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필름포럼 전시회
- 지하조직
- 2014
-
- 철도 민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기차 사진
- 지하조직
- 2013
-
- 이것은 70년대 사진이 아니무니다(3)
- 지하조직
- 2013
-
- 산
- 지하조직
- 2013
-
- 구 세대(2)
- 지하조직
- 2013
미군 하에 있는 아이티
by Helen Scott
미국 언론이 1월 12일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아이티를 보도했지만, 지난 수 십 년 간 그 섬에 불어 닥친 재난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 재난이란, 서반구에서 현재 가장 가난한 나라에 이익 증진과 이익 보장을 위해 끼어든 미 정부가 오랜기간 행했던 피비린내 나는 임무이다.
1900년대 이후, 미국은 아이티를 남미와 카리브해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주요 요소로 보았다. 1915년, 미군은 아이티를 19년간 점령했으며, 그것은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 이후에야 끝이 났다. 미군은 떠나기를 강요 받았으나, 아이티 민중의 향상을 위해 주둔한다는 주장을 하며 19년 후에야 98%의 문맹률, 한 개의 작물, 커피, 그리고 거대 미군-국내 저항 진압 훈련을 받은 군인-에 의존하는 경제를 남겨놓고 떠났다.
그 군대는 후에 뒤발리에의 독재를 원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미군 부대가 실제로 아이티에 없었을 때 조차,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뒤발리에 정부가 전복된 후, 미국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정부에 대항한 군사행동을 포함, 좀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돌아섰다.
여기, Helen Scott이 국제 사회주의 비평(the 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2004년 5-6월호에 쓴 "포위된 아이티: 미 제국주의의 200년"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1950년대 뒤발리에 정부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다.
뒤발리에 정부
1950년대, 미국 점령에 의해 악화된 관계는 아이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미 최저 생할 수준이거나 혹은 그 이하였던 소작농들은 국제 커피 시장에서의 또 다른 폭락으로 인해 심한 손해를 입었다. 임기가 짧았던 정부는 세금징수와 억압을 강화 하는 것 외에 어떤 해결방안도 제시할 수 없었다.
1957년, 그 고통 받는 나라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해에, "그림, 인쇄, 글 혹은 정부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는 사상을 표현하는 그 어떤 것들도 금지했으며, 카키색이나 어두운 색 옷을 금지했다. 사실, 그는 경멸해야 한다던 엘리트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뒤발리 정권은 소수의 가진자와 다수의 가난해진 사람들 간의 극단적 사회 양극화를 초래했다. 그가 재 분할한 부는 가난한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와 정부 재원을 거쳐 그의 추종자와 공범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아이티 역사가 미셸-롤프 트루이요(Michel-Rolph Trouillot)는 뒤발리에가 아이티의 "위기를 고착화시켰다"고 말한다. 뒤발리에는 반대세력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기관을 공격했다. 언론사가 문을 닫았고, 카톨릭 교회, 학교와 대학을 정리했으며 조합을 탄압하고,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고문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킨반면,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비자금으로 보답했다. 또한 군대를 동원한 무차별적 폭력적 탄압을 통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는 무기를 소지한 사복 깡패, 무시무시한 통통 마쿠테(Tontons Macoutes)인 "광기의 신변보호군"을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파파독 뒤발리에는 미정부에 의해 세워지지 않은 반면, 존 F. 케네디 정권 시절, 뒤발리에 정권은 미국의 지원 때문에 번창했고 궁극적으로 살아남았다.이는 뒤발리에가 미 제국주의에 유용하다는 것을 두 가지 점에서 입증해 보였다.
첫째, 그는 무조건적으로 미 자본주의를 지원했다. 예를 들어, 그의 집권 4년 동안, 아이티 보크사이트 광산업을 독점을 하고 있던 미국 레이놀드 채광 회사는 아이티 정부에 수입의 7%만을 지불했다. 사이잘(용설란과에 속하는 식물. 이 식물의 잎섬유는 로프・바닥 깔개 등을 만드는 데 쓰임-역자), 사탕수수, 구리 그리고 보크사이트와 같이,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수출품이 증가했다.
