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공 4개월 차의 간략한 소회
굵직한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각종 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진화위, 사참위, 518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어쩌다보니 이런 한시적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몇 달 지나가고 있는 중.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류의 한시적 위원회가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깊어진다. 물론 시대적 아픔을 돌이켜 세워 진상을 파헤치고 역사의 증거로 남겨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과거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국가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위원회들이 설치되면서 어둠 속에 묻혀졌던 많은 사건들의 진상이 규명되고, 반민주적 독재정권이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확인하여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 위원회의 설치목적을 충족하고 각각이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적 측면에서 보면 과연 이러한 위원회들이 그 의의를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만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한시적 위원회들이 자체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은 정권의 민주적 정당성을 위한 알리바이 역할에 머물고 그 기간을 만료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우선 이런 위원회는 국가기관의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인지라 국가공무원만을 조사원으로 사용할 수 없다. 민간인 출신 별정직들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서 국가공무원의 일부를 파견받고 별정직들을 채용한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는 우선 한시조직이라는 것때문에 기한 만료에 따른 기강해이가 너무 일찍부터 드러나고 그것이 실적과 연동된다는 거다. 파견직은 1년 내지 2년 정도 있다가 교체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각 위원회에서 근무하는 기간을 일종의 휴가 정도로 생각한다는 거. 그 중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년 내내 놀다가 1년 연장신청 해서 2년 놀다가는 사람도 있고.
파견을 보내는 곳에서도 제대로 된 인력은 별로 보내지 않는다. 조사업무를 하다보니 검찰, 경찰, 군 등에서 파견을 받고, 국가기관이니 당연히 행정자치부를 비롯한 여타 행정부에서도 필요한 업무를 수행할 사람들을 파견받는다. 그런데 각 기관은 자기 기관에 꼭 필요한 사람을 절대로 보내지 않는다. 그나마 어느 정도 역량이 되는 사람을 보내주기는 해야 하는데 가끔은 소속기관에서도 골머리를 썩는 사람을 얼씨구나 하고 보내는 경우도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멀쩡할리는 없고.
별정직도 마찬가지다. 한시적 조직에 들어오는 이유는 경력을 쌓아 직급을 올려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 위한 발판으로 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흔하다. 이들 중에서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차피 기간이 정해져 있는 곳에서 일정한 실적을 만들면 그뿐이지 소속에 대한 애착 같은 걸 요구하기는 힘들다. 특히 기간만료가 가까워질 수록 소속기관에서 월급받으면서 이직하기 위해 뛰는 경우가 흔하다. 유사한 형태이지만 다른 목적의 한시적 국가기관이 설치되면 소속기관의 기간만료가 상당히 남아 있더라도 직급을 올려 잽싸게 프로포절을 한다.
이러니 기간 만료가 가까운 위원회는 사람이 빠져나가 전전긍긍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참위의 기간만료가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2기 진화위가 설치되자 사참위에 근무하던 별정직들이 우루루 진화위에 프로포절 하고 상당수가 이직을 해버렸다. 별정직들이 상당수 빠져나가자 사참위는 계속해서 채용공고를 냈지만, 기간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기관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곤경을 치룬다.
공직기강 해이는 말도 못한다. 파견들은 파견 나름대로 어차피 자신들이 돌아갈 곳이 있다보니 이 안에서 뭘 잘 하자는 생각을 하기 어렵고, 별정은 별정대로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보니 서로 척지지 않으려 문제들을 방관한다. 도대체 조출이나 야근을 할 일이 뭔지 모르겠는데 허구한날 조출 야근 잔업을 달아놓고 시간외 수당을 꽉꽉채워 받아간다. 조출 끊고 헬스장 가서 헬스하고 오거나 야근 끊고 놀다 오고 술먹고 오고 해도 출근 퇴근 시간 체크만 해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는 일도 없는데 새벽같이 출근해 삼삼오오 모여 특근매식바 카드로 커피며 다과며 사다 먹으면서 근무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노닥거린다. 퇴근했는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술마시다 퇴근 시간 체크하려 들어온 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들의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놀란 게 한 두번도 아니고. 이젠 익숙해질만도 한데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최고 책임자에게 인사권이 없다는 거다. 4급 이상의 별정 인사권은 대통령 권한이고, 파견직은 어차피 파견된 본 소속에서 인사권을 쥐고 있고, 다른 별정들은 이 한시기구 안에서 별도의 인사권행사의 방법이 없다. 승진을 시킬 수가 있나 전출을 시킬 수가 있나. 게다가 내부적으로 공직기강과 관련되어서는 죄다 공범 내지 방조범들이다보니 징계위원회 한번 제대로 꾸리기가 어렵다. 최고책임자가 인사권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전권을 행사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한시 위원회에서는 전권이고 나발이고 뭐 하나 할 수가 없다.
덧붙여, 보통 이런 한시적 위원회는 정권차원에서 설립되고 운영되기 십상이다. 특히 '민주정부'를 표방하는 자유주의 우파진영의 집권기에 흥성하게 되는데, 따라서 정권이 위원회의 향배를 쥐고 있고, 정권의 의지에 따라 위원회는 굴러가게 된다. 하지만 100%의 경우, 정권은 위원회를 만들어놓은 후 특별하게 관리하지 않는다. 위원회의 독립성 보장 차원에서 오히려 장려할만한 일이 아닌가 싶지만, 위원회의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 것과 위원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고 방관하면서 만들어놨으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바로 이 위원회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원인 중 하나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한시적 위원회들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상설기구를 설치하여 과거사 문제들을 다루는 거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가 있는데, 지금 국가인권위원회의 규모나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게 웃기는 게, 그렇다면 국가인권위원회같은 독립기구를 대폭 확장하고, 그 안에 각종 과거사 전담부서를 설치하면 되겠는데, 그렇게 되면 각 정부부처가 난장판을 부려버리니 그거 귀찮아서 건건이 이런 한시 위원회를 만드는 거다. 뭐하자는 짓들인지.
여차한 사정때문에 빼도박도 못하고 당분간 어공노릇을 해야 하는데, 지난 얼마되지 않는 기간 동안 내부적으로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다가 혀만 내두르고 있다. 매우 심각한 사건이 있어서 고위급에게 징계위원회 구성을 상신했더니 그거 해서 누구 하나 징계했다간 그 사람이 앙심품고 다른 사람들 다 걸고 넘어지면 이 조직에서 남아날 사람 없다고 펄쩍 뛰길래, 아니 그럼 앞으로 누가 어떤 잘못을 해도 징계 한 번 할 수 없다는 이야기냐고 물었더니 별 수 있냐고 해 기함을 했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니 조사규칙과 각종 규정을 위반한 조사관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며 최고책임자 앞에서 진상을 떠는 일이 벌어진다. 기가 찰 노릇이다. 씨앙, 솔직히 맡은 일만 아니었으면 아주 반 작살을 내놨을텐데, 성질 많이 죽었다...
앞으로 지나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어차피 할 필요가 없는지라 아무리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도 잔업 한 번 안 달았고, 업추비 한 푼 쓴 적이 없고, 묻어서 특근매식비 한 번 쓴 게 다다. 이러다가 나도 은근히 물들어서 저따위 짓 비슷한 거 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게 되려는 순간에 사표 던져야지 별 수 있겠나. 어지간해서는 내가 속한 조직의 문제를 꺼내고 싶지 않다만, 이게 내가 있는 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한시적 위원회의 문제라면 철두철미하게 재고 해야 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