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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 <목적없는 수단> 1부 요약

▶ 『목적없는 수단』(조르조 아감벤, 난장)1부 요약 ◀

 

 

1. 삶-의-형태

 

1) 그리스인들에게는 우리가 오늘날 생명vita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하는 단일 용어 없었음.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조에, 개인이나 지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비오스. ‘생명’은 조제와 비오스 사이의 공통된 벌거벗은 전제를 가리키고, 저 공통된 전제를 무수한 삶의 형태 각각 안에 고립시켜버리는 것은 언제든 가능. 반대로 삶-의-형태라는 용어를 통해서 우리는 그 형태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삶, 그것으로부터 벌거벗은 생명 같은 것을 결코 고립시킬 수 없는 삶을 가리킴.

 

2) 그 형태와 분리될 수 없는 삶이란,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와중에 무엇보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이 표현은 무슨 뜻인가? 이 표현은 어떤 삶(인간의 삶)을 정의한다. 이 삶에서는 살아가는 모든 방식, 모든 행위, 모든 과정이 결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항상 무엇보다 삶의 가능성이며, 항상 무엇보다 역량이다. (...) 그러므로 인간은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이며, 인간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삶이 행복에 부여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 자체가 곧 삶-의-형태를 정치적 삶으로 구성한다.

 

3) 이와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권력은 항상 최종심에서는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의 영역을 분리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생명이라는 용어가 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경우는 딱 한 번뿐이다. 생살여탈권vitae necisque potestas이라는 표현이 그 경우인데, 이것은 아버지가 제 자식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생살여탈권은 주권권력의 원초적 중핵을 구성한다. 따라서 토머스 홉스가 주권을 정립할 때 자연상태에서의 삶은 그 존재가 무조건적으로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제한적인 권리)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국가권력을 정의해주는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역량은 결국 어떤 정치적 의지가 아니라, 주권자(또는 법)가 가진 생살여탈권에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존되고 보호될 수 있는 벌거벗은 생명에 기초한다.(성스러운sacer이라는 형용사의 원래 의미)

 

4)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규칙이 됐음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진단이 시의성을 잃지 않은 것은 주권의 감춰진 토대를 구성했던 벌거벗은 생명이 그동안 도처에서 지배적인 삶의 형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예외상태에서 삶은 모든 영역에서 삶의 형태가 단일한 삶-의-형태로 응집되지 못하도록 그 형태 자체를 분리해내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칼 맑스가 말한 인간과 시민의 분열은 이렇게 주권의 궁극적이자 불투명한 담지자인 벌거벗은 생명, 그리고 전적으로 이 벌거벗은 생명에 기초해 있지만 법적-사회적 정체성 등 추상적으로 재코드화된 여러 삶의 형태 사이의 분열로 대체된다.

 

5) 권력체계에서의 의학적-과학적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인 기능을 차지함. 정치적 통제를 목적으로 과학을 빙자하는 사이비 개념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음. 즉, 주권자가 각각의 상황에서 삶의 형태에 대해 조작해왔던 벌거벗은 생명의 추출과 똑같은 추출이 오늘날에는 신체, 질병, 건강에 관한 사이비-과학적 표상에 의해, 또한 삶과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의료화함으로써 대대적이고 일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벌거벗은 생명의 속화된 형태인 생물학적 생명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침적이라는 점에서 벌거벗은 생명과 고통점이 있다. 그리하여 생물학적 생명은 현실의 삶의 형태를 문자 그대로 생존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생물학적 생명은 폭력, 외국인 신분, 질병, 사고 속에서 곧바로 현실화될 수 있는 불분명한 위협마냥 그 생존의 형태 속에 생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이 생물학적 생명은 권력자들의 바보 같은 가면 뒤에서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는 보이지 않는 주권자이다. 권력자들은 이것을 알든 알지 못하든 이 생물학적 생명의 이름으로 우리를 통치한다.

