스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일까? 도망칠 곳이 있었다면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을까... 피할 수 없는 상황과 일들에 대해서 이미 그것에 맞서기 위한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을 이겨낼 요령도 강한 마음도 아직은 없었던 어린 에이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 쓸쓸하고 외로운 마운드에서 그는 울면서 공을 던졌다. 나는 이형종이 정말 도망치고 싶었던 그 순간 아무도 원망하지는 않았을것만 같다. 피할수 있었다면 피했겠지만... 그 상황에선 그로서는 울면서 던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것이다. 모든 책임을 스스로 져야하지만 이미 소진되어버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황. 그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눈물이 자꾸만 맘 한켠에 남는다. 그 상황에서, 울면서 던질 수밖에,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서 그의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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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벚꽃, 라일락

바람이 뭉큰 불어왔다 보랏빛 라일락 향기가 났다 고개를 드는 순간 눈 앞은 분홍빛 벚꽃눈이 나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보니 도톰한 아리보리 빛을 머금은 목련잎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목련의 앞뒤로 아직 풍성한 벚꽃과 은은하게 눈부신 라일락이 함께 피어있었다 하얀 바탕에 저마다의 색감을 수줍게 감추고 있었다 벚꽃이 지기도 전에, 목련이 한참일 때에, 라일락이 피어있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나는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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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해도 괜찮아

돕이 얼마전 전화를 해서 물어봤다 야구는 좋아하지만 국가주의를 싫어하는 나는 WBC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뭐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혀 있지만 그냥 귀찮아서 결론만 말하면 나는 WBC를 별로 안좋아한다고 했다. 경기를 본 것도 우리 석민얼힌이가 선발로 나왔던 베네수엘라 경기 그것도 윤석민 들어가고 나서는 안봤지.. 암튼 WBC따위는 제껴두고 드디어 프로야구 개막 사실 프로야구 개막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야구에 정신팔려서 야구기사 찾아보다 하루가 다 갈까봐 걱정하기도 했다(벌써 그러고 있다ㅠㅠ) 암튼 해설자들은 예의 "올시즌은 너무도 치열해서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는 뻔한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고 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개막경기를 볼수없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냥 야구 개막하니까 좋다. 내가 응원하는 기아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할거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다. 기아 꼴찌해도 좋다 그냥. 그냥. 야구 개막하니까 좋다 야구장 가야지. 구경하러 가야지. 김밥싸서 들고 가야지. 맥주사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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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의식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과 조용히 살다가 아무에게도 폐끼치지 않고 싶다는 바램 사이에서 결국 인생은 혼자살아가는 것이라는 믿는 이용석과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소리없이 흐느끼고 싶은 이용석 사이에서 떠나버린 당신과 떠나갈 당신 사이에서 내가 노력을 쏟아부은 사람들과 나에게 노력을 쏟아부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 눈물을 보여준 사람들과 나에게 한숨을 보여준 사람들 사이에서 가지않은 겨울과 오지않은 봄 사이에서 이장혁을 듣고 이소라를 듣고 기형도를 읽고 김연수를 읽고 내가 쌓아온 모든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수 있을만큼 부실하고 모른척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보잘것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픈 각성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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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내 인생의 한 시절이 저물어가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벌써 꽤 오래전, 엇비슷하면서 사뭇 다른 그때처럼... 그것은 단절을 의미하는 거였다. 내가 뻣어온 가지들을 잘라내는일. 잘린 가지 사이에선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새순이 돋기도 하고 잘린면이 썩어 소멸되기도 했다. 새롭게 돋아낸 싹들도 그 전과 결코 같은 모습일 수는 없었다. 잘려나간 가지들마다 아픔은 한가득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건 아픔은 결코 피할 수 없고 다만 예쁘게 잘려나가야만 그부분이 썩지 않고 새롭게 싹이 돋을수 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배우지 못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예쁜 절단면을 만들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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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예전엔 그랬다. 오해라는거 사람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것이니까 그냥 어지간한건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자고, 그러다보면 풀릴 오해들은 풀린다고 오해를 풀려고변명하는 순간 오히려 오해들은 증폭된다고 우리가 상대방의 모든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설혹 모든것을 다 알아도 나머지 하나에서 오해를 발생하고 안다고 하는 것도 결국 각자의 주관이 깊숙히 개입해있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지않을 완벽한 조건은 없다. 또 오해라는 것은 아니땐 굴뚝에서 연기나는법이 없는것처럼 충분히 그런 오해가 발생할만한 정황의 누적속에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는 경우 많은 부분 그런 오해가 가능하게 만든 나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서로간의 신뢰가 이런 오해들에 대해서 방어벽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뢰라는 것이 강력할 때는 핵무기가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정도지만 그렇게 강력한 신뢰도 아무리 오랫동안 두텁게 쌓아온 신뢰도 다 한순간에 산산조각나기도 하는데, 강력했던 신뢰일수록 그것이 무너지고 나면 더 큰 반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럴경우 오해는 암세포처럼 무섭게 퍼져가기 시작한다. 오해라는 것 피할 수 없는 거라 생각하고 그냥 시간이 해결해줄거라 생각했었는데, 좀 안일했다. 뭐 오해야 풀면 그만이지만, 풀릴 오해는 어떻게든 풀리겠지만 내가 주고 있던 신뢰가 결국 이정도였구나 하는 생각이 씁쓸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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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9

