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미래로의 귀환, 로스트 LOST

 

양돌규



그런데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내게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건 재난에의 직면이다. 꿈 속에서 물을 보면 오줌을 싸곤 했는데, 그건 ‘물바다’의 이미지와 함께 했다. 처음엔 무언가를 엎지르는 것에서 출발해서 나중엔 해일과 홍수를 동반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저강도 엎지르기에서 고강도 쓰나미로. '추락 墜落'도 있었다. 모든 추락, 예컨대 침대에서 떨어지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든, 아니면 놀이기구나 케이블카, 엘리베이터, 혹은 비행기 등등으로부터 떨어지는 공포는 지금도 여전하다. 추락은 다양한 국면과 장소로 변주되면서 내 악몽의 고전적 주제로 여전히 반복 상영되고 있다. 화재도 있다. 아무리 ‘불이야!’를 외쳐도 불자동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인 소방관 대신에 도둑과 강도, 간첩과 무장공비, 탱크들이 등장하기도 했고, 한글을 깨우치고 구구단을 외우며 방정식을 풀 나이가 되는 동안 이 꿈들은 서로 이종교배하고 돌연변이를 낳아 총체적 난관과 퓨전 악몽으로 진보하며 약진했다.

하지만 이건 모두 꿈 얘기일 뿐이다. 현실에서 공포스러운 상황을 야기하는 ‘원인’은 똑똑하고 영민한 (혹은 그렇게 믿어지는) 자들에 의해 대개 밝혀지기 마련인데 그걸 두 범주로 크게 분류하자면 ‘사고’ 아니면 ‘의도된 행위의 결과’일 따름이다. 신문들은 그래서 사고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둘러싸고 연일 기사를 싣곤 한다. 그 기사들에 등장하는 어휘들도 대개 정해져 있는데, 그건 그러한 추락을 바라보는 시선을 제한한다. 예컨대 이런 단어들이다. 인재, 예고된 참사, 안전 불감증 등등. 이는 ‘사고’의 범주에 속하는 단어들이다. 하이재킹, 공중 폭파, 미사일 공격 등등은 ‘의도된 행위의 결과’ 즉 테러의 결과에 속하는 단어들이다. 내게는 83년 소련의 KAL 007편 공격과 87년의 KAL기 폭파 사건이 그런 연상의 단초들로 작용하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추락’을 보도하는 태도는 모든 ‘재난’을 보도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다. (사실 비행기의 추락 같은 건 ‘재난’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재난을 다루는 방식

저널리즘과 달리 재난을 다루는 장르가 있으니, 그 중 하나는 영화다. 재난의 공포는 내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고 거창하고도 거창하게 인류적 차원에서 잠재하는 위협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재난이 장르가 될 수 있으랴.

잘 알다시피 재난 영화는 그것이 장르인 이상 몇 가지 공식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 외부의 거대한 힘과 위협이 있기 마련이다. 고질라, 킹콩, 공룡, 상어, 아나콘다와 같은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물 혹은 동물 같은 게 하나라면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이 그 둘이고, 거대한 자연재해나 화재 같은 게 그 셋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 외부에 존재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그 조건 위에서 영화는 펼쳐진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은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인간의 야비함, 비겁함, 굴종성, 배신 등의 부정적인 속성에서부터 용기, 의지, 낙관, 현명, 지혜 등의 긍정적 속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긍정적 덕목은 으레 소수의 사람들의 전유물로 연출되고 그 결과 살아남는 자는 그들뿐이다. 이때 재난은 영웅 탄생의 배경으로 전체 그림은 완성되는 것이다.



재난영화의 공식을 넘어서

[로스트]는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가 나뒹구는 남태평양의 한 섬에 생존한 48명의 사람들의 얘기이다. 재난 상황. 벌써 이 기본적인 설정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예상한다. 요컨대 영리한 관객들인 것이다. 혼자서 감독, 작가, 주연, 조연 등을 다 해내는 영리인들의 [로스트]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썸씽’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인물은 소수의 영웅일 것이다. 그 영웅들은 막강한 개인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훌륭하다. 머리 속에 각인된 재난영화의 공식들은 그들의 화려한 컴백으로 대미의 결말을 장식하게끔 되어 있다. 영웅의 영도 뒤에는 열등하거나 사악한 이들의 죽음을 배경으로 더욱 빛이 날 것이며, 캠페인 커플의 탄생으로 결말이 날 것이다.

하지만, [로스트]는 영리한 관객이 사실 영리하지 않다는 것, 사실은 그 영리가 세뇌된 영리임을 확인시켜 준다. [로스트]에는 사악한 이가 없다. 또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영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 [로스트]의 초입에서는 익숙한 문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건 영리하다고 착각하는 관객들을 유인하여 우롱하는 일종의 미끼로 작용하고 회를 거듭할수록 그 우롱은 우리로 하여금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게끔 한다.

