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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na.co.kr/view/AKR20260911064700073?section=search
(도쿄=연합뉴스) 조성미 특파원 = 지난 9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야구인 장훈(일본 이름 하리모토 이사오)씨가 별세 나흘 전에도 자신이 겪은 피폭의 아픔을 전하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강조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11일 보도했다.
마이니치는 장씨가 수락해 지난 5일 진행된 전화 인터뷰에서 "핵무기를 전 세계에서 없애야 한다. 무기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고 전했다.
재일교포 2세로 히로시마에 살던 그는 5세였던 1945년 8월 6일 폭심지에서 동쪽으로 2.3㎞ 떨어진 집에 있다가 피폭됐다.
그는 폭발 순간 온몸을 감싸 안아준 어머니 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폭심지 가까이서 근로 동원으로 일하던 큰누나는 피폭 뒤 열기에 대한 괴로움을 호소하다 숨졌다.
마이니치는 2006년 10월부터 원폭 피해를 다루는 심층 기획 보도를 시작했는데, 1회 기사에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장씨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재일교포인 일본프로야구의 영웅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해설위원이 별세했다. 향년 86세. 일본프로야구 전·현직 선수들로 구성된 명구회는 10일 "장훈 위원이 9일 오전 일본 도쿄 도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장훈 위원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최다 안타 기록(3천85개)을 세우는 등 통산 타율 0.319, 504홈런, 1천676타점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보좌로 활동했으며 2007년엔 한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사진은 1980년 5월 28일 롯데 오리온스 선수로 출전해 한큐전에서 3천안타를 달성해 기뻐하는 장훈. 2026.9.10 photo@yna.co.kr
연재 시작 20주년을 맞아 이 매체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전화 인터뷰를 수락한 것이 별세 나흘 전 진행됐다.
장씨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 출범 이래 일본의 '국시'(國是)로 여겨져 온 '비핵 3원칙'의 재검토가 거론되는 데 대해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가져서는 안 될 것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8세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뒤 입을 닫고 있다가 60세가 넘은 2005년 무렵에서야 피폭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TV 거리 인터뷰에 응한 젊은이들이 "전쟁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데 위기의식을 느껴 자신의 피폭 경험을 공유하고 반핵 메시지를 내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피폭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라며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지구상의 마지막 원폭 피해자가 돼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그는 한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이 너무나 싫은 마음에 "법으로 이 날짜를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발언도 한 적이 있다.
이 발언이 보도되자 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8월 6일을 잊지 말아달라"는 손 편지를 보내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이후 피폭 당시의 기억이 상기되는 것을 꺼려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2007년 처음 둘러봤다.
일본 전국의 평화 단체들로부터 핵무기·전쟁 반대 활동 관련 메시지 요청이 잇따랐고 그는 적극적으로 응했다.
장씨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히로시마현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 하라다 히로시 이사장은 "누나를 잃은 아픈 경험을 안고서도 수많은 증언을 해 온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그의 공헌을 기렸다.
그는 지난 2011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피폭 경험을 이야기해도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지구상에서 핵무기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죽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한 셈이 됐다.
한편, 마이니치는 장씨가 고등학교 야구부 2학년 때 1학년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던 경험에 대해서도 전했다.
당시 받은 처벌로 인해 그는 뛰어난 야구 실력에도 일본 고교 야구 선수들의 '꿈의 구장'으로 불리는 고시엔 대회(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장씨가 당시 학교 야구부장이 "나는 조선인이 싫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자 그의 어머니는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평등하다.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라"고 조언했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계기가 됐다.
cs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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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60824112110473
이기영, 두만강(풀빛, 1989) 1권 발췌
271쪽
이씨부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았다. 그는 오직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할 뿐이었다.
"그런데 인제 나라가 망하고 양반이 망하게 되니까, 그들은 우리의 철천지웬수인 왜놈들과 부동해서 돈 가진 새 양반이 되어보려고 또다시 백성을 못살게 굴지 않소. 누님! 왜놈은 임진조국전쟁 때부터 우리나라와 웬수지간이요, 우리 아버지를 죽인 웬수요! 그러므로 왜놈과 결탁하는 조선놈은 어떤 놈이든지 나의 웬수요. 누님! 그렇지 않소? 나는 이 웬수들을 용서할 수 없소. 이런 놈들은 누구든지 웬수로 미워하겠소. 그놈들을 저주하겠소!"
이번에는 진경이가 두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또다시 소동을 일으켰다. 진경이는 참으로 극도의 격분이 치밀었다. 한식경을 울고나서 그는 옷소매를 쳐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313쪽
성천마마는 장래의 운명을 예측하고 영감에게 지금이라도 창복의 몫을 분재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면 한길주는 또 그게 뭬 그리 급한 일이냐고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그는 남 몰래 애가 탔다.
성천마마는 첩이 된 죄로 창복이한테도 큰소리를 못하였다. 왜 아들에게 떳떳한 어미로 못되었던가? 첩은 자식에게도 죄인이다. 그는 아들의 눈치를 은근히 살피었다.
성천마마의 고민은 남 모르게 커갔다. 아들에 대한 동정은 창복이가 씨동이와 친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도 여자동무가 없는 것을 미루어서 알만하다. 양반의 첩은 상놈도 아니요 양반도 아닌 반신불수다. 이러한 신분상 관계는 그야말로 상하불급의 고립된 처지에 빠지게 하였다.
452쪽
곰손이는 산전을 파서 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그런데 석혈(石金鑛)이 터지면서 광산길을 닦은 것이 하필 그의 밭 가운데를 뚫고 나갔다. 그 결과로 밭은 거의 절반이 없어지고 양편 귀때기가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자기 집 밭으로 길을 내는데 그는 부역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남 몰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산전이 있었기 때문에 덕만이를 은밀히 만나서 그 일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487쪽
그중에도 김관일, 권치백이 두 집 식구들과 춘실이네 식구들은 더욱 친한 정리를 떼치기가 섭섭하였다. 그들은 제가끔 길양식으로 가다가 먹을 것을 만들어왔다. 덕성이네는 미싯가루와 송화가루를 한봉지씩 가져오고, 치백의 아내는 흰무리떡을 쪄오고, 감자와 강냉이를 삶아온 이도 있었다. 그때 마침 칠앗 임첨지 내외는 사위가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하여 꿀 한단지와 이차떡을 한목판 해가지고 왔다.
"아니 짐이 무거운데, 뭘 이렇게들 가져오시고 원!"
곰손 어머니는 그들의 동정심이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타국으로 멀리 떠날 생각을 하니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떠나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내는 사람의 마음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이들은 왜 제 나라 땅에서 못 살고 산 설고 물 설은 타국으로 가야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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