참을수 없이 부끄러워, 나의 행동과는 정반대인 글들이, 올바른 글들이 너무 부끄러웠다. 입으로만 떠들어대고 삶은 개판인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착한척이든 뭐든 간에 내가 쓴 글들 또한 나이고 개판으로 살고 있다해도 그 삶 또한 나이고 도대체 서로 연결이 안되는 두 가지의 모습이 다 나에게 속한것이고 사람들이 나의 좋은 면만을 봐주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고 암튼 이제 부끄러움이 채 가신것은 아니지만 이게 나인걸 어쩌겠냐 싶어서 다만 이제는 좀 더 솔직하게 글쓰고 괜히 올바른척 착한척하지 말고 남들 듣기좋은 뻔한말 하지 말고 아는것없이 괜히 아는척 무례하게 쓰지 말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모든것을 가질수 없음을,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인하고 또 잃어버리고 나서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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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

과거를 추억하지도 미래를 기대하지도 않겠다고 그냥 지금 이순간만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던 건 아마도 2003년 쯤부터였을 것이다. 무겁던 다짐들이 무너지고,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굳은 신뢰들이 서로 배반하는 과정을 겪으며 이제 살아갈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곳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여전히도 루시드폴의 노래가 좋은 걸 보면 과거는 나에게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지나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를 가져야겠지... 지나가버린건 어쩌면 시간뿐이고 나는 거기서 한발짝도 자라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니까. 친구가 이장혁 들어보라고 해서 한참 이장혁을 들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버거워 엠피쓰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스멀스멀 한 곡씩 한 곡씩 찾아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피할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애써 도망치려고 해도 결국에는 도망치지 못할 것들이 있다. 그렇더라도 어쩔수 없었다고, 그것이 모든 것에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닐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예의. 그건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지켜야하고 고려해야하고 배려해야하는 것들을 뜻하는 말일것이다. 상황은 언제나 지나고 난 이후에 자각을 불러일으키며 그런 일련의 과정을 다른 말로는 후회라고 할것이다. 아무 부질없는 이름 후회. 이런 면에서 인간은, 아니 나란 존재는 성찰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존재일지도. 내 감정에 취해 돌진하다가 문득 나의 속도를 깨달았을때는 항상 소중한 것들을 지나쳐버린 이후였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과 하나씩 하나씩 이별하면서 살아왔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내가 떠나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것도 아닌데.'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돌이켜보면 모두 내가 떠나보낸것이었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모든 관계는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나는 상처를 덜 주는 방법들에 노력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늦게라도 내가 짊어져야 할 몫, 그리고 나에게 소중했던 시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겠다.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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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이지형과 루시드폴과 언니네이발관이 함께 한 콘서트에 갔다왔다. 살짝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이지형이 토이의 노래를 부른 그 이지형이라는걸 콘서트 시작 조금전에야 알았다ㅠㅠ 언니네이발관 5집을 1번부터 10번까지 순서대로 연달아서 들은건 행운이었다. 내 엠피3은 좀 이상해서 노래를 넣으면 가수이름으로는 대충 정렬되는데 그 안에서 곡의 순서가 마구 섞이는데, 역시 언니네이발관 5집은 순서대로 들어야 한 편의 이야기로 살아나는 듯. 그리고 예상외의 이석원의 개그 센스. 루시드폴은 실물은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키가 크더라. 마이크가 낮아져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노래를 불렀다. 사람이었네를 부를땐 뭐랄까 내가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있는것이 세상의 둘도 없는 축복같았다. 특히 마지막부분의 충만한 사운드는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의 결말과도 같은 느낌. 출소하고바로 루시드폴 3집을 사서 이 노래를 맨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이 다시 물밀듯 밀려왔다. 콘서트를 보는 내내 생각했었는데, 과연 인간이 순간을 간직할 수 있을까? 노래를 들을 때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은 음반이 라이브보다 더 완벽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어쨋든 CD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일뿐. 라이브가 전하는 감동을 간직하지는 못한다. 그건 라이브 앨범에서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가수의 거친 숨소리와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그저 소리가 아니라 공간을 가득채운 일종의 물질성을 가진 개체로 느껴질 때의 느낌은 그 순간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가수가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때마다 그 노래들은 각 각 다른 노래이며 이 세상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노래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하지만 지나버리고 나면, 그건 각자의 기억에 조작되어버린 이른바 추억일 뿐. 그렇다고 추억하는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순간은 그 시간과 그 공간에 존재할 때만이 유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꼭 가수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순간이든. 사람들은 사진으로, 혹은 동영상으로, 혹은 언어적이 표현으로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지만, 그렇게해서 태어난 각각의 기억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이 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것들의 원본이었던 그 순간만은 될 수 없다. 그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과거를 기억하거나 추억하려는 작업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불가능을 인식하는 것과 그럼에도 끊임없이 불가능을 행하는 것은 별개다.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해버린다면 인간됨을 증명할 수 있는 중대한 행위를 멈춰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오만하지 말것이며,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며, 지금 이순간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거다. 순간을 간직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는 우리 인간의 몫은 딱 그 정도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미화할 필요도 없고,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필요도 없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이 순간'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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