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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새로운 직장의 장점 ㅋ
의식적 노력 없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책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어서 행복해요 ㅋㅋㅋ 뭔 소리냐
책은 좋은데 정리는 귀찮고, 정리를 안 하면 좋은 내용과 감흥을 영구삭제하게 되니... 이게 숙제여...
내가 뭘 읽은 거냐 ㅋㅋㅋ 인플루엔자는 핑게일 뿐.
역사물을 가장한 과학 아라비안 나이트, 아카데미 버전 무뜬금 사랑과 전쟁, 영웅호걸들의 웨스턴 삼국지냐 뭐냐..
와, 인플루엔자를 다룬 책인데 내내 미국 의학계의 후진성 이야기하다가 90쪽에 와서야 처음 유행 시작됨. 그래서 이제 뭔가 스토리가 나오나 했더니 다시 160쪽 될 때까지 1차 세계대전 미국 뻘짓 이야기 ㅋㅋㅋ 그리고 나더니 이제 수십 페이지에 걸쳐 미국 방방곡곡 유행이 본격화되면서 진짜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이 쓰러져감... 보스턴 외곽 군대 훈련소에서 중서부의 작은 시골, 알라스카의 에스키모 마을까지.. 일단 유행이 시작되니 정말 생생하게 비극과 공포와 좌절을 방대한 사료를 이용하여 손에 잡힐 듯이 그려냄...
'재미있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너무 큰 비극이었지만, 엄청 흡인력 있게 빨려들어가며 읽었음.. 진짜 이야기꾼일세!!!
유럽과 비교하면 후발주자였던 미국 근대 의학교육 체계에 대해서도 좀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19세기 말 무렵 최대 20% 정도의 의대는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요구하지 않았고 등록금만 내면 누구나 받아줬다 ㅋㅋ 예컨대 1981년에 하버드 의대에서도 9개 과목 중 4개 낙제해도 의사 졸업장 ㅋㅋ
대학과의 관련성도 적었고 (직업학교니까!!!) 병원과의 연계도 없었음. 플렉스너 리포트 이전의 참상을 아주 상세하게 소개해줌... 사실 이런 거 읽을 때마다 히포크라테스 전통 이야기하며 천부의권 운운하는게 떠올라 정말 실소가 나옴....
존스홉킨스는 교수도 뽑았고 병원도 열었지만 돈이 없어서 의대를 아직 못 열고 있었는데 ㅋ 여학생을 받아주면 50만 달러 기부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지만!!!) 이들을 받아주면서 겨우 개교.... 이건 또 뭐냐.. 돈 앞에서는 성차별도 무너지는구나 ㅋ 홉킨스 문 열던 1893년, 대부분의 의대는 수련병원이나 대학과 연계가 없었고 대부분의 교수 월급은 등록금으로 충당하고, 환자는 만져보지도 않고 졸업 ㅋ 어쨌든 홉킨스가 개교하면서 미국 의학교육의 새로운 장이 열림...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1차 대전이 인플루엔자 대유행에 기여한 부분이 훨~~~씬 더 컸다는 것도 깨닫게 됨. 전쟁 총동원 체제 하에서 군사훈련, 이동, 밀집환경을 통해 전파가 가속화되었던 것은 물론 언론 통제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일본에서만 적십자가 군대의 하수인으로 일했나 했더니만,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음. 특히 간호 인력을 전선에 투입하는 핵심 기구.... 앙리뒤낭 어디 간 거냐???
한편 민족 자결론으로 한민족에게 유명한 윌슨.... ㅡ.ㅡ 실상은 기독광신도..... 평화협정 체결하러 파리에 갔다가 인플루엔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제정신 아니었던 것 같음 ㅋ
학생 시절 왜 바이러스 인플루엔자와 헷갈리게 Hemophilus influenza로 이름 지었을까 궁금했던 것도 풀림.
당시 정말 많은 과학자들이 인플루엔자의 병원체를 밝히기 위해 애썼고 그 시도 자체는 당시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을 부수적으로(?) 거두었다는 것도 알게 됨. 그 중의 하나가 무려 DNA를 통해 유전이 이루어진다는 것!!!
어쨌든 병원체는 아니었지만 2차 세균감염을 저지하기 위한 폐렴구균 백신이나 혈청의 대량 생산도.. 내 막연한 추측보다 너무 본격적이라 깜놀함. 당연히(?) 공중보건체계도 강화되고 통계학적 연구도 발전!
1918년 봄의 1차 유행이 비교적 마일드했다면 (증상이 매우 마일드해서 1918년 7월에 출판된 란셋 논문조차 아무래도 인플루엔자는 아닌 것 같다고 결론.. 하지만.. ) 가을 2차 유행이 엄청 폭발적이고 사상자를 많이 냈는데, 특히 군대를 중심으로 청년 집단의 피해가 극심했고 cytokine storm 에 의한 ARDS 가 하도 급격하게 나타나고 청색증이 심해져 심지어 인종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고... ㅡ.ㅡ 사람들이 '흑사병'이라고 오해할만했다고 하니... 그래도 오늘날 코로나 유행에서 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있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됨. 사실 유행 시작 1년도 안 되 백신이 개발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음 ㅡ.ㅡ 예전에 영화 contagion 보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 바로 신속한 백신 개발이라고 그랬었는데...
인간사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이렇게 무서운 유행이 몰아치고 매장을 할 수가 없어 집안에 시체를 두고 살아가는 환경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거기에 또 익숙해졌다는 것....... ㅡ.ㅡ
그리고 흥미로우면서도 좀 서글펐던 것은 인류의 바보짓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이 발간된 것은 이번 코로나 유행 한참 이전인데, 마치 지금 유행을 보고나서 글을 쓴 것 아닐까 의심할만큼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그 시절에도 있었음.
빠른 시간에 급격히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워 관을 쌓아두고, 구덩이를 크게 파서 시체를 한꺼번에 매장하는 모습, medical surge 때문에 의료인, 특히 간호사 부족으로 난리가 나는 모습, 모이지 말라는데 말 안듣고 모여서 전파 확산시키는 모습, 괜히 겁주는 게 더 위험하다며 별거 아니라고 가짜 안심을 주는 모습 ("이제 피크는 지나갔다!" ㅋㅋ), 가짜 뉴스 ("독일인이 바이러스를 몰고 왔다!" ㅋ), 탑 저널도 제대로 된 과학적 검증이나 리뷰 없이 말이 될만한 논문은 어지간해서 다 실어줘서 아무말 대잔치 난리가 난 모습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쓰는 것까지 똑같네 그려.. ), 섬나라 호주 빗장 걸어잠그고 초기에 전파 차단에 성공했던 것... ㅋ 무엇보다 백미는 웰치가 1920년에 이 유행 사라지고 나면 다 까먹게 될 것이라는 예측 등등....
이렇게 인간 사회의 도저에 자리한 본성, 의식, 사회적 질서가 좀처럼 변하지 않으니까 '고전'이 사랑받는 것이겠거니... ㅡ.ㅡ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를 다룬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발견.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공포 (홀로코스트, 전쟁)에 대한 책은 많지만 자연이 초래한 공포는 글쎄올시다 아니었을까라고 해석. ...
널리 알려져있든 1918 팬데믹은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과 달리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음. 그 기원은 1918년 초 미국 Kansas state, Haskell county 로 강력 추정됨. 다만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은 1차대전에 총력전 펼치며 대부분의 부정적 뉴스를 검열하던 미국이나 유럽 다른 국가들과 달리 스페인은 아직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았고, 유행은 오히려 덜 심각했지만 맨날 뉴스 대서특필했기 때문 ㅜ.ㅜ
현재 역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은 최소5천만 명, 어쩌면 1억명 사망. 이는 겨우 2년에 걸쳐, 그것도 2/3의 사망이 24주, 특히 그 중 절반 이상이 1918년 9월 중순에서 12월 사이에 발생했다고 함. 중세 흑사병이 한 세기 안에 죽인 것보다, 에이즈가 24년에 걸쳐 죽인 것보다 24주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 ㅜ.ㅜ
미국에서는 유행 동안 총 사망의 절반 정도가 인플루엔자와 그 합병증 연관되었고, 평균수명을 10년 이상 깎아먹을 정도였다고 함. 젊은이 피해가 컸으니 그럴 만도 ㅜ.ㅜ 당시 추정값을 지금 미국 인구에 대입하면 약 175만명 사망 규모라고 하는데, 2월 23일을 기점으로 미국의 코로나 누적 사망자 수가 50만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의학기술의 발전은 다 무엇인가 싶음 ㅜ.ㅜ
유행 당시 영아와 노인의 사망률이 당근 높았지만, 청년층 사망률도 높아서 W 모양을 보였는데 아마도 가장 치명률이 높았던 것은 임산부.. ㅜ.ㅜ 입원환자 중 치명률이 23-71%에 이르고, 생존한 이들 중에서도 26%가 유산을 경험했다고 함.... 이후 후유증도 적지 않아서 그 유명한 수면병 (encephalitis lethargica)... 칼 메닝거는 인플루엔자와 조현병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는데, 2/3의 사례에서 5년만에 완전히 회복됨...
저자는 인플루엔자 감염이 너무나 보편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인종이나 계급에 따라서 패턴을 보여주지는 않았다고 해석했는데, 밀집도와 분명히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계급과 사망률 사이에서는 연관성 관찰됨. 물론 치료제가 변변치 않았고 유행이 워낙 대규모여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좀... 게다가 그동안 높은 인구밀도로 도시가 개발되지 않아 면역 수준이 낮았던 저개발국가, 에스키모 등에서 그 피해는 심각..
코로나 유행 초기에 아마도 이 책을 읽었으면,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내용을 좀더 많이 알았더라면 조바심이 덜 났을 것 같은데....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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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읽는 밤, 나를 읽는 시간 - 그냥 나이만 먹을까 두려울 때 읽는 루쉰의 말과 글 이욱연 휴머니스트, 2020 |
대학생 때 루쉰 선생의 번역서를 거의 빼놓지 않고 읽었던 것 같은데. 세세한 내용들은 기억이 안 나고 (길이 원래 있던 게 아니라는 그 구절만 기억!)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날이 서 있고 막 야단맞는 느낌이었다는 "분위기"만 기억 ㅋㅋㅋ
심지어 닉네임 노신 님께서 선물해주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아직도 책꽃이에 있는데 시집조차도 마음이 촉촉해진다기보다 또 야단맞는 느낌이었던 기억 ㅋㅋㅋ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신기방기한 느낌... 아니 왜 나랑 생각이 이렇게 비슷한 거야???
나는 내용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했던 고민, 그가 썼던 글들이 어느 덧 내 생각의 회로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버렸던 것이여????
마치 내 생각을 들킨 것처럼 익숙했는데, 그게 내 생각인지, 아니면 그동안 읽었던 글들이 결국 이런 방향으로 체화되어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 건지 구분이 안 됨...
전집을 다시 읽어봐야 하나 생각.. 대학생 때 그 느낌, 불편하고 생경하고 야단맞는 느낌과는 다르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구..
이욱연 선생님의 해제도 깊이 있어서 좋음.
"저마다 삶에는 트라우마가 있다.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이후다. 루쉰이 전하는 삶의 지혜는 치유를 위해서 지금 이곳의 삶을 응시하면서 말하라는 것, 글을 쓰라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시작점으로서, 새롭게 자신을 만드는 차원으로서 능동적인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루쉰이 전하는 삶의 지혜다."
작년에도 연초에 반짝 열심히 포스팅하고 하반기로 갈수록 흐지부지하더니 ㅋㅋ
매년 비슷한 패턴 반복... 올해는 뭔가 더욱 어수선한 것이 과연 월드와이드 질풍노도 시대 다운 현상이다.
# 폴 블룸 [공감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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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시공사, 2019 |
뭘까... 도전적 문제제기에 동의하고 이걸 어떻게 풀어갔나 궁금해서 책을 골랐을 뿐인데 스티븐 핑커, 조너선 하이트, 피터 싱어 줄줄이 딸려옴... 모두 석연치 않은 사람들... ㅜ.ㅜ
그리고 책은 조금 실망스러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서론'만 반복되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온갖 좋은 것에 공감이라는 개념을 다 가져다 붙이고,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을 구분하지 않고 쓴다는 점, 도덕적 동기가 마치 유일하게 공감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는 나도 백퍼 동의.
