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는 지난 6월 10일의 촛불집회가 비폭력 시위로서의 성공적 사례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의 집회 양상 또한 이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혹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 또는 주장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빠져있어 이곳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촛불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보수 언론과 중립적 관망자들은 집회의 정당성을 '폭력사용 여부'라는 도덕적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여기에는 '폭력사용은 곧 악'이라는 윤리 공식이 깔려있다. 즉, 이들은 집회의 의도나 목적 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이냐 비폭력이냐에만 관심을 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촛불집회 참가자(혹은 지지자)들도 동조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수렴된 '촛불집회는 비폭력 집회로서 바람직한 모델이다.'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불완전하고 또 위험하다.
과연 이번 촛불집회가 비폭력이었는지 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정의를 다시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술한 명제에서 쓰인 '폭력'은 '불법한 방법으로 행사되는 물리적 강제력'을 의미한다. 때문에 쇠파이프가 등장하자 언론과 여론의 태도가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폭력이 이와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어 폭력'처럼 심리적 폭력도 포함된다. 이를 바탕으로 이번 현상을 보면 촛불집회는 완벽히 비폭력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수의 군중이 모인 것 자체가 심리적 폭력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의 태도와 정부의 자세가 조금이라도 변화한 것은 바로 그들이 대중의 규합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코 비폭력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감동하여 동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이번 집회를 완벽한 비폭력 집회로 규정하고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어 '비폭력성'이 집회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될 경우 소수자들의 집회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언론과 여론의 행태를 볼 때, 소수자들의 집회는 극단적 행동이 나오기 전까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투쟁이 마지막 승부수로 던지던 물리적 저항마저 이제는 '비폭력성'이라는 새로운 굴레에 묶이고 만 것이다.
그럼 이 글의 의도가 비폭력성을 부정하고 폭력성을 긍정하자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비폭력성이 허구이니 폭력성을 드러내자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성이 가능할 수 있도록 그 발판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의 투쟁이 곳곳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극단적인 폭력적 저항이 발생한다. 따라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나아가 우리나라의 시위 문화가 한 걸음 성숙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소수자들의 외침이 온전히 확산되어 그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시위의 비폭력성에 대한 것만큼 그들의 목소리에 민감해져야 할 것이다. 즉, 비폭력 시위가 잠재적 폭력성을 갖지 이전의 단계에서도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폭력 시위에 전제되어야 할 우리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