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이님께 답변
동동이님의 덧글에 대해 조금 부연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답글을 달다가 내용이 길어질 듯 해서 아예 걍 포스팅을 합니다. ^^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선 이미 2004년도에 올린 포스팅 중에 일부 내용이 있구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2004년도 하반기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그렇게 거창하게 시작할 때, 미안하게도 저는 이런 식으로 운동하는 것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구세력의 집결만 추동한다고 생각했고, '끝장' 모임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제 기억으로 아마도 2004년도 여름쯤 민중연대 박석운씨가 '끝장'에 철폐연대의 기획단위가 되줄 것을 요구했는데, 제가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 결과 공식적으로는 '끝장'이 철폐연대 내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끝장'의 멤버들이 거의 대부분 철폐연대 사업을 하게 되었죠. 사실 이 부분에서 저는 굉장히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정세를 돌이켜 보더라도 탄핵정국 이후 갑작스레 다수 여당이 되었던 열우당은 애초부터 4대개혁입법을 끝까지 밀고 나갈 저력이 없는 완전잡탕정당이었습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외곬수 노무현이 지들 뒷배가 되서 내내 지원사격을 해주는 것이었는데, 아시다시피 노무현은 어떻게 해서든 이라크 파병을 위해 한나라당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죠.
또한 잇다른 보수정당의 헛발질로 인하여 전세 자체가 극히 불리하게 된 남한 보수세력들은 어떤 계기로든 집결해야한다는 절실함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비록 수구세력이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나 그들의 세력 자체가 완전히 깔아뭉갤 수 있을만큼 축소된 것은 아니었죠.
국보철폐투쟁이 가열화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이러한 부정적인 부분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국보철투쟁을 돌이켜볼 때 얻은 교훈은 딱 두 가지 입니다. 첫째, 뭐든지 작명(作名)이 중요하다. 둘째, 믿을 놈을 믿어야 한다.
국보철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참 에피소드도 많이 있었는데요,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느낀 거는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는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법의 내용은 그저 미운놈 때려잡는 법에 불과합니다. 핑계야 북조선이지만 각 규정은 북조선을 빙자하여 누구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주어 팰 수 있도록 해놓은 거죠.
그러나 이름만큼은 번지르르 하게 "국가보안법"입니다. 이름이 이렇게 휘황찬란하다보니 그 법의 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국가를 보안하자는 법을 왜 폐지하려 하느냐는 비난이 빗발칩니다. 이게 딱히 "보수"나 "수구"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구요,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노인장에서부터 대학다니는 학생들조차도 그걸 왜 없애려고 하지? 하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애초 국보법 철폐에 관해서 이 사회의 논란은 이미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당위가 다 드러났습니다.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조차도 이게 문제가 있긴 한데 어차피 전가의 보도, 필요할 때는 꺼내 쓸 수 있는 것이다보니 함부로 없애긴 아까운 것일 뿐이구요.
그렇다면 국보법이 왜 문제다 하는 이야기를 새삼 네삼 할 것이 아니라 이걸 어떻게 옴쭉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자연도태시킬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더랬죠.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공안기관의 해체죠. 국정원은 해외 정보수집 등으로 그 역할을 한정시킵니다. 검찰 공안부는 해체해야죠. 경찰의 보수대도 마찬가집니다.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그놈의 '분실'이라는 거 없애는 것도 중요하구요. 이런 방식으로 국가보안법을 집행하는 단위들이 본래 제 역할만 충실하게 하고 괜히 간첩잡는다고 설레발이치는 짓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의 손발을 먼저 잘라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그닥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 믿을 놈을 믿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때 민주노동당에 와서 "열우당 2중대가 되더라도" 어쩌구 했던 참여연대 김기식 류는 원내 다수당이 된 열우당의 속칭 386 의원들과 탄핵의 구렁텅이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노무현이 국보폐지운동을 지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생각을 했던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는 비웃음이 절로 났더랬습니다. 이런 인식수준을 가지고 운동을 하니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이 맨날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이나 잡아 끄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거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노무현이 탄핵되었을 때 민중운동진영이나 시민사회진영은 노무현은 물론이고 동시에 한나라당 의원들과 일부 열우당 의원들도 탄핵하자고 나섰어야 합니다. 괜히 말도 되지 않는 "친노 = 민주, 반노 = 반민주" 운운하면서 노무현 살리자고 생 난리칠 일이 아니었죠. 노무현은 이미 그 당시에 헌법의 평화규정을 위반한 자였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탄핵되어야 할 인물이었죠. 그러나 상황은 완전 개코메디로 전락했습니다. 물론 이 와중에 민주노동당, 앞뒤도 못가리고 촛불집회에 뛰어가곤 했습니다.
그랬던 노무현과 그 노무현 덕분에 한자리씩 꿰찬 386들, 좌충우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걔들에게 무슨 정치철학과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개인적으로야 그런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잡탕정당에서 잡탕이 되어 잡스럽게 노는데 걔들이 뭐 얼마나 지들 개인적 차원의 신념을 밀고 나갈 수 있겠어요? 게다가 노무현 입만 쳐다보고 살았던 넘들인데 노무현이 말 한마디만 바꾸면 얼마든지 입장 바꿀 수 있는 것들이 걔들이었죠. 대표적인 예가 유시민 아닌가요?