나도 공감 싫어함. inequality of what? 이라는 아마티야 센의 질문처럼 누구에게, 무엇을 공감할 것인가에 따라 공감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수도 있고, 세상 무서운 흉기일 수도 있음. 공감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 공감이 도덕적 잣대로 쓰이고 절대화하는 것에 반대. 도덕적 판단은 꼭 그사람이 되어보지 않아도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않아도 가능하고 여러 가지 다른 기준들이 있음. 예컨대 정의론이 그렇잖여?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라는 저자의 비유에 "공감" (이 때의 공감이란 '동의'라는 뜻). 다수의 피해를 두고 눈앞의 생생한 서사를 보여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인식가능한 희생자 효과'로 명명할 수도 있음.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공감(empahy)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 . 애덤 스미스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는 이걸 sympathy 라고 지칭했는데 저자는 이를 '연민'으로 개념화 (나는 전자를 감정이입, 후자를 공감이라고 부르겠소만.. 번역 상의 문제인 것 같음). 즉 empahty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고, sympathy or pity 는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개인의 반응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듯함, 관심, 배려의 감정. 연민은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것이지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은 아님 (심지어 명상수련자가 참여하여 이걸 functional MRI 로 실험한 연구도 있음 ㅋ)
"직감에 의존하는 판단에는 결함이 있다... 우리가 공감과 같은 직감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직감의 노예는 아니다. 전쟁에 돌입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비용편익 분석을 거치면서 내자식에게는 사랑을 느끼고 생판 남에게는 특별한 온정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내 자식의 삶이 중요한 만큼 남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판단도 행동도 더 잘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못생긴 사람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선호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마음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선호를 기준으로 도덕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도 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적 행동, 우리의 추론 능력, 우리의 도덕성과 관련하여 우리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줄 알는 능력이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능력 덕분이다."
도덕의 범위는 역사를 거치며 확장되었고, 소수자의 권리를 대하는 태도 또한 포괄성 쪽으로 번화해왔는데 이는 ".. 역사과정을 거치며 우리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증조부모 세대보다 공감을 더 잘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정말 내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 더 추상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타인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이란 부분이 한꺼풀 벗겨내면 몹시도 취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심리학 실험들이 간단한 암시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줌), 그토록 취약한데 학문은 왜 존재하나? ㅋㅋㅋ 사실 이성조차도 환경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성의 우수함이라고 생각하는디 ㅋ
공감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극단적 사례가 소시오패스인데, 이들은 타인의 마음 헤아리기, 즉 인지적 공감능력이 매우 빼어나지만(그래야 가학도 할 수 있음) 이를 조정하고 필요한 곳에 이용 (정서적 공감은 취약). 이걸 두고 '특정한' 공감능력 결핍을 문제삼기보다는 얕은 감정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게낫다고 설명
책 자체는 공감=선 이라고 하는 헛된 믿음(마치 종교가 없으면 도덕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프레임)에 균열을 내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인데 너무 논의가 얄팍해서... 에잉...
# 벤스 [힐빌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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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흐름출판, 2017 |
전반부 어린이, 청소년 시기 힐빌리로서의 직면했던 현실에 대한 담담한 서술은 낯설고도 낯익은 이야기. 지구 반대편 러스트벨트의 쇠락은 피부색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그대로 디트로이트 흑인 이주민의 이야기.
불행을 경쟁할 필요는 없다만 백인의 피부색을 갖고도 깊은 절망과 박탈에 직면하며 무너져가는 힐빌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기에 더해 비자발적으로 뿌리뽑힌 고향없는 삶과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제약에 갖힌 흑인들의 삶을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멀리 부르디외 센세의 '세계의 비참',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Thomas Sugrue의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그리고 최근의 영화 Moonlight, Florida project 까지 동시에 떠오르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한숨...
하지만 한국의 사당동25 그리고 내가 만났던 underclass 청년들이 직면한 삶도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나는 아직도 택배 상하차 일이 제일 쉽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음. 남들은 지옥, 노예노동이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번듯한 졸업장과 인지적 자원, 사회적 자본, 정서적/사회적 기술을 전혀 익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덜 부담스러운 일.....
그나마 닻이 되어주는 (그야말로 anchoring) 버팀목 하나만 있어도 아주 심연으로 추락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삶의 공통점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역사 속에 배태된 개인의 회고록. 풍부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분석'에까지 이르지 못함. 아마도 이것이 세계의 비참, 혹은 The origins of the urban crisis 와 다른 점.
이웃 힐빌리들에게 따끔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당사자성이라는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겠지만, 개인이 아무리 정신차린다 해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음. 타고난 금수저들이라면 대충 해도 가질 수 있는 자원들과 기회들인데, 모든 존재를 갈아넣어서야 그것들을 획득할 수 있다면 wear & tear - 출발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수밖에...
이 책이 인기를 얻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심지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좀 불편....
만국문화박람기도 아니고 남의 나라 빈곤과 불평등 내러티브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고통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세상에 이런 비참함이? 내가 모르는 어떤 세계, 그곳이 아마존 밀림의 어느 수렵채집부족일 수도 있고, 미국 내륙 깊숙이 힐빌리일 수도 있고.... 인간 자체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쁘다 할 수 없으나 (나도 엄청 집중해서 읽기는 했음), 최소한 이 책이 (한국) 연구자를 위한 책이거나 (한국) 연구자에게 울림을 주는 책이어서는 안 될 것 같음. 연구자의 계급적 성격이 점차 상층 편향되면서 이런 종류의 생생한 '체험'담이 연구자들에게 간접 경험과 정서적/인지적 자극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님.. 책 그 자체보다 책을 둘러싼 국내 사회과학 연구의 풍토, 연구자의 계급성, 출판 시장 등등.. 이런게 불편함. 연구자의 책무라면 이 책을 읽고 추천글을 남기는게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underclass 의 삶을 탐구하고 분석해야 하는게 아닐까 말이지...
# 최종희 [대구경북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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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의 사회학 - 대구경북 사람들의 마음의 습속 탐구 최종희 오월의봄, 2020 |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과연 이것이 대구경북만의 특별한 속성일까?
이를테면 다른 비수도권 지역 호남, 충청 사람들은 전혀 다른 마음의 습속을 가지고 있을까?
책이 보여준 마음의 습속은 내가 그동안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왜 이런 습속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것이 어떤 점에서 다른 비수도권 혹은 전근대의 잔재로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이 아쉬움 ㅜ.ㅜ
# 마크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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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리시올, 2018 |
90년대 초중반에 이런 종류의 문화/정치 비평을 엄청 읽은 것 같은데.. ㅡ.ㅡ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관점에서 대중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마치 끝판왕처럼 보이는 현존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과 틈새를 찾아내고 급진적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움직임에 몰두했던 일련의 '세대'가 한국사회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나에게 추천해주신 분들은 어떤 새로움을 보았던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저자가 선호하는 이유 -
1) 포스트모더니즘 테제가 처음 발전된 1980년대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깊고 훨씬 더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볼모의 느낌'. 그 때는 그래도 현실 사회주의가 존속하고 있던 시절. 80년대는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독트린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 시기, 2) 그래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더이상 모더니즘과의 대면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모더니즘에 대한 극복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 3)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온전한 한 세대 경과.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외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 ===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가 역시 끝판왕이라고 진단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진단 어디에서 급진성을 찾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음 ㅡ.ㅡ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품고 있는 아포리아
1) 정신건강 - 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건강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체계이기는 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 2) 관료주의 - 관료주의는 스탈린주의적 유물이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쇠퇴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관료주의는 일상의 일부이며 새롭고 탈중심적인 형태를 통해 오히려 증식. 이 두 가지 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두는 이유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명령이 지배하는 문화영역인 교육을 특징짓고 있기 때문 ===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는 커녕, 국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성장했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는데??? 정신질환은 과연 자본주의의 징후인가? 지나친 일반화 아님? 영국적 맥락에서는 그럴 법도 하다만,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보면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말여.. 유로센트릭 관점은 사실 책 곳곳에 드러남. 읽는 아시아 사람 기분 나쁨 ㅡ.ㅡ 영국 교원노조가 팔레스타인 인권 고만 이야기하고 계급 이슈에 좀더 천착하다는 것 등... 무슨 맥락에서 말하는지는 알겠으나 말이지.
이를테면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의 바깥 테두리를 표지'해주는 상태라면 양극성장애는 자본주의 '내부'에 고유한 정신질환이라는 설명..... 응? "현재의 지배적 존재론은 정신질환의 사회적 인과성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한다. 정신질환의 화학-생물학화는 당연히 그것의 탈정치화로 이어지게 된다. 정신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게 된다 1)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 강화, 2) 다국적 제약회사에 수익성 높은 시장 제공 " === 지배적 담론이 생물학적 설명에 기울어져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미 학술 커뮤니티 안에서도 사회적 기원 혹은 사회적 요인에 의한 영향에 대한 논의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닌데 너무 느낌적 느낌으로 기술하신 것 같음 ㅋ
아니 관료주의 비판하면서도 "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의지에 종식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거대 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 원인, 즉 자본의 효과라고 재단언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또 지리학적으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전략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발전시키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라니, 뭔 하나마나한 공자님 훈계말씀인가. 이미 1980년대에 앙드레고르가 에콜로지카에서 " 사회주의가 만약 도구를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우리는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질환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불만은 외부로 방향을 돌려 실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근데 여성들은 자본만큼이나 가부장주의가 더 문제인 거 같은데? 무슨 생뚱맞은 자본주의 대환원론인지.. 20년만에 이런 거 보니 좀 참신하기는 하다 ㅋㅋㅋ 20년전 혈기왕성하고 마음 앞서나가던 마르크스주의 새내기 비평가 글을 보는 느낌적 느낌...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의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 사실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계급적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데올로기를 수반했고, 항상 당대에 대안은 없다는 이념 하에서 작은 균열들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준 것이 사실.. 이것이 비단 자본주의만의 일은 아니잖여???
반성적 무기력 (reflexive impotence) - 사태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음. 이는 영국 청년, 청소년의 집단적 병리로 우울증적 쾌락 (depressive hedonia) 상태에 빠지게 만듦.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상태를 일컫는 개념
나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반적으로 나랑 안 맞음 ㅋㅋㅋㅋ
실증 자료도 없고, 현실 정치 노력도 없고, 그렇다고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는 '전략'이나 주체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없고, '부재'로부터 도출해낸 가능한 미래에 대한 상도 없고...
온라인 상에서 손꾸락 놀리는 살롱 좌파들의 평론가 놀이가 나는 싫은 거임 ㅡ.ㅡ
# 대니얼 서스킨드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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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기술 빅뱅이 뒤바꿀 일의 표준과 기회 대니얼 서스킨드 와이즈베리, 2020 |
번역서 제목이 안티 아닌가... ㅡ.ㅡ
저자 자신도 "일은 한까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줄어들 뿐"이라고 쓴 마당에
디지털시대 일자리의 퇴조와 관련하여 매우 차분하고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함. [노동의 종말]에 비해 훨씬 최근에 쓰인 책이라 현재의 상황에 훨씬 더 부합하기도 하고.. 가독성도 좋아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림... (사실 내가 이거 읽고 있을때가 아니었는데 말야.. ㅜ.ㅜ)
그런데, 뭔가 대안 쪽으로 오면 갑분싸.... 법인세 높이고 전통자본에 세금 높이는 것 다 동의하는데, 이걸 대안이라고 제시하면... 여기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이미 디지털경제로의 전환 이전에도 이야기해왔으나 노-자간 역관계 때문에 안 되고 있던 건데.. 다시 공자님 말씀 들먹이면 뭐하나 싶은 생각이....
어쨌든 생산의 재배열과 국가의 적극적 분배 개입, 기업 통제를 종합해보자면 '공공성'이라는 언어로 개념화하지 않았지만 결국 '민주적 공공성'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 같음.
참, 눈에 띄는 잡상식 ㅋ '틈새의 신 god of the gaps'이라는 표현 너무 적절 ㅋㅋ 종교지도자들이 현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신으로 정의한다는 의미 ㅋㅋ
# 조정진 [임계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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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조정진 후마니타스, 2020 |
아빠가 건물 경비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순수한 독자의 마음만으로 읽을 수는 없었지.. ㅡ.ㅡ
일단 사회 구조고 뭐고.... 사람들이 참 못됐다는 생각!!!
스스로 응분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비대한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통해서 나의 상대적 지위를 구축하려는 이들의 생생한 사연에 진정 환멸.....
마침 부산에서 노숙인, 이주민 단체 활동가들과 인터뷰를 하고 온 다음날이라, 인류에 대한 환멸이 한층 더 심했던 듯.. 아오 정말 미친 새끼들... 욕도 아까움..
