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를 잊은 죄
아놔, 뭐 공부도 안 되고 하니 걍 넋놓고 앉았는데, 이게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회의도 들고, 인생 무상이라는 생각도 나고, 창 바깥에서 울어제끼는 매미는 7년 수행 끝에 빛이라도 봤지 난 뭔가 싶은 착잡함도 무시 못하겠고...
어릴 때는 하루라도 빨리 취직해서 밥 굶지 않고 사는 게 원이었는데, 어느날 정신이 들고 보니 뭔 공부를 하고 있질 않나, 세상 일에 이것 저것 참견을 하고 있지 않나, 과거엔 생각도 못할 모습으로 변해 있는 나를 발견했더랬다.
주위에는 작게나마 세상을 좋게 만드는데 기여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둘러싸 있었고, 난 그들이 좋았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 했고,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달라진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긴 그런 고민이 나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만.
당시, 정도의 강약은 있었지만, 소신껏 자신의 힘을 다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사람들의 결기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자기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동의할 수 있었고 함께 할 수 있었다. "ㅆㅂ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던 그들의 열의는 돈 많이 벌어 그저 먹고 사는 걱정이나 덜어보자던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한 게 한 20 몇 년 된 듯하다. 지금껏 그나마 쪽팔리지 않은 건, 20 몇 년 전에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바대로 아직은 변치 않고 살고 있다는 거다. 돈을 쫓지 않고 명예를 쫓지 않고, 넓게 보고 깊게 파고... 좋게 말하면 초지일관이지만 솔까 지금 내 모습은 그냥 백수건달에 한량이지 뭐...
문득 고개들어 보니, 당시 결기를 내세웠던 자들 중 상당수는 지 먹고 사는데 바쁜 건 둘째치고, 과거의 한 때를 젊은 날의 치기 정도로 여기면서 추억의 한자락 수준으로 생각한다. 돈 따라 간 넘도 있고 자리 하나 잡으려 줏대고 나발이고 다 팽개친 놈도 있고, 게중에는 십 수년 단체니 뭐니 활동이라고 하다가 이제 그 영역을 장악하고 그 알량한 것이나마 자기 나와바리로 삼아 기득권을 향유한다.
반면, 이전의 의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나름 그럭저럭 자리 찾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이런 사람들이 제일 부러운데, 손가락 빨아먹는 것도 한계에 도달한 지금은 특히 더 부럽다. 암튼 뭐 그렇다고.
그런데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다 자기 처지에 따라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을 보며 안타까운 건 이제 우리 옆에 대의라는 건 없구나 하는 상실감과 회한이다. 그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대의를 이야기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긴 대의가 밥 먹여주더냐.
적어도 우리가 바라던 세상은 돈 가진 자가 돈으로 유세하지 않고, 지위를 가진 자가 지위로 갑질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수 십년 지난 다음 보니, 그렇게 결의를 했던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모펀드에 투자하고, 땅투기/집투기 하고, 이너서클을 구성하여 그 안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도와 자식들을 명문학교에 보내고, 자리와 지위와 돈을 대물림하고 있더라.
오히려 한 자리 하고 있는 자들이 더욱 심하다. 이들은 심지어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리더이기까지 한데, 그러다보니 평소에는 소시민으로 전락한 주변의 사람들이 잊고 있던 대의를 설파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번에 조국 후보자처럼, 한 자리 더 높은 곳을 향하다가 암초를 만나 신상이 까발려지기 시작하면 그가 입으로 떠든 대의가 그의 삶에는 별로 중욯나 것이 아니었음이 확인된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그와 함께 한 이너서클의 멤버가 나타나 평소에는 지들도 대의를 운운했던 자들이 이제는 대의고 자시고 언제 그따위 소리 했었냐는 듯 자신의 당파성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조국이 뭘 잘못했냐? 법을 어겼냐? 뭐가 문제냐?
이 대목에서 욕이 나오는 걸 참고 말하자면, 너희들의 죄는 대의를 잊은 것이다. 법을 어겼냐 뭘 어쨌냐하는 말이 너희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자체가 문제다. 한 때 혁명을 위해서라면 무장폭동도 불사할 것처럼 떠들던 자들이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법을 어긴게 있냐고? 지금의 법은 너희들이 혁명을 이야기할 때와 뭐가 달라졌는가?
달라진 건 저들이 이제 잃을 것이 많아졌다는 거다. 교수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판검사가 되고, 어쨌든 뭔가 사는데 불편함이 없고. 이런 자들에게 혁명까진 바라지도 않는다만, 과거의 그 반짝거렸던 꿈과 희망, 그런 건 어디로 가고,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았던 구조의 일원으로 정착하면서 그 구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나서는 모습은 언제 봐도 볼썽 사납다. 그들은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가 법을 어겼냐? 뭘 잘못했는데? 하... 그 말 하는 입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대의를 말하는 것은 나 역시도 모양새 빠지는 짓인줄 잘 안다. 게다가 그 빌어먹을 대의는 어디 짱박혀 있기에 나를 이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코빼기도 뵈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서 대의 따위 그냥 묻어두기로 한다. 하지만, 대의는 고사하더라도 돈 가졌다고 유세 떨고 지위 좀 있다고 주접 떠는 그런 걸 용인하는 세상이 아닌 세상을 꿈꾸는 건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다. 그거마저 포기하면 난 지난 반생을 허공에 날린 게 된다. 이건 마치 기독교 신자들에게 예수가 부활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과 같은 거다. 그게 되겠냐고...
그래서 시간도 남아 돌고 하니, 지금 한 자리 하면서, 과거의 대의 따윈 까맣게 잊어버린 채 돈 가졌다고 유세 떨고 지위를 이용해 힘을 과시하는 자들이 떠벌리고 있는 말들을 다 주워담아보려 한다. 반면교사 하기에 이 정도로 훌륭한 교재가 없을 듯하다. 정권 바뀌면 또 같은 입으로 뭔 소리를 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