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이 오셨다

어째 좀 이상하다 싶더니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근래 북핵시험이다 일심회다 하는 시국사건(?)들이 터지고, 거기 더해 이 상황에서 민주노동당 방북단이 장도에 오르는 일까지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 내지 비난이 그닥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래, 이렇게 좀 조용히 넘어가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라? 이 땅의 우익들이 다 죽었나? 왜 이리 조용할까? 뭐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뭔들 행인이 뜻한 대로 된 적이 있나... orz...

 

바깥이 시끌벅적 하기에 뭔 일인가 싶어 내다봤더니... 오셨다, 그분들이 오셨다. 태극기 들고 현수막 들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스피커 끌고, 흰 머리 바람에 휘날리며 노구를 이끌고 그분들이 오신 거다. 약 40여명 쯤 되는 어르신들이 민주노동당 당사 앞으로 몰려오셨다. 점심시간 12시 종이 땡 울리자 마자 식사도 전폐하시고 달려오신 어르신들의 우국충정 앞에 여의도 일대가 뜨끈해지는 순간이었다.

 

길을 막고 도열하신 어르신들, 모이자 마자 사회자의 선창으로 "빨갱이 정당 민주노동당 해체하라!",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쓸어버리자!"라는 구호를 외치신다. 궁금한 것은 저 어르신들, 섭생을 어떻게 하셨길래 저런 기백과 체력과 목청이 나오는 걸까? 궁금한 거 절대 못참는 행인인지라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서 여쭤볼려고 했는데, 빨갱이들을 한 눈에 알아보는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몰매를 맞을 것 같아 애써 궁금증을 참고 있었다.

 

"빨갱이들을 북송하라!", "간첩들을 일망타진하자!" 이런 구호들과 함께 여전히 민주노동당 해체하라는 구호를 약 5분 간 외치시던 이분들. 드디어 경건한 마음으로 국민의례에 돌입. 할아버지 한 분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길 한 복판에 등장. 지금까지 목청높여 구호를 외치던 그분들, 갑자기 숙연해지더니 국기에 대한 경례 시작.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이 경건한 순간에 등장한 각종 차량들, 길이 막혀있다보니 답답했는갑다. 빵빵 거리고 밀고 들어오고... 그러나 이 애국지사들이 어떤 분들인가, 국민과 시민의 편의와 안전과 이들의 생명을 빨갱이로부터 지키기 위해 출동하신 분들 아닌가. 어디선가 잽싸게 달려나온 안전요원 서너명이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많이 해 본 솜씨다.

 

혼란한 와중이라 국민의례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의연한 어르신들의 나가는 길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끝나자 곧 애국가 '봉창'이 있었다. 투철한 애국심에 불타는 어르신들이었는지라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실 줄 알았는데, 역시 시간 앞에 장사는 없던가... 시간 관계상 1절만 부르신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 엄숙한 장면에서 또 눈치없는 운전자들, 빵빵거리기 시작한다. 한 운전자는 안전요원과 실랑이를 벌인다. 자세히 봤더니 이 안전요원들, 집회 시작부터 앞에서 사진찍던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멀어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티격태격하는 동안 골목길 안에 차량들이 장사진을 이뤘고, 결국 어르신 한 분이 쫓아 나가 뭐라고 하면서 그냥 내보냈다.

 

애국가 끝나자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이 역시 빵빵거리는 차량의 경적 때문에 별로 숙연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개념없는 것들, 골목길에서 경적질하고 말이야...

 

국민의례가 끝난 후부터 본격적인 성토대회가 벌어졌다. 그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민주노동당은 간첩들의 소굴이고, 이 나라는 국민 세금 가져다가 386 간첩단들을 민주화운동유공자라고 돈까지 집어 줬고, 그래서 이 나라가 빨갱이 천지가 되었단다. 졸지에 간첩 소굴에서 기생하고 있는 처지가 된 행인, 그렇다면 나는 간첩인가 아니면 간첩의 찌끄래긴가...

 

이 땅을 빨갱이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끝나자 태극기 흔들며 가히 축제의 분위기다. 이런 저런 성명이 발표되고 주 내용은 이 불안한 시기에 북한에 방문하는 민주노동당은 빨갱이 집단의 본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고, 국정원과 검경은 간첩을 발본색원해서 좌익집단을 완전히 분쇄해달라는 것.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쇠파이프 등을 동원한 각종 폭력시위를 주도했고 그게 다 북한이 지령한 것을 따른 것이라는 주장.

 

그러더니 끝날 때쯤 공지사항을 발표. 점심식사한 후 "애국지사 김용갑의원"을 살리기 위해 김용갑 의원실을 방문하잔다. 진지도 자시지 않고 집회를 하시기에 엄청 안습이었는데 점심 계획이 있긴 있으셨구나...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혼난 것은 "애국지사 김용갑의원"을 살리자는 거룩한 발언을 듣고 나서이다. 한나라당이 김용갑의원에게 제재를 가한다고 하니 그걸 막아내자는 거다. 여러모로 고생하신다.

 

돌아가는 꼴을 봐 하니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동안 열우당에 집중되었던 좌파사냥이 드디어 민주노동당을 향해 칼끝을 돌리는 듯 하다. 조선일보 사설은 연일 포문을 터뜨린다. 오늘자 사설에서는 "민노당은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 외부 불온세력의 제1 침투 대상"이라고 한다. 근거는 민주노동당이 9명의 의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의원들이 각종 고급정보를 우선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한나라당이나 열우당이나 민주당이나 마찬가진데 왜 유독 민주노동당이 "제1 침투대상"인지는 그 이외에 설명이 없다. 하여튼 얘네들 하는 짓이 뭐 별 거 있겠는가 마는...

