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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에서 지난 해(2007년) 9월 발행한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의 저자, 박영균 님께서 1회 일곡유인호학술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박영균 님은 현재 건국대학교 철학 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연구모임 코뮤닉스 연구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어서 기쁩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광풍이 몰아치는 이때에 맑스주의 학자로서 평생 동안 뜻을 굽히지 않고 농업협업화론과 민족경제론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일곡 유인호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학술상을 받을 수 있어서 저로서는 더 없는 영광입니다. 정유회사의 국유화를 주장하셨던 일곡선생의 혜안이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번 수상작이 된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는 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이 땅의 민주화와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싸웠던 이름 없는 민중들과 저의 육신에 각인된 동지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들의 빛나는 투쟁에 경의를 표하며 물심양면으로 저와 함께 해 주신 분들과 일곡기념사업회와 심사위원들, 그리고 메이데이 출판사와 맑스코뮤날레의 회원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상을 채찍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더욱 분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아름다운 영혼의 표상”이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철학의 그 고고함이 싫었습니다. 철학은 현실적으로 보면 무능합니다. 철학자는 더 무능합니다. 그것은 철학이 ‘이데의 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세계 속에서 ‘고고함’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세계와 진리와 보편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는 항상 추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주를 소요하며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지만 항상 그 고고함 속에 갇혀 ‘연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연꽃’은 맑은 물이 아니라 흙탕물을 빨아올려 ‘꽃’을 피웁니다. 철학에서 흙탕물은 물질적 세계입니다. ‘육체’는 정신의 고고함을 흐리는 악마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엘리트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오랜 과거부터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 온 철학적 이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철학이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하나의 이단이라면 그것은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적 철학의 관념을 해체하고 철학의 외부를 사유했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철학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며 ‘감성적 활동’의 능동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논쟁이다. 객관적 진리의 문제는 실천적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맑스에게 철학적 사유의 핵심은 철학 내부의 내성적 사유가 아니라 우리의 사유를 생산하는 ‘육체’적 실천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철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외부, 특히 육체적 에네르기가 직접적으로 교통되고 부딪히는 현실의 세계, 물리적인 육체를 가진 자들의 직접적 충돌과 카오스적 마주침의 세계는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철학의 사유는 ‘이데’와 ‘개념’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면서 이 세계 전체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보편성과 초월성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물질과 의식의 철학사적 근본문제는 언제나 대당적인 문제설정으로, 양 당파의 투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인간 존재의 한계를 너머 철학의 신비화, 철학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는 진리의 유한성을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철학적 고고함, 철학적 사유의 한계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밖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철학은 꽃을 피울 없으며 온실의 화초가 될 뿐입니다. 지금도 밖에서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힘없는 약자들의 아우성이 거리의 정치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진흙탕 속에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된 이후로 정신노동을 독점한 자들, 아니 보다 정확히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소유한 자들은 대중들의 반란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들의 저항을 ‘천박한 것’, ‘좀비적인 것’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배후를 말하지요. 그것은 그들이 대중 그 자신의 정신문화적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람시는 이미 ‘모든 인간은 철학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언제나 계몽된 자들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성적 독단의 세계에 갇힌 자들이며 독재자들입니다.
이것이 저는 근대 부르주아, 근대 계몽의 역설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들이 말하는 이성의 권리를 통해서 은밀하게 감추고자하는 자신들의 추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공화’의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법과 질서를, 무질서와 카오스 대신에 규칙과 코스모스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야기하지요. “광장의 정치는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 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성’의 배후에서 그들의 광기를 만드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철학에서의 사회계약론이나 공리주의조차 출발점은 다름 아닌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이기성을 옹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기적 욕망을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이런 이기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이성적 사유입니다. 그것을 사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성’입니다. 그들의 이성은 천박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물화합니다.