이제는 내가 빠져나온 (최소한 학력자본과 사회자본 측면에서) 그곳을 다시금 돌아보며,
겨우 빠져나왔다는 안도감과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나의 부모, 이웃들에 대한 연민, 사명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멸, 인생은 고해라는 현타 때문에 세상 하직하고 싶은 마음까지....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 조너선 하이트, 그레그 루키아노프 [나쁜 교육]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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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너선 하이트.그레그 루키아노프 프시케의숲, 2019 |
아..... 진짜 애~~~매 한 책...
미시적인 부분에서 많은 내용에 동의하는데, 왜 굳이 우익의 혐오와 차별 행동에 대한 비판보다 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소위) 진보주의자, 좌파에 대한 비판에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좀 이해하기 어려움. 대학이 진보주의자 일색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의 다양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걸 보면 과연 글쎄올시다... 한국 대학, 특히 교수진의 보수성이야 그렇다치고 미국도 우파 씽크탱크가 그렇게 차고 넘치고 시카고학파 같은 우파의 이데올로그가 그토록 강고한데 이건 너무 과도한 걱정 아닌가 말여? 파편화된 정체성 정치나 극단적(?) '정치적 올바름' 에 비판적인 것도 사실 아슬아슬.... 예컨대 정체성의 정치가 보편적 인간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black lives matter 에 all lives matter 로 물타기하는 세력, 페미니즘이 아니라 보편적 휴머니즘이어야 한다며 물타기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영 찜찜할 수밖에 없음 ㅜ.ㅜ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주장을 하는 방식, 그것의 정치적, 이성적 동기보다는 '심리적/정서적 반응'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학생들이 예민하거나 피해자주의에 물들어서라기보다, 분명히 개소리하는 인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과거라면 넘어갔을 문제들도 오늘의 높아진 인권감수성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많아졌기에 문제제기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할진데 말이지...
당장 한국의 상황만 봐도, 학교에서의 성차별 발언, 성추행, 심지어 성폭력 사건들이 과연 요즘 아이들이 예민해서 문제 삼는 건가? 우리 때도 그게 뭔가 불편하고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아무개 선생 '변태'다 피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걸 설명할 안어가 없었을 뿐.... 요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는 소위 '한남 문학'도 이미 예전부터 이건 좀 아닌데, 여자가 무슨 남성 주인공 돋보이게 만드는 도구야, 맨날 겁탈이나 당하고...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하여 이현세 만화에 질색팔색했던 것이나, 일제강점기 남성 지식인 자의식 과잉 소설에 갸우뚱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다만 이걸 문제로 개념화하지 못했던 거지... 마치 예전에는 다 너그럽게 받아들였는데 요즘 애들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이런다고 본다면 진정한 지적 게으름이거나 너무 꽃길같은 안온한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
그럼에도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동의하는 바가 적지 않았고, 나도 '안전주의' 문화에 대한 우려가 있기에 몹시 흥미롭게 읽기는 했음... 사실 이런 책은 혼자 읽을 게 아니라 술 마시고 같이 까대면서 읽어야 하는데 ㅋㅋ 아쉽네 그랴.. 예전에 스티븐 핑커 책 보면서도 같이 까댈 사람을 찾지 못해 한동안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주변 사람들보고 제발 읽고 나의 이 불편한 마음을 같이 나누어보자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ㅋㅋ
책의 내용을 좀 정리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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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회에 두루 퍼져나간 '대단한 비진실 great untruth'을 크게 세가지로 정리.
1) 유약함의 비진실: 죽지 않을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2) 감정적 추론의 비진실: 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3) '우리 대 그들'의 비진실: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 -
이들은 여러 비진실 명제들 중에서도 고대(?)의 지혜와 모순되고, 현대 심리학 연구결과와 모순되며, 이 명제들을 끌어안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해를 입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비진실'로 명명됨. 근데 바로 여기부터 살짝 고개를 갸우뚱... 고대의 문헌이라고 다 진실만 담고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고통과 도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자원이나 레질리언스가 갖춰졌을 때나 성장에 도움이 되지 마냥 좋은 것도 아니잖여. 건강불평등 업계에서 allostatic load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도 20년이 넘었는디.... 심지어 고통을 겪어야 강해진다, 요즘애들 고생 안해서 물러빠졌다는 지적은 자칫 "나 때는 보리밭에서 일하다 애만 쑥 잘 나았다고.. 내가 군대 있을 때는 말이야..." 이런 '라떼' 꼰대가 되기 십상 ㅡ.ㅡ
하지만 두번째 '느낌'에 대한 신봉 (한국에서는 KIBUN ㅋㅋㅋ)이나 선/악 구도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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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리고 책의 모티브가 된 아틀란틱 칼럼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대학들의 연사 초청과 관련한 폭력(?)사태와 교과 과정에서의 '트리거워닝' 요구 점증 때문...
우익적 선동을 일삼는 논객들의 교내 초청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간혹 폭력사태로 진화하는 것에 대해, 저자들은 공론의 장에서 논박하는게 바람직하지 아예 물리적으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 (대학은 무엇보다 '제도화된 부당성 증명'의 공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1991년 정원식 계란투척 사건으로 희대의 패륜 세대라고 싸잡아 욕을 먹었던 90년대 대학생 세대의 일원으로서 한 마디 보태보자면, 당시 전교조 탄압을 비롯한 문제적 인물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대해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음. 겨우 계란이나 던진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과 의사표현의 방법이었는데,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민주화 운동을 억압해온 정권이 학생들을 패륜 운운하며 이 사건을 부각시킨 것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어이 상실.. ㅡ.ㅡ
단,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학생들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 것은 좀 다른 이유 때문임. 학생들의 반대행위가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이나 실천이라기보다, 이것이 학생들의 '감정을 격발'시키거나 '안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반대에 나서는 것이라는 점에 우려.... 이러한 비판에는 나도 완전히 수긍함... 학생들이 교정 안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규범이지만, 미성년자도 아닌 대학생들이 그토록 '정서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지는 진정으로 모르겠음...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좀 후덜덜한 것이, 유혈낭자하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혐오와 차별이 그득한 고전문학을 배우거나 법학과에서 성폭력 사례를 포함한 판례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고 트리거워닝을 요구하거나 리딩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논쟁적 연사들의 발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입을 수있기 때문에 안전공간을 마련하는 것 등은 매우 황당.... 뭔 다들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들인가 ㅡ.ㅡ (아마도 압권은 영국 초등학교에서 눈싸움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 눈 만지기를 금지시킨 거 ㅋㅋㅋ)
이렇게 보호받다가 사회로 나가면 어찌 되는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학 공간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대비를 하고 멧집을 키워서 사회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 사실 SNS 상에도 다큐멘터리나 영화에 대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트리거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을 보았는데, 트라우마는 회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여 ㅜ.ㅜ 그리고 현실 사회에서 언제까지 회피할 수 있남...
안전주의는 다소 위험한 개념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함. 제일 안전하려면 사실 아무것도 안 하면 됨 ㅡ.ㅡ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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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란 개념도 소개함. '매일의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언어적, 행동적, 환경적 차원의 멸시.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간에 유색인종을 상대로 적의, 경멸감, 혹은 부정적 뉘앙스의 인종적 혐하와 모욕을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저자들은 이러한 개념이 지나치게 대중화하고 오만군데 적용되고 있다는데 문제의식. 그런데 사실 이것도 애매~한 것이... 실제로 노골적이지 않은 암묵적이고 일상화된 차별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 타인의 행동/발언 하나하나를 맥락으로부터 거세시키고 과잉해석하여 미세공격이라 비판하는 것도 과도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모두 예민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점. 한국사회에서 일상화된 온갖 차별적 발언들, 심지어 자기 딴에는 선의에서 내뱉었지만 편견 가득 담긴 발언에 짜증이 두 배로 났던 경험들은 다 있지 않나...
그런데 또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심하다 싶기는 함 ㅋ 소수자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누가 봐도) 선의에서 비롯된 발언들마저 미세공격으로 과잉 해석하고 소셜미디어 상에 앞뒤 맥락 없이 공개해서 (일명 '가해자 지목 문화') 더 나은 해결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사례는 너무 익숙함. 여기에 일종의 피해자의식 문화가 결합하는데, 이는 독립성과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나약함을 신성시하는 분위기"를 가지며 세 가지 특징이 있음. 첫째 개인이나 집단은 사람들이 범하는 무례에 대해 고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둘째, 제3자에게 항의하는 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애쓴다... 이 세 가지는 당장 몇 개의 구체적 사례가 떠오를만큼 최근 몇 년간 사회단체들에서 극심한 갈등으로 비화되고, 문제제기한 당사자를 포함하여 소모적 상처만 입고 끝나는 (아니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음. 심지어 대학원생 커뮤니티에서도 종종 목격. 왜들 그렇게 자신을 가장 취약한 약자이자 피해자로 포지셔닝하는지 가끔 어리둥절해질 때도 있음. 학생 때, 전공의 때 문제제기해서 해결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한번 맞붙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극심한 권력 불평등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며 마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할말은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ㅋㅋㅋㅋ 여보시오들.. 나라고 갓 스무살 때 나이많은 남자 선배들, 전공의 때 교수들이 오냐오냐 내 이야기 잘 들어주어서 그런 거 아니라오 ㅋㅋㅋㅋ
하여간... 저자들의 비판에 동의하는 부분이 적잖으면서도 시종일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세대 후려치기, 리버럴 후려치기에 불안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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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저자들의 원인진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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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저자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바람이 불어오면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더 거세게 타오르는 횃불이 되도록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에는 깊이 공감...
허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상처받지 않기를 선택하라. 그러면 상처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말라. 그러면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ㅋㅋㅋㅋ 뭐래, 원효대사 해골물이냐...
저자들은 1) 자기 힘으로 할 수있게 준비시킨다, 2) 감정적 추론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다, 3) '우리 대 그들'을 넘어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4) 학교가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같은 양육 방법을 안내하면서, 자신들의 전공답게 인지행동치료가 도움이 될 것으로 소개.
인지행동치료에서 말하는 왜곡된 자동사고 유형이란.. 1) 마음 읽기 2) 미래 점치기, 3) 재앙화, 4) 딱지 붙이기, 5) 긍정적인 면 깎아내리기, 6) 부정적 필터링, 7) 과도한 일반화, 8) 이분법적 사고, 9) 당위적 사고, 10) 자책, 11) 남 탓하기, 12) 불공평한 비교, 13) 후회 지향, 14_) 상황 가정, 15) 감정적 추론: 감정이 현실 해석을 이끌도록 내맡기는 것, 16) 부당성 증명을 못 받아들임, 17) 판단 위주 사고
내 주변에도 이런 종류의 인지왜곡 대장들 몇 명 있고, 트위터 세상에는 한 백만 명 있는 것 갈음 ㅋㅋ 이것이 과연 사회적 수준의 대응으로 적합할지는 의문이지만, 이들이 이러한 인지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개선될 것임은 분명해 보임 ㅋ
아우.. 누구 이 책좀 읽고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캠페인하고 싶네...
밀린 독서일기가 에버노트에 한 가득 있지만 차곡차곡 정리하려다 패가망신할 것 같아서 ㅋㅋ 일단 최근에 읽은 책부터 정리하자로 전술 전환...
# 마샤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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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민음사, 2015 |
일찍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으나, 죄가 무슨 죄나 사람이 죄지.. ㅡ.ㅡ
이런 인간환멸이 한 가득인 상황에서 정신 좀 다독여보려고 책을 읽음.
사실은 코로나 유행에서 드러난 혐오 문제를 좀더 차분하게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책을 폈는데, 중간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점화되면서 가해자 신상공개 논란이 벌어짐. 한층 혼란 ㅜ.ㅜ
법은 감정적이 아니라고 노력한다지만 분명히 감정을 반영하고 (사실 분노와 탄식 없이 어떻게 인류사회에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겠나!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법에서 감정의 역할을 흔히 부정하고는 하지만 이미 영미 현행법에서도 '타당한 동정심'은 이미 양형 선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 또 이론과 실천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으로부터 책은 시작. 이를테면 법이 범인에게 수치심을 주어야 한다는 시각과 법은 시민들이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시각이 공존하는 상황. 특히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사회규범의 표현으로 옹호되는 경향.
