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며
비대위가 구성되고 이러저러한 일이 많이 있다. 정말 손에 피 묻힐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어쨌든 구멍난 곳을 찾아 때워 다시 항해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는 확인된 듯 하다. 물론 비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여전히 이러한 모습이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잡다한 과정을 거치면서 행인도 비대위에서 책임을 맡았다. 눈앞이 아득해지지만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고 나서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에서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까지 된 바에는 떨어지는 임무를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앞으로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을지 모르겠지만, 책임을 맡는 그 순간 집행위원장이 농담조로 물었다. "다시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뭔가 긍정적인 대답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어디가 빵꾸났는지부터 확인해 봅시다."라는 게 행인의 대답이었다.
분당과 신당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험난한 광야로 나선 동지들에 대한 생각은 복잡하다. 굶어 죽느냐 얼어 죽느냐의 차이 뿐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맨 땅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겠다는 그 동지들을 보면서 가슴이 쓰라려 온다.
그분들의 비판과 주장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동의할 뿐만 아니라 그분들이 그렇게 힘든 결정을 할 때 함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도 있다. 이런 말 쓰기는 뭐하지만 흔히 듣던 용어로 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의리를 지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거친 바람 앞에 몸을 던지는 것도 의리를 지키는 방법이겠지만 행인은 이 당 안에서 그들에게 뭔가 '꺼리'를 던져주는 것 역시 의리를 지키는 방법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새로운 진보를 주장하면서 나간 사람들이 당을 만들더라도 우선 각을 잡고 대척점을 세워야할 대상은 바로 민주노동당이다. 싫건 좋건 간에 그들은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새로운 진보에 대한 상을 정립하여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을 비판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을 보다 건실하게 제 자리로 올려놓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더 쉽게 민주노동당과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 상호 비판적인 관계에서 동반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내부적으로 제기되어온 그 숱한 문제들, 예컨대 종북정당이라거나 민주노총당이라거나 정당은 커녕 원내단체에 불과하다거나 하는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시너지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이걸 극복해줘야만 새로 정당을 고민하는 사람들 역시 보다 건설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행인의 입장에서 그분들에 대한 나름의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한다.
짧으면 한달, 길면 3개월 시한이 비대위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이 안에 비대위는 당의 지지율을 높이고 대안정당의 입지를 다져야 한다. 대의원대회까지 남은 한 달 동안 비대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대위가 상정한 모든 안이 대의원대회에서 거부되면 비대위는 그 즉시 해산해야 한다. 이 비대위마저도 그렇게 해산된다면 민주노동당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나는 얼마나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될까?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그동안의 고민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이래 저래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일찍 일을 끝냈다. 쉬어야 겠다.
행인님의 [다시 시작하며] 에 관련된 글. 심상정 비대위와 신당파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다. 모순되는 바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