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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이 이룬 '건강 기적'
[기고]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 번역을 마치고
<레디앙>2010년 06월 30일 (수) 15:58:23
김승섭 / 하버드 보건대학원 직업병 역학 박사과정
보건학을 공부하겠다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 제 주변의 친구들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약자에게 잔인한 의료시스템을 가진 나라에 가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냐는 것이지요. 수치상으로 볼 때, 친구들의 우려는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OECD 국가 중에 가장 많은 돈, 국내총생산(GDP)의 15%를 의료비에 지출하면서도 평균수명과 영아사망율은 OECD 평균에도 못 미치는 나라니까요.
특히 미국 다음으로 의료비 지출이 많은 스위스나, 프랑스가 국내총생산의 11%를 쓰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 국민은 실로 엄청난 돈을 의료에 쓰면서도 더 많이 아프고 더 빨리 죽는 것는 것지요. 최근 오바마의 의료개혁으로 인해 그 수가 절반 가량 줄어들게 되었지만, 4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7백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의료보험이 없어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은 아무리 허울 좋은 이야기로도 포장할 수 없는 미국의 어두운 모습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뭘 배워 오겠나?
저는 오랫동안 궁금했었습니다. 미국처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투표라는 제도를 거쳐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토록 끔찍한 현실이 왜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도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 최고의 의료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뛰어난 두뇌들이 모여서 질병을 연구하고 환자를 진료하는 경제대국에서 왜 영화 <식코(Sicko)>에 나오는 것처럼 의료보험이 없어, 잘린 두 손가락 중 둘째 손가락을 붙여야 할지 셋째 손가락을 붙여야 할지 절실하지만 동시에 어이없는 고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제게는 오랜 딜레마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버드 보건대학원에서 진행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알고나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바로가기) 국민 전체를 대표하도록 선별된 1026명의 미국 성인에게 “미국이 세계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을 한 것이지요.
그 질문에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는 68%가,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는 32%가 그렇다고 답을 했습니다. 이 설문의 요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인의 지지 정당에 따라서 의료제도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저로서는 68%건 32%건 상관없이 상당수의 사람들이 미국의 의료제도가 훌륭하다고, 그것도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심지어 전국민 무상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영국이나 캐나다와 비교해서도 미국이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사람들이 40% 가량 되었구요. 그 숫자들 앞에서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저는 미국 의료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교수님들은 물론이고 저와 가까운 보건대학원의 미국 학생들은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이야기할 때마다 부끄러워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가장 기초적인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7백만 명이나 있다"라고 말하며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고개숙였고, 의료에 있어서도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한 부시 공화당 정권에 대한 분노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상식같은 것이었구요.
자국 의료가 최고라 믿는 미국인들
곰곰히 생각을 다시 해봤습니다. 일면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본인이 의료보험을 가지고 있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중산층 미국인이라면 미국의 의료제도는 만족스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혹 아내나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만나는 의사들은 분명 한국에서보다 더 친절하고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또한 한국에서 환자를 진료했던 의사로서 바라보는 미국은 한국에 비해 의과대학 시절 배웠던 진료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의료보험을 가지고 있고 높은 의료비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환자와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직업인으로서) 의사가 모두 만족하는 제도인 것이지요. 환자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건강을 고민해야 하는 보건학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시스템인데도 말이예요. 혹자는 아무리 의료민영화를 추진한다고 해도 과연 한국이 그런 사회로까지 치닫겠느냐고, 전국민 의료보험을 겪어본 한국 사람들이 그런 사회를 용납하겠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현정부가 추진하는 의료민영화의 종착역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그 끝에서도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대다수가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군가는 소리 없이 아프고 죽어갈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다수결의 원리로 움직이는 선거과정에서 숫적으로 소수자일뿐아니라, 돈이 없어 입법 과정에서 로비할 수 없고 생활고에 찌들려 거리에서 피켓시위조차 하기 힘든 정치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일 겁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민영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치료받지 못하는 약자들에 대해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거예요. 면죄부는 항상 준비되어 있거든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는 타인에 대한 연민을 구조적으로 없애는 데 대단한 능력을 보여왔으니까요.
의료시스템에서 소외된 그들은 ‘자발적으로’ 흡연과 과도한 음주를 하고, ‘개인의 선택' 에 따라 범죄율이 높고, 병원이 없는 지역에 살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더 위험한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건강하지 못하고 아픈 것이라고 세상은 마구 떠들어댈 거예요.
