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지각에 40대...
행인님의 [폭력의 기억은 핏속에 남는다] 에 관련된 글.
훈련소 초짜 훈련병에게 '비상'이라는 단어는 여러 모로 사람 미치게 만드는 단어다. 왜 비상일까, 또 뭔 훈련일까, 얼마나 힘들까 등등 이런 생각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놈의 군장채비가 걱정이기 때문이다. 항상 조교가 원하는 시간을 초과해서 준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나친 긴장으로 인해 아예 군복을 입은 채 군화까지 신고 자는 경우도 있었다. 마치 '5분대기조'처럼. 물론 걸리면 한따까리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뭔가 특별나게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함께 내무반에 있는 견장 찬 병장 계급의 조교는 빤스만 입은 채 자빠져 자고 있어도 우리보다 빨리 복장을 갖추고 뛰어 나간다. "군대는 짬밥이여~~"라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다.
집합에 늦으면 당연하게 얼차려가 이어진다. 말이 얼차려지, 그건 얼차려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력단련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통을 줄 것인지를 연구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사단장의 엄명으로 훈련병에 대한 구타는 일절 금지되었기에 별다른 신체적 위해는 없었다. 물론 자대배치 받고 나선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혹하게 구타를 당해야 했지만...
얼차려를 받는 동안 조교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고함을 치고 욕을 하고 간혹 엉성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는 훈련병을 전투화발로 밀어제낀다. 그러면서 하는 말, "전투에서 5분은 몇 백명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 니들이 5분 늦음으로써 지금 수 천명이 죽었다. 이 개쉐이들아!"
훈련소에서의 얼차려는 그래도 견딜만 했다. 올림픽 군번들이 개꼬장을 부리고 있던 자대에서는 걸핏하면 쌍코피가 터지고 머리통에 기스가 났다. 생전 보도 듣도 못하던 희안한 자세의 얼차려가 개발되어 있었고, 고참들은 돌아가면서 신병들을 굴렸다. 집합시간에 늦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이유 없이도 얼마든지 그렇게 했다. 행인, 이 과정에서 앞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절대 다른 사람 주어 패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게 "군대가서 사람 된" 케이스인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뭐, 까이꺼 군대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훈련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차피 이러한 생각이 폭력에 길들여진 자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기왕 지난 옛날 이야기니 좋게 생각하자는 회피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뭐, "군대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잔 말이다.
그런데, 학교는 왜 그런가? 군대도 아닌 것이 애들 죄다 똑같은 교복 입혀서 누가 누군지도 몰라보게 만들고, 똑같이 머리카락 정렬시켜 다 그넘이 그넘처럼 보이게 만들고, 꺼떡하면 교복에 부착물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껀수잡고, 심심하면 바리깡 들고 돌아다니면서 마빡에 고속도로 만들고...
소지품 검사니 뭐니 하면서 짐뒤짐 예사로 하고, 지각한다고 벌주고, 뭐 했다고 벌주고... 하긴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사람들이 그럴 정도로 뭔가 달라지긴 했다만. 예전에 새카만 교복입고 다니던 시절, 아는 형과 누나는 손잡고 지나가다가 선생에게 걸려 '불량이성교제'라는 명목으로 정학까지 당했다만...
국방색 옷만 안 입혀 놓으면 학교고 국방색 옷 입혀놓으면 군대냐? 인권은 고등학교 졸업장 받아야 비로소 주어지는 건가? 그 전까지는 이 청소년들이 외계인인가? 인간이 아니란 건가?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선생님이 큰 소리 한 번만 잘못쳐도 학부모 쫓아오고 경찰에 신고들어간다는 요즘 학교의 분위기.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 자식에게 손톱만큼의 불이익이 돌아가면 온통 난리가 나는 그런 사례가 적잖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부 몰지각한 교사에 의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학생들과 그 부모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사례보다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지 싶다. 5분에 200대... 그것도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철철 나도록 주어팬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걸 변명한답시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취지의 사랑의 매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웃기는 소리다. 그 혓바닥에 곤장 200대를 맞은 후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하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3 때, 힘이 천하장사였던 담임선생님이 철도 침목으로 엉덩이를 내려 칠 때, 그 고통의 강도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육중한 무엇이 궁둥이 위에 떨어지고 그 여파로 엎드려 뻗쳐있던 몸이 그대로 교실 바닥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고통의 강도는 수학공식을 통해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꼭 돌덩어리 같은 마른 북어를 들고 다니다가 그 북어로 마빡이고 손바닥이고 등허리고 닥치는 대로 퍽퍽 갈기던 미술선생, 학생의 귀를 잡고 운동장으로 나가 그 운동장을 뱅뱅 돌면서 주먹질을 하던 지리선생, 얻어맞아 쓰러진 애의 몸 위로 책상과 걸상을 있는 대로 다 집어 던지던 국어선생... 그리고 봉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50대씩 때리던 아까 그 지리선생...
왜들 그랬을까? 꼭 그래야 했을까?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었을까? 그 후예 중 하나가 이번에 이렇게 5분 지각한 학생의 살덩어리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지난 봄 최순영 의원실에서 학생인권법을 발의하던 과정에서 일부 교사들이 체벌 자체를 완전히 금지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면서 계속 문제를 제기한 일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전교조 활동을 하신다는 분들조차 이런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난감했던 적이 있다.
체벌에 대한 인식마저 이러할진대, 교복을 없애거나 두발을 완전 자유화 하는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 답답하다. 교복을 입히고 머리모양을 관리하고 지각을 체크하는 이 모두가 다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란다. 다 학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다 학생들 잘 되라고 하는 거란다.
그렇다면 왜 교사들은 명찰을 달지 않는가? 교사들부터 명찰 달고 다니는 것이 맞지 않나? 저 피터진 아이의 앞에서 구타를 자행했던 그 교사는 왜 이름표도 달지 않고 그런 짓을 했을까?
덧 : 이 사건을 보면서 사학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교사는 파면조치되었다지만 그것도 난리가 나니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고, 애초에 이 사건 감추기 위해 학교차원에서 온갖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교장이고 재단이사고 다 이 교사와 친인척 관계였다. 사학재단들, 그리고 거기 기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애들 사랑한다는 소리 입에 침이나 좀 바르고 했으면 싶다. 욕나올라고 그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번에는 이것을 집에 가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어깨를 짖누르는 가방 안에는 입소통지서가 그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남들은 1번 가기도 힘들다는데
1910 ; Oil on canvas, 8' 6 1/4 in x 10' 5 1/2 in ;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색채의 마술사로 불려지는 Henri Matisse(1869-1954)의 [The Dance(decorative panel)]입니다. 흔히들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라고 하면 피카
행인님의 [1분 지각에 40대...] 에 관련된 글. 중학교를 올라가면서 중간, 기말 고사를 치고 나면 겁나는 단어가 생겼다. 그게 소위 말하는 '매타작' 이라는 말이었다. 중학교 부터는 체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