둘째, 냉전시기에, 뒤발리에는 공산주의에 방어벽을 치고, 쿠바와 대립했다. 그는 아이티 공산당(PUCH)을 탄압하고 좌파를 마녀사냥함으로써 반-공산주의자임을 입증해 보였다. 트루이요는 다음과 같이 썼다:
[뒤발리에 정부는] 수 백 명의 진보적 지식인, 작가, 교수, 기자, 그리고 조합과 농민 대표들을 감금하고 제거하거나, 강제 추방했다. 이들 대다수는 PUCH나 다른 어떤 정치조직들과 관계가 없는 이들이었다. 이념적 부분에서, 희생자들 대부분은 미국 명명법으로 중도좌파 정도로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때부터 쭉, 아이티는 파파독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방문했던 미 넬슨 락펠러의 확실한 동맹국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정권을 물려받을 때, 그의 취임식이 방해 받지 않도록 미군함이 아이티 바다를 순찰했다.
신자유주의부터 라발라스(Lavalas)까지
1971년에 정권을 잡은 장클로이드 뒤발리에는 제국주의의 다음 단계인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경공업에 경제를 개방했으며 미국 회사들을 위해 옷과 다른 상품들을 제조하는 싸고 비조직된 노동자들을 제공하는 조립공장 개발을 감독했다.
이후 10년간 신자유주의는 국가를 변화시켰고, 농업의 소작농의 감소를 가속화 시켰으며, 수 십만 명의 시골의 가난한 이들이 도시로 도망가도록 만들었다. 가난한 이들은 포르토프랭스 외곽의 시티 솔레일과 같은 빈민가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20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기, 물, 하수도도 없는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뒤발리에 통치시기는 또한 IMF, 미주개발은행, 서유럽 정부들로부터 외채의 형태로 증가된 국제적 "원조"를 받았다. 이 부패한 정권은 많은 돈을 착취하고 적은 돈은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
1973년과 1980년 사이에 아이티의 빚은 5천3백만 달러에서 3억6천6백만 달러로 늘어난 반면에 1976년 48%였던 극 빈곤층은 1985년 81%로 증가했다. 외채는 농산물 수출과 아이티의 소작농들을 파괴시키고 오직 미국과 아이티 기업의 엘리트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아메리칸 플랜"과 같은 사업의 경제 상황에 달렸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계속 부유해지고 대다수는 망가지는 시기였던 10년 뒤, 아이티 민중들은 그들의 적에 대항해 국내외에서 다시 일어났다. 1980년대 말, 거대한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뒤발리에 정권과 미국의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가져온 상황에 대항하는 교회와 라디오 방송국들을 활용했다.
억압에도 불구하고, 수십만이 1986년까지 거리로 나왔으며, 장클로이드 뒤발리에를 몰아냈다. 게이지 에이브릴(Gage averill)의 목격담은 당시 환희에 넘친 분위기를 전해준다:
뒤발리에의 망명소식이 전국에 퍼짐에 따라, 군중들은 거리로 나와, 쇄신의 상징으로 나뭇가지를 꺾어 하늘높이 치켜올렸다. 군중들은 경멸적이고 굴욕을 당한 지배자에게 작별인사를 고할 때, 풍자적인 오버톤으로 번스(Burns)의 "석별의 정"을 불어로 불렀다.
뒤발리에로부터 자유로워진 아이티의 민중들은 크리올 아이티인(아이티로 이주해온 백인-역자)의 근절, 즉 기존 정권을 뿌리부터 뽑아내겠다는 격변(dechoukaj)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노래는 "우리는 단결을 위해 모든 나쁜 잡초를 절멸시킬 것이다"라고 선언했으며 가난한 이들은 그렇게 했다.
잡지 NACLA에서 그렉 챔버레인(Greg Chamberlain)이 쓴 글에 의하면:
dechoukaj는 아이티인들이 민중의 정의를 위하여 그 나라를 관리했다. 부자들의 저택을 압수하고, 통통 마쿠테(Tontons Macoutes)를 사형시켰으며, 뒤발리에 추종자들로 인해 직업을 잃고 숨어 지내야만 했던 이들이 연좌농성을 하고 투쟁을 했다.
마쿠테의 새로운 중앙본부는 학교로 바뀌었다. 일부 각료들은 그들의 월급을 다시 내놓았으며 공산주의 역사가 로저 게일라드(Roger Gaillard)는 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뒤발리에 엄마의 이름이 붙여진 시티 시몬 빈민가는 기독교 라디오 솔레이 이후에 다시 이름 붙여졌다. 그리고 아이티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행진을 했다.
