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밤마다 운동 삼아 산책을 한다. 뜀박질은 호흡이 얕고 짧아서 금방 지치고, 자전거는 밤에 타기 위험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기와 자전거는 먼 거리를 가야 운동이 되는데 왠지 멀리 가면 집에 오기 귀찮아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산책이다. 한 시간 정도 음악을 들으며 걸으면 부담되지 않으면서 은근히 몸에 열이 오른다.
매일 산책을 하는 데에는 별다른 기술이나 장비가 필요하지 않은데 다만 한 가지 원칙은 기억해야 한다. 바로 '똑같은 길로만 다니지 않기'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 지겹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 마다 어디로 가야할지 잠깐 고민을 해야 한다. 이런 게 산책의 묘미이기도 하다.
오늘은 고속도로만큼 넓은 큰길로 나섰다가 길건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사는 창동은 지금의 아파트촌이 들어서기 전에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르게 생긴, 주차장보다 좁은 마당 정원에 감나무가 으레 한 그루 쯤 서있는 고만고만한 이층 양옥집이 늘어서 있던 동네였다. 지금은 그런 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다행인지 몰라도 큰길 너머에는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동네가 딱 한 구역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신식 빌라가 몇 채 이어져서 괜히 들어왔나 싶었다.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저쪽 귀퉁이만 돌아보자는 심정으로 걸었는데 웬걸 골목 골목을 헤메는 동안 조금씩 그 안의 풍경이 눈과 코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나는 골목의 흐름을 타고 떠도는 여행자가 되어 버렸다.
뜬금없이 여행자라고 하니 뭔가 과도한 감정몰입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다. 드문드문 불을 밝힌 구멍가게의 간판만 없다면 아시아 어느 소도시의 골목이라 해도 괜찮을 그런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설렜다.
그곳에는 동네 형의 손을 붙잡고 따라나섰다가 길을 잃었던 유년의 골목이, 한 시간에 오백원 주고 빌려 타던 자전거로 온 동네를 누비던 개구장이 골목이, 그리고 외가 동생들과 신나게 눈썰매를 타던 추억의 골목이 역사처럼 얽혀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안에는 또 어둠이 내려 사막마저도 포근하게 보였던 자이살메르의 골목이, 동네 지기들과 술 한잔 걸친 어른들이 어슬렁 거리던 쿤밍의 골목이, 그리고 외지인을 호기심과 경계의 눈빛으로 훔쳐보던 카트만두의 골목이 카세트 테잎처럼 차근차근 감겨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더 그곳을 거닐다가 낮잠의 꿈처럼 골목이 갑자기 끝나버려 조금은 아쉬었지만 요 근래 산책 중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음번에는 배낭이라도 메고 돌아봐야겠다.
(글이 갑자기 끝나는 기분인데 고칠 기운이 없다. 아까 너무 신났었나보다. 졸립다. 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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