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붕어론
조선 숙종 연간에 사대문 안 고관대작들의 집에 벽보가 붙어 조정을 뒤집어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들이 모두 죽기까지 너희들의 배에 칼을 꽂으리라.” 벽보의 선언은 단지 엄포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양반의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탈취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을 주도한 자들은 “살주계(殺主契)”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주인’을 죽이기 위한 모임인 것이다. 신분계급이 공고화된 사회에서 개·돼지 취급을 받던 노비 등이 이 모임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주종관계에 얽매인 채 착취당하던 계급이 양반계급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으로 이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을 터다. 황석영은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이 살주계라는 비밀결사의 일단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바가 있다.
살주계가 원한 건 계급 없는 사회였으리라.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 만인이 고루 평등한 사회. 그런 사회에선 죽임을 당할 주인도 없고, 살인을 저지를 노비도 없을 것이다. 미륵불이 현신한 후에 오게 될 지상극락의 세계는 인류의 영원한 꿈이지만 영원히 꿈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꿈이 인간의 것이라면, 착취당하고 천대받는 인간들은 여전히 꿈을 위해 일어서고 싸울 것이다. 그 격렬한 피의 투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다 같이 그 꿈을 꾸고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일 터이다.
그런데 최근, 교육부 고위관료가 “국민 개·돼지” 발언을 하면서 온 나라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어떤 이들은 농반진반으로 해당 관료가 지나치게 솔직했던 게 화근이 아니었느냐는 이야기도 한다. 천기누설을 너무 직설적으로 했던 거 아니냐는 거다.
하지만 청와대 쥔장이 “친애하는 국민여러분”이라는 말을 던질 때, “국민”을 “개·돼지”로 바꿔도 아무 이상이 없을 정도로, 이 땅의 날고 긴다는 자들은 이미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헬조선’의 위명이 하늘을 뚫고 있는데도 위정자들이 이 지경으로 세상만사를 개판·돼지판으로 팽개쳐둘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는 자가 자신의 비리에 대한 감찰에 반발하면서 “주말 지나면 잠잠해질 텐데 왜 사건을 키우나?”라는 소리를 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위사실은 날이 갈수록 그 심도가 고약해져서 일일이 짚어보기가 수치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이번 그의 발언은 기실 저 교육부 관료의 “국민 개·돼지”론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국민 붕어”론이다. 붕어 같은 국민들은 아무리 큰 일이 터져도 며칠 지나면 잊게 마련이라는 오만방자함이 절절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의외로 우병우 민정수석의 발언은 교육부 고위관료의 발언정도로 비화되지 않았다. “개·돼지”라는 직설적 표현에는 분노한 대중이지만, 대중을 붕어수준으로 취급한 민정수석의 발언에는 그토록 격렬한 반발을 하지 않았다. 주말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는 저 태도에 대중은 역시 분노했지만, 교육부 관료의 발언만큼의 반응은 없었다. 그 결과, 교육부 관료는 파면되었지만 우병우는 여전히 건재하다.
고위층이 이따위 발언을 공공연히 내뱉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신분제 사회가 된 듯 하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헌법 제11조 제2항의 선언은 쓰레기가 되었고,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한 헌법 제1조 제1항은 코메디가 되었다. ‘헬조선’이라는 자조는 어쩌면 이렇게 신분제가 고착된 이 사회에서 발버둥치고 악을 써봐야 쓸 데 없는 것이라는 자포자기인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살주계의 꿈이 미륵세상이었다면, 헌법으로 선언한 우리의 꿈은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공화국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정치인, 관료, 재벌에 의해 민중이 노비만도 못한 개·돼지취급, 붕어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21세기판 “살주계”가 만들어지는 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