근대적 시민의 정신 또한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정신, 공공성 모두 다 인간학적 박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애주의, 공공성, 공공선 등은 결코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 ‘천한 자들’을 여전히 시혜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만듭니다. 이 사회를 만들어 온 것은 그들인데 말이죠. 오늘날 거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한 부르주아의 그 물질적 기반이 바로 그들이 천하게 여기는 자들의 손에 의해, 그들의 사회적 노동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그들을 착취한 결과라는 것은 명확합니다. 빌 게이츠가 소유한 재산은 100년 동안 매일같이 15억씩 써야 하는 돈입니다. 그 재산을 어떻게 그들은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며 사회적 협력, 사회화된 생산의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탈세와 과세저항을 합니다. 그들이 베푸는 시혜는 ‘상징적 가치’, ‘차별화된 가치’ 등등이라는 대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분명 전도된 세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처럼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로크의 소유권’ 개념에도 위배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였다면 저는 그와 같은 윤리적 부정의함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합력해서 만들어낸 문화와 물질적 가치들은 그것을 생산한 인류의 자산으로, 그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청년 맑스가 말한 ‘인간사와 자연사의 통일’이며 코뮤니즘을 ‘진정한 인간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그래서 청년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유물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역으로 맑스철학의 비판 정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이성철학에 반기를 든 사람은 맑스 이전에 포이에르바하입니다. 그는 이미 근대적 사변철학이 데카르트적 이성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라는 실체화된 존재의 근대적 변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인간의 의식이 지닌 한계 안에서 대상화되고 실체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은 인간 그 자신의 ‘유적 본질’의 대상화로, 인간의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성철학을 말했지요. 그러나 그는 그 감성을 ‘감각’적 실증의 대상으로, 자연철학적 산물로 되돌려 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감성’은 결코 수동적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 활동의 산물입니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가 ‘감성적 활동’의 능동적 측면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맑스의 실천적 휴머니즘이 ‘감성적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히려 능동적인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입니다. 스피노자도 이 측면을 보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육체 변용’, ‘정서적 인식 능력’은 바로 이와 같은 능력들을 보여줍니다. 철학이 말하는 이성은 육체가 물질적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들, 존재와 존재의 마주침에서 체험하는 육체, 그 육체가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감성을 통해서 작동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성적 사유와 존재의 개방은 우리의 육체를 그 밖의 세계에 던지는 행위들, 실천들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정신에 비해, 감성이 이성에 비해 우월하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합리성의 세계, 아니 서양철학의 전통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을 형성하는데 첨병이었던 것은 철학입니다. 그것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제가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라는 책에서 그람시와 알뛰세르, 포이에르바하와 스피노자, 그리고 들뢰즈를 통해서 맑스철학의 확장을 모색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맑스철학은 스탈린주의를 거치면서 ‘이성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당-이성의 화신’은 언제나 맑스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여기에 근대적 이성의 은밀한 공조가 있었습니다. 맑스도 그 덫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 덫으로부터 맑스철학을 분리시키고 맑스철학을 변혁적인 실천철학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물질과 의식의 대당적 문제설정을 기각하고 ‘소통의 매개자’로서 ‘육체’라는 통일성을 작업의 핵심으로 놓았던 것은 바로 ‘육체-감성적 활동’을 통해서 철학의 자리를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대당적 문제 설정을 해체한 것은 맑스가 처음은 아닙니다. 데모크리토스-포이에르바하로 이어지는 전통과 에피쿠르스-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전통 속에서 유물론은 이런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맑스와 스피노자가 그 작업을 이어받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탈현대적 논의들과 맑스를 대립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물론의 자연주의화’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를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들은 맑스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물론의 자연주의화는 ‘사회-역사적으로 구성된 존재의 장’, ‘선규정적인 물질적 장’을 보지 않습니다. 포이에르바하와 스피노자 모두에게 공통된 전략은 ‘유물론의 자연주의화’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는 포이에르바하는 ‘자연의 물질화’라면 스피노자는 ‘자연의 존재론화’이겠죠. 저는 원초적인 생명도, 생명 없는 물질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회적 노동’의 이중성, 관계의 선 규정적 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년 맑스가 고뇌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고뇌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에토스적으로 부르주아적 관념을 역전시켰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자명한 그런 전도를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지배는 위로부터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지배받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원인에 대한 망각’이나 ‘반동적 정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지배의 현실로부터 나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믿음, 모든 개인은 개별자이고 단독자라는 믿음, 일인일표의 단자적 세계라는 믿음이 부르주아의 천부인권 개념과 근대적 소유권, 부르주아의 정치원리를 형성합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물질성과 이데올로기 간에 동형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물질은 여전히 중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물질과 의식, 토대와 상부구조 상에는 동형성이 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적 지점은 사유양식이나 정신이 아니라 그런 사유양식과 정신을 생산하는 현실의 구체적 관계, 그 구체적 관계를 선규정하고 있는 물질적 장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맑스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의 물질적 강제력을 ‘인간의 육체적 에네르기가 투여되는 물리적 실천’으로 전화하는 그 지점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탈현대적 논의와 대결합니다. 자본의 지배는 인간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바꾸어 놓고 세계 전체를 상품의 세계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습속’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맑스철학의 혁명성, 그리고 맑스철학의 외부가 ‘정치적 육체’와 만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생명력이 약동하는 존재에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져 있는 세계, 그리하여 그 안에 존재하지만 이미 모순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 ‘특수의 존재이자 모순의 존재’인 프롤레타리아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맑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학이나 자연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이미 그렇게 하도록 모순적인 장에 놓여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에 근거합니다.
