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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홀연히 봉하마을에 다녀오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 기고]인간과 정치를 분리하는 담론의 외설성
2011년 05월 23일 (월) 11:57:41 안영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노무현 전 대통령 2주기는 이 글을 청탁받는 것과 함께 <개그 콘서트> ‘생활의 발견’ 풍으로 내게 찾아왔다. 잊고 지내던 이의 부음이 들려오면 봉투에 담을 돈의 크기를 찰나 가늠하는 풍경처럼 말이다. ‘생활의 발견’에 빗대면, 연인에게 이별을 선언하다 말고 삼겹살집 주인에게 생고기인지 냉동고기인지 따져 묻는 것처럼. 아니 그 반대로, 고기의 냉동 여부를 천진하게 묻다가 별안간 정색하고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활의 발견’은 내게 꽤나 어려운 텍스트다. 웃음은 괄약근이 풀리듯 터져 나오지만, 가슴 속에는 자잘한 이슬이 맺히게 한다. 웃음과 울음이 상극인지, 서로 다르기는커녕 분리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그 순간 판단이 서지 않는다. 판단할 겨를도 없이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운다. 이별을 환기하는 것은 아픈 것이고, 그럼에도 9시 뉴스 방송 사고처럼 웃음이 툭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노무현 2주기는 ‘생활의 발견’의 비극 버전처럼 도래했다.
2년 전에도 그랬다. 지금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어차피 차이는 반복 속의 변주일 뿐이다. 그날 내게도 충격은 권총이 격발하듯 닥쳐왔다. 그러나 분향소 앞이나 신문 속 사진으로 마주치는 이들이 폭포 같은 눈물을 쏟을 때,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픈 것은 오히려 그들의 압도적인 슬픔이었다. 나는 대신 두통을 앓았다. 그러다 영결식날 온종일 눈가가 축축했고, 대신 두통은 사라졌다. 인색한 눈물이 두통을 겨우 용해하는 듯했다.
그날 밤, 그의 집권기에 그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이들 몇몇과 어울려 노래방에서 늦도록 노래를 불렀다. 가사도 가락도 다들 구슬펐다. 나는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가라”(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라고 불렀다. 늘 부르던 노래인데도 자꾸 박자를 놓쳤다. 얼마 뒤 한 편의 글(‘노무현’, 그 이름에 동의하지 않았던 자들의 슬픔)을 썼다. 일종의 삼우제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름의 상장례를 마쳤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말마따나 그는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노무현 ‘동지’를 꿈꾸며…’)이었다. 그의 고유함은 물리적으로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같은 글)이었던 존재를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던 존재로 기억하게 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쉽게 적대할 수 없으나, 결코 스크럼을 짤 수도 없는 ‘불편함’으로, 그나마 다가오지 않고 닥쳐왔던 것이리라.
▲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과 노무현 전 대통령ⓒ민주노총 부산본부
2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여전히 복잡계에 머물러 있다. 그 사이 그는 자주 추념됐다. 그러나 천체의 운행에 따른 주기적 추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일정에 따른 호출 같아 보였다. 그를 계승한다는 이들은 지역선거를 앞두거나 재보궐선거를 앞뒀을 때마다 그를 환기시키려 애쓰는 듯했고, 그의 적자 자리를 놓고 서로 각축하기도 했다. 그들에겐 현정권에 대한 반정립만 있을 뿐, 그의 무엇을 계승할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글을 쓰다 말고, 부산에 일정이 있어서 서둘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송경동 시인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부산 한진중공업 타워 크레인 농성이 150일이 다 되어간다며, 다함께 버스를 타고 지지 방문을 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거기 그 높은 곳에 ‘아직’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29일을 농성하다 목을 맸던 그곳에. 나는 다시 ‘생활의 발견’을 떠올렸다.
묘하고 먹먹한 기분을 뒤로 하고 눈을 붙였다 떠보니 열차가 신경주역에 섰다. 이어 울산역에도 들렀다. 처음 들러보는 역들이었다. KTX 전구간 개통 뒤로 처음 부산행 열차를 탄 것이다. 어두운 터널 속을 한참만에 빠져나오니 곧장 부산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 사이 어딘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천성산 밑도 통과했으리라. 상추쌈을 싸다 이별 통보를 받듯이. 그리고 지율 스님은 지금 낙동강 내성천을 지키고 계신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글을 쓴다. 노무현 2주기는 서거 이전을 추념하는 시간뿐 아니라 서거 이후를 기억하는 시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서거 이전과 이후는 차이와 반복으로 이어져 있다. 김진숙과 지율만이 아니다. 그의 재임기에 체결되었던 한미 FTA는 지금도 뜨거운 감자다. 그를 계승한다는 이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태도를 바꾼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의 정부에서 중국에 팔아넘겼던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은 그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릴 때 옥쇄파업을 벌이고 있었고, 그 뒤 15명이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했다.
얼마 전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을 꼽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30.3%)이 박정희 전 대통령(31.9%)의 뒤를 바짝 좇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난 그 결과에서 안도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적어도 한국 사회가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쉽게 이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한편으로, 박정희와 노무현이 평면적 이항대립의 관계에 놓이는 징후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둘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대칭적이되 닮은꼴이다.
근일 발간된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이광일, 메이데이)에서 저자는 박정희에 대한 숭배가 ‘인간 박정희’와 ‘정치인 박정희’의 분리 담론에 터하고 있음을 갈파한다. 인간 박정희의 이미지가 인간 박정희의 본색과 어긋난다는 것은 현실 정치에서 큰 의미가 없다. 나는 인간 노무현만큼 이미지와 본색이 근접하는 정치인도 없다고 본다. 하지만 각각의 지지자들이 박정희와 노무현에게서 제가끔 느끼는 질감에는 차이가 없다. 성찰되지 않는 노무현 분리 담론은 숭배되는 박정희 분리 담론 못지않게 위험할지 모른다.
인간과 정치를 분리하는 담론 안에서는 정작 아무것도 분리하지 않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을 당시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은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그의 청렴 이미지가 타격받은 것에 대한 비판적 풍자였다. 그러나 <한겨레21>은 그의 자유낙하 직후 독자들에게 사과를 해야만 했다. 그가 알았든 몰랐든, 또 어떤 이유에서든,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금품을 받은 정황이 뚜렷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고인에게도 하나의 질곡이다. 권력을 욕망하는 이들 가운데는 그의 이름을 현실 정치 세계로 끝없이 불러들이려는 이들이 있다. 노무현, 그 호명에는 그의 이름은 물론 지지자들의 순정을 이용하려는 권력욕망이 어른거려 보인다. 박정희를 호명하는 자들이 박정희의 인간적 이미지(본색과는 별개로)와는 거리가 먼 것과는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는 노무현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그의 인간적 가치마저 외면하게 하는 정동으로 작용한다.
인간과 정치는 편의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길항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다른 한쪽으로만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적으로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보여준 인간적 감동이 진보 좌파가 현실 정치에서 역사적 실현으로 나아가는 데 영감으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그에게서 인간과 정치를 분리하지 말고, 정치에서의 공과 과를 분리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만 그는 극복되고 승화될 수 있다.
‘생활의 발견’의 외설성은 마지막 계산대 장면에서 극대화되는 법이다. 이 코너가 아직 한 번도 셈을 치르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던 것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장면이 연출되는 순간 이 코너는 마지막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먼저 생고기인지 냉동고기인지 따졌기에 막장으로 치닫지 않고 다음을 예고하는 플롯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나도 어느날 선선히 셈을 치르듯이 봉하마을에 홀연히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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