충분히 준비돼 있는 민영화의 논리들
사회는 그런 사람들까지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하겠지요.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 백악관에서 의료 분야에서 일했던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도대체 왜 미국은 그토록 많은 돈을 의료에 쓰고 결과가 이 모양이냐라구요.
아주 간결한 답을 내놓아서 놀랐었어요. 미국은 다인종 국가여서 범죄율이 높다는 것이었지요. 그 뒤에는 그들의 건강은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숨어있지요. 한꺼풀 더 벗겨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국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의료민영화를 반대하는 것은 높아지는 의료비 때문만이 아니라, 민영화 과정에서 만나게 될 약자에 대해 더없이 잔인한 사회에 대한 우려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지금 한국의 의료는 민영화 되어 있지 않은가요? 민영화를 반대하고 그래서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것인가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의료 민영화를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정치인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하에서 모든 국민을 잠재적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던 사람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물론 의료민영화와 4대강 사업이 가져올 재앙에 대한 우려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계획하고 꿈꾸는 우리의 상상력이 의료 민영화 반대에 머문다면, 그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 아닌가 하는 거지요.
공부가 부족해서 '4대강 사업 반대'를 넘어서는 생태주의적 상상력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감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의료민영화 반대'를 넘어서는 상상력에 대해서는 보건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꼭 보여주고 싶은 사회가 있습니다.
'반대'를 넘어 보여주고 싶은 사회
쿠바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쿠바의 의료는 학계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쿠바는 보건학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정말 놀라운 나라입니다. 국민 1인당 GDP는 미국의 반의 반도 안되는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세계 최강대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삽니다.
2008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쿠바에서는 만 한 살이 되기 전에 죽는 아기들의 숫자가 1000명 중 4.8명인데, 미국은 6.7명이구요, 국민 전체의 평균수명(78.7 살)도 미국(78.4살)보다 우월합니다. 심지어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에 쿠바의 경제를 지탱해주던 경제원조가 사라진 이후에,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엄청난 장애 속에서 어떻게 이런 것을 이뤄내고 또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쿠바하면 떠오르는 ‘카스트로’나 ‘사회주의’라는 단어들로 인해 우리가 쿠바에 대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여러 선입견을 조금만 제쳐두고 생각을 해보면, 쿠바는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의료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심장병, 뇌졸중의 원인을 연구하고, MRI니 CT니 초음파니 하는 기계들을 이용해 진단을 하고 또 첨단 의료기술을 이용해서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질병들을 고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과 같이, 미국과 한국 그리고 여러 선진국에서 행해지는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국민 모두가 건강하게 오래살도록 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엄청난 비용이 투자되는 연구도, 값비싼 의료 기계들도, 또 첨단의 치료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쿠바 사회가 훨신 더 적은 비용을 투자해 이미 그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그것도 전국민 무상의료 시스템으로요. 쿠바의 의료는 자국민의 건강을 챙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외국의 가난하고 뜻있는 학생들을 모아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모두 지원해 의사로 키워내고 그들이 자국의 의료소외 지역으로 돌아가 진료를 하도록 설립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이나, 베네수엘라 정부와 함께 실시한 수만 명의 빈곤층 사람들의 눈을 뜨게해 준 ‘기적의 작전(Misión Milagro)’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놀라움을 넘어서 오히려 너무 먼 세상의 이야기같은 거리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쿠바는 우리와 다른 사회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한국은 쿠바와 다르고 동시에 미국과 영국과도 다르고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과도 다르고, 중국과 일본과도 다른 사회입니다.
여러 사회를 경험해볼수록 모든 개개인이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사회는 각기 독자적인 역사와 환경 속에서 변화해 가는 것이고 그렇기에 특정 사회의 성공모델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외려 위험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특정국가 시스템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환경과 우리가 만들어온 역사에 기반해 그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겠지요. 다만, 우리 다음 세대가 살아갈 사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따뜻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한국사회가 어떤 의료 시스템을 가졌으면 하는지를 고민할 때 쿠바가 이루어낸 이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의 단서가 되어주지는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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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필자는 최근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 (린다 화이트포드 지음, 메이데이, 12000원)라는 책을 공역했다. 필자는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든 생각을 글로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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