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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읽고 난 단상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메이데이>읽고 난 단상들

- 알라딘에 올린 서평, 2008.09.30.

 

박종성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고찰하는 글이 있다. 아마도 남구현과 이광일, 박영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여기서 남구현의 글은 비폭력의 문제를 다시금 사유할 수 있는 장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비폭력을 옹호하는 목수정의 글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촛불 항쟁의 출발을 알린 고등학생들의 현실과 그로부터 귀결되는 신자유주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이철호의 글 또한 국가의 국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교육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동성은 공공부문의 위기를 야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각 저자들이 문제와 그 내용은 독자들이 다양한 이해를 위한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 글에서 정리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국가의 권력과 구성원들의 관계, 권력의 정당성의 문제, 인터넷의 운동성 등의 문제의식으로 글을 이어 나갔다.

 

희망과 공포라는 국가 권력의 내적 동학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각 저자들이 집중해서 다루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과 직면하면서 ‘행복’과 ‘죽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죽음의 관계로 설정하고 행복의 영역은 자본에게만 허락하는 것이다. 그것도 죽어 있는 노동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는 허구적 실체를 부여한 자본에게 말이다. 행복은 건강한 신체와 아타락시아(평온한 마음Ataraxia)이다. 촛불 항쟁에는 이러한 요구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고통을 피하는 사려 깊음이 사라진 사회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사려 깊음은 프로네시스(pronesis)는 곧 이성이다. 결국 사람들이 거리의 정치를 시작한 것은 ‘현실적인 것이 비이성적 권력이고 비이성적 권력이 현실적인 것’1)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직시한 것이며 이에 대한 이성적 사회의 직접적 실현인 것이다. 다른 한 축으로 촛불 항쟁에는 직,간접적으로 바로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얼마 전 보았던 <차마고도>의 수행자가 모습이 상기된다. 거기서 수행자들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수행의 길을 걷는다. 이러한 길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본성을 주장하는 애덤 스미스적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믹스를 넘어선 인간이다.

 

신자유주의의 연속적 바통을 이어받은 이명박 정부의 지배적 가치관에 대한 균열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윤보다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광우병으로 인한 죽음의 불안을 야기하고 삶을 반성하는 긍정적 측면으로서 등장하여 기존의 가치관을 균열내는 촛불의 항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여기서 죽음의 불안은 자아 중심적 영역의 틀을 깨고 연대를 위한 그리고 이를 위한 전제로소 타인의 죽음을 위한 자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본주의적 걱정인 호모 이코노믹스만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존재라는 본래적이고 실존적인 불안에 공감하는 인간 존재의 규정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잠재적이건 현실적이건 간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렇듯 자신을 넘어 타인에 대한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는 광우병만이 이러한 본래적 걱정과 불안에 들어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노동하는 가난한 계급으로의 전락과 언제든지 그 속에서 삶을 위협하고 있는 권력의 총구 앞에 우리 모두는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삶을 공감(sympathy)한다는 것은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강제적으로 노출된 생존의 위협에 대한 고통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윤을 낳지 못하는 행위를 배제하는 원리로부터 비생산적 인간을 배제한다. 이때 늚음이라는 자연성은 천시되어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크리스트교는 신이 지지하는 인간중심주의이듯 신자유주의의는 자본이 지지하는 인간중심주의이다. 자본이 지지하지 못하는 인간은 여기서 철저히 배제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배제된 또는 생산 활동에서 배제된 인간들은 자기 창조(autopoiesis)적인 ‘가능성의 존재’이다. 이는 존재를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존재로 보는 시각이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운동을 외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촛불 항쟁이건 생존을 위한 투쟁이건 모든 저항은 자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에 항체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체의 형태는 그 모양을 촛불로 거리의 정치로, 물리력을 동반한 투쟁으로 바꾸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저자들은 촛불 항쟁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진전된 운동으로 보고 있다. 존재의 가능성이 그러하듯이 촛불 항쟁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지구적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 자기 생성하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말하듯 인간답게 만드는 문화적 생활을 선사한 문명도 ‘자본’앞에서 좌절해버린 것이다.

 