제가 철학의 외부를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존재이지만 모순적 존재’이며 ‘정치적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흙탕물’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철학은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에서 과학의 길을 여는 자이며 과학은 정치와의 관계에서 이데올로기로 추락하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언제나 이데올로기 곁에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현실의 변혁과 만나고 정치적 실천을 생산하며 이데올로기를 생산합니다. 저는 철학이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육체는 언제나 선규정된 장 안에서 모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흙탕물이 튀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맑스철학은 역사의 짐을 지는 것이며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떠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맑스철학은 이데올로기를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와 관계하면서 현실을 바꾸고 변화된 현실 속에서 다시 현실을 바꾸는 정치적 실천과 긴밀하게 결합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논리와 윤리적 정합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노동자를 포함하여 제가 보다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싶은 것은 파토스입니다. 대중들이 주어진 제도와 체제를 벗어나는 것은 ‘죽음본능’과 연결되어 있는 파토스가 터져 나올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이나 구성능력에 기대하기보다는 파토스적 대중의 정념에 기대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학은 이런 파토스적 열정을 에토스적인 대중의 자기 통치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것, 또는 봉기의 정치학을 ‘구성의 정치학’ 또는 ‘주체화’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파토스는 다시 에토스화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에토스는 언제나 파토스적인 것 위에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자본의 모순을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켜 놓았습니다. 이제는 생산 내부에서의 모순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모순의 덩어리입니다. 그것도 경쟁이라는 ‘전쟁의 양식’ 속에서 벌어지는 반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며 반인간적인 투쟁 속에서 말입니다. 쇠고기 광우병 파동이 그러하며 대운하가 그러합니다. 촛불집회에서 이미 대중들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시녀가 되어버린 국가권력에 대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부자를 꿈꾸던’ 그들이 말입니다. 그들의 반란은 그들의 욕망이 좌절되는 곳에서 시작하며 그들의 모순은 그들이 살아가는 자본에 의해 그들의 육체가 배신당하는 그 곳에서 시작합니다. 따라서 저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증층화되어 있고 다원화되어 있는 모순을 어떻게 대중의 자기 구성 능력, 자기 통치 능력으로 바꾸어가야 하는가’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맑스는 이것에 대한 어떤 좌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맑스는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양식’ 속에서 생산력은 본질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간의 모순, 그것은 구체적인 생산관계에서만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이원화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유발하는 생활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산의 사회화는 이미 인류의 부를 사회화하고 있으며 사회화된 부를 전유하는 사적 소유의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문제는 ‘대중의 자치 능력, 구성 능력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 가지 쟁점이 있지만 인류가 이제까지 발전시킨 생산력과 문화적 창조 능력을 인민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프로그램, 실제로 인민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실험들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가를 포함하여 사회화된 생산력을 인민의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분배의 관점, 시혜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소득이나 분배의 문제로 보는 것, 사회적인 평등의 논리에서 접근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 안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소득이나 분배가 아니라 사회적 부를 인민의 자기 구성 능력, 문화적인 창조 능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회=공동체(polis)적 존재’인 인간의 문제이며 정치입니다. 따라서 분배가 아니라 부를 인민의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능력을 생산하는 과정과 결합된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이 고안되어야 하며 그것의 핵심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니라 코뮨을 만들어가는 공동체적 행위로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6월 27일
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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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카추카부가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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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의미있는 책의 의미있는 수상!!부가 정보
童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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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기쁠 일이 없는데 이 글을 보니(?) 초콤 기쁨부가 정보
나인빅스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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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수상소감에서...[그들은 ‘공화’의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법과 질서를, 무질서와 카오스 대신에 규칙과 코스모스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야기하지요. “광장의 정치는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 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성’의 배후에서 그들의 광기를 만드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와닿음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