물론 [로스트]가 미국식 드라마의 모든 문법을 파괴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잭이나 케이트, 로크가 다른 이들보다 중심에 서 있는 건 사실이고 그들 나름대로의 능력으로 이들의 생존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슨 슈퍼한 스타즈들처럼, 예컨대 [타워링]의 스티브 맥퀸이나 [인디펜던트 데이]의 대통령처럼 종횡무진 신화적 액션을 펼치는 건 아니다. 요컨대 인간이라는 한계 내에서의 활약인 것이다. 유일하게 악한처럼 등장하는 소이어도 알고 보면 사연 많은 불행했던 한 사내였음을 한 꺼풀씩 보여준다. 가공할 만한 ‘썸씽’도 예를 들어 고질라에서처럼 그 어마어마한 덩치로 빌딩과 차량, 인간들을 깔아뭉개는 초특급 3D효과와 파워풀한 효과음으로 위용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한 명씩 죽어나가는 설정이 없다는 점 역시 특징적이다. 재난영화는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만 명까지 쓸어버린다. [딮임팩트] 같은 영화는 혜성의 지구 충돌로 거의 전 인류를 절멸시켜 버리기도 하고 [투모로우] 역시 북미 대륙의 대부분을 동토로 만들어버린다. 반면 [로스트]는 비록 희생자가 없지는 않지만 슈팅 게임처럼 하나씩 죽어가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로스트]가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 다른 데에 있기 때문인 듯하다.



제로섬 생존을 넘어 코뮨의 살아남기로

재난영화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에서 내/외부의 구분은 매우 중요한 갈등 축을 구성한다. 소련이나 사회주의권과 같은 외부의 적은 그리하여 미국 영화에서 숱하게 다루어져 왔다. 킹콩 시대나 타워링 시대에도 붉은 제국 소련은 그것 못지 않게 위협적이었고 또한 가상적이기보다는 실재적이었다. 코 앞의 적을 두고 외계인을 불러들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적은 중요하다. 적이 있어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적은 ‘우리’라는 가상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소련이라는 적의 존재는 자유세계의 경찰 국가로서의 미국을 구성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낫과 망치가 아로새겨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진 이상, 외부 없는 제국이 등장한 이 시대에 적은 가상적으로밖에 구성할 수 없게 되었다. 땅 밑에서 가공할 괴물을 일으켜 세우고 1억 하고도 몇천만 년 전의 쥬라기로부터 공룡을 부활시키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적이든 가상적이든 간에, 외부의 힘으로서, 즉 우리 바깥의 어떤 위협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 적의 자장(磁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무엇’의 ‘외부’로의 ‘지향’

반면 [로스트]는 바깥의 어떤 위협 자체가 불분명하다. 이 섬이 어떤 섬인지, 숲 속의 괴물 같은 존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생존과 살아남기를 위협하는 게 그렇게 단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개인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자기 배속의 위장일 지도 모른다. 집단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서로간의 반목과 대립일 지도 모른다.

[로스트]의 ‘살아남기’에는 우선 ‘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잃어버렸다는 의미의 ‘로스트’가 제목인 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 이 드라마의 중심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는 그래서 이 섬에 오기까지의 각자가 가졌던 사연을 다룬다. 그러나 [로스트]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다는 식의 실존주의적인 혹은 구도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개인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는 드라마 [로스트]는 적을 마주하고 우리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찾는 저마다의 사연에 다가갈수록 섬에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간의 결속과 힘을 강화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요컨대 ‘우리’의 ‘내부’로의 ‘심화’.

그 ‘우리’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내적 갈등과 대립은 ‘우리’의 파멸, 즉 더 이상 우리가 아닌 것으로 귀결되기 보다는 더욱 풍부한 우리를 구성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이 점도 [로스트]가 보여주는 특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에피소드 6에서는 동굴팀과 해변팀으로 사람들이 나뉘는데,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당연히 이 분열은 한 쪽의 몰살로 귀착될 것이다. 위기의 상황은 ‘단결’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고 흩어지면 죽고 뭉쳐야 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공 편에 줄을 서야 한다.) 하지만 이후 에피소드에서 이 ‘분열’은 ‘죽음의 분열’이라기보다 ‘확장의 분열’로 그려진다. 동굴팀은 물을 해변팀에 가져다주고 해변팀은 이 섬을 벗어나기 위해 구조 요청의 모닥불을 피우고 배를 만든다. 더구나 이 ‘나뉨’은 구조와 수색, 탐사와 사냥을 위해서 수시로 사람들이 새로운 팀을 이룬다는 점에서 가변적일 뿐만 아니라 유동적이다. [로스트]의 서바이벌은 제로섬 게임의 서바이벌이 아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한 코뮨의 방식이다.

물론 [로스트]도 숲 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열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방영된 지금에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설령 그것이 공룡, 고질라와 같은 것일지라도 [로스트]가 쥬라기공원과 다르다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다. 그것이 코뮨의 미래와 생존에 위협적인 힘으로 작동된다면 코뮨은 그것에 대항하는 일종의 전쟁기계로 자신의 구성을 탈바꿈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코뮨은 전쟁을 위한 기관이 애초부터 아니다. 죽음을 부르는 전쟁기계는 삶을 위한 코뮨으로서는 예외적인 상황에 취하는 예외적 양태일 뿐이다.

로스트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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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의 로스트 클럽 모든 에피소드와 자막을 다운 받을 수 있는 곳이다.
ABC의 로스트 페이지
KBS의 로스트 페이지 각 에피소드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KBS에서는 토요일 1시 10분에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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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13:57 2006/11/07 13:57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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