 

6) 정치적인 삶, 즉 행복이라는 관념으로 정향되고 삶-의-형태 안에 응집되는 그런 삶은 이런 분열에서 해방됨으로써만,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엑소더스를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따라서 비국가적인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오늘날 삶-의-형태 같은 뭔가를 파악할 수 있는가? 즉, 살아가는 와중에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곧 역량의 삶이 가능한가?

단지 내가 항상 그저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역량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단지 내가 겪고 이해한 것 속에서 매번의 삶과 이해 자체가 있을 수 있다면, 달리 말해 이런 의미에서 사유가 있을 수 있다면, 삶의 형태는 그 자신의 사실성과 사물성에 있어서 삶-의-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삶-의-형태에서는 벌거벗은 생명 같은 뭔가를 고립시키는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7) 여기서 논하고 있는 사유의 경험이란 항상 공통된 역량의 경험이다. 공동체와 역량은 여지없이 완전히 서로 동화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역량에 공동체의 원리가 내재한다는 것은 모든 공동체가 가진 필연적으로 잠재적인 특성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모든 소통은 무엇보다 이미 현실태로 있는 공통된 것의 소통이 아니라 잠재적인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다. 따라서 근대 정치철학은 사색, 사변적인 삶bios theoreticos을 분리되고 고독한 활동(“혼자의 다른 혼자에 대한 망명”)으로 만들어버린 고전적 사유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 아니라 아베로에스주의,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된 유일하게 가능한 지성의 사유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다.

 

8) 사회적 역량으로서의 지성과 맑스가 말한 일반지성은 이런 경험의 전망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일반지성은 사유의 역량 그 자체에 내재하는 물티투도를 명명한다. 지적 능력, 사유는 삶과 사회적 생산을 절합하는 여타의 다른 삶 중 하나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형태를 삶-의-형태로 구성해내는 통일의 역량이다. 모든 영역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삶의 형태와 분리함으로써만 자신을 긍정할 뿐인 국가의 주권성에 맞서, 지적 능력과 사유는 삶과 그 형태를 끊임없이 다시 묶어주고 삶으로부터 형태가 분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량이다.

 

 

2. 인권을 넘어서

 

1)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난민은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리고 적어도 국민국가와 그 주권의 와해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난민은 오늘날 도래하는 정치공동체의 형태와 그 한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범주이다. 만일 우리가 맞닥뜨린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적인 것의 주체를 대표해 온 근본 개념들(인간, 권리를 가진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인민, 노동자 등)을 지체 없이 포기하고, 난민이라는 이 둘도 없는 형상에서 우리의 정치철학을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

 

2) 난민이 대규모 현상으로서 처음 출현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이다. 그때는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의 붕괴, 그리고 평화조약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질서가 중부․동부 유럽의 인구와 영토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 국민국가를 모델 삼아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세운 새로운 국가조직(예를 들어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구 중 30% 정도가 대개 사문화된 채로 있었던 일련의 국제조약에 의거해 보호받아야만 하는 소수민족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불과 몇 년 뒤에 독일의 인종차별법과 스페인 전쟁을 거치면서 다수의 새로운 난민이 유럽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많은 유럽 국가들이 자국 시민의 귀화국적박탈과 국적박탈을 허용하는 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프랑스는 1915년에 ‘적성국가’ 출신의 귀화시민에 관한 법을 선포했다. 잉어 1922년에는 벨기에가 전쟁 동안 ‘반국가적/반민족적’행위를 저지른 시민의 귀화를 철회했다. 1933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차례였고, 자국 시민들을 모든 권리를 지닌 시민과 정치적 권리가 없는 시민으로 분할한 독일의 뉘른베르크법은 1935년까지도 계속됐다. 이런 법들(그리고 그 결과 생겨나게 된 대량의 무국적자)은 근대 국민국가의 삶에서 어떤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하는 거시자, 인민과 시민이라는 소박한 관념으로부터의 결정적인 해방을 나타낸다.

