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정말 노동자의 '빽'인가?
청년 취업 등 청년세대가 겪는 고통에 대하여 이를 경감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당사자인 청년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정초부터 기본소득과 청년을 묶어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신문: "현금지원은 미래에 대한 투자... 취직하면 세금 더 낼게요"
서울신문: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빽'이다... 부당함에 당당히 "NO" 외쳐라
시리즈물로서 맨 위부터 순서인 듯하다. 첫 기사에서는 곤궁한 처지의 청년들에게 50만원이 가지는 가치를 확인한다. 활력소, 행복, 오아시스, 기회는 물론 '생존권' '목숨'이라는 표현으로 50만원의 의미는 격상한다. 그걸 왜 모르겠나. 밥값은 커녕 차비도 없어 며칠을 굶고 걸어서 일 찾아 다니던 입장에서, 그 50만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 50만원으로 삶의 용기를 얻게 된 청년은 자신의 훗날을 이렇게 기약한다. "나중에 취업하면 기꺼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 훌륭한 자세다. 그러나 그 희망을 충족하기 위한 전제는 '취업'이다. 단지 일자리만 얻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취업을 통해 더 많은 '세금'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 희망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째 기사에서는 '기본소득'형 지원금의 용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기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 청년의 항변이다. "월 50만원 지원하면 근로의욕이 떨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근거가 뭐냐'고 되묻고 싶다." 나도 그렇다. 월 50만원 받는다고 해서 근로의욕이 떨어질까? 근로의욕이 떨어지려면 월 50만원으로 개인적인 최소의 충족이 채워져야 한다. 먹고, 자고, 입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며,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최소한도로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그 때 비로소 근로의욕의 상실이 가능하다. 월 50만원으로 가능한가?
그래서 두 번째 기사의 제목은 내 입장에서는 틀린 거다. 월 50만원이 되었든 얼마가 되었든, 그렇게 돈이 생기면 그래도 한 잔 하고싶다거나, 담배 한 갑 사고 싶다거나, 진짜 가고 싶었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꼴랑 50만원에 도덕적 감수성을 요구하나?
정작 문제는 50만원 받으면 그걸로 진짜 살기위한 명목으로만 쓰고 군것질하거나 허튼 용도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저 50만원이나 혹은 기본소득당이 이야기하는 60만원은 한국사회에서는 더 많이 더 빨리 일자리를 찾으라는 채찍질이 된다는 거다. 일정한 급여가 있거나 재산이 있는 상태에서 받는 50만원과는 달리, 열악한 상황에서 당장 먹고 살기가 빠듯한 사람에게 저 50만원은 영속적으로 이 사회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경비가 되고 만다.
따라서, 세 번째 기사에서 판 빠레이스가 이야기하는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빽'이다"라는 구호는 사기다. 판 빠레이스가 전제하듯, 기본소득이 직업을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한 위로 차원의 지원금이 돼서는 곤란하다. 이 전제가 충족되지 않는 한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빽'은 커녕 노동자를 구직노예로 만드는 기제가 될 뿐이다.
이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단지 주어지는 돈이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더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문제는 그 돈이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느냐의 문제다. 판 빠레이스는 "부유층에게도 기본소득이 지급되지만 부자들은 기본소득을 위해 세금을 더 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론이 영구적으로 시장복지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돈은 결코 허공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바로 자본가들이 제공하는 재원에서 나온다는 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하게 위상을 지키고 있는 한, 기본소득은 어떠한 경우에도 에릭 올린 라이트가 이야기했던 "우쭐거릴 수준은 아니지만 남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 전제가 충족되지 않는 한,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빽'이다"라는 말은 사기다. 자본가들이 미쳤다고 그 '빽'을 노동자에게 주는가?
자본가가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50만원을 받는 사람들은 결국 싫은 건 'NO'라고 할 수 있는 주체적 노동자가 아니라 현찰을 손에 든 소비자일 뿐이다. 기본소득은 소비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이지 결코 노동계급의 해방에 기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기본소득의 제공은 임금수준의 저하를 야기하고, 임금수준의 저하로 인하여 평균적 수입수준은 프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찰복지는 현물복지를 대체할 수밖에 없고, 이젠 시장에서 현찰로 현물복지를 사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하자고 주장하는 자가 바로 미국 대선에 뛰어든 앤드류 양이다.
차라리 앤드류 양은 솔직하기라도 하지. 한국의 기본소득당이나 저 판 빠레이스 같은 자들은 솔직하지도 못하다. 그들은 그저 국가가 세금을 얼마 걷으면 얼마의 기본소득이 가능하고, 그 세금은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걷으면 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면서 거기에 무슨 사회주의 이행경로니 녹색생태기본소득이니 하는 허울을 갖다 붙인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기본소득은 아무리 그 의미를 고도로 승화시킨다 한들 그 본질적 성격상 재분배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재분배'보다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분배'의 문제이며, 이 분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지금 필요한 논의는 현찰을 얼마 줄 것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체제를 언제까지 이대로 둘 것인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이다.
신년 벽두에 서울신문에서 이러한 연속기사가 실린 건 올해 총선에서 기본소득 등 현찰수당에 관한 이야기가 정책적 화두로 올라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일 거다. 이재명 경기지사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미 청년 수당 등을 지급하면서 이걸 기본소득인 것처럼 퉁친 바가 있고,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정의당의 강상구 등이 걷는 것에 지불하는 수당을 기본소득이라고 명명하는데다가, 아예 기본소득당이 만들어지고, 거기다가 또 이러한 시스템을 옛날부터 강력하게 밀고 있는 허본좌가 국가혁명배당금당을 만들어 튀어나오니 아무래도 의제가 될 수밖에 없을 거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의제로 만드는 건 너무나 쉽다. 관심을 고조시키는데도 쉽지만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사회를 뒤집어 엎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기존에 주어지던 현찰복지체제와 배치되지도 않는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더 나가 자본가들에게 부담도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소비자를 양산해주는 이 체제가 놀랍도록 고마울 것이고. 왜 이걸 자꾸 미루는지 자본가들은 답답할 지경일 것이니.
아, 그러고보니 이참에 '기본소득은 사기다'라는 제목으로 책이나 한 번 내볼까나... 허 거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