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간과 복습의 상관관계
복습이라는 건...(latte is...)
시골 집 원단 퍼세식 뒷간은 흙벽과 초가지붕, 그리고 입구의 거적때기로 기억된다. 대문과 행랑방(사랑방), 외양간과 뒷간이 한 건물에 있었더랬다. 외따로이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진 뒷간도 있었고.
뒷간의 건물 옆이나 안에는 항상 잿더미가 쌓여 있었다. 아궁이나 화로에서 나온 재는 일단 이곳으로 수합된다. 재는 뒷간 내부의 습도조절과 악취 제거에 매우 효과적이며, 나중에 인분과 섞여 훌륭한 퇴비의 원료로 이용된다.
거사를 치루는 포인트는 길쭉한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으며, 집안 가풍에 따라 발판은 나무로 댄 곳도 있고 돌로 댄 곳도 있고 그마저도 없는 곳도 있다.
내가 사용하던 뒷간은 외양간에 붙어 있던 곳과 독립건물 모두 나무판자가 대어져 있었다. 낙하 포인트 바로 근처에는 어김없이 길다란 작대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일컬어 'ㄸㅗㅇ 막대기'라고 한다.
뒷간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품은 뭐니뭐니 해도 뒷처리를 위한 휴지다. 당시에는 지금 흔히 쓰는 보들보들 야들야들한 두루마리 휴지 내지 그보다 더 고급진 티슈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다. 동네 점방에서도 구비하지 않는 품목이었으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온갖 종이류가 휴지의 역할을 하기 위해 동원된다.
동원된 종이류 중 오늘날의 휴지와 가장 유사한 느낌을 주는 건 집집마다 붙어 있는 농사달력이다. 매일 한 장씩 뜯어내게 되어 있는 달력인데, 이걸 그냥 버리지 않고 한 장 한 장 모아서 뒷간에 갖다 놓거나 벽에 걸지 않았던 걸 채 통으로 갖다 놓기도 했다. 이 달력에는 미리 중요한 대소사나 기념일 등을 표시해놓기도 하고, 급히 메모를 하거나 누구의 연락처나 주소, 또는 어딜 찾아가는 방법-버스노선이나 열차시간이나- 등등을 적어놓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쩌다가 휴지로 쓰기 위해 달력장을 들추다보면 잊고 있었던 기념일이나 연락처 같은 걸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 이날이 그날이었어? 어라, 이 전화번호가 여깄었군! 이러기도 하는 거다. 한편 농사달력엔 반드시 음력날짜와 24절기 등이 함께 인쇄되어 있으므로 간혹 그 날이 음력으로 며칠인가 등을 계산할 때도 요긴하게 사용된다.
농사달력의 최대 장점은 얇고 보들보들해서 휴지로 사용하기 위한 전처리가 필요 없다는 점이다. 다른 휴지들은 뻣뻣하기 때문에 그냥 바로 뒤처리에 이용했다간 깔끔한 뒷처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항문출혈 등 부상을 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보풀이 일어나 보들보들해질 때까지 종이를 부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 농사달력은 '습자지' 같은 재질로 얇고 부드러워 그런 과정이 거의 필요 없었다.
하지만 농사달력의 최대 약점 또한 바로 이 얇고 보들보들하다는 점에서 나왔는데, 이게 워낙 재질이 약해서 힘조절을 잘못하면 뒷처리를 손가락으로 하게 되는 낭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 씨 드으러... 유사품으로는 ‘딕셔너리’가 있었는데, 농사달력과 재질은 비슷했지만 그 사이즈가 현격히 차이가 나서 그다지 애용되진 않았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이건 비싸고 귀해서 쉽게 보기도 어려웠고.
다음으로 많이 선호되는 종이는 신문지였다. 이건 좀 안타까운 것이 시골에는 신문지 조달이 그다지 쉽지 않았다. 소위 계도지라는 게 들어오긴 하는데, 이것도 이장집이나 경로당, 회의소, 점방 등에 들어가지 웬만한 집에는 개별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랬다. 지금처럼 몇 십 페이지씩 하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그놈의 '폐품수집의 날' 뭐 이런 때에 학교에 갖다 바칠 것도 필요하다보니 뒷간에 풍성하게 신문지를 갖다 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지나간 신문을 읽는 맛이라는 게 또 쫄깃하다. 간혹 어려운 한자에 막혀 뭔 말인지 모르고 넘어갈 때가 있기는 해도, 아니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단 말야? 이러면서 유명짜했던 사건을 뒤늦게나마 접하게 되거나 혹은 알고 있었던 사건을 복기하기도 했다. 연재소설이나 4컷 만화 같은 걸 신문쪼가리를 뒤져가며 찾아 읽는 것도 뒷간의 행복 같은 것이었다.