 

3) 아렌트는 난민 문제에 할애한 『제국주의』의 5장에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우리는 인권의 운명과 근대 국민국가의 운명을 뗄 수 없이 연결시키는 이 정식화를, 국가의 쇠퇴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위축을 함축한다는 방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기에서 역설은 그 무엇보다 인권을 구현해야 할 형상인 난민이 거꾸로 그 개념의 근본적 위기를 표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가정에 기초한 인권 개념은, 이 개념을 앞장서서 외쳤던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순수한 사실(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제외한 여타의 모든 성질과 특정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들과 처음 대면하자마자 파산할 것”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순사한 인간 같은 존재가 들어설 수 있는 자율적인 공간이 국민국가의 정치 질서에 없다는 것은 적어도 다음 같은 사실 때문에 분명하다. 심지어 최선의 사례에서도, 난민의 지위는 항상 귀화 또는 본국송환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조건으로 여겨져 왔다는 사실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안정적인 법적 지위는 국민국가의 권리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4) 1789년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권리선언들의 목표가 초법적인 영원한 가치를 선포해 입법자로 하여금 권리를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그만두자. 이제는 근대 국가에서 수행한 실질적 기능에 따라 그 권리선언들을 이해해야 할 때이다. 사실 무엇보다 인권은 벌거벗은 자연적 생명이 국민국가의 법적-정치적 질서에 등록됐다는 시초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 선언은 구체제의 붕괴에 뒤이어 나타난 새로운 국가질서에 삶이 편입되도록 보장해줬다. 선언을 통해 신민studdito시민cittadino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은 출생, 즉 자연적인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주권의 직접적인 담지자가 됐음을 의미한다.

 

5) 난민이 국민국가의 질서에서 이처럼 걱정스러운 요소를 대표하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난민이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 출생과 국적의 동일성을 깨뜨림으로써 주권의 원초적인 허구/의제를 위기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 난민이라는 주변적인 형상은 국가-국민-영토라는 낡은 삼위일체를 파괴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우리 정치사의 중심적인 형상으로 간주될 만한 가치가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애초 수용소란 난민을 통제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유럽에 세워졌다는 것이며, 강제수용소-집중수용소-몰살수용소로의 계승이 완벽한 진짜 계통을 재현한다는 점이다. 나치가 ‘궁극의 해결책’을 실행하던 때에 드물게도 꾸준히 준수했던 규칙 중 하나는, 유대인과 집시에게서 국적을 완전히 박탈한 다음에 이들을 몰살수용소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녀가 가진 권리가 더 이상 시민의 권리가 아닐 때 지정으로 성스럽다sacro. 고대 로마법에서 그 단어가 가졌던 ‘죽음에 바쳐진’이란 의미에서 말이다.

 

6) 난민 개념을 인권 개념으로부터 과감하게 해방시켜야 한다. 난민은 국민국가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위기에 빠뜨리는 동시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범주상의 혁신을 위한 터를 닦아주는 한계 개념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산업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안정적으로 거주하는 대규모의 비시민들이다. 이들은 국적을 취득할 수도 본국으로 송환될 수도 없으며, 또한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가끔이 비시민들이 출신국의 국적을 갖기도 하지만, 본국의 보호를 누리고 싶어 하지 않을 때부터 이들은 마치 난민처럼 ‘사실상 무국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7) 주지하다시피,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된 선택사항 중 하나는 예루살렘을 어떤 영토적 분할도 없이 동시에 다른 두 국가조직의 수도로 삼는 것이었다. 이 방법에 내포된 상호간의 바깥영토(혹은 오히려 비영토성)라는 역설적 조건은 새로운 국제관계 모델로 일반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국민국가가 불확실하고 위협적인 경계선으로 분리되는 대신 두 정치공동체가 똑같은 지역에서, 일련의 상호간의 바깥영토를 통해 절합되어 상대 공동체로 서로 엑소더스하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상호간의 바깥영토에서 주도적 개념은 더 이상 시민의 법/권리jus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피난처refugium가 될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우리는 유럽을 불가능한 ‘국민들의 유럽’이 아니라, 오히려 비영토적 공간 또는 상호간의 바깥영토를 위한 공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 유럽 국가의 모든 거주민(시민과 비시민)은 엑소더스나 피난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럽인의 지위란 (물론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엑소더스 중에 있는’ 시민을 뜻하게 될 것이다.

