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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7)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지각하는 의식의 독백]:

 

나는 나다. 나는 ‘Je suis l'autre’가 아니다. 대상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첫 문장 관계절에서 ‘ich’를 ‘Ich’로 표기했는데, 이런 내용을 함유하는 것 같다.] 내가 그저 받아들이기만(aufnehmen) 하는 대상은 순전히 일개의 개물(흄: “a single object”=“a unity”=“ein Einfaches”)로 등장한다. 나는 또한 일개의 대상에서 {성질}(=이 {나무})도 알아본다(gewahr werden). 근데 이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별성을 초탈(超脫)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이제 보니까 일개의 모습으로 내 곁에 와 있었던 [명사 Wesen을 동사 wesen의 의미로 번역함] 대상의 첫 존재가 그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 뭐가 잘못됐지? 어떻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있을 수 있지?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상은 분명 참다운 것이다. 그럼 참답지 않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인데? 혹 내가 대상을 잘못 받아들이지 않았나? 맞아, 잘못 받아들인 게 틀림없어. 고쳐야 돼. 개별성을 버려야 해.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의 개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모든 개물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해. 안 그럴 수 없어. 근데 뭔가 좀 다른 {성질}도 보인다. 다른 개물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고 울타리를 쳐주는(=horizein=bestimmen=제한하다/정의하다/규정하다) {성질}(=body?)이네. 근데 뭔가 또 어긋난다.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모든 개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일반 공동체로, 달리 표현하면 개물과 개물의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대상을 잘못 받아들인 게 아니었나? 그런 것 같다. [울타리를 치는] 성질의 특수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뭔가 달리 해야 해. 개물과 개물을 연속성으로 잇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연속성을 절단하여 다른 개물을 [울타리 밖으로 쫒아내고]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 자리매김해야해. 어, 근데 뭐야? 이렇게 단절되어 있는 <하나>에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수의 {성질}(=쓴맛, 단맛 등)들이 있잖아. 뭘 또 잘못했지? 대상을 배타적인 <하나>로 받아들인 게 잘못이야. 대상은 그런 게 아니라 이젠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일반(=개물과 개물을 차별하지 않고 이어주는]연속성과 비교할 수 있는 일반적인(=갖가지 성질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매체(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가 아닐까? 맞아. 이런 일반적인 공동매체 안에서 [쓴맛, 크고 작음, 부드러움 등] 다수의 성질들이 존재하는 게 분명해. 근데 이 성질들은 감각적 보편성으로서 각기 홀로(jede für sich) 존재하고, [각 감각기관에 따라] 규정된 것으로서 다른 성질들을 배척하지 않는가? 그럼 결국 내가 지각하는 게 뭐지? [쓴맛이면 오로지 쓴맛일 뿐인] 단순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das Wahre=참다운 것)이 아닌가? 일반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성질 하나하나(einzelne)를 따로따로(für sich) 지각하는 게 아닌가? 그럼 [감각적인] 성질은, <하나>에 달려있지도 않고 다른 {성질}과 관계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된]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규정된 존재(bestimmtes Sein)도 아니지 않는가?

 

[보이스 오버]:

 

{성질}이 {성질}로 규정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에 달려서 (=이 {나무}=bestimmtes Sein/규정된 존재) 다른 {성질}과 관계하는 상황에서만 그렇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감각적] 성질은 더 이상 스스로 부정[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순수하게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것(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으로 머무르는, 온통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일 뿐이다. [지각하는 의식이 이 단계에 오면] 그는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게 되어 다시 단지 하나의 사념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각의 태동상태인]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는다.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사념이 스스로 지각행위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지각하는 의식]:

 

내가 시시포스야?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놓은 돌이 다시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수용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야?

 

환장할 일이다. 내가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 또 반복과 반복의 되풀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Kreislauf)에 휘말려 들어가야만 하는가?

 

시시포스야, 넌 어땠어?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는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었어?

 

너도 나와 같이 매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걸 맛보았니

 

[보이스 오버]:

 

ㅋㅋ. 처음과 끝을 연결하여 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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