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처럼 양당제를 하는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과 견주어도 우리가 앞선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국에는 국정조사를 통한 의회의 대통령 견제 기능이 살아 있고 사법부의 대통령 견제 기능도 살아 있다. 정보기관과 검찰,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장치도 우리보다 훨씬 더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있다. 여기에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재벌체제다. 총수 한 사람이 적은 지분으로 수십 개 회사를 실효 지배하는 이 구조는 우리보다 앞선 어느 선진국에도 없다.
40년 동안 딱 하나가 바뀌지 않았다
1987년 이래 40년 동안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경제 규모도, 산업의 수준도, 문화의 위상도, 시민의 권리의식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유독 하나가 바뀌지 않았다. 헌법과 정치관계법이다. 승자독식 선거제와 거대양당의 적대적 공생 정치, 제왕적 대통령제와 제왕적 대법원장제가 40년 전 그대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일부였던 정보기관 개혁은 문재인 정부 때 불완전하게나마 이루어졌다. 검찰개혁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라는 형식으로 올해 간신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사 인사권을 독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제기조차 없었다. 특별사법경찰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없앤 것은 잘한 일이나, 특사경의 수사역량을 강화하고 독립 직렬로 세우는 일에는 아무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
사법개혁은 이재명 정부의 민주당이 추진해 대법관을 증원하고 재판소원을 인정하고 법왜곡죄를 도입했다. 시민의 사법 참여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언론개혁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선에서 멈췄다. 재벌개혁은 정부 첫해에 상법을 세 차례 개정해 조금 나아갔으나 더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선거제 개혁은 이야기 자체가 없다.
두 번의 혁명을 치르고 얻은 것이 이만큼이다
이 목록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두 차례 시민혁명을 거치고서야 간신히 이만큼이 진행되고 있다. 거기까지다. 개헌은 지금 같아서는 국민의힘이 무조건 반대 방침이라 무망하다. 간신히 하더라도 국힘당이 쪼개지지 않는 이상 하나마나 개헌을 넘어서기 어렵다.
앞에 놓인 과제들은 지금까지의 과제보다 훨씬 어렵다. 삼남 지역에서 진행 중인 초첨단 메가프로젝트, 집값 안정을 위한 부동산 정책, 수도권 단극화를 막기 위한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기다린다. 노동과 의료, 교육과 연금 같은 중장기 개혁 과제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손을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다. 180석 넘는 절대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왜 손을 대지 못하는가. 이 과제들은 모두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이어서 오랜 협상과 폭넓은 합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승자독식 선거제가 만들어 내는 양당 대결 구도에서는 그런 협상도 합의도 불가능하다. 5년 단임 대통령 한 사람의 임기 안에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다음 정권에서 뒤집히거나 둘 중 하나다. 중장기 개혁은 애초에 이 정치제도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남은 개혁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에 있다. 이재명 정권이 선거제 개혁과 정치개혁, 국회개혁을 하지 않는 한, 더 할 수 있는 개혁이 없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도 능력의 문제도 아니다. 제도의 문제다. 정치제도가 감당할 수 있는 개혁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지금 정부는 그 한계선에 이미 닿았다.
스스로 국민주권정부라고 이름 붙인 정부라면 바로 이 일을 해야 한다.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주권자가 자기 대리인을 뽑는 규칙과 그 대리인이 일하는 규칙을 스스로 정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그 규칙을 대리인이 정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규칙을 자기가 만드는 국회의원과 거대양당의 셀프입법특권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국민주권은 이름뿐이다.
우리나라가 헌법과 정치관계법을 고치지 못하는 한,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게 어렵다. 경제 규모로도, 문화의 힘으로도, 시민의 역량으로도 우리는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출생률이나 양극화의 유턴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을 이룬 나라이지만 기쁨을 잃은 국민들이 늘어난다. 지금의 제도로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난망하다. 정치가 시민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
능선의 기준을 다시 정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8부 능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기준을 분명히 해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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