감정은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고를 담고 있음. 대개 자신의 목표와 목적의 도식 안에서 일정한 중요성을 부여해왔던 것에 대해서만 감정을 가지며, 목마름이나 배고픔의 욕구와는 다른 것이, 감정에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훨씬 더 많은 사고를 수반. 즉 감정은 '지향적 대상'에 초점을 두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평가적 믿을음 수반. 이를테면 인종주의는 감정 속에서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증오의 기반이 되는 사실이나 가치와 관련된 잘못된 밁음을 없앤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ㅜ.ㅜ) 감정도 바뀔 수 있는 것임.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 옳소옳소....
법은 잘못된 '행위'를 처벌하고 그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guilty)'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야지, 행위가 아닌 인간 정체성에 근간을 둔 혐오에서 비롯된 법적 판단, 혹은 수치심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됨. 수치심과 혐오는 분노나 두려움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기에, 너스바움은 혐오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혐오가 어떠한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처럼 형법에서 죄를 무겁게 하거나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함
혐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자면...
혐오가 법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위해로 여겨질 수 있는 불쾌감이 정당한 지침 역할을 할 수 있는 생활방해법이나 토지용도 지정 정도. 흔히 '혐오가 담고 있는 지혜'를 운운하며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에 기반한 차별이나 법제도를 옹호하지만 (동성애가 대표적 타겟), 사실 혐오라는 감정은 인간이 동물적 육체를 갖고 있다는 불쾌감으로부터 촉발되며, 사회적 실천은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을 대상으로 투영됨. 이러한 반응이 규범적 의미에서도 비합리적인 것은, 이러한 반응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려는 열망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표적으로 해서 심각한 위해를 가하기 때문.
혐오는 감각 요소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적 반응인 '기피'나 해로운 결과가 예상되어 거부하는 '위험'과도 구분됨. 혐오는 대상이 지닌 감각적 요소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 관념적 요소에 의해 유발. 혐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닌 동물성을 숨기고 ('오염'),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꺼려할 때 현저히 드러나는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임.
혐오는 분개와도 다른데, 분개는 모든 사람에게 법률적 규제의 기초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위해 또는 손상과 관련된 반면, 혐오는 법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오염'에 대한 사고와 연관. 분개는 일반적으로 발생한 위해를 야기한 사람에 대한 평범한 인과적 사고와 위해의 심각성에 대한 일상적 평가에 기초하는 반면, 혐오는 실제적 위험보다는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신비적 사고에 바탕. 또한 분개는 일반적 속성 상 우리가 쉽게 상처입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가장 마음쓰는 대상이 다른사람의 부당한 행위로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지만,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임. 혐오의 절규에는 '나는 이 추악한 세상을 나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러한 바보같은 제도에 나는 토할 것 같고 그것들이 나의 (순수한) 존재의 일부가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가 담겨있는 반면, 분개는 '이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방아왔다면 더 이상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음. 혐오는 오염에 대한 사고가 중심이기 때문에, (행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져버리길 원함. 역사적으로 혐오는 특정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작동해왔음. 특권을 가진 집단은 자신과 구별하는 집단을 통해서 우월한 인간적 지위를 명백히 하려 했으며,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계급 사람들 모두 육신의 오물로 더럽혀진 존재로 그려짐. 이런 면에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위험과 분개로부터 혐오를 '분리시키는'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을 것임.
혐오는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응으로, 너무 어리거나 부주의해서 혹은 잘 몰라서 해당 품목의 이점을 숙고할 수 없을 때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이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혐오가 법적,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귀중한 반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됨.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많은 반응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공적 행위의 지침이 될 수 없음. 혐오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추정상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특히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때 이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 됨. 우리는 혐오를 이용해야 하지만 혐오가 담고 있는 인간사회의 비전에 기초해서 우리의 법률 세계를 건설해 나가서는 안 됨 === 한문장 한문장 모두 지극히 동의
다음 타자 수치심!
인간에게는 원초적 수치심이 존재하고 선을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공적 삶에서 규범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움. 그래서 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수치심을 억제하고 시민이 수치심을 겪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음. 왜 그런고 하니, 수치심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특정 사회가 지닌 규범적 정향에 상관없이 밑바탕에 존재. 수치심은 인간이 지닌 인간성, 즉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존재하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매우 일시적인 방법이기도 함. 모든 사회는 혐오와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통해 특정 집단과 개인을 선택하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별하며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만들어 왔음.
수치심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처벌 방식의 일부이지만, 규범적 상황은 혐오보다 훨씬 복잡함. 일정한 형태의 수치심은 긍정적 윤리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러한 역할들이 원초적 또는 나쁜 형태의 수치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함.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정상적인 시민'이라는 매우 일반화된 직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수치심을 둘러싼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음.
수치심은 어떤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자아의 '특정한 행위'보다는 '전체 자아'와 관련. 수치심과 모욕의 구분이 필요한데, 수치심을 주는 것은 도덕적 비판이 정당한 경우들과 당사자의 인간성 자체를 욕보이지 않는 가벼운 경우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인 반면, 모욕은 일반적으로 이를 당하는 당사자가 인간 존엄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지 않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진술을 표현함. 당혹감은 일반적으로 수치심보다 가벼운 상황이며, 항상 사회적이고 맥락적이지만 수치심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음. 수치심은 깊게 자리잡고 있는 문제와 관련되며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평가'를 담고 있는 감정이라는 점이 중요. 당혹감은 청중이 없으면 생기지 않고, 청중의 속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반응하는 것.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 (자아의 나르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함. 분노와도 구분이 필요한데, 분노는 위해 또는 손상에 대한 반응이며 부담함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죄책감은 말하자면 자기 처벌적 분노로, 자신이 잘못이나 위해를 저질렀다는 인식에서 생겨남. 수치심은 결점이나 불완전성에 주목하고 감정을 느끼는 그 사람 자체가 지니는 일정한 측면에 관심을 두지만 죄책감은 어떠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 죄책감에 내재된 공격성은 수치심 주기에 담긴 공격성보다 더 성숙된 것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음. 죄책감은 도덕적 요구를 수용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제한하는 것과 연관되었기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생각과 관련됨. 법은 사회가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표현하고 죄책감을 사회적 동기로 활용하도록 해야 함.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통찰력 있는 말을 귀담아 들어서 귀중한 개인적 이상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정상적인 것을 벗어난 모든 것은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되며, 많은 경우 신체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됨. 수치심을 외부 대상에 투영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소인을 찍임으로써 정상인들은 일종의 대리 행복을 얻고, 외부를 통제하고 완전무결해지려는 유아기적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음. 모든 사회가 관여하고 있는 낙인찍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유아기적 나르시즘과 자신의 불완전성에서 생겨난 수치심에 대한 공격적 반응이라 할 수 있음. 낙인찍는 행위의 핵심은 피해자를 비인간화하는 것.
수치심을 주는 처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할 수 있음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치심 처벌이 형벌의 네가지 목적 (응보, 억제, 표출, 개심 또는 재통합)을 잘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 처벌이론에서 응보주의는 무임승차와 평등한 자유에 관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시민이 동등하며 행위에 대한 동등한 자유를 향유해야 할 때, 범죄자는 자신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의 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응보적 처벌은 범죄자의 불평등한 자유요구를 기록에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 응보적 처벌은 복수와 다르고 이런 면에서 수치심 처벌은 전혀 응보적이지 않음. 수치심 처벌은 일탈 집단과 대비되는 상위집단을 정의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라 할 수 있음.
물론 비판적 자기성찰의 결과로 야기되는 수치심 (에렌라이크의 미국 근로빈곤층에 대한 르포가 미국 대중들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드는 방식)은 개혁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 일종의 건설적 수치심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는 완전히 일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법적인 측면에서의 수치심 처벌과는 다름.
대개 혐오와 수치심을 기초로 작동하는 법적 처벌은 시작은 도덕적 공분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로 향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
동성결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공격적 대중운동의 많은 부분은 전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며 원초적 나르시즘의 공격적 형태의 요소를 수반. 성소수자에게 낙인을 안겨줌으로써 가족과 성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발휘하길 바라는 것임. 이는 인종 간 결혼 합법화에서 '정상적' 가족 구조를 송두리째 뒤집는다는 인식과 마찬가지. 당시 백인 남성들은 자신의 남성성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러한 수치심의 위협을 피하려는 욕구에서 인종간 구분선을 엄격하게 나누고자 했음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동성 결혼의 권리에만 초점을 두다보니, 결혼의 지위에 대한 건설적 논쟁이 어려워짐. 제도로서의 결혼은 사랑과 함께 폭력을, 아이 양육과 함께 아이에 대한 학대와 멸시를 키워왔고 특히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왔음. 동성결혼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반작용 때문에 평등한 결혼 권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공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긴급한 문제들이 지연됨 ㅡ.ㅡ)
혐오와 수치심을 규범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에 담긴 아킬레스 건은 '공동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모든 공동체는 규범과 가치에 대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권력의 차이도 마찬가지. 특정 집단의 가치로 내걸리는 것은 주로 집단 내 가장 지배적 구성원들의 가치임. 또한 공동체주의자들은 대체로 인종, 장소, 또는 공통의 문화나 언어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두지만, 공통의 취향이나 직업, 문제를 공유하는 집단, 압제의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도 공동체가 될 수있음
밀이 자유론에서 옹호했던 결론은, 다수(자신이 행하는 방식이 정상이라고 정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의 압제를 막고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적이고 주의 깊은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낙인의 작동에 대한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해법은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를 빈틈없이 강조하고 모든 시민에게 법의 동등한 보호를 확고히 보장하는 것임. 너스바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들이 수치심과 낙인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촉진적 환경'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 그러면서 낙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빈곤을 지적하며, 예의 역량접근법을 토대로 사회가 모든 시민에게 괜찮을 생활수준을 보장해야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 (인간 역량이란 어떤 구체적 형태의 기능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러한 기능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상태를 지칭). 법적 측면에서는 차별금지법과 증오범죄법이 중요한데, 자유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어떻게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실재함. 또한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 다루기 어렵고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는 인간성의 측면을 대면하고 검토할 수 있는 공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프라이버시 강조함.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 생기는 상상과 공상은 과도한 불안없이 자신의 인간성이 갖는 다루기 어려운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되며 이러한 탐구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이러한 자기탐색은 타인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줌. 이 두 가지 능력은 바람직한 힌간관계를 맺는 데에도 중요하며, 자유주의 사회가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도 필요. 즉, 사회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상상하고 탐구하는 공간을 보호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 프라이버시 영역, 특히 사람에 따라서는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활동과 상상을 위한 프라이버시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요. 대개 공/사 구분은 대칭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정상인'의 경우는 감추고 싶은 선택과 공개하고 싶은 선택을 모두 보호하지만 '비정상인'에게는 감추라고 요구하기 때문. 이를테면 성소수자에게, 여성들에게 '사회가 혼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욕구와 노출을 감추라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논의들을 따라가다보면, 최근의 텔래그램 성착취 사건에서의 가해자 신상공개가 과연 처벌의 응보, 억제, 표출, 개심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범죄의 내용이 개인에게 수치심과 말할 수 없는 낙인을 가져온 행위였다는 점에서, 응보적 측면의 처벌이 타당해보이기도 함. 물론 억제와 표출 측면에서는 신상 공개보다는 강력한 형량이 더 의미있는 기여를 할 것으론 생각하지만서도... (이들에게 개심이 가능하긴 한 건지 잘 모르겠음 ㅡ.ㅡ)
근데 사실, 가해자의 수치심 처벌 측면에서의 신상공개보다는 잠재적 범죄 예방 측면에서 논의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음. 핵심 가해자인 조주빈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거야 뭐 대중에게 딱히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것이 없으나, 그를 포함한 26만명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거나 앞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상 공개가 필요해보임. 언론에 명단이 공개되어 봤자 이들이 연예인도 아닌데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고, 오히려 좀더 상세한 정보를 성범죄자 신상공개 형태로 조회해볼 수 있게 해서 잠재적 피해를 예방하는 것은 매우 필요해보임.
너스바움의 논문들만 읽다가 단독 저서는 처음 읽어봤는데 엄청 꼼꼼하고 논리적이고, 견고한 정치철학적 관점이 분명히 드러나서 강추하고 싶음.
그런데.... 책을 읽고나서 근본적 미스테리는, 이렇게 합리적이고 똑똑한 양반이 왜 유대교로 개종했느냐 하는 것... 인간 본연의 취약성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혐오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합리적 감정이 아니라는 수백페이지짜리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종교에 대한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혐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현실....
이런 분류에 다 퉁쳐도 되는지 모르겠네..
