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묵은 앙금 털기가 쉽지는 않겠으나
트-김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언론은 시시각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점심나절 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아보였다. 유튜브 채널을 돌리며 이방송 저방송 들어봐도 한결같이 기대하던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정상간 합의문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고, 그 내용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한계를 가질 것인가, 한국의 입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향후 방향은 무엇인가 등등 디테일한 부분에 대하여 설왕설래가 오고가고 있었다.
마침 내가 소속한 학회에서도 정상회담이 끝난 후 최소한 종전선언이 나올 때 입장문이라도 내야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과분하게도 초안을 작성하는 소임을 맡게 되었다. 기실 남북문제나 북미문제에 대해 입장을 기초할만큼 전문성을 가지지 못한 처지에 적잖이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기왕에 바라마지않던 종전이 선언되었음을 축하고, 향후 과제, 특히 제도적 측면에서 필요한 사항 등을 주제 열거하는 방식 수준에서 하는 것은 어찌어찌 해볼만 하다 싶었다. 그래서 뉴스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데.
좋지 않은 분위기가 돌더니 회담이 깨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찢어졌고, 트럼프는 혼자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장에서 트럼프는 판이 완전히 나가리가 된 건 아니라 앞으로도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내용인 즉슨, 북미의 이해관계는 조정되지 못했고 애초에 면밀한 프로세스를 설계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던 협상과정의 한계가 결국 폭발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요컨대 한 쪽은 마음이 없었고, 한 쪽은 마음이 앞섰다. 어쨌거나 학회에서 입장을 내기로 한 것 역시 철회되었다.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서는 부담을 덜었으나 입맛이 개운칠 않고 영 답답하다.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의미, 향후 전개에 관한 예측은 이후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하지만 회담결렬을 보는 순간 트럼프에게 과도하게 기대 남북문제에 접근하던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상당한 혼선이 있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며칠 전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하여 한국 외교부가 과이도를 지지한다는 공식성명을 낸 것이나, 오늘 확인했지만 청와대가 내부 인선을 하면서 국가안보실 2차장에 김종현을 임명한 것이나,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한국 정부가 트럼프의 심기안녕을 위하여 무진 애를 쓰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소기 목적한 바를 달성할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이런 식으로 했어야 할 일인지 의문이다.
트럼프가 국내적으로 매우 불리한 정치적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 러시아 스캔들이 발목을 잡고 있고 멕시코 장벽설치를 위해 선포한 국가비상사태는 의회에서 무산되었다. 그 외에도 성추문을 비롯한 각종 개인적인 과거의 일들이 발목을 잡고 있다. 이란과의 핵협상 폐기, 이스라엘 대사관 이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의 격화, 베네수엘라 내정간섭 문제 등으로 외교적으로도 자승자박의 건들이 쌓여 이를 해소하기가 만만칠 않다. 당장에 청문회 이후 정치공세를 감당하기도 힘들 뿐더러 조만간 있을 대선에서 재선의 가능성이 높지도 않다.
이러다보니 남북 문제에 접근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 북쪽에 대하여 그나마 자기 업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트럼프가 재임하는 동안 북미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남북관계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를 통해 획기적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척을 가져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외교정책 전반을 질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태도가 일이 잘 진행될 때라면 그나마 큰 무리 없이 결과를 낳을 수 있겠으나, 이번처럼 예상치 못한 삑사리가 나는 경우에는 향후 커다란 부담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1950년 남북의 전쟁은 아직도 그 상흔이 온전히 남아있다. 무려 69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이걸 하루 아침에 없앨 수는 없다. 물론 하루 속히 해소된다면 그것만큼 바람직하지 않은 게 없겠으나 조바심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트럼프는 비행기 타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후 어떤 행보를 할지는 또 두고 봐야 할 것이지만,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판이 될 수도 있다. 김정은이 대놓고 도발을 하지는 않겠지만 경색된 국면을 헤쳐나가기 위한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이 이를 제공하기엔 아직은 벽이 크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 정부는 트럼프에게 몰빵해서 트럼프 재임 중 한 큐에 남북문제를 해결해보고자하는 태도는 수정되어야 한다. 뾰족한 수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지금은 더 많은 국제사회의 힘을 끌어모으는 노력을 진행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트럼프만이 아니라 기성 미국의 정치세력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현종을 저기다가 갖다 꽂는 걸 보면 이 정부가 태도를 바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갑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