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발족 선언문
다음과 같은 발족선언문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발판으로 꾸준히 성장해온 남한 근로민중의 힘은 1987년 6월 투쟁과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 속에서 다시 한번 분출되었다. 이는 남한 사회의 총체적 변혁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인 민주주의변혁에 있어서, 근로민중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며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의 패배로 인하여 정세가 점진적으로 퇴조해 갔으나, 근로민중의 민족민주운동은 대오를 재정비하고 투쟁의 불길을 당기면서 정세의 새로운 고양을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근로민중의 힘찬 발걸음에 대하여 남한 신식민지 파쇼체제는 각종 파쇼악법과 부르주아 기본법 및 법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올가미를 씌우려 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먼저 민법, 상법, 경제법 등은 독점자본에 의한 생산수단의 전유와 그 재생산을 보장하고 있고, 행정법은 파쇼체제의 조직을 체계화하여 그 작용을 원활하게 해주고 있으며, 형법은 부르주아적 기본질서를 보위하기 위하여 형벌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주아 기본법 위에 구축되어있는 제반 파쇼적 법령들을 보라! 학문 사상의 자유를 봉쇄하고 민중의 조직적 정치활동을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미전향사상범'을 감금, 감시하는 사회안전법, 노동3권을 형해화시키고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을 봉쇄하는 노동관계법, 농민을 독점자본의 손아귀에 내맡기고 어용조직만을 강요하는 농업관계법, 도시빈민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재개발법, 미국의 남한에 대한 '신식민지'적 지배를 보장하는 한ㆍ미관계 조약,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짓밟은 출판ㆍ인쇄법, 정간물등록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교육활동을 파쇼의 통제하에 두는 교육관계법 등의 각종 파쇼악법들은 이 땅의 근로민중을 가시 돋힌 철조망으로 묶어두려 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은 이상과 같은 제반 법률을 구성요소로 하면서도 이를 '자유민주주의'의 미명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며 재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남한 사회의 제반 법률은 남한 신식민지 파쇼 체제를 유지하고 근로민중의 민족민주운동을 탄압하는 남한 반동 부르주아지의 도구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법의 지배', '법치국가'라는 구호로 표상되는 법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법파괴행위는 은폐하면서 피지배계급을 '법질서'에 충실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는 근로민중의 투쟁의지를 마비시키고 근로민중을 '파쇼적 합법성' 속에 가두어두는 기능을 한다.(후략)"
이 발족선언문을 가지고 있는 조직은 물경 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나는 이 발족선언문을 가지고 있는 조직의 일원이다. 이 발족선언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 대충 들은 바가 있다.
어쨌든 30년 전통을 가진 이 발족선언문을 나는 그동안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해왔고, 최근에는 조직의 새로운 전망과 실천노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치열한 고뇌 끝에 시대의 현실과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을 담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과연 이 조직의 구성원이나 이 조직이 이 발족선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관점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노선을 감당할 여력이나 의지가 있는 조직인지 언제나 의심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선언문 자체의 내용이 과연 적실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선언문만 보자면 당장 세상을 다 뒤집어 엎을 것처럼 되어 있지만 이 선언문을 간직한 조직의 구성원들은 지금 거의 대부분이 선언문이 그토록 부정하던 부르주아적 기본질서를 공고히하는 법들을 논하며 먹고살고 있다.
얼마전 조직의 선배가 사적인 자리에서 "과연 우리 조직이 발족선언문에서 천명한 것처럼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법이론을 구축하고 있는 건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매우 시니컬하게 대답했는데, "기초한 사람조차도 지키지 못할 선언을 해놓았는데 무슨 과학적이냐?"라고 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 조직이 조국 후보자 문제로 사분오열 갈라지면서 콩가루집안...이라고 하면 표현이 좀 저열하니, 베지밀가족이 되어버렸다. 거기서 설왕설래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선언문이 생각났다. 그리고는 내가 그동안 비판적으로 보아왔던 이 선언문의 내용이 오히려 지금 더 적실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다. 이제서야 이 선언문의 가치를 알아버렸으니 지금까지 이 선언문을 대체할 새로운 강령을 고민했던 건 다 물거품이 되어야 하는가. 아오... 세상이 뭐 변한 게 없는 거여? 그동안 도대체 우리들은 뭘 한거여? 저 선언문 만들었던 자들은 교수도 하고 뭣도 하고 장관도 하고, ㅆㅂ 부르주아적 기본질서가 이젠 다 혁파된겨? 아니 지들이 만들어 놓은 선언문은 어디 팽개치고 조국이 되니 마니 이러고들 떠들고만 앉았는 거여...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