국가 권력의 나르시스트, 이명박 정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몇 몇의 저자들은 국가의 발생과 그 권력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내용의 확인은 독자들의 열린 사유를 위해 정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이 글을 읽으며 들었던 단상들을 피력하는데 국한하고자 한다. 국가 권력의 발생 원인이자 결과인 지배와 공포의 자기애는 타인을 통해 인식된다. 이는 민심이 곧 타인의 거울(라캉)이라는 것이다. 인간적 삶을 황폐화시키는 국가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대상화하지 못하는 ‘일차원적’ 권력이다. 이러한 권력 속에서 청소년들은 꿈이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이철호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촛불 소녀가 등장했음을 주장한다. 우리는 더 나아가 나르시스트적 권력은 결국 자기애를 타인을 통해 실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애를 자본을 통해서만 실현하는 현실적 정책들 속에는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기애를 실현하지 못하고 죽어간 나르키소스의 죽음으로 핀 수선화의 전설을 가슴속에 간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핀 수선화의 전설은 21세기 인간의 죽음으로 핀 자본화의 전설이 살아나 현실을 지배하고 실현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억견(doxa-자기 혼자의 판단)에 빠진 권력의 전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이 권력이 지배적 권력을 위한 권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촛불을 든 이들은 국가권력은 다중(multitude)의 권리, 역량이다. 정치사회의 코나투스(conatus)는 곧 다중의 권리 실현이라는 참된 깨달음(episteme)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반응은 건강권의 욕망이다. 이는 인간의 내부이자 외부에서 작용한다. 생명의 보존과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내적이고 외부 환경이 인간의 건강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라는 측면에서 외적이다. 건강권을 위협하는 외부로서의 사회를 건강을 배려하는 사회로 만들 것, 이것이 샤르트르가 말하듯 자신 스스로 선택한 쪽으로 자기를 구속하는 것, 곧 자유이다. 자기를 구속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촛불을 든 이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실현을 위한 자기 책임의 실현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현재만이 아닌 미래의 민중을 내포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촛불은 과거의 촛불의 총결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촛불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주장은 국민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명제에서 현실적 개인의 연대가 자기를 창조한다는 명제로 번역될 수 있다.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따른 정치 형태와 정치 권력의 선택과 실현을 위한 행동이다.

 

천박한 정치가 규정하는 내재적 선택을 일반적 선택의 원리가 관통하는 정치 형태로 지향되고 있음을 깨닫는 정치적 경험인 것이다.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난 자발적 저항, 자발적 창조, 희망으로 도약하는 현실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못하는 권력은 이미 그 권력 자체의 기원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촛불을 바라보는 또는 참여한 이들은 자신들의 자발성에 강조점을 두면서 기존의 운동과 차별화한다. 이는 표준적 인간을 벗어난 운동으로서 자발적 의지에 따른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미 비자발적 의지를 생성하는 조직의 균열을 통해 가능해 진다. 이러한 조직의 균열은 국가 권력이 속죄양을 통해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면서 드러난다. 즉 국가 권력은 속죄양(scapegoat)2)에 상응해 배후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 권력은 무저항적 인간만을 용인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으로 그 이외의 인간을 배제하는 단결의 권력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다들 공감하듯이 촛불의 거리에는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힘이라 할 수 있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에로스와 이익이 없어도 희생하는 아가페가 공존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자발적 저항을 몸소 실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와 더불어 배고픈 이들을 위한 김밥과 목마른 이들을 위한 물 한모금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중심성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현실 권력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촛불이 있어 그 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반대의 길은 간접민주주의의 길을 벗어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로 이행하는 길을 의미한다. 사회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홉스는 죽음의 공포를 통한 사회계약을 주장하는데 이때는 저항권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독립선언에 있으며 간접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로크는 저항권의 일부를 승인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계는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루소는 정치적 참여를 주장한다. 일반의지를 통한 사회계약은 정부를 국민의 사용인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적극적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참여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길에 있는 것이며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주권자는 국가라는 보편자의 특수자로 인식하는 것은 중세적 발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종래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였던 반면에 현재는 대등한 관계로 전화되고 있다. 치료에 대한 종래의 관계는 의사가 환자의 상태와 그 상태에 따른 결정권을 주도하거나 환자가 의사에게 “의지하게 만들어야 한다.”3)하게 만든다. 이렇듯 국가권력과 국민의 관계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처럼 결정권이 의사에서 환자로 옮겨지듯 정치적 결정권 또한 국가에서 국민으로 옮겨져 사회의 치료의 주체로 나가고 있는 역사적 과정의 현장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현실의 국가권력은 이미 중세로 후퇴하고 있다. 미래적 존재로 전진하는 역사의 동력으로 그 역할을 하는 촛불의 항쟁은 이러한 진부적인 역사관을 전도시킨다.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소통과 현실화라는 시냅스를 절단하려는 국가권력과 보수언론에 맞서 뉴런의 이음매인 시냅스는 마치 ‘전세계를 둘친 거미줄’4)처럼 커지고 증가한다. 히터 레셀의 말처럼 “글로벌 브레인”은 “역사가 낳은 최대의 대중참가형 매체”5)이다. 그런데 인간의 인간적 삶을 재창조하기 위해 권력의 형태를 역전시키기 위한 활동은 거미줄로서의 인터넷만이 아니다. 거미줄에 의존한 거미는 거미줄이 끊어지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면 자신의 활동의 장소를 상실하여 죽음에 직면한다. 지상의 거미는 끊임없이 지상을 배회하며 생명을 이어 나간다. 생명의 비약(엘랑비탈,elan vital)은 창조적 진화속에서 자신과 외부를 끊임없이 재창조한다. 이 역사 속에 촛불의 비판은 역사의 진보의 동력으로 존재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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