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천익과 노회찬을 잊지 않기로 하였다
앞서 간 자들에 대한 추모는 어쩌면 기껏해야 산자들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를 매개로 산자들의 자세를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거개의 장삼이사들은 대개 기일에 맞춰 살아 있는 이들의 안부를 집단적으로 확인하고 모처럼 격조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추억을 안주삼아 술 한 잔 하기 좋은 날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덕담인지 자위인지 모를 말로, 흔히들 저승의 삶에 대해 문의를 한다거나 - “그곳에서는 잘 계시는지?”, “아무개와 만나 행복한지?” - 떠난 이의 평안을 기원하는 - “이젠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이젠 그곳에서 더 아프지 마세요.” - 따위의 인사로 떠난 이들에게 말을 건다.
당연하게도, 유물론자에게 이러한 말들은 살아 있는 자들의 독백일 뿐 먼저 간 사람과는 하등의 인과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말들이다. 이승과 저승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말이 전파처럼 저승까지 도달하여 저들에게 수신되어 저들을 흐뭇하게 한다는 걸 증명할 방도는 없다. 그럼에도 먼저 간 이를 추모하는 건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들의 족적을 돌이키며, 옷깃을 여미고 스스로를 성찰할 계기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비록 먼저 간 사람에 대한 회상이 온갖 연민과 회한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 모른다고 해도,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각성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2018년 한 해 동안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이어졌다. 구구절절이 다 꺼내긴 민망하니 대충 그랬다고 퉁치고 넘어가겠지만, 몸도 마음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주변의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었었다. 그 와중에 더욱 힘들었던 건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본인상이 겹치기로 이어졌다는 거. 좋은 일은 오기 어렵고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더니 내겐 작년이 딱 그랬다. 그렇게 줄줄이 안 좋은 일들이 연이어지는 중에 멘탈을 완전히 붕괴시킨 건 장천익 선배와 노회찬 전 의원의 부고였다. 한 달 간격으로 두 사람이 떠났다. 그리고 내 정신도 내 몸을 빠져 나갔다.
장천익. 진보정당운동에 모든 것을 다 걸었던 사람이다. 명예도 이름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자기 할 일 하면서 신명을 다 바쳐 진보정당운동의 거름이 되기를 자처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돈을 마련했고, 몸으로 부딪쳐야 할 때면 몸을 던졌다. 그의 장례식은 어떤 유명짜한 사람들의 장례식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애초 그는 그런 삶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달 전에, 그의 1주기를 맞아 찾았던 추모관에서 그는 여전히 단촐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노회찬. 역시 진보정당운동에 모든 것을 다 걸었던 사람이다. 간난신고를 거쳐 건설한 민주노동당을 통해 제도권 정치인으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다른 많은 진보정치인과 그가 현격하게 구분되는 지점은, 당시 대다수 진보정치인을 민주노동당이 만들었다면, 그는 바로 민주노동당을 만든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장점 중에 한 백만분의 1정도를 발휘했다고 보던 시점에서 그는 유명을 달리했다. 부박한 진보정치판에서 고군분투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지막은 다른 어떤 기성정치인보다도 많은 대중들의 슬픔 속에서 치러졌다.
두 사람은 내겐 너무나 값진 사람들이었고,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천익 형님은 내게 무한의 신뢰를 보내준 분이었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누구에게 무한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있었다는 것은 내 생에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깨손’의 좌장이었고, 분노와 사랑으로 세상이 좀 더 좋아지기를 바랐으며, 그래서 모든 걸 다 갈아 넣었던 그였기에, 그가 임종한 후 추모관에 안치할 때 집에 돈이 없어 난처해하던 형수와 자제들을 보게 된 건 너무나 아픈 기억이 되었다. 나는 그와 진보정당운동을 하면서 같이 웃고 같이 울던 일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회찬 선배는 진보정당 운동의 결정적 고비에서 애증이 교차하는 일들이 있었다. X파일 사건 때, 나는 의원실에 파일 공개를 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최고위원회에서도 같은 취지로 브리핑을 했었지만, 그는 결단했다. 민주노동당 분당 후 진보신당 2기 대표단 선거에 단독 출마한 그에게 팬클럽 관리차원의 정치를 종식해줄 것을 우회적으로 부탁했지만 별반 반응이 없었고, 이후 통합한다고 당을 떠난 그에게 많은 원망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 뛰어난 두뇌와 판단력과 기획력, 거기에 조직력과 실천력을 두루 겸비한 정치인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난 후 1년은, 물론 그들의 탓이 아니었지만, 내겐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다. 이제 서서히 제 컨디션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1년이 지난 지금, 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곱씹게 된다. 진보정당운동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수한 장천익들을 만났다.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고, 개인적인 영달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신념과 이상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 민중을 대변할 국회의원 한 번 만들어보자는 희망으로 뭉쳐 진보정당을 구성했고 거기서 출발해 많은 진보정치인들을 배출했다. 승리의 기쁨도 있었고, 배신감에 허덕이던 회한의 나날도 있었지만, 그 수많은 장천익들 덕분에 비록 많지는 않지만 진보정치에서 여러 명의 노회찬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진보신당의 창당, 통합논쟁과 결집논쟁의 과정에서 입합집산 등이 벌어질 때마다, 어떤 이들은 ‘명망가 정치의 폐단’을 운운하면서 유력 진보정치인들을 비난했다. 천익 형님 또한 사람인지라 원망의 마음이 있었지만, 형님하고 나하고 통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원망은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명망가를 만들어내는 정치활동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수많은 장천익들이 노력해서 몇몇의 노회찬들을 만들어냈을 때, 그 노회찬들 중 일부가 떠나가거나 혹은 죄다 떠나가더라도, 다시 그 노회찬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중단한다면 진보정당운동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난 뭐 더 이상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자 말을 잇거나 하진 않으련다. 대신, 장천익과 노회찬에게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들이 내게 주었던 것은 물론 장천익이 노회찬에게, 노회찬이 장천익에게 준 것을 잊지 않고자 한다. 내 방식의 추모다. 다만, 나는 더 이상 죽은 이들에게 편히 쉬라거나 거기 가서 보자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그들과 내가 더 이상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 않음을 선언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