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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 이야기 –여성

요즘 역사공부 하면서 정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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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번 째 대통령이자 정치를 잘했다고 칭송 받는 토마스 재퍼슨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진보적이라 할만한 정책들을 펼쳤지만, 유독 여성문제와 관련해서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다. 그는 여성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으며, 여성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했다.


1790년대에 공화당은 국가의 자유 (해방)를 위해서 여성의 역할을 남편의 내조에 한정하고, 여성의 순결 등을 강조하는 글들을 신문을 통해 쏟아냈다. 그들은 여성의 시민권은 온전히 남편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의 어머니 역할을 좀더 잘 수행하기 위해 여성 교육을 장려했다. 이는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져야 아이들과 남편을 더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여성역할을 위해 장려한 여성 교육은 되려 여권운동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육은 여성을 자신감 있는, 이성적 존재로 만들고 남성과 평등한 존재로 만든다고 주장했던 주디스 사전트 머레이는 1790년 “On the Equality of the Sexes” 출판을 통해 “교육받은 여성은 그들 스스로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명확하게 고찰할 것이며, 이성이 그들의 결론을 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의 [상냥한] 성격은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라며 여성 교육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려는 공화주의자들의 의도를 폭로하면서도 여성 교육을 강조했다.


이러한 공화당의 언론플레이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정치적 의미 (그러한 여성 역할이 국가의 자유/해방을 촉진한다는… 그럼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로 고취시켰지만, 기존의 젠더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의 역할은 개인적 이익 보다는 공적 이익을 추구해야 하고, 여성은 개인보다 남편과 가족이 우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공고히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1804년 네 번째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의 부인 돌리 메디슨에 의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성들 간의 모임을 만들어 정치, 특히 연방 정부의 관직 시스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매주 열리는 “Mrs. Madison’s Crush”라는 파티 모임은 정치의 비공식적 루트를 뚫고, 정보를 수집해서 정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의 파워는 19세기 초 정치에서 엘리트 여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주도한 여성 모임의 한계는 그녀들의 남편의 업무와 관련에서 도움을 주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겠다.


독립적 여권운동은 비혼모인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등장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00년부터 1825년까지 여성의 결혼, 역할 등을 위해 시행된 교육제도를 변화시키려는 저항이 일어났다. 종교 단체들은 교회 조직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정의하기 위해 싸웠고, 여성 교육 시스템은 부엌과 돌봄으로서의 교육을 넘어 문학 등 여성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지식을 채워주는 커리큘럼으로 대체되었다.

 

여성교육
1830년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주의를 잘 기능하게 하기 위해 공립학교를 설립했다. 남자아이들뿐 만 아니라 여자 아이들도 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주로 백인이었지만, 일부 학교는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흑인들도 받았다. 주디스 사전트 머레이는 여성을 위한 학교들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1800년에는 “여성 역사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한적이 있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자아이들을 위한 사립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1830년에는 거의 200개의 여성학교가 생겨났다. 학교에 다니는 이들은 성직자 가족이나 중산층 엘리트 여성의 딸들이었다. 아이들은 문학, 예술, 웅변 등 다양한 분야를 배웠으며, 그들이 졸업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섞인 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교육은 여자 아이들의 자기 수양과 자신감에 도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박식한 인텔리 여성은 시집을 못 간다는 편견을 낳았다. 1820년대에 여성 학교의 학생 등록수는 남성 학교의 등록수와 똑같아 졌다. 1810년대에 학교를 나온 여자 아이들이 성인이 된 1830년대에 그들은 젠더 시스템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족관계법 개정 투쟁
1800년대에 여성들의 독립을 주장하는 입법, 법정 투쟁이 벌어졌지만, 이는 주로 백인 여성 위주였고, 흑인 여성들에게 이는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입법부는 가족 관계법을 계속 퇴짜 놓았다. 1816년에 출판된 가족 법에 관한 논문 “군주(남성을 의미)와 여성에 관한 법 The Law of Baron and Feme”의 제목만을 보아도 법률가들이 남편-부인 간의 관계를 얼마나 불평등하고 확고하게 설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1790년대 공화주의자들은 여성들의 결혼을 촉진했는데, 1820년 까지, 남부 캐롤라이나를 제외하고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적으로 이혼하거나, 도망가거나 중혼을 한 여성들은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불공평한 관계 속에서 결혼을 강제하는 것은 19세기 젠더 불평등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싱글인 여성들은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소송을 걸 수 있는 자격이 있었으며, 세금을 냈지만 투표권은 없었고, 배심원이 될 자격이 없었다. 재산을 상속 받았거나 결혼을 한 형제나 자매들과 같이 사는 이들 외에 대부분의 싱글 여성들은 가난했다. 흑인 여성들은 결혼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국가의 규제보다 주인의 파워가 더 셌기에 어느 보호도 받지 못했고, 도망가거나 노예상태에서 풀려나고 나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종교에서의 여성
교회 대표자 구성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 교에서는 여성 신도 수가 남성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백인 남성만으로  대표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침례교에서는 여성이 대표자회 멤버가 될 수 있었고, 성직자를 뽑는 투표권도 있었다.  퀘이커교 (영국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미 개척시대에 펜실베니아에 정착한 교도)는 여성이 성직자가 되는 것도 허락했다. 이들은 다른 교파와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79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여성도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하는 이들이 뉴욕 북부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성직자가 될 수 없었지만, 그들만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까지 영향력을 펼쳤다. 그 중에서도 제미마 윌킨슨은 본인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며 여성의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남성처럼 옷을 입고 머리를 했다. 그녀는 250명의 추종자와 함께 뉴욕 서부에 신예루살림이라 이름 지은 마을에 정착했다.