 

 

3. 인민이란 무엇인가?

 

1)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용어의 정의 자체는 동정심에서 생겨났으며, 이 말은 불운과 불행의 동의어가 됐다. 로베스피에르는 ‘인민, 이 가련한 자들이 나에게 갈채를 보내네’라고 말했으며, 심지어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감상적이지 않았고 가장 명석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시에예스조차도 ‘늘 불쌍한 인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장 보댕에게 이 개념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이중적이었다. 보댕은 민주주의나 인민국가를 정의한 『국가론』의 어느 장에서 주권을 보유하는 인민체peuple en corps와 서민menu peuple을 대립시켰다. 지혜는 이 후자를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제하라고 권고했다.

 

2) 우리가 인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대립하는 양극 사이를 오고가는 변증법적 진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에는 총체적이자 일체화된 정치체로서의 (대문자) 인민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의 부분적이자 파편화된 다수로서의 (소문자) 인민이 있다. 또한 한편에는 나머지라곤 없는 듯이 보이는 포함적 개념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배제적 개념이 있다. 한 쪽 극에는 주권과 일체화된 시민들의 완전한 국가가 있고, 다른 쪽 극에는 비참한 자․억압받는 자․정복당한 자로 구성된 금지구역이 있다. (...) 인민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본래의 정치구조를 규정하는 짝패 범주들을, 즉 벌거벗은 생명(소문자 인민)과 정치적 실존(대문자 인민), 배제와 포함, 조에와 비오스를 손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인민이라는 개념은 그 안에 근본적인 생명정치적 균열을 이미 언제나 담고 있다. 인민은 자신이 이미 언제나 포함되어 있는 전체에 속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전체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민 개념은 정치 무대에 불려와 작동되는 매 순간 모순과 아포리아를 발생시킨다. 인민의 실현은 자신의 폐지와 존재하기 위해서 인민은 자신의 대립물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해야만 한다.(그러므로 노동운동 특유의 아포리아는 인민을 향하는 동시에 인민의 폐지를 목표로 한다.) (...) 사실상 맑스가 말한 계급투쟁은 모든 인민을 분할하는 내부의 전쟁이자, 계급 없는 사회나 메시아적인 왕국에서 (대문자) 인민과 (대문자) 인민이 일치하게 될 때에만, 정확히 말해서 어떤 인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에만 종식되는 내부의 전쟁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배제된 자들인 인민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인민을 분할하던 분열을 메워보려는 집요하고도 체계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이런 시도는 상이한 양상과 지평에 따라 우파와 좌파,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들 모두가 단이하며 분할되지 않는 하나의 인민을 창출하려는 계획에 협력하도록 만들어왔다.

이렇게 보면 나치 독일에서 이뤄진 유대인 몰살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국민적인 정치체로의 통합을 거부한 인민인 유대인들은 (사실상 유대인의 동화는 실제로는 시늉에 불과하다고 간주됐다) 무엇보다 인민, 즉 근대성에 의해 그 내부에서 불가피하게 창출될 수밖에 없었으나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하기 힘든 존재가 되어버린 벌거벗은 생명의 전형인 동시에 살아 있는 상징이다. 우리는 독일 민족Volk(그 무엇보다도 더 일체화된 정치체로서의 인민을 보여주는 훌륭한 전형)이 (대문자) 인민과 (대문자) 인민을 분리하는 내부 투쟁의 최종 국면으로서 유대인들을 영원히 말살하고자 했던 그 분명한 광기를 인식해야만 한다. 궁극의 해결책을 통해 나치즘은 이 용납할 수 없는 어둠으로부터 서구의 정치무대를 막연하고 쓸데없이 해방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원초적인 생명정치적 균열을 메우는 인민으로서의 독일 민족을 만들어냈다(나치의 우두머리들이 유대인과 집시를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이 사실상 다른 유럽의 인민에게 봉사하고 있다고 그렇게 집요하게 되풀이해 주장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근대적인 생명정치가 “벌거벗은 생명이 있는 곳에 (대문자) 인민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에 따른 원리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원리는 “(대문자) 인민이 잇는 곳에 벌거벗은 생명이 있을 것이다”라는 그 반대 정식에서도 유효하다고 곧 덧붙여 말할 수 있다. 유대인이 그 상징인 (소문자) 인민을 제거함으로써 메울 수 있다고 여겼던 균열이 이처럼 새롭게 재생산됐으며, 이에 따라 전체 독일 인민을 죽어야만 하는 성스러운 생명이자 (정신적 질병과 유전적 질병의 보균체들을 제거함으로써) 무한히 정화되어야만 하는 생물학적 몸으로 바꿔놓았다.