이 때, 참 많은 사람들이 국회 앞에서 그 추위에 떨며 고생을 했죠. 삭발까지 하고. 민주노총 조합원이 집단으로 노숙을 하기도 했구요. 뭐 물론 깎을 머리도 없는 박석운씨가 삭발대열에 동참함으로써 사람들을 웃겼던 일도 있고, 대학로에서 하기로 했던 이주노동자 집회를 벅벅 우겨서 국회앞으로 옮겨놓고 그 추워서 덜덜 떠는 동남아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국가보안법 철폐해야 한다고 떠들던 당시 민주노동당 최고위원들도 있었구요.
길바닥에서 고생한 사람들, 그 분들의 신실한 자세에 대해서는 그 때나 지금이나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되도 않는 소리를 해가면서 사람들 모아 앉혀놓고 마치 곧 국가보안법이 철폐될 것처럼 헛소리 하면서 뒤로는 열우당 의원들과 정치적 줄다리기를 펼쳤던 일부 사람들, 그 이후에도 자기 책임에 대해서는 일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디다.
그나마, 평가를 했던 단위는 인권운동단위였는데 그 평가도 참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 예컨대 래군이형 같은 경우 어떤 기고글에서 "민주노동당은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던가 뭐던가 하는 표현을 쓰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더군요. 그러나 래군이형을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견해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는 것이 오히려 그 당시에 민주노동당은 지들 할 짓은 하지 않고 열우당 2중대 노릇하면서 분수에도 맞지 않는 오바질을 해버렸더랬죠.
적어도 민주노동당은 2004년을 즈음해서 파병을 획책한 노무현의 반민주성과 위헌성에 대해 가장 책임있는 비판세력이 되었어야 합니다. 이후 벌어진 한미 FTA 반대투쟁과 연결지어볼 때도 당시 민주노동당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덕분에 이후 대 참여정부 투쟁에서 언제나 본질적인 부분을 짚지는 못한 채 항상 변죽만 울리고 말았죠. 아닌 말로 평택이 그 난리가 났을 때 박석운이나 김기식이나 오종렬이나 이런 사람들이 "노무현 타도" 한 번 외쳤습니까? 이거 민주노동당이 했어야 했는데 지들이 정당인지 시민단첸지 분간도 하지 못하는 당의 최고위원 등 지도부들은 그저 시민단체 간부들 말에 현혹되어 그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에 앉쳐 놓고는 결국 한나라당만 좋은 일 시켜 줬죠.
당시에 많은 분들이 동동이님처럼 조금만 더 하면 국가보안법 철폐시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찬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안타깝더군요. 왜 이분들은 자기들 주변에서 자기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만 보고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왜 시청앞에서 서울역 앞에서 그 난리를 치는 수구세력들과 보수정당들은 보지 못하는 걸까? 그들이 아직까지도, 아니 앞으로 한 세대는 더 이 땅의 기득권 세력으로 활개칠 것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그 삽질 덕분에 한나라당은 기사회생했고, 드디어 10년만에 정권을 탈환했습니다. 한나라당 정권이 이명박 5년 후에 무너질지 아니면 앞으로 10년을 더 해먹을지 지금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탄핵정국 이후 한나라당을 더욱 궁지로 몰아 고립시킨 후, 지방선거와 보궐선거 등에서도 17대 총선처럼 저들을 수세로 몰아놓았다면, 지금과 같이 뻘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국가보안법투쟁만으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판단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철폐투쟁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혹여나 국가보안법철폐투쟁만으로 보더라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장강의 나비가 아메리카의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 있는 거니까요.
04년도 탄핵정국 때랑, 국보철 투쟁 다 하고 군대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변에서 자기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만 보고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전적으로 동의 할 만한 일도 많았고... 뭐 그렇군요.
그 평택 때나 기타등등에서 노무현을 규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 한나라당이 더 쎄기 때문에 진짜로 노무현을 끌어내리면 한나라당이 집권하기 때문에" 라고 했었다죠 아마?
그래서 민중진영이 역량을 키워야 하네 어쩌네 하는 소리를 하는 걸 들었는데... 그 때 참 많이 고민이 돼더라구요. 그게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과학적인 투쟁 방식인가요? 하고 말이에요 흠 ㅠ.ㅠ
입맛이 쓰군요...
에밀리오/ 에밀리오님의 그런 고민이 장차 새로운 운동을 여는 출발점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not/ 쓰다... 엄청...
삐딱선/ 당시에는 다 그랬죠. 그래서 씁쓸했던 기억도 있구요.
그런데, 삐딱선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제 글에 덧글을 다시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제 사생활의 일부를 거론하셨네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런 경우를 처음 겪는지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차후에는 조금만 더 배려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기본 에티켓도 망각한 짓을 했네요...
일단 댓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삐딱선/ 헉... 이렇게 빨리 조치를 취하시다니... 혹시 부담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하구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새글로 설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생뚱맞게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모 책의 귀절이 생각나는 밤이네요.
동동이/ 맞아요. 지금이야말로 진정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라는 경구를 새김질할 때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