일부는 이데올로기와 인식론에 대한 것이고, 일부는 구조 그 자체에 대한 것인데.. 그냥 크게 묶어서 한 덩어리로 ㅡ.ㅡ
# 미치코 가쿠타니,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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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돌베개, 2019 |
어우 속이 시원해 ㅋㅋㅋㅋ
사실 프로토타입으로서의 사회구성주의가 어디 있겠냐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요즘 소위 탈진실시대 글로벌 스케일로 포스터모더니즘이 펼쳐지고 있는 건 깜빡 놓쳤네..
당연히 포스터모더니즘, 혹은 해체주의가 등장한 것 또한 담론의 권위주의적 점유와 과도한 실증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당대의 진보였지만, 문제는 사회구성주의 그 자체는 자신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모두가 각자의 진실이 있다면 학문은 무슨 소용이며 진리에 대한 탐구는 다 뭔 뻘짓이겠어..
현재 우파 포퓰리즘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전용'하여 객관성에 대한 철학적 부인을 수용한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보수주의 우파의 권위를 공격하기 위한 철학적 토대였건만.. 참으로 역사는 알 수가 없다는... 근데 또 해체주의자들, 예컨대 데리다 같은 사람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반유대주의 활동을 했던 드 만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로 해체주의 가져온 거 보면 정말 토나옴... 어우...
이 과정에서 인터넷이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 이제 사회구성주의 그대로, 인터넷이 현실을 반영하는 데서 더 나아가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임...
몇 가지 기억해둘 문장이 있음.
한나 아렌트가 1951년 전체주의 기원해서 했다는 말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대상은 확인에 찬 나치당원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차이,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아렌트 책 좀 읽어봐야겠음 ㅡ.ㅡ)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사회학자 대니얼 모이니핸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토크빌도 참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네... 원본을 읽어봐야겠음..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자기통치 습관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통치자를 제대로 선택할 수 있을까"
제이냅 투팩치 [트위터와 최루가스] "망으로 연결된 공적 영역에서 권력자의 목적은 대개 사람들에게 특정한 이야기가 진실임을 납득시키거나 특정한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막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체념, 냉소주의, 권한이 없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것"
이렇게 냉소와 체념만큼, 다 더럽다, 다 똑같이 도둑놈이다라는 허무주의/해체주의 서사만큼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도 없음 ㅜ.ㅜ
도덕이나 사실의 거짓 등가성, 열정의 비대칭성 이런 단어도 개념을 잘 드러냄
정희진 선생의 해제는 가장 논쟁적인 부분에서 좀 받아들이기 어려움.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가 옳은가/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단 하나의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도 진실로, 유일한 목소리일 수 없다.. 진실을 추가하는 대안이 저자의 주장대로 포스트주의 비판일까? 이러한 현상이 진실이 사라졌다는 의미일까? 진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어뜬 의도이건 간에 모든 사유는 오해되고 왜곡된다. 그래서 모든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효과다. 언어의 사용 과정에서, 즉 누가 어떤 위치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과거의 승자와 동일시하는 대중의 인식이다. 진실을 유무와 시비, 진위를 중심으로 논할 때, 결국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진실을 따지게 되면 피와 폭력이 동반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미 있는 흐름이었지만.. 지금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게 이 책의 메인 주장 아닌감??? 이 정도 되면, 타동적 (transitive) 대상이 아니라 자동적(intransitive) 존재로서의 실재에 대한 부정으로 보이는디??? 이런 시대일수록 비판적 실재론이 나침반이자 등대 역할을 할 수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그리고 러시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글로벌 빌런 역할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가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뭣도 아니고, 딱히 이념형이나 시장형인거 같지도 않은데, 그냥 순수 악인가? 악행에 동기가 없으면 그게 그냥 순수 악 아녀?
# 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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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오월의봄, 2018 |
구경꾼 삼아 관찰한 것이 아님은 알겠는데, 이 타자화는 어쩔 것이여.. ㅡ.ㅡ 너무 화자/대상이 구분됨
아무리 '경험적 실재'가 아니라 '분석적 실재'를 추구한다고 했지만, 이 연구의 추론을 통해 만들어지는 고정관념은 어쩔 것인가... 이런 방식의 서술이 윤리적인 것인지 정말 모르겠네 모르겠어... ㅜ.ㅜ
지방대생이라고 하면 공부를 어중간하게 했던 지방 출신 학생과 타지역(대개 수도권) 출신 학생들이 합쳐진 것일텐데, 공부를 어중간하게 하고 문화적/사회적 자본이 불충분하고 가정 형편도 여의치 않은 이들이야 수도권에도 넘쳐나는 바,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지방이라는 문화적 환경의 영향인지, 현행 대학입시 지향 교육체계 안에서 어중간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현황에 대한 것인지는 불분명. 두 개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음.
"어차피 나는 노력해도 성취를 이룰 수 없으니 성실하게라도 임하자"는 생각은 그저 지방대생 사이에서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일까?
지방대생이 '앎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모르고자 하는 의지', '자기계발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자기보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지만 이는 '지방대생'만의 정체성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학습의욕 저하 집단을 퉁쳐서 지방대생으로 범주화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음. 수도권 인근에도 이런 종류의 습속을 가진 사람들은 넘쳐나는 거 같은데... 가족과 친구라는 일차원 공동체에 대한 의존도 오히려 중산층 정상가정 이데올로기 속에서 세대적 속성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함. 이제는 부모 세대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 자원은 물론 정치적 성향과 문화적 취향까지 이어받는 게 트렌드 아닌가 말여 ㅡ.ㅡ
서울 강남 청년들이야말로, 자기계발과 목적 합리적 행위를 한다고 하지만 철저하게 부모가 만들어놓은 안전망이나 틀 안에서 하는 거 아닌가???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고향을 잃고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담론은 서울에서나 통한다. 지방에서는 고향이 상실되지도 않았고 가족 또한 굳건하다"는 주장도 글쎄올시다... 이건 계급적 이슈.. 수도권 엘리트 핵심 분파 내에서 가족이라는 경제 공동체, 이념 공동체가 얼마나 굳건한데 말여???
'지방에서는 정치경제적 차원의 세대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문화적 차원의 세대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결론에 그래서 동의하기 어려움... 세대 전쟁은 다분히 공중전이고, 수도권에서야 주거 문제를 통해 가시화된 것이라고 생각함
또한 지방대생들이 사치스러운 대상을 추구하기보다 특정 활동을 통해 얻는 감각적, 캐락적 경험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이 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거야 말로 요즘 소확행 열풍과 경험 구매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지 특별히 지방대생의 문화라고 보기 어려울 듯.. 그럼 뭐 스카이 대학 학생들은 사치스러운 대상을 추구하나???
가장 공감하는 것은 확장성 없는 사회자본에 대한 지적인데, 이는 대개 경제적 중하위 계급 전반, 문화자본 측면에서의 비엘리트 대다수에게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특히 지방이라는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회네트워크와 문화적 전망이 협소하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될 수 있다고 생각함
내용 요약은...
지방대생에게 최고의 가치는 가족의 행복 -- 이러한 가치는 성찰적 겸연쩍음을 통한 방식으로 추구 (권리라는 인정 형식 속에서 타자로부터 호혜적으로 인정을 받아본 경험이 없음. 학교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서. 이들의 생활 세계에서 가족과 친구를 넘어서 목적 합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자아가 아직 분화되지 못함. 시장경쟁 언어가 오히려 닻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신을 변형시키는 자기통치의 길로 나아가지 않음) -- 가치 추구의 수단은 주변의 습속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자기계발에 나서지 않으며 '느슨한 관여'를 통해 몰입 상황 회피. 목적은 사라져도 행위가 조직되는 방식은 그대로라는 점에서) - 이를 통해 특유의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 실천
하필 영남지역이라서 그런 건가, 뭔 놈의 고색창연 가부장주의는 21세기에도 이렇게 굳건한 것인지... 언빌리버블... 이게 동시대, 나보다 젊은 세대의 이야기라는 것이 한숨 포인트...
저자는 대학이 대학다우면 된다는 '단순명료한 사실'로부터 희망을 찾고 있는데, 즉 '학생들에게 인간으로 현상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교육'을 이야기하는데 글쎄올시다....
수도권이라고 이런 교육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진공의 온실도 아닌데.. 과연 이게 가능한 꿈인지 나는 모르겠다고 ㅜ.ㅜ
# 메리 그레이, 고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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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워크 - 긱과 온디맨드 경제가 만드는 새로운 일의 탄생 메리 그레이 외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2019 |
데이터 과학자와 인류학자가 같이 쓴 책이라서 좀 기대를 했는데, 기대만큼 빼어나지는 않음... ㅡ.ㅡ
그래도 새로운 개념들을 정립하고, 플랫폼 노동 시대 (한국에서는 아주 최근에서야 본격화된 크라우드워크)의 여러 모습을 균형있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함.
아직은 정식으로 분류되지 않은 온디맨드(on-demand) 형식의 고용. 본질적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런 직업은 제대로 규정되지 않아고 그런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는 소비자들이 볼 수 없도록 감춰져 있기 때문에 '고스트워크'라 지칭.
물론 대부분의 생산 현장에서 생산하는 자, 노동자들이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마도 이전의 노동과 다른 점이라면 이런 일들이 사람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 아닐까 싶음... 휴대폰 누가 만드는지 휴대폰 보면 척 떠오른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무언가를 조립하고 있을 거라는 이미지가 존재하는 반면, 페북에서 음란 이미지 삭제하는 건 인공지능이 알아서 해준다고 생각하지 이걸 누가 일일이 지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어.. ㅜ.ㅜ
마치 자동판매기 안에 알고 보니 사람이 들어있더라.. 뭐 이런 거 아녀.. 실제로 배달앱 초기에 영세업자들은 인터넷으로 주문들어온 것을 일일이 자기네가 콜센터 만들어서 식당에 전화로 주문해주는 황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알려져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지... 이 책에서도 우버 드라이버 실시간 신원 인증 과정이 인공지능에 의한 이미지 인식이 아니라 인도에 앉아 있는 노동자가 화면 확인하고 몇 초만에 클릭 누른다는 사실에 깜놀함.. 뭔가 웃픈데.. 그런 면에서는 고스트워크라는 명명이 적절해보이기도 함
이름도 잘 지어요, crowdsourcing, microwork, crowdwork... 프로젝트를 잘게 나누어 분배하고 이를 종합하는 컴퓨테이션도 사실 한국의 다단계 하청구조를 보면 그닥 새로울 건 없는데, 일련의 과정은 힙스터+첨단 이미지로 포장하고, 아예 사람을 만날 수 없는 비인격 구조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으로 보임...
물량팀장, 아니면 소사장, 하청업체 바지사장..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물리적 실체가 보이지만 크라우드워크 환경에서는 저 멀리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웹이나 단말기를 두고 사람 꼴을 볼 수가 없음... 그러니 노동자 입장에서는 비난도 복수도 읍소도 하기 어려움..
사이트 확인해볼 것: 아마존 엠터크, 마이크로소프트 UHRS, 리드지니어스, 아마라닷컴 (비영리)
고스트워크의 장점도 있음.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디맨드 플랫폼이기 때문에 거주지, 장애, 소수자 등 대면 접촉이나 물리적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보다 낮은 장벽으로 일에 접근할 수 있음. 그런데 리차드 세넷이 거듭 강조했듯.. 이게 일자리 장벽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분절화시켜서 각자 일하게 하는 건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함.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듯, 이 온라인 환경에서도 나름의 네트워크와 인간적 관계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과연 이것이 의미있는 부분인지 모르겠음... 내가 또 오프라인 일터의 괴롭힘이나 텐션을 너무 축소해서 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서도...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이미지넷(ImageNet)'이라는 인공지능 이미지 인식 알고리듬 연습용 데이터셋을 개발하기 위해 엠터크를 이용해 2년 동안 167개국, 노동자 4만 9천여 명이 참여하여 이미지 320만 개에 태깅을 완료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한국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논의가 정말 심란하게 느껴짐. 이를테면 헬스데이터, 진료기록을 이용한 어떤 의사결정 알고리즘을 만들려면 이를 태깅하는 연습용 자료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그야말로 인간 노가다, 고스트워크가 절실한데 이런 과정들이 과연 만들어져있는지 모르겠음.
