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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6부 능선에 있을 뿐이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kwaknh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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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 입력 2026.10.26 15:35

  • 수정 2026.10.26 15:38

  • 댓글 1

민주헌정 발전 수준 판단 2단계 낮추는 이유

시민의식과 역량 못 따라가는 제도 수준 때문

87년 헌법은 유신과 전두환 헌법 잔재 남아

헌법과 정치관계법 못 고치면 나아갈 수 없어

민주지수 앞선 나라들 비례대표제·다당제 택해

제왕적 대통령제·대법원장제 40년 전 그대로

대통령 5년 단임제로는 중장기 개혁 감당못해

나는 윤석열을 탄핵하고 정권교체를 이룬 직후 감격에 겨워 우리 헌정이 이미 8부 능선에 이르렀다고 썼다. 그 판단을 거둔다. 지금 다시 보면 우리는 간신히 6부 능선을 넘었을 뿐이다. 지난 10년간 두 차례 시민혁명을 겪고 대통령을 두 번 파면하고 그때마다 세계가 놀란 시민의 힘을 보여 주고도 그렇다. 진단을 바꾼 까닭은 하나다. 나는 당시 지나친 낙관과 흥분 속에서 시민의 수준을 제도의 수준으로 잘못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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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식과 시민역량만 놓고 보면 우리는 이미 8부 능선을 넘었다. 광장의 규모와 질서, 투표장의 열기, 부정한 권력을 끝까지 응징하는 집요함에서 우리를 앞서는 나라를 찾기 어렵다. 헌법과 정치관계법으로 눈을 돌리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 제도는 1987년 헌법에 멈춰 서 있고 그 87년 헌법은 80년 전두환헌법과 72년 이른바 유신헌법의 잔재를 여기저기 갖고 있다. 시민은 앞서 가는데 제도가 뒤에서 붙드는 구조가 50년 넘게 이어지는 셈이다. 내가 8부 능선에 왔다고 한 것은 시민의 성취를 제도의 성취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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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나라들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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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지수에서 우리보다 앞서는 나라들을 보자.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과 핀란드,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위스와 독일이 거기 있다. 이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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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국가원수와 행정수반이 분리되어 있다. 우리 대통령처럼 국가원수와 행정수반, 국군통수권자까지 한 사람이 겸하는 제왕적 존재가 없다. 의회는 소선거구 승자독식이 얼씬도 하지 못하는 대선거구 비례대표제로 구성되고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소수당이 원내에 들어가 입법에 참여하므로 정치관계법에서도 양당제 국가와 달리 셀프입법의 폐해가 크지 않다. 거대 정당에게 유리한 규칙을 거대 정당이 짬짜미해서 만들지 못한다. 정보기관과 검찰, 경찰 같은 권력기관도 정권의 입김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된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18일 국회에서 열린 4월 임시국회 제6차 본회의에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 등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관 법안을 상정하고 있다. 2026.4.18 연합뉴스