10년 뒤, 운동은 정화의 물결 혹은 홍수를 의미하는 라바라스로 모였다. "혼자서는 약하다. 함께하면 우리는 홍수가 된다"라는 슬로건이 거리에 크게 울려 퍼졌다. 급진적 목사이자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지도자로서 등장했다. 1990년에, 그는 14명의 대통령 후보 중 67.5%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아이티 민중들은 국가를 넘어 그들의 표면적 자유를 축하했다.
그러나 단지 9개월 뒤, 국가 7대 부자들에 의해 자금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뒤발리에 추종자들에 의해 연출된 쿠데타 시작되었다. 아리스티드는 그 나라를 쫒겨 났다. 쿠데타 정권은 이후 3년 동안, 어마어마한 체포, 암살, 고문, 강탈 그리고 잔학행위로 민중들에게 복수를 가했다.
1994년 9월, 미군이 다시 아이티로 들어왔다. 이 침략의 목표는, 공식적으로는 억압이 아닌 아이티 민중의 자유와 군사정권의 제거, 그리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복귀시키기 위함이었다. "민주주의 복원 활동" 냉전 후 시기의 미 외국 정책의 상징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는 "인도주의적 침략"을 위한 것이었다.
침략의 진짜 목표는 미 제국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이익을 위협하는 것은 쿠데타 정권이 아니라 미-뒤발리에 동맹을 이미 추방시켰었던 민중이었다. 그들은 이제 신자유주의 전체 시스템에 도전하고 있었다.
아리스티드에 대한 거짓 선동
그레그 챔버레인이 1986년 2월 뒤발리에의 퇴장에 대해 쓴 것에 따르면, "더욱 지속적인 봉기가 발생했고, 더욱 급진적 세력과 반미감정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워싱턴은 행동을 해야만 했고, 뒤발리에를 프랑스로 한밤중에 추방시켰다."
그들이 안전을 위해 뒤발라에를 제거하자, 미국은 기존 정권의 주요한 특징을 포함하고, 오른팔인 앙리 낭피(Henry Namohy)장군이 이끄는 국가 정부 위원회(CNG)를 설치했다. 국가 정부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통통 마쿠테를 없앴지만 "많은 이들이 그저 제복을 갈아입고는 군대와 경찰로 살짝쿵 들어갔다."
국가 정부 위원회 첫해 동안 미국 정부는 군사 원조금으로 2백8십 만 달러를 지원했으며, 그 돈은 정부에 저항하는 아이티인과 투쟁하는 인권단체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증거는, 미국 지원금을 사용하는 국가 정부 위원회가 15년 전 뒤발리에가 죽였던 사람수 보다 더 많은 아이티인들을 사살했다는데 있다.
그 시기, 미국은 아리스티드에 적대적 태도를 유지했다. 1990년 선거에서, 미국은 예전 세계은행 당국과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을 통해 다국적 기업 마르크 바쟁(Marc Bazin)의 옹호자들을 지지, 지원했다.
그 당시 아이티에 있었던 저널리스트 밥 셰코치스(Bob Shacochis)는 제도의 이중성을 목격했다.
국방부, 국회, INS, 그리고 국가 언론과 결탁한 CIA는 백악관이 언급한 정책을 뒤엎기 위해 공공연하게 활동했다. 정보기관의 최고 분석가에 의해 되풀이된 짜맞추어진 증거를 가지고 티티드(Titid, 아리스티드의 별명)의 정신건강에 대한 더러운 선동을 시작했다. 그 정보기관은 교활한 마약 중독자, 스스로 판단력을 읽은 미치광이인 엠마뉴엘 "토토" 콘스탄트(Emmanuel "Toto" Constant)에 의해 조직된 준 군사적 테러리스트 조직 아이티진보전선(FRAPH,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몰아내고 등장한 군사 정권 아래 자행된 대부분의 국가 테러를 주도-역자)의 배후세력으로서 기능했다.
많은 군사정부 관료들과 지지자들이 CIA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 국제 발전을 위한 미 정부기관을 통해 상당한 미국 자금을 받았다. 모든 정부기관이 아이티의 민중 운동 발전을 막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다.