당장 병원 진료기롞을 활용할 수 있게 열어주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걸 어떻게 학습용 데이터로 구축할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음. 게다가 건강, 의료 데이터라는 것은 엠터크에 풀어놓는 방식으로 마구잡이로 작업이 불가능하고 프라이버시 보호와 동시에 의학 용어 이해라는 난이도가 존재하는데.. 현재 영상의학과나 병리학과에서 열심히 연습용 이미지 데이터 구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 같음 ㅡ.ㅡ
어쨌든 컴과 플랫폼 환경에 익숙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종류의 고스트워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학 졸업 이상의, 젊은 사람이기 마련... 최말단에서 라이더로 일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이들 또한 불안정한 일자리와 소득, 결국 항상 긴장 상태인 프리랜서 노동자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이를 쫗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는데 (코딩이나 개발자들도 항상 새로운 거 배워야 해서 정년이 의외로 빠른 직종)..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를 믿을만한 안정적 일자리로 믿어도 되는지는 의문.. 이 또한 어딘가에 안정적 물리적 일자리가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나의 편견일 수도.. ㅡ.ㅡ
어쨌든 이렇게 고스트워크로 분산화시키면서, 사무실이나 관리와 관련된 각종 부대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기업이 이런 방식의 외주화를 선호하는 이유겠지.. 말하자면 기업 입장에서는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수단... 문제는 고스트워크를 통해서 거래비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에서 고객(의뢰인)과 노동자에게로 전가된다는 것... 업무 교육도 필요없어, 부가급여도 필요없어, 사무실도 필요없어... 심지어 컴퓨터 같은 설비도 노동자가 각자의 것을 이용하니 사업주로서는 거래비용이 하나도 안 드는데 이게 다 노동자 부담... 공부도 해야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도 장만해야 해, 인터넷 회선도 자기가 부담하고 의자, 책상, 문제해결을 위한 멘토링 탐색, 골병까지 모두 노동자의 것... 이렇게 좋은 제도가 있나...ㅡ.ㅜ 플랫폼에서는 노동자도 일감을 사가는 고객, 업무를 맡기는 의뢰인도 고객...
산업혁명기에도 컨베이어로 상징되는 조립라인과 더불어서 이를 떠받치는 거대한 규모의 와주화된 '삯일'이 존재했다는 분석은 우리가 간혹 놓치는 것임. 많은 이들이 기계화가 진전되면 숙련된 인력으로 재편되고 삮일을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자동화 과정에서도 임시노동수요는 단기적으로 급증하거나 어쨌든 지속됨. 예컨대 미국에서도 남북전쟁 시작 무렵 면직물 수요 급증하면서 기계가 못하는 일을 처리해야 할 인력이 절실히 필요해지고 노예 수요가 오히려 5배나 늘어났다고... 다축 방적기 기술이 나오면서 인간 노동이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수요를 변화시켜 새로운 임시노동이 필요한 환경으로 변화... 그래서 아동 노동도 나오고...
고스트워크 또한 근본적 변화보다는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임. 한국에서도 산업 고도 성장기에 공장 바깥에서 허르렛일과 가내부업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었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날 고스트워크는 이런 지위라고 보면 될 듯.. 여전히 취약하고 여전히 주변화되고...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기술을 만나 독특한 속성을 갖는..
저자는 분명하게 이야기함 "기업입장에서 노동자들은 부담해야 할 비용이고 책임이다. 고객들은 각자 위험부담을 지고 상품을 사고파는 자주적인 행위자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고스트워크 플랫폼과 의뢰인들 간 상거래의 주요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수백만 명의 인력이 불확실한 신분으로 머물러 있다."
미국 2016년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40%가 긴급하게 400달러를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돈을 빌리거나 무언가를 팔지 않고서는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보고.... 400달러면 50만원임... 당장의 여유자금 50만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아래의 해결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는 하는데, 이거 안 하려고 고스트워크 만든 마당에.. 과연 될지 잘 모르겠네 그려
# 로버트 퍼트남, 우리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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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 (페이퍼백)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로버트 D. 퍼트넘 페이퍼로드, 2017 |
왕당파의 복귀를 막기 위해 부르주아 세력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 민중에 빙의하면서 조국 사태를 견뎌보내던 시절에 읽었던 책....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 > 이후의 업데이트를 본 듯한데, 학교라는 제도 너머 가족, 양육, 공동체의 영향과 역할을 두루 살피며 불평등 분석... 물론 엘리트 계급의 존속과 불평등 영구화에 대한 당파적 관점을 취한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주의자답게!), 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주변 환경의 여러 층위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게, 때로는 한탄하며 읾었음. 한국의 엘리트들이 그토록 열렬히 추종하며 모방하는 시스템의 원조를 보면서 씁쓸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나는 이번 조국 사태 속에서 한국 대학도 AP 를 채택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음...아.. 여기 미국 식민지 맞구나...
퍼트남 교수가 청소년기를 경험한 50년대, 인종차별과 계급격차, 젠더불평등이 당연히 존재했지만 개인 수준에서의 노력이나 때로는 '우리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가진 선량한 이웃들에 의해 뜻밖의 기회가 열리고 도움을 받았던 시절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곳.. 약 30년의 격차를 두고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시절이 이 때와 비슷했던 것 같음. (인종 차별이라는 건 아직 본격적 이슈가 되지 못했고) 빈부 격차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상층 이동의 기회가 열려있고, 빈번한 계급간 접촉과 교우가 존재했던 시절....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걸 알지 못했지"라는 퍼트남 급우의 회상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똑같음.. 나도 대학에 가기 전까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평창동에서 학교를 다녔는데도 ㅋㅋㅋㅋ 멍청했던 건가 ㅋㅋ
예전에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뭐로 측정하면 차이를 잘 나타낼까 했을 때, 어떤 애가 부자냐고 했을 때 초딩이던 토끼가 '이빨 교정하는 아이'라고 하면서 뭔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그 이야기 등장해서 깜놀함... 퍼트남 와이프가 새로운 동네에 이사 갈 때 '치열 교정기 테스트'를 이용하는데 이것이 양육과 소득, 학교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였다고 ㅋㅋㅋ
코졸의 책이 공교육의 몰락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책은 학교를 포함한 지역사회 전체에 보다 초점을 두는데 코졸과 달리 공교육 자체는 불평등을 그다지 악화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함.. 문제는 학교 자체가 아니라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학교에 가져오는 물건들'이라고 함. 이는 가정에서의 격려와 과외활동을 위한 사적 지원금에서부터 범죄, 약물 무질서에 이르기까지.. 결국 학교 그자체보다는 누구와 함께 학교에 가느냐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 구성적 효과가 어느 순간 맥락적 효과로 양질전화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퍼트남은 '조직'으로서의 학교는 경쟁의 장에서 평준화에 기여했지만, '장소'로서의 학교가 계급격차를 확대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함
교육 성취를 설명하는 데 시험 성적보다 계급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실증 데이터에서 분명히 드러남. 실제로 대학 졸업 비율을 보면, 상위4분위 가정의 하위 1/3 성적군보다 하위 4분위 가정의 상위 1/3 성적군이 더 낮게 나옴.. 이 어마어마한 사회적 손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과외활동이 흔히 한국에서는 보충수업으로 여겨지지만 미국에서는 그 자체로 엄청난 혜택.. 나는 이것이 그동안 단순한 스펙쌓기용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통해 소프트 스킬과 품성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는 하드스킬이나 정규학습보다 더 중요함. 이러한 비인지적 특성이야말로 불리한 가정환경 아이들에게 더욱 중요할진데 현실에서 그 기회는 반대로 분포.. 마찬가지로 사회적 유대관계, 그래노베터가 이야기한 약한 유대관계의 폭에서의 계급 격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음. 한국 엘리트 계급의 자녀 스펙전쟁에서 이러한 전문직 인맥이야말로 대학 진학과 이후의 커리어 형성에 아주아주 중요하지... 이건 김성태 류의 불법 청탁이나 거래가 아니라 개인적 선의와 우애에서 나온 것이지만 비극적이게도 비-인격적 계급동맹이 되어버렸음... ㅡ.ㅡ
이러한 멘토링에서의 차이는 분별력의 격차를 낳음.. '기회의 길에 자리잡고 있는 제도를 이해하고 그러한 제도를 자신을 위해 작동하게끔 만드는 능력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차이'... 뭔지 너무 알겠음 ㅜ.ㅜ 복학왕의 사회학에서 드러났던 것이기도 하지....
심지어 이제 미국에서는 종교 공동체에서조차 계급간 격차가 나타나고 있음. 그동안의 이미지와 달리 낮은 계층에서 종교 공동체 참여가 더 낮음... 교회가 더 이상 낮은 이들을 위한 안식이나 보호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어째 이것도 한국 엘리트의 기독교 편향과 쌍을 이루는 느낌적 느낌.. 정말 한국 지식 엘리트야말로 미국 식민지의 천하제일 모범생!
이러한 계급격차는 정치 영역에서도 관찰되는데 '교육을 잘 받은 부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직업적 성공뿐 아니라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이점'.. 투표율에서의 차이, 참여에서의 차이, 나는 너무 잘 알겠음..
책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빈곤층 청년들이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말이지... 나치즘, 파시즘 등 '선동적 대중운동에 가장 취약한 시민들이 정확하게 "공동체의 공식적 비공식적 할동에 참여할 기회가 가장 적은 사람들"'이었다는 설명도 역시...
근로빈곤층과의 인터뷰에서 자녀들을 모두 대동하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이유가...주변에 대학 나온 멀쩡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야기... 한국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직업이 사회복지사이거나 교사, 혹은 저 멀리 아이돌그룹인 것을 잘 설명해줌..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직업은 아예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음. 최근 내가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이런 슬픈 진실 그대로 재현...
퍼트남은 이 연구를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데.. '나는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포트클린턴의 평범한 배경을 딛고 출세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상당 시간 동안 내가 간과했던 것은 내가 지닌 행운의 상당 부분이 공동체적이며 평등주의적이었던 시대의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공공기관 덕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와 반 친구들이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면, 오늘날 평범한 배경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마치면서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 하지 못할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
여기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너무 잘 알겠고, 한국의 현재와 근미래를 보여주는 청사진 같아서 커다란 좌절이.. 이걸 도대체 어째야 하나...
용어 몀 가지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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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리커버) 김지혜 창비, 2019 |
시의적절하게 동료 시민에게 성찰을 권하는 책... 그렇다고 자기수양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흔히 빠지기 쉬운 문제. 내가 차별받을까봐 걱정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별을 할 수도 있다는 점, 그것도 악의 없이... 이를 돌아보고 이런 세상일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건네는 책.
그리고 뭐라 딱히 설명하거나 대응하기 어려웠던 상황들을 개념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음
호의나 자선 대 권리 개념 - 전자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설명하게 드러냄..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 그런데 수혜자가 권리를 요구하는 순간,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나에게 있는 권력행위..
마찬가지로 사회적 권력의 열세에 있는 집단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단순히 까탈스럽다 예민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왜 웃긴가, 누가 웃는가 라는 질문으로 전환해야 핸다는 설명은 명쾌하게 불평등 관계를 드러남. 특히나 유머를 통한 비하는 엄숙하게라면 걸러졌을 혐오표현을 느슨하게, 고삐를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의가 필요... (편견규범이론)
'동성애자가 싫지만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언설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 싫다고 이야기하거나 난민이 국민 싫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의 선호나 취향 문제라기보다 권력의 문제.. 머릿속까지 단속할 수 없지만 공적 공간에서의 저런 발화 자체가 문제!
김치녀와 한남충을 똑같은혐오표현으로 볼 수는 없는 상황 ㅋ 김치녀는 '여성이 남성에게 보여야 하는 바른 행동에서 어긋나 있다는 평가를 포함.. 즉 조신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이라는 억압적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 이지만, 한남충은 여성이 남성에게 특정한 역할 규범을 요구한다기보다 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하는 현상 ㅋ 이를 둘 다 잘못이라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지적함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해졌다 (비정규직/정규직 선물차이, 신분증 목줄 색깔 차이)에 대해서는 왜 제한된 자원인데 이런 종류의 차별을 해야되는지에 설명 필요. 어떤 타당한 이유로 자원 배분 우선순위를 달리했는지 ..물론, 대개 능력주의가 그 답으로 준비되어 있지만 이거야말로 문제 ㅋ
소수자가 효과적인 다른 저항의 수단이 없을 때 시민 불복종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 롤즈의 설명 합리적 "만일 정당한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그 책임은 항거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대가 정당화되겠금 권위와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에게 있다." - 그런데 요즘 한국의 우익반동이 삭발에 단식 농성까지 그동안 소수자들과 힘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댔던 수단을 취미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참... ㅡ.ㅡ
또한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이미 2백년 전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대로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지만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됨...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는 말 너무 공감.