신문은 보통 몇 차례의 절단을 거쳐 사용하게 된다. 가문의 통이 큰 집에선 3번 자른 신문지를, 좀 더 근검절약하는 가풍의 집에선 4번 자른 신문지를 쓰게 되는 것이다. 자린고비 집에서는 5번도 자르고. 통으로 신문지를 가져다놓거나 1~2회 자른 걸 가져다 놓는 집은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렇게 갖다 놓는 건 그 집안의 구성원들이 무성의하거나 게으르거나 사치스럽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였기에 그렇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간혹 집에서 뒷간 뒤처리용으로 신문지를 쓴다고 하면, 그거 썼다가 항문에 ‘조선일보’라고 찍히는 거 아니냐는 갖잖은 농담을 들을 때가 있었다. 설령 찍히더라도 당시 계도지로 들어온 건 ‘서울신문’이었기에 ‘조선일보’라고 찍힐 일도 없거니와, 신문지를 뒤처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보풀이 일 정도로 부벼서 써야 했기에 인쇄내용이 피부에 전사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뒷간에서 가장 환영받는 휴지의 종목 중 하나는 전화번호부였다. 언제부턴가 뒷간에 비치되기 시작한 전화번호부는 종이의 재질이 농사달력과 신문지의 중간쯤 되어 질긴 정도와 살갗에 닿는 감촉이 상당히 인체공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정작 시골에 전화가 흔한 게 아니었고, 당장 우리도 그랬는데, 그러다보니 전화번호부를 조달하는 게 곤란하다는 거였다. 읍내 전화국에 가서 받아오면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받아왔는지는 모르겠고, 대부분 서울 등 도회지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생각날 때마다 한 두 권씩 갖다 놓는 형식이었다.
아무튼 이 전화번호부는 일단 통으로 뒷간에 매달아 놓고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전화번호부를 갖다 주면 맨 처음 하는 일이 송곳으로 그 귀퉁이에 구멍을 뚫고 노끈을 꿰어 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장착된 고리는 나중에 뒷간 변기 근처 손 닿는 곳에 박아 놓은 못에 걸리게 된다. 일 끝내고 한 장 한 장 뜯어 쓰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전화번호부는 무료하기 쉬운 뒷간에서 색다른 놀이거리를 제공해줬는데, 다름 아니라 사람 이름을 훑어보는 재미였다. 아니 이런 이름이 있을 수 있나 하면서 희한해하거나 웃기도 하고 그런 건데, 남의 이름 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좀 더 큰 다음에 알게 되었더랬다. 전화번호부는 맨 앞과 맨 뒤, 그리고 중간중간 광고가 실려 있었다. 재밌는 광고 사진과 문구 등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또 전화번호부의 한계이기도 했는데, 이름 훑어보는 거나 광고 보는 거 외에는 신문지가 주는 흥미와 재미 같은 건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뒷간 휴지의 전설은 역시 동아전과, 표준전과, 10년간 몇 년간, 뭐 이런류의 학습지였다. 학습지들은 조달도 꽤 쉬웠기에 자주 접할 수도 있었고, 게다가 종이의 질과 양이 적절하여 쾌적한 사용이 보장되었으며, 농사달력처럼 꾸준히 모아놓거나 신문지처럼 적절한 크기로 잘라놓는 등의 수고로움이 필요 없이 전화번호부처럼 구멍 하나 뚫어 노끈 꿰어 척하니 걸어놓으면 되는 편이성도 있었다.
게다가 이 학습지류의 최대 장점은 언제나 학습하는 뒷간의 풍토를 조성해줬다는 점이다. 어느 페이지 어느 부분을 들여다보더라도 학습지류는 공부할 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나의 학습수준과 학업진도에 부합하는 학습지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뒷간에서 학습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학습은 시간상으로 나의 현실과는 많이 떨어져 있는 예습 아니면 복습인데, 저학년일 때는 주로 예습이 이루어졌고 고학년으로 갈수록 복습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그 학습지류를 조달하는 일가친척들의 구성상 사촌들의 연령대 구성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암튼.
사회나 문학 같은 항목은 예습이나 복습이나 언제나 흥미롭다. 고학년이 된 후 너무 저학년용 학습지는 좀 식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으나, 예전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해하게 된다거나 아예 모르고 지나쳤던 내용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학이나 과학은 머리에 쥐가 나기 때문에 제끼기도 했지만 간혹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제를 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오기와 자존심 때문에 학습지 맨 뒤에 있는 답안지를 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던 그 때의 경험은 훗날 인내력과 집중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치질을 키웠을지도...
지금이야 거의 돌이 되어가는 뇌기능으로 인해 갑갑함을 느낄 때가 많아졌지만, 그래도 한 때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잡학다식하다는 말을 꽤나 듣곤 했다. 깊이 아는 건 없지만 이것 저것 주워 들은 건 상당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이게 다 그 옛날 시골 뒷간에 걸려 있던 전과나 문제집, 신문지의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이래서 복습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며칠 후에 어떤 심포에서 토론을 하게 되었다. 토론문을 작성하다보니 전에 읽었던 책들과 논문들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아, 그런데 그만 그 책들과 논문들에서 전에는 지나쳤던 중요한 대목들이 보이고, 전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머리를 때린다.
이것은 마치 그 옛날 한적한 뒷간에 앉아 무심코 들여다보던 학습지의 한 귀퉁이에서 그보다 더 옛날 어느 때에 미처 풀지 못해 한이 서렸던 어떤 문제의 답이 환하게 머리 속을 비칠 때의 그 감동과 비견할만하다.
이렇게 복습의 희열을 만끽하는 가운데 토론문은 점점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던 토론문이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토론문에 진척이 없다보니 마음은 급해지는데 복습에 대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다보니 이따위 똥글만 오살하게 잘 씌여지는구나. 뭔 소리여...
언제 토론문 보내주나...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