종교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는 다른 교파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도 여성들을 대표자로 인정하는 변화들이 일어났다. 심지어 대표회의 남성 비율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남성의 확고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여성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여권 운동과 노예제 폐지 운동 함께 전개해 나갔다. 교회 개혁을 위한 여성들의 운동은 연설, 회의 주도, 결의문 작성, 탄원서를서 퍼트리는 등의 그들의 정치적 활동의 경험을 풍부하게 했다.


 

세니카 폴스 선언문

1848년 엘리자베스 스탠턴과 루크리셔 모트의 주도 하에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전국 여성 권리 대회가 뉴욕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그들은 세니카 폴스 여성의 소신 선언을 발표한다. 그 선언은 “인간의 역사는 남성이 여성을 부정하고 침해해온 반복의 역사이다”라고 공언한다. 세니카 폴스 선언문은 독립선언문 형식으로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그녀의 자신감을 파괴하고, 자존심을 버리며 의존적이며 비열한 삶을 살려”는 ‘사람 (men!)’들을 비난했다. 토마스 재퍼슨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문에는 “모든 사람(men)은 하늘아래 평등하다”는 문구가 포함되어있지만, 재퍼슨의 의도 (노예제는 옳지 못하다는)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사람(men)’에서 노예라는 존재를 제거했으며, 당시에는 노예제 보다는 이슈화되지 않았지만, 여성에게 참정권과 정치 대표자가 될 자격을 주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여성도 배제했다. 세니카 폴스 선언문은 이에 빗대서, “…….비열한 삶을 살려는 ‘여성(women)’이 아니라 비열한 삶을 살려는 ‘사람(men)’으로 작성함으로써 독립선언문의 ‘men’에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은 단어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미국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독립선언문을 재해석(?) 함으로써 남성들을 비판하고 현재의 사회 정책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언은 여성의 참정권과 여성 차별의 종식을 요구했으나 그들의 목소리가 실현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가들과 신문기자들은 여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집이며, 그녀들의 역할은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스탠튼을 비롯한 다른 활동가들은 나아가 남성과의 임금차별폐지, 동등한 고용 기회를 주장했다. 파올라 라이트 데이비스는 “노동하기에 적합한 몸을 가진 모든 남성은 하루에 1달러를 벌 수 있고 쉽게 고용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조건의 노동력을 가졌으며, 남자들과 똑같이 꼼꼼하고 총명하며, 삶에 있어서 정직하고 훌륭한 무언가를 하기 원하는 여자들은, 운이 좋아 봐야 한 달에 5달러나 6달러를 벌 수 있을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노력은 10여 년 뒤에 성과를 얻었다. 1860년 뉴욕에서 결혼한 여성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여성의 참정권은 70여 년이 지나서야 보장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보장되고 있지 않으며, 이는 남성의 권위를 깨기가 이토록 힘이 드는 것이며, 역사는 우위를 지키려는 남성들과 그것을 깨려는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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