사회가 평등행지는 것에 대해, 기득권 세력은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기에 저항... 너의 이익은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다는 거지 ㅋㅋ 평등은 한정된 재화가 아니란 말여 ㅋㅋ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수고로움이나 불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가치와 지향에 관한 것"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지적에 매우 공감함....
그런데 고민되는 지점도 있음...
이를테면 '결정장애'라는 용어가 과연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로만 받아들여져야 할까.. 누구나 어느 지점에선가 하나씩은 장애를 다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오히려 장애에 대한 게토화를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드는데, 장애인 당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복잡... 이를테면 퀴어라는 용어의 전복적 전유 사례처럼 누구나 한 가지의 어려움= 장애를 가지고 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낼 방법은 없을까???
이 책에는 '상식'처럼 널리 쓰이지만 정확한 정의를 몰랐던 용어를 명료하고 정확한 언어로 정의 해놓아 참조하기 좋다는 것이 미덕인데, 그 중에 하나가 토크니즘 (tokenism)-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
와, 이 책들... 작년 봄 학회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ㅋㅋ
그래도 아직 1년 되기 전에 포스팅...
#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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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동아시아, 2017 |
인문학 전공자들이 자주 보이는 반과학주의 때문에 인문학자들이 과학책 썼다고 하면 일단 뒷걸음치는데 하도 K 기자가 괜찮다고 추천해서 읽어봄. 최근의 논의들이 잘 포함되어 있고, 내용이 상당히 알차고 논리적임. 나중에 들어본 강의도 무척 흥미로웠음. 학회 참가자들의 반응도 좋았던 편..
근거없는 반과학주의나 잘 모르는 사람만이 갖는 근거없는 유토피아적 기대도 없고, 그냥 건조함 ㅋ
인공지능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 이를 통해 제기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음. 저자가 철학자니까 ㅋ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근대의 대부분 기간동안 (서양에서) 철학=학문=과학이었고, 형이상학=오늘날의 철학에 갈음.
인공지능을 통해서 오히려 자연스럽고 질문받지 않았던 인간 사고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 책은 약인공지능과 강인공지능(범 인공지능)을 구분하고, 픽션에서 그려지는 후자와 오늘날 활용되고 기술적으로 접근가능한 전자를 구분함. 현재의 수준으로 본다면 인공지능이 인류를 말아먹을 우려는 당분간 안 해도 될 듯 ㅋ
하지만.. 인공지능 그 자체보다 '강화 알고리즘'의 개발로 말미암아, 정치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맞아 혼돈의 카오스 때문에 인류 멸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우려는 지울 수 없음 ㅡ.ㅡ
# 송기원의 포스트게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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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 생명 과학 기술의 최전선, 합성 생물학, 크리스퍼, 그리고 줄기 세포 송기원 사이언스북스, 2018 |
여성 과학자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일러스트가 일단 매력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이해할 수 있게 적절히 수위 조절이 잘 된 책이라고 생각함. 강의도 조근조근 잘 하심..
뭐랄까 크리스퍼 가위 기술을 통해 질병과 건강에 대한 접근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과연 이러한 기술을 어떻게 통제하고 사회적 편익을 극대화시킬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음... 미국에서도 이러한 유전자 기술은 과학자가 주도하는 벤처캐피털에 의해 혁신이 이루어지고, 게다가 한국은 뭐만 하면 미래 먹거리 산업...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어떤 규제에 의해 과학 발전이 가로막혔던 적은 없음 ㅜ.ㅜ
"과학의 역사에서 과학자들이 윤리적 문제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춘 적은 없었다"
합성생물학 영역에서의 성과가 대중화와 비용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면서 DIY 방식의 접근, 커뮤니티 랩에서도 여러 작업들이 가능해졌는데 과연 이것이 과학기술의 민주화인지 나도 의문.... 이것도 엄청 걱정됨.. 그나마 규제를 받는 국가 혹은 정식 연구기관들과 달리, 이 부분을 어찌 할 것이여.. ㅡ.ㅡ
# 메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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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어크로스, 2019 |
혹시나 러다이트 류가 아닐까 걱정했으나 그보다는 좀 실용주의자 갈음...
나 약간... 심리, 마음, 인간.. 이런거 나오면 일단 걱정부터 하는 게 버릇 같음 ㅋㅋㅋ 과학 파괴자 등장할까봐... ㅋㅋ
과거의 아름다운 책 읽기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어느 시기까지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책 읽기, 읽어주기를 해야하고,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어가는 이 국면에 어떻게 디지털 디바이스를 제대로 활용할 것인지, 혹은 책을 직접 읽어주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가정, 사회에서 이런 디지털 디바이스로 어떻게 독서경험을 늘려줄 것인지 일종의 바이링구얼 플랜을 구상하자는 이야기...
무엇보다 1장에서 책을 읽는 시각적 자극을 통해 촉발되는 뇌 안에서의 활동을 여러 개의 무대를 동시에 종횡무진하는 서커스 공연으로 그려낸 것에 엄지 척했음... 뇌과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지는 의문부호이지만, 머릿 속에서 그야말로 그림이 그려지며 이해가 확 되는 느낌적 느낌
사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이렇게 문자로 기록하고 전승하고 자신을 넘어서 세계를 이해하게 된 건 불과 길어야 5천년, 이렇게 대중화된 것은 사실 2백년 남짓 아닌가 말여..
하지만 이 기간이 인간 진화(의 정점인지야 아직 모르지.. 멸망을 안 했으니까)의 결정적 도약이 된 것만은 분명해보임. 헤르만 헤세가 "인간이 자연의 선물로 받지 않고 자신의 영혼으로 창조한 수많은 세계들 중에 책의 세계가 가장 위대하다"고 한 것은 이를 잘 드러냄
물리적 책과 디지털 디바이스로 책 읽는 것이 내용의 습득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고, 후자의 경우 잦은 주의 분산이 문제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물질성, 시간성, 위치성, 촉각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고, 굳이 네트워크로 인한 주의 분산 아니더라도 깊이 읽기 측면에서 물리적 책이 낫다고 알려줌.. 어쩐지!!!
사람과의 관계와 반복도 중요한 요소...아기였을 때 똑같은 책을 수십번 읽어주고 들으면서 얻게 되는 다중감각과 언어적 연결은 디바이스의 재밌는 멀티미디어 북이 줄 수 없는 효과. 그리고 새로운 자극으로부터 벗어나 '인지적 인내심'을 통해 깊이 들어가는 것은 영화나 영상을 통한 몰입보다 훨씬 깊다고 함
'깊이 읽기'는 '연결'과 관련... "아는 것을 읽는 것에, 읽는 것을 느끼는 것에, 느끼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 생각하는 것을 삶의 방식에 연결짓는 것.." 뭔지 너무 잘 알겠네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과는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글을 반대하며 ("문자에 의존하면 무언가의 기억을 자기 내부에서 가져오는 대신, 외부해 표시해둘 것이다" - 그 때는 지식이 많지 않아서 가능했겠지 ㅋ) 두려워했던 것이 '젊은이들이 진실을 찾는 고된 훈련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 깊이 동감. 외장하드도 지나 클라우드와 넷 세상에서 지식의 외주화는 결국 깊이 생각하기를 멀리하고 판단을 외주화할 가능성을 높이는 게 아닐까 ...
수전손택 -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모종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럴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한계의 범위는 확장될 수 있다"
깊이 읽기를 버린다는 것은 주의를 버린다는 것이고, 그것은 도덕적 인간으로 살 가능성을 져버리게 된다는 것.. 물론 책 많이 읽은 엘리트들이 세상 말아먹은 이야기는 굳이 여기서 할 필요 없겠으나, 자기성찰적 인간이 되어가는데 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는 말해 무엇하랴...
칼비노가 이야기했다는 "느낌과 생각을 가라앉혀 무르익게 하고 모든 조바심이나 순간의 운연을 버리는 것 외에 다른 목표는 없는 상태에서 지나가는 시간의 리듬"을 느끼는 것을 "페스티나 렌테 festina lente" 즉, 천천히 서두르기로 표현. 깊이 읽는다는 것은 바로 페스티나 렌테... 인지적 인내력을 갖는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의대혼 대로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리듬을 회복한다는 것임
어린이와 청소년의 문해력, 인지발달 관련한 아동 초기의 책읽기 교육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는데, 현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 국내에서도 돌봄의 불평등이 워낙 강고하고, 특히나 공교육이 모든 아이들을 데려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 같은 이 상황에서 글자는 읽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를 못해서 사회도 못하고 수학도 못하고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 청년들 모습이 떠올라 막막...
초등학교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저자는 반복적으로 강조하는데 너무 동감. 다만 이 역량이 거지같은 제도 안에서 개인의 뛰어남만을 강조하는 건 아니라는 점....
작년에 읽었던 과학소설들 정리하려고 메모 꺼내보니 유독 아시아 작가들이 많다.
국내 + 중국 + 심지어 영미권에서도 아시아 계열 작가들...
어떤 흐름이라도 봐도 좋겠지?
# 켄 리우, 종이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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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황금가지, 2018 |
이토록 유려하고 아름다운 단편소설들이라니.... 진심으로,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홀로 투명한 구체 안에 들어앉아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고요함, 정적을 맛봄. 그렇다고 마냥 즐거웠다는 이야기는 아님 ㅡ.ㅡ
하나같이 마음을 지구 멘틀 핵까지 끌어당기는 우울의 정조. 도저한 우주적 스케일의 시련. 그래도 꾸준히 나아가야 하는 삶.... 놀라운 상상력과 역사에 대한 (나와) 공유된 시각에 경탄과 더불어 뭔지 모를 위안을 얻음. 내가 가진 세계관이 이렇게 차분하고 성찰적인 작가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한 작가의 시선이 허거덕하는 짱돌이 아니었다는 데서 나온 감정이겠지?
한자문화권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그 문화와 정서, 그리고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미묘함이 풍성한 층위를 만들어냄. 이 작가 정말 너무 좋네 그려
# 팁트리 주니어, 단편집 마지막으로 할만한 멋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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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아작, 2016 |
아오 이 언니...
표지의 귀여움과 달리 글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폭력 수위가 높고 그걸 또 상세히 묘사했는지 무서워 죽겠네 ㅜ.ㅜ 막 생채기에 물파스 바르는 느낌, 어두운 골목에서 무언가 내 뒤를 쓰윽 지나가는 느낌을 내내 가지며 읽고 말았네 ㅜ.ㅜ
#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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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장강명 외 황금가지, 2018 |
주폭천사괄라전.. 핵 공감 ㅋㅋ
책 읽다 뒤집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해주었는데, 다들 자기가 왜 그동안 술만 먹으면 개저씨가 되는지 큰 깨달음을 얻음 ㅋㅋㅋㅋㅋ 아/련 ㅋㅋㅋㅋ
여기 실린 글들은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음 ㅋ
# 듀나, 구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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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전 듀나 알마, 2019 |
조선 영남 양반 뱀파이어 좀비... ㅋㅋ
미친 새끼들, 좀비로 변하는 와중에도 존재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나라 세우려고 함... 아우 지긋지긋해... 너무 사실적이라 소름!!!
언문으로 쓴 치료법을 읽지 못해 괴로움에 빠진 한학자 선비라... 뭐랄까 세종대왕 의문의 1승 ㅋ
모든 작품들이 대체로 다 좋았고, 듀나의 서늘한 거리두기와 경계없는 상상력에 엄지 척 ㅋ
추억충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법한 기억의 이식에 대해서, 뭐랄까 아주 서늘하고 담담하게 그려서 뭐랄까 내용은 살벌한데 수채화와 같은 심상... 이런 이질성이 너무 좋았음...
# 류츠신, 삼체3부 사신의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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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 3부 사신의 영생 - 완결 류츠신 단숨, 2019 |
거 스케일 한번 거대하도다 ㅋㅋㅋ
정서를 건드리는 따뜻한 부분이 좀처럼 없는 것 같으면서도 혼돈의 시간, 지구의 멸망, 우주에 홀로 남아버린 그 아득한 느낌, 어쩐지 다 가슴으로 이해가 되는 기묘한 느낌. 2차원 멸망에 대한 동화 속 은유와 실제 구현,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상상이라는 기발함에 깜놀함.
읽는 도중..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문득.. 갑작스런 물방울 공격으로 세계가 폭망할 수도 있겠다는, 지금의 고요함이 그 전조라는 이미지가 떠올라 잠깐 심장이 두근거린 적도 있었음. 바로 이렇게 끝날 수 있다... 이런 자각이 갑자기 ㅋㅋㅋ 무슨 바보같은 반응인지 모르겠으나 내 마음이 그런 걸 나보고 어쩌라구 ㅋㅋ
왜 3권 빨리 번역 안하냐고 사람들이 엄청 욕했는데, 분량이 많고 내용이 복잡하여 쉽지는 않았을 듯.. 심지어 이 정도 되면 두 권으로 분책해서 내는 것이 합당한 도리가 아닐까 싶었음. 들고 다니느라 손목 나가는 줄알았다고...
