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주식시장과 반도체 업계가 크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AIDC)의 핵심 거점으로 꼽히는 텍사스주에서조차 민주당 소속 주지사와 의원이 당선되자, 시장에 때아닌 공포가 덮쳤습니다. 민주당 특유의 친환경·전력 규제로 인해 미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이 줄어들고, 결국 그곳에 들어갈 한국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블룸버그>는 '미 선거 여당 참패 후 급변을 맞은 AI 데이터센터 열풍'이라는 기사를 통해 데이터센터 규제 공약을 내건 민주당 후보들이 대거 승리하면서, 빅테크 기업들의 AI 데이터센터 확장 계획에 큰 제동이 걸렸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국내 일각에서는 "우리 반도체 산업을 위해서라도 텍사스는 공화당이 이겼어야 했다"는 해괴한 탄식까지 흘러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특성과 현재의 수급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내놓는 근시안적 판단에 불과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민주당의 승리에 따른 데이터센터 건설 속도 조절이 이뤄진다면 한국 반도체 기업에 악재가 아니라, 오히려 폭증하는 수요를 적당히 식혀서 오랫동안 누릴 수 있게 만들어준 장기 호황의 축복으로 봐야 합니다. 왜 그런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더 달라고 해도 못 파는 시장, 주문이 조금 줄어든들 무슨 상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현재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수요가 아니라 공급에 의해 실적이 결정되는 극단적인 공급자 우위 상황이란 점입니다.
생성형 AI 열풍 이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퉈 서버 증설에 나서면서 메모리 3사(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생산 능력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특히 AI 시대의 핵심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은 일반 D램과 비교해 같은 용량을 만들 때 칩 면적이 2배 이상 크고 공정이 복잡해, 웨이퍼당 생산량이 일반 D램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는 이른바 '다이 페널티(Die Penalty)'가 발생합니다. 즉, HBM 생산 비중을 늘릴수록 전체 메모리 공급량은 오히려 줄어드는 구조적 병목이 생기는 겁니다.
수요는 연달아 폭발하는데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니 메모리 가격이 과거 저점 대비 9배나 폭등하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선두 기업의 HBM 물량은 이미 향후 2~3년 치 주문이 완판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공장을 빨리 지으면 될까요? 반도체 공장(팹·Fab) 하나를 새로 짓고,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핵심 장비를 발주해 들여와 수율을 안정화하는 데는 최소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쉽게 말해, 하루에 반도체를 100개밖에 못 만드는데 빅테크 기업들이 몰려와 하루에 200개를 달라고 줄을 서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미국 민주당이 환경과 전력 문제로 데이터센터 규제를 강화해 빅테크들의 주문량이 200개에서 150개로 줄어든다 한들, 우리 기업이 하루에 만들어 파는 수량은 어차피 100개로 똑같습니다. 생산 시설을 늘리는 데는 어차피 2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하고요.
반도체 기업이 가장 무서워하는 '과잉 투자 후 폭락'을 막아주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민주당이 압승했다고 해서 미국의 AI 패권 경쟁이나 데이터센터 건설 자체가 멈추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민주당의 정책 기조는 데이터센터를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막대한 전기를 먹는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 '친환경 에너지를 써라', '지역 전력망 부담을 해결하고 지어라'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겠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되면 빅테크 입장에서는 당장 올해 무리해서 지으려던 데이터센터 10개 중 7개만 올해 짓고, 나머지 3개는 인허가와 전력 문제를 해결하며 내후년에 짓게 될 겁니다. 10개 중 5개만 먼저 짓고 나머지를 그 다음으로 미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반도체 수요가 증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이연되는 효과가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 반도체 기업에는 천군만마와 같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역사상 수많은 기업을 도산으로 내몰았던 가장 무서운 시나리오는 '단기 수요 폭발 →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공장 증설 → 충분한 공급 → 급격한 수요 절벽 → 재고 누적과 가격 폭락으로 인한 대규모 적자'로 이어지는 악순환, 즉 반도체 사이클이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인 데다 규격과 성능이 표준화되어 있어 제조사별 차별화가 어렵습니다. 철저히 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등락하기 때문에 이제껏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 이 가혹한 폭락장 속에서 독일의 키몬다와 일본의 엘피다 등 체력이 약한 기업들이 하나둘 무너진 끝에 지금처럼 메모리 제조사가 3곳만 남게 된 겁니다. 가까운 예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의 특수가 끝난 직후인 2023년, 수요 절벽과 재고 폭탄이 겹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규모의 연간 영업적자를 기록하며 최악의 한 해를 겪었던 사실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만약 아무런 규제 없이 향후 1~2년 안에 데이터센터가 무분별하게 난립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기업들도 그 단기 폭증에 맞추느라 무리해서 공장을 늘릴 텐데, 그러다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한순간에 끝나면 2023년보다 훨씬 더 처참한 후폭풍을 맞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미국의 규제가 적절한 과속방지턱 역할을 해주면 데이터센터가 수년에 걸쳐 천천히, 꾸준히 지어지게 됩니다. 메모리 기업들 역시 무리한 공장 증설 없이 현재의 높은 가격과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될 겁니다. 단기적으로 감당 못 할 만큼 터지는 버블보다, 공급 속도에 맞춰 3년 갈 호황이 5년, 10년 가는 장기 우상향 구조가 우리 반도체 기업에는 훨씬 유리한 겁니다.
전력 효율 규제는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는 강력한 무기
여기에 더해 미국 의회와 주 정부가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와 탄소 배출을 강하게 압박할수록, 빅테크 기업들은 전기를 덜 먹으면서 성능은 좋은 반도체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데이터센터 운영 비용에서 서버 가동과 냉각에 들어가는 전력 비용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며, AI 서버 한 대가 쓰는 전체 전력 중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만 20~30%에 달합니다. 구형 메모리를 쓰면 당장 막대한 전기 요금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강화된 환경 규제 기준조차 맞추기 어렵습니다. 결국 빅테크들은 가격이 좀 비싸도 기존 대비 전력 소모를 30~50%까지 줄여주는 최신 세대 HBM이나 저전력 D램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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