 

이번 간첩사건에 관해서도 조선일보는 민주노동당의 공안조작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혐의 사실을 파악해 보지도 않고 국가기관의 수사를 조작으로 몰고 가는 재야세력 때 버릇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한다. 지들이 "구체적인 혐의 사실을 파악해 보지도 않고" 멋대로 기사질 하면서 다른 사람들 빨갱이로 몰아부치던 것은 전혀 생각지 않는다. 얘네 수준에서 이 이상 바라지도 않는다만, 도대체 이런 사설이 나갈 때 이 동네 기자라는 쉑덜은 뭔 생각을 하고 있길래 딴지 한 번 거는 일이 없는 걸까?

 

그나마 조선일보, 간만에 옳은 말 한 마디 했다. "북한은 민노당이 꿈꾸는 '노동자의 천국'과는 거리가 먼,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세계에 하나뿐인 '노동자의 지옥'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장하다, 그거 이제 알았냐. 그런데 조선일보도 아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채 생까는 주사돌이들이 민주노동당에 짱박혀 살아가고 있으니 이 덜떨어진 조선일보로부터도 이런 수모를 당한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같이 벼락맞는다더니 이 닭대가리 주사돌이들 덕에 다른 많은 당원들이 도매급으로 닭취급을 받는다.

 

조중동문의 십자포화가 시작되고 있다. 드디어 얘네들이 열우당이 빨갱이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빨갱이 정당이라는 사실을 각성한 것일까? 아니면 열우당 그거 얼마 가지도 못할 당인데, 자꾸 열우당 걸고 넘어져 봐야 약발이 받지 않는다고 판단한 걸까?

 

앞으로 또 자주 그분들이 오실 것으로 보인다. 뭐 자주 오셔도 괜찮다. 건강하실 때 이렇게 많이 돌아다니시면서 하시고 싶은 이야기 다 하시고 가시는 것이 까르마를 푸는 길이 될 것이고. 가시는 길 편히 가시길 바란다. 들고 오셨던 조선일보는 가보로 보관하시면 되겠다.

 

 

그 후에 드는 상념

 

자, 기회는 왔다. 어차피 노리고 있던 것이 이거 아니었던가? 보수와 진보의 확연한 대립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 지금까지 열우당이 마치 진보의 대명사처럼 언론에 비춰지면서 열우당이 좌파인양 각색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는 누가 더 파란색이냐를 가지고 한나라당과 열우당이 싸우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농도가 옅은 파란색을 빨간색이라고 규정하는 희안한 꼴통들의 용어사용으로 인해 열우당이 빨갱이처럼 이야기되었던 거다.

 

그러던 것이 이제 진성 빨갱이 민주노동당의 색깔을 보고 빨갛다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계기야 뭐가 되었건 분명하게 좌우의 구분이 시작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여기서 뭔가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진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어야 하는 거다. 물론, 계속해서 봉건왕조에 대한 지극한 사모의 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중세회귀본능을 보유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비전이란 것이 불가능하다. 선군정치를 남한사회의 모델로 생각하는 이 닭덜을 견제하고, 그동안 준비해왔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새로운 대안세력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인민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0/31 13:14 2006/10/31 13:14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651
  1. 저분들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_-; 무척 럭셔리한 섭생으로 오래사실것만 같아서리. -_-;;;

  2. 맨 첫째 줄에 있는 일진회는 일심회가 아니던가요^^? 일진회는 중딩고딩 일진들의 서클인데...^^...

  3. 디디/ 저분들 중 럭셔리한 분들은 다섯 손가락 안쪽 정도였구요. 나머지 분들은 그저 그런 반공집회 때 보이시던 탑골공원 어르신 수준이었습니다. 되려 그분들 보니까 더 안습이죠. 이분들에게 충분한 복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이런 곳에 오셔서 일당벌이하시지는 않을텐데 하는 생각에요...

    곰탱이/ 이런... 왠만해선 그런 실수 하지 않는데, 오늘 너무 재밌는 구경을 한 나머지 그만 오타를 찍어버렸네요. 바로 고치겠습니다.

  4. 그래요. 이참에 진정한 보혁구도 만들어보자구요^^;

  5. 열우당의 집단자살골 행진이 민노당으로서는 큰 기회일 수 있을 텐데요. 극우 보수 대 '잡탕'보수로 양분 아닌 양분되는 것보다는, 풀소리 말대로 "진정한 보혁구도"가 되도록 하면 좋은데... 보수대진보의 확실한 편가르기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의 비젼"이 민노당을 중심으로 해서 나올까요?

  6. 풀소리/너부리/ 제 바램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좀 암울하네요. 여기에 대해서 따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7. 조선일보도 아는 것을 쌩까는 주사돌이 들이 민주노동당에 많이도 박혀 있으니, 보혁구도는 꿈꾸기도 어려울듯....
    여전히 보수와 빨갱이의 대결구도가 이어지지 않을까요?ㅎㅎ

  8. 블로거 오프모임때 나왔던 얘기 : 행인님 포스팅은 아침 신문 보듯 들여다 보게 된다니깐~~ (다들 '맞아 맞아!') ㅎㅎ

    그래도, 포스팅하느라 잠못자고 그러진 마세요~
    재미난 글 잘 읽고 감다.

  9. 산오리/ ㅋㅋㅋ 저도 그게 젤루 걱정입니다... ㅜ.ㅡ

    re/ 아... 갑자기 엄청난 중압감이...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