# 테드 창,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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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양장, 어나더커버 특별판) 테드 창 엘리, 2019 |
일본 삿포로 여행갔을 때 후배에게 주고 와서 약간 아쉬움이 있었던 소프트웨어 객체 주기의 생애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단편들이 너무 빼어나서 이 경이로움에 대해 뭐라 보탤 말이 없음.
시간여행을 하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작품부터 어허.. 이거 심상치 않구나.. 생각했는데, 비디오로그를 통한 일생의 기록, 바로 앞을 예측할 수 있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알려주는 기계, 양자 분기점에서 갈라진 평행세계를 프리즘을 통해 교유하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나아갔을 때 닥칠 수 있는 근미래의 딜레마를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사실 밀린 책 메모가 에버노트 한 가득이지만, 저걸 언제 다 옮겨 정리하냐..
우선 눈에 밟히는 마지막 메모이자 최근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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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북인더갭, 2016 |
부제이자 원래 제목은 '타자를 향한 시선'임.
지난 연말, 을씨년스러운 독일에서 뉘렌베르크의 전범 재판소와 나치 전당대회 장소, 그리고 바이마르 부켄발트의 수용소를 오가는 길에 읽는 프리모 레비의 글이란...
이미 책을 골라 가방에 넣는 순간부터 무거움과 기대가 한가득....
이미 다 지난 후, 말하자면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주기율표를 거치며 격정과 무거움을 다 떠나보낸 후 햇살이 잘 드는 한적한 이탈리아 토리노 (사실은 가본적 없는) 어느 모퉁이 오래된 카페 안에 앉아 할배랑 하릴 없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
아주 조금씩 살짝 묻어나는 작가 인생의 바로 그 시기의 고통의 경험이 묻어나되,
내가 아니라 다른 인간, 동물, 식물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소소한 관찰과 생을 향한 연대의 작은 서사들로 넘처남. 눈물을 왈칵 쏟을 법한 구절들은 없지만 (사실 할배 이런거 싫어함 ㅋㅋ) 마음이 먹먹해옴은 어쩔 수 없음.
" 동물들은 진정 존중받아야 한다. 동물들이 선하다거나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고 모든 종교와 모든 제정법이 인정하는 규칙이 우리 스스로는 물론,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고통을 야기하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다, 우리의 고통만 빼고' 평신도가 확신을 갖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우선은 이것부터다. 고통 (그리고 고통을 가하는것)은 스스로에게나 타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상받아아야만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이 책으로 프리모 레비를 처음 접했다면 이게 다 뭐람? 했을 것 같음... 표면 그대로라면 이토록 싱겁고 따분한 이야기가 없어보임 ㅡ.ㅡ 이 책은 레비 할배의 연대기에 익숙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
옆에 두고 가끔씩 꺼내읽어야 하는 이야기들이라고나 할까...
아득함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비정한 이과 작가 할배 같으니라구 ㅋㅋ
그동안의 작업에서와 달리 글쓰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함...너무 구구절절 공감!
".. 글쓰기는 진짜 직업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내 견해로는 직업이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창조적인 활동이므로 일정이나 마감, 고객과 상사에 대한 책무 등을 견디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생산', 아니 오히려 변형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독자가 될 '고객'이 이해하기 쉽고 좋아할 만한 형태로 변형한다. 그러므로 경험은 원료다. 원료가 부족한 작가는 헛되이 일하는 것과 같다..."
하도 마감에 쫓기는 글들만 많이 써대서 창의력과 재료가 모두 고갈된 나를 알아보고 쓴 구절 같다구 ㅜ.ㅜ
명료하고 '독자에게' 책임감 있는 글쓰기 강조한 것도 너무 와닿음
"완벽하게 명료한 글쓰기가 완전하게 의식하는 작가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에고와 이드, 정신과 육체, 더 나아가 핵산, 전통, 호르몬,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트라우마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도플갱어를, 말이 없고 정체도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행동에 함께 책임을 지며, 우리가 쓰는 모든 글에도 함께 책임을 지는 형제를 데려가야 하는 운명이다... 사실 나는 '그를 위해' 쓴다. 비평가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독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부당하게 굴욕감을 느낄 것이고, 나는 계약 위반이라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통곡은 과도한 수단이다. 눈물로는 개인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나, 언어로 본다면 무력하고 투박할 따름이다. 정의상 언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무언의 감정 표출은 명확한 언어적 표현이 아니며, 소음은 말소리가 아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형언할 수없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동물 울음소리의 한계에서 울리는' 텍스트들을 찬사하는 것에 진저리가 난다...... 우리들 산 자는 고독하지 않으므로 마치 우리가 고독한 것처럼 써서는 안된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대해 한 단어 한 단어 책임져야 하고, 모든 단어가 반드시 제 목표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나도 감정과잉과 자기연민 극도로 싫어하지...ㅋ
그런데..... 살아있는 한 우리는 책임이 있다고 쓴 할배는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 이런 글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어쩐지 스스로의 삶을 종결시킬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영감님과 내가 공유하는 글쓰기 비법 한 가지.. '서랍속 휴식기'...
두꺼운 Sapolsky 책이랑 Sagan 할배 책 메모 정리하다가 나머지 한글 책들까지 밀려서 일단 중간 정산...
# 삼체 1, 2부 (류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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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류츠신 단숨,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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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 2부 암흑의 숲 류츠신 단숨, 2016 |
오오오 훌륭하다. 과연 휴고상에 걸맞는구나...
주로 미국 SF 읽다가 한국작가도 아닌 중국작가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뭐랄까 도덕경 읽었을 때 딱 그 느낌... 서양철학사 읽을 때와는 달리 처음 읽는데도 너무 낯익고 다 이해되는 그 느낌이 들었음.
중국 근현대사 배경도 그렇고 사용된 한자어 단어들, 예컨대 지자, 면벽자, 파벽자 이런 거 너무 머리에 쏙쏙 들어옴
거짓말과 권모술수를 시연할 수 없는 삼체인들에게 던져진 문화적 과제가 삼국지연의라니 ㅋㅋ 뭔지 너무 알겠잖아 ㅋㅋㅋ
이렇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촘촘하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토리를 직조해내는 능력에 진짜 깜놀했네
의도적 오마주인건지, 거대한 전제라서 피해갈 수 없었던 소개인 건지,
우주사회학 개념은 아시모프 할배의 파운데이션에 등장한 셀던 박사의 심리역사학 개념.
우주 공리는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나노물질을 이용한 우주 엘리베이터 논의는 아서클라크 할배의 fountain of paradise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구..
그리고 지구를 지킬 카미가제 공격대 찾아서 알카에다 방문한 자들이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이야기하는 거 정말 SF 팬들만 아는 이야기잖아... ㅋㅋㅋ 대개 소설 많이 읽은 사람들이 소설 창작도 하는 법이라지만 유독 SF 장르는 팬이 작가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거 볼 때마다 한식구같은 정겨움이 생김 ㅋㅋ
본 주제인 삼체 문제의 경우, 가위/바위/보 간단한 조합이지만 세 명이 경기를 할 때 예측할 수 없듯이 삼체의 랜덤니스가 정말 그리 예측불가능한 것인가??? 일단 이런 의문이 생기고 나니 소설 속 관계가 뭐든지 삼체로 보임 ㅋㅋㅋ
삼체행성을 추종하는 분파들이 셋으로 갈라지고 나서 서로를 견제하고 지배하려다 공멸하려는 것이나
삼체행성과 지구, 또 다른 지능형 행성의 관계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나...
둘이 아니고 셋이 되었을 때 랜덤니스가 폭주하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 산재함...
얼릉 3권이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구먼.. 이건 영어본이 아니라 반드시 한자어를 살린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구 ㅋㅋㅋㅋ
# 엄마는 페미니스트 (치아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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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페미니스트 -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민음사, 2017 |
K 편집자가 엄청 칭찬하면서 이런 컨셉의 책을 기획해보자고 해서, 도대체 어떤 책인가 하고 추석 연휴에 읽었음. 페미니즘을 '쉽게' 생활언어로 풀어쓴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함... 두께는 엄청 얇지만 내용은 묵직함...
그러나 한편 뭔가 찜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는데...
도대체 뭐가 싫을까 한참을 생각해보니 책의 화자가 나한테 반말해서 싫은 거였음 ㅋㅋㅋㅋㅋ
그러고보니 나는 상점 입간판이나 미디어 광고에서 반말하는 것도 다 싫어함 ㅋㅋㅋ
독자의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조카 토끼한테 읽어보랬더니,
와 정말 유전자의 힘인가???
내용은 너무 좋은데 이렇게 이랬어 저랬어 대화투 말투 싫다고 해서 깜놀 ㅋㅋㅋㅋㅋㅋㅋ
너랑 나는 유전자의 1/4밖에 공유하지 않았는데 왜 이러는 거야..
# 인류의 기원 (이상희, 윤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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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사이언스북스, 2015 |
인간 중심주의와 진보로서의 진화 개념, 혹은 사뢰구성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의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는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함. 허나, 그런 자들이 책 한 권 읽는다고 생각을 바꿀거 같지는 않음 ㅋㅋ
근데 그러다보니 내 입장에서 그닥 흥미진진하지는 않았음 아마도 직전에 Sapolsky 책을 읽어서 그럴수도 있고,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탓일까...
본문 중에 인간의 수다가 입으로 하는 (동물들의) 그루밍이라는 말 너무 기발하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수다에도 권력이 있다는 점에서 딱히 적절한 메타포같지는 않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마이클 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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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글항아리, 2018 |
번역이 후진 건지, 원저자의 개그코드가 괴랄한 건지, 뭔가 유머에 반어법이라고 썼는데 재치가 2프로 부족 ... 어리둥절하기만 함 ㅠㅠ 게다가 후기에서는 갑지기 진지한 모드로 농담을 수습해서 더더욱 어리둥절
막연히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북유럽 국가 ㅡ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핀란드, 스위덴 (엄밀히 말해 스칸디나비아는 노 덴 스만 포함) ㅡ 사람들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차이와 서로간의 인식,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아쉬움 ㅠㅠ
다른 나라는 잘 몰라도 최소한 최근 아이슬란드에 다녀오고 현지 작가가 쓴 에세이를 읽어보면, 예컨대 그곳 사람들이 요정에,집착한다는 이야기나 발효 상어요리 이야기는 너무 관광객스러운 피상적 소개라 어리둥절.. 혹시 내가 가보지 못한 다른 나라 소개도 이런건 아닐까 의심이 ㅠㅠ
그래도 내용 측면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핀란드 사람은 해야할 일을 꼭 하기에 핀란드어에 미래시제가 없다는 말 인상적 ㅋ 근데 좀 무서움 ㅋㅋ
전반적으로 북유럽 사회가 고립되고 동질적 문화를 공유해온 고막락 사회라는 해석에 매우 동의하나 일본 같은 고맥락 사회와 어찌 다른지는 잘 모르겠음.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중요성이나 작동의 기제가 뭔가 다를거 같은데 말이지 ㅠㅠ
또한 이민문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할거리를 던져줌. 본국의 전통과 문화를 버리고 이주 국가의 소위 현대적 문화에 동화하라고 당연히 강제해서는 안되지만 젠더 불평등이나 종교 강요 같은 이슈들은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용인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말여.... 노르웨이에서 추위와 어둠을 견딜 수 없다면 다른 나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성평등을 견딜 수 없다면 함께 살기 어렵지 않겠냐는 노르웨이 사람의 말에 백퍼 공감함
스위덴의 극우 스웨덴민주당에 대해서 그리 낙관적으로 평하지 않으면서도 우려를 표했는데, 이번 총선에서 뙇 ㅠㅠ 스웨덴을 저비로운 전체주의로 평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할지 잘 모르겠음.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 자율성을 가져갔다지만 남은 자율성과 자유란 게 결국 부유해질 혹은 가난해질 자유라면??? 특정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국가와의 공적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게 난 부럽기만 한데? 심지어 저자도 후기에서 이 자율성을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언급함 ㅋ 왜 오락가락인지 모르겠네
하여간, 가봐야겠음 ㅋㅋㅋㅋ 남의 말 못 믿겠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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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가는 책이 몇권 있네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