 

 

4. 수용소란 무엇인가?

 

수용소란 무엇인가? 수용소의 법적-정치적 구조는 무엇인가? 어째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런 물음은 수용소를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 과거에 속하는 하나의 변종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정치공간의 감춰진 모체이자 노모스nomos로 바라보게 해줄 것이다.

수용소란 일반적인 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예외상태와 계엄령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치 법률가들은 프로이센에서 유래한 보호검속 제도를 간혹 예방적인 치안조치로 간주했다. 형법상 처벌받아야만 하는 행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국가안전에 대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개인을 ‘구류’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보호검속에서 문제가 된 자유의 ‘보호’는 아이러니하게도 긴급사태의 특징인 법의 중지로부터의 보호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은 이제 이 제도가 자신이 근거하는 예외상태에서 이탈해 정상상태에서도 효력을 지닐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수용소란 예외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열리는 공간이다.

주권권력이 예외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수용소는 예외상태가 안정적으로 실현되는 구조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지배를 지탱하고 있는 원리이자 여간해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원리, 즉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원리가 수용소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봤던 의미에서 수용소는 법이 전면적으로 중지되고, 거기에서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예외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대한 훨씬 더 정직하고 유용한 물음은, 인간 존재가 어떤 법적 절차와 정치적 장치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렸기에, 더 이상 범죄처럼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이들에 대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지점(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에 이르게 됐는가를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다. 만일 수용소의 본질이 예외상태의 물질화이자 또 그 결과로서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위한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이런 구조가 창출될 때마다 매번 잠재적으로 수용소와 대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수용소가 탄생한 것은 근대성의 정치적 공간 자체를 결정적인 방식으로 특징짓는 사건처럼 보인다. 생명(탄생 또는 국민)을 자동으로 등록해주는 규칙이 매개하는 장소확정(영토)과 질서(국가)의 기능적 연관을 토대로 세워진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체계가 지속적인 위기에 들어섰을 때, 그리고 국가가 국민의 생물학적 생명에 대한 관리를 자신의 직접적인 임무로 떠맡기를 결정했을 때, 바로 이때 수용소가 탄생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수용소는 시민권이나 시민의 국적박탈에 관한 새로운 법이 공표된 것과 동시에 나타났다. 본질적으로는 질서의 일시적 중지였던 예외상태가 이제 새롭고 안정적인 공간 배치가 되며, 바로 이곳에 벌거벗은 생명이 거주한다. 그리고 벌거벗은 생명은 점점 더 질서에 등록될 수 없게 된다. 탄생(벌거벗은 생명)과 국민국가 사이에서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간극은 우리 시대 정치의 새로운 사실이며, 우리는 바로 이 간극을 ‘수용소’라고 부른다. 장소를 벗어난 장소확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용소는 우리가 그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정치의 감춰진 모체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변신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용소는 국가-국민(탄생)-영토라는 오래된 삼위일체를 깨뜨리면서 그것에 덧붙는 네 번째이자 분리 불가능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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