우리처럼 양당제를 하는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과 견주어도 우리가 앞선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국에는 국정조사를 통한 의회의 대통령 견제 기능이 살아 있고 사법부의 대통령 견제 기능도 살아 있다. 정보기관과 검찰,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장치도 우리보다 훨씬 더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있다. 여기에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재벌체제다. 총수 한 사람이 적은 지분으로 수십 개 회사를 실효 지배하는 이 구조는 우리보다 앞선 어느 선진국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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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딱 하나가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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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래 40년 동안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경제 규모도, 산업의 수준도, 문화의 위상도, 시민의 권리의식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유독 하나가 바뀌지 않았다. 헌법과 정치관계법이다. 승자독식 선거제와 거대양당의 적대적 공생 정치, 제왕적 대통령제와 제왕적 대법원장제가 40년 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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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대통령제의 일부였던 정보기관 개혁은 문재인 정부 때 불완전하게나마 이루어졌다. 검찰개혁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라는 형식으로 올해 간신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사 인사권을 독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제기조차 없었다. 특별사법경찰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없앤 것은 잘한 일이나, 특사경의 수사역량을 강화하고 독립 직렬로 세우는 일에는 아무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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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은 이재명 정부의 민주당이 추진해 대법관을 증원하고 재판소원을 인정하고 법왜곡죄를 도입했다. 시민의 사법 참여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언론개혁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선에서 멈췄다. 재벌개혁은 정부 첫해에 상법을 세 차례 개정해 조금 나아갔으나 더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선거제 개혁은 이야기 자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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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혁명을 치르고 얻은 것이 이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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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록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두 차례 시민혁명을 거치고서야 간신히 이만큼이 진행되고 있다. 거기까지다. 개헌은 지금 같아서는 국민의힘이 무조건 반대 방침이라 무망하다. 간신히 하더라도 국힘당이 쪼개지지 않는 이상 하나마나 개헌을 넘어서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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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놓인 과제들은 지금까지의 과제보다 훨씬 어렵다. 삼남 지역에서 진행 중인 초첨단 메가프로젝트, 집값 안정을 위한 부동산 정책, 수도권 단극화를 막기 위한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기다린다. 노동과 의료, 교육과 연금 같은 중장기 개혁 과제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손을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다. 180석 넘는 절대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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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손을 대지 못하는가. 이 과제들은 모두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이어서 오랜 협상과 폭넓은 합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승자독식 선거제가 만들어 내는 양당 대결 구도에서는 그런 협상도 합의도 불가능하다. 5년 단임 대통령 한 사람의 임기 안에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다음 정권에서 뒤집히거나 둘 중 하나다. 중장기 개혁은 애초에 이 정치제도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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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남은 개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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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에 있다. 이재명 정권이 선거제 개혁과 정치개혁, 국회개혁을 하지 않는 한, 더 할 수 있는 개혁이 없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도 능력의 문제도 아니다. 제도의 문제다. 정치제도가 감당할 수 있는 개혁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지금 정부는 그 한계선에 이미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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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국민주권정부라고 이름 붙인 정부라면 바로 이 일을 해야 한다.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주권자가 자기 대리인을 뽑는 규칙과 그 대리인이 일하는 규칙을 스스로 정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그 규칙을 대리인이 정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규칙을 자기가 만드는 국회의원과 거대양당의 셀프입법특권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국민주권은 이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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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헌법과 정치관계법을 고치지 못하는 한,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게 어렵다. 경제 규모로도, 문화의 힘으로도, 시민의 역량으로도 우리는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출생률이나 양극화의 유턴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을 이룬 나라이지만 기쁨을 잃은 국민들이 늘어난다. 지금의 제도로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난망하다. 정치가 시민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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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의 기준을 다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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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무엇을 해야 8부 능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기준을 분명히 해 두겠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민주노총 정치개혁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5.9. 연합뉴스

첫째, 각급 의회 선거제를 모두 비례대표제로 바꾸어야 한다. 국회만이 아니라 광역의회와 기초의회까지 그렇다. 표의 비례성이 확보되고 소수당이 원내에 들어가야 다당제가 서고, 다당제가 서야 합의정치가 가능해지며, 합의정치가 가능해야 중장기 개혁을 감당할 수 있다. 앞선 나라들이 예외 없이 이 순서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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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통령과 대법원장의 제왕성을 빼내는 일대 개헌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인사권 독점을 깨고, 권력기관을 대통령의 손에서 떼어내고, 비상권한에 통제를 걸어야 한다. 대법원장의 대법관제청권과 법관인사권을 제3의 독립기관에 이양하고 중대사건에 대한 시민의 사법참여와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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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이 둘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8부 능선이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국민발안과 국민거부, 국민소환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제대로 실시하고, 시민의회와 공론조사, 배심재판 같은 추첨민주주의를 제도로 자리 잡게 하면 9부 능선까지 간다. 대리인에게 맡긴 권한을 주권자가 직접 되찾아 오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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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을 거두는 일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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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헌정이 8부 능선에 와 있다고 믿으면 남은 일이 얼마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6부 능선이라고 인정하면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갈 길이 멀고 절박하다. 인공지능시대와 기후위기시대, 미중격돌시대의 3중 격변과 파고를 대처하며 체감가능한 평등과 측정가능한 진보, 춤추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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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민은 이미 자격을 갖췄다. 문제는 그 시민의식과 시민역량을 억누르는 정치제도다. 이 제도를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 짧게는 40년을 미뤄 온 일이고, 미룰수록 뒤에 놓인 과제들이 함께 밀린다. 그나마 조건을 갖춘 지금 이 정부가 선거제 개혁과 정치개혁, 국회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다음 정부도 똑같은 한계선 앞에서 멈출 것이다. 이것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2기 촛불정부의 역사적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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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kwaknh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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