미국이 쿠데타를 대규모로 일으켰음에도, 계속되는 고통에 대한 책임은 완강히 거부했다. 1991년 쿠데타가 일어나는 동안, 38,000명의 아이티인이 미국으로 도망갔다. 이들 중 5% 이하가 피난처를 얻었고, 나머지는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관타나모 난민캠프에 수용되었다. 더욱 괘씸하게도, 미국 정부는 도망가려 했던 이들 중 쿠데타 지도층들에게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이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그렇게 했다.
미국은 군부에 통상금지 조치 취했으나, 그 타격은 지배계급이 아닌, 빈민층이 입었다.
1994년 침략 전, 새로운 정부에서 군사정부 수립의 역할을 했던 수치스러운 가버너즈 아일랜드 협정에서 미국은 군부 지도자들과의 거래를 확보했다. 반면에 아리스티드는 그의 남은 임기를 (그의 대부분의 임기가 쿠데타에 의해 도둑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휴식을 보내며 마치도록 했으며,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정부 지출을 관리하며, 국영기업을 민영화 하고, 저임금을 유지하며, 관세를 없애고, 수출 산업을 위해 인센티브를 주는" 가혹한 구조조정에 사인을 해야만 했다.
사실상 군사 점령은 무장 해제를 하지 않고 뒤발리에 추종자들과 군부세력을 복권시켰으며, 기존 경찰의 외관만 바꾸고는 새로운 경찰이라 칭했다. 군부세력의 활동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미 정부는 FRAPH와 아이티 군대의 본부로부터 150,000 페이지의 문서를 강탈했으며, 아리스티드를 통해 그들에게 건네주는 것을 거부했다. 거기에는 분명히 수년간의 악행과 CIA가 공모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셰코치스는 다른 이름의 마쿠테가 주둔하는 포르토프랭스에서 미국 군대가 다른 쪽을 보고 있는 중에 군중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대표적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미군의 목적은 이제, 그들이 아마도 해방시켰던 수천의 빈민층의 분노로부터 부유한 엘리트층을 산기슭으로 대피시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인듯 하다"라고 썼다.
클린턴 행정부의 아이티 피난민 투옥이 만들어낸 또 다른 명백한 이유는, 미국으로 이주하려는 아이티인을 거부하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티에 위장 명령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미국, EU, 캐나다, 일본에 의한 원조 중지 때문에 가난은 점점 심해졌다. 끔찍했던 뒤발리에 통치 10년 동안 기꺼이 지원해 왔던 미국은 아리스티드 집권 시절, 그가 그 돈을 "정직하게 지출"했다는 것을 증명할 때 까지 지원을 하지 않는 무례함을 범했다.
그러나 2번째 집권한 아리스티드는 더 이상 반항적 목사로서의 이미지가 아니었고, 세계의 지배자들을 위협했던 가난한 이들의 지지자가 아니었다. 그가 약속했던 "문맹 퇴치, 시골 병원, 공공 노동, 국토 개혁" 중 그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라발라스 당은 분열되었고, 아리스티드는 개인 숭배에 의한 지배를 계속 해나갔으며,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민중 운동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그는 해결책으로서 도미니카 공화국 국경의 새로운 수출 가공 지역을 제안했다.
비극적이게도, 아리스티드를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쿠데타를 주도한 우파세력의 반란이 미 정부와 협력한 아이티 지배계급에 의해 일어났다.
2004년 9월, 미 해군은 아리스티드를 납치해서 아이티를 떠나는 비행기에 그를 실었다. 미국 정부는 아리스티드의 행복을 위한 배려 행위라고 주장했으며, 그가 자발적으로 사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는 곧 그가 미군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고 세계에 알렸다.
아리스티드는 아이티에 돌아올 수 없었고, 점령은 브라질을 필두로, 여러 나라의 군대에 의해 시행되는 UN에게 위임되었다. 새로운 권력은 정치활동가를 억압했고, 수천의 민중들이 점령군, 혹은 새로운 지배 권력 하에 있는 깡패들에 의해 죽었다.
변화를 위한 아이티의 민중 운동은 아이티 지배세력과 미 제국주의의 공모로 인해 다시 한번 축소되었다.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그들을 까발리며 우리의 임무를 다한다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이티인들의 자유를 위해 이 거대한 장애물을 제거한다면, 그들은 승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socialistworker.org
댓글 목록
카라안
관리 메뉴
본문
좋은 자료 bona traduko! Dankon al vi.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