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글을 안 쓴다고??
발등에 떨어진 불땜시 정신머리가 어디로 가출했는지도 모를 상황이라 간만에 학교에서 밤샘을 하던 중, 불난 마빡을 진정이라도 시킬 요량으로 웹 서핑을 감행하다가 재밌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참세상 기사다. 노무현의 정신착란적 좌충우돌이 한미 FTA를 둘러싼 정치권 공방을 가속시키는 현상을 가져왔다는 분석이다. 아니 공방이라기 보다는 교통정리라고나 할까? 제정신 못차리던 민주당이 노무현의 말 한마디에 입장정리를 완료하고, 중구난방 떠들던 한나라당은 졸지에 초딩으로 전락했다, 뭐 이런 분석이다.
냉정한 입장에서 평가해보자면, 좌파신자유주의자의 들쑥날쑥 개념상실 일기 몇 편에 정치권이 요동을 치는 이 현상이 실로 비정상이다. 열우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뉴레프트 운운하는 안희정의 말장난이 당내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수준의 민주당, 실용을 목놓아 부르짖지만 도대체 그놈의 실용이는 작년 연말 이래 종무소식인 한나라당. 노는 물이 이정도니 노무현 몇 마디에 부산을 떨고 입방정을 떠는 거다. 그래서 저 기사의 분석과는 별개로 행인은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고 딱 노무현의 말장난에 놀아날 정도의 수준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솔직히 말해 이런 인간들이 정치한다고 앉아 있는 이 현실이 암울하기만 하고.
기사의 전반부 내용에 대해선 별로 코멘트할 것이 없다. 단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니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뿐이다. 그런데 행인의 눈길을 끈 건 기사의 말미까지 마우스 휠을 긁었을 때 나타난다.
먼저 간단히 언급할 것은 심상정이 각 언론사에 올린 '노무현 전대통령의 결자해지를 촉구합니다'라는 글에 대한 기자의 극찬이다. 기자는 "운동의 지휘부라면 적시적때에 이 정도 감각을 담은 글을 쓰고 배포할 줄 알아야 한다"며 심상정의 글을 상찬한다. 근데 '적시적때'는 뭐여? 동어반복인데... 기자가 창안한 용언가? 암튼.
행인이 보기에 심상정의 글은 상당히 조근조근하게 노무현의 구라를 반박한다. 하지만 그 글은 "운동의 지휘부"답게 씌여지진 않았다. 일단 졸라 길다. 노무현의 글 두 개를 다 합쳐도 그 분량에 훨씬 못미친다. 그리고 수많은 쟁점을 이야기하지만 각 쟁점은 쟁점별로 읽을 거리는 되도 전체적으로 콕 찝어서 노무현의 글처럼 뭔가 하나 머리속에 틀어박히는 중심이 없다. 걍 끝장토론 한 번 하자는 정도?
바로 이와 관련해서 기자가 질문하는 바, "좌파는 왜 글을 안 쓸까?"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나온다. 기자는 꽤 많은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질문을 던진다.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모임의 양규헌 대표, 이경수 부대표, 이종회 집행위원장은, 노동자진보정당건설전국추진위 양경규, 장혜옥, 전재환 대표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오세철 운영위원장은, 등등등은 왜 글을 안 쓰는 걸까"
행인이 이 질문에 답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행인은 기자가 거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명된 사람들의 면면을 볼 때 행인은 기자의 기준에 따라 "좌파"로 분류될 것 같지도 않다. 뭐 그래서 서운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행인이야 잡파로 충분하니까. 행인은 다만 저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이랬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램을 좀 이야기하려는 것 뿐이다.
사실 저 사람들의 글을 보고싶다는 바램은 언제 어디서고 이루어질 수 있다. 이번 한미 FTA와 관련한 상황에서 바로 그 주제로 저 사람들이 글을 안 썼다 뿐이지 그동안 저분들 많은 말을 해왔다. 그런데 가끔씩 저분들의 글을 읽어봤던 행인의 입장에서 저분들이 또 어떤 훌륭한 글을 써서 발표한다고 해도 그닥 보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
심상정의 글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이건 정치인의 글이라기보다는 무슨 연구원의 글같다. 전문적인 것은 좋은데 각론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총론으로서 아젠다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심상정의 글을 읽다보면 "아 씨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작 글을 다 읽고 나면 "절라 길다"라는 생각 외에 딱히 인상에 남는 것이 없다. 이게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숨가쁘게 불러젖혔던 좌파인사들의 이야기와 노무현의 구라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차이다.
노빠들의 입장에서는 노무현의 두 글이 예배당 신도들에게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지는 것과 같은 복음의 충격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얘네들보다는 이성적인 행인의 입장에서는 걍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수준의 글이었다. 그런데 왜 심상정의 글과는 달리 노무현의 글은 화장실에서 깊은 신음을 할 때나 세상모르고 뒤비 자다가 해가 똥구멍까지 비친 연후에 눈비비고 일어났을 때도 쉽게 기억이 날까?
노무현의 글에서 어떤 전문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닥 쉬운 일이 아니다. 행인이 발견한 노무현의 전문성은 전두환 청문회하다가 빈 자리에 명패를 집어던졌던 경력의 소유자 답게 국회 안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의원들끼리 이종격투기를 하게 되는가를 소상하게 밝힌 것 뿐이다. 한미 FTA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무현은 그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언술이 더 정확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난다. 새록새록.
다음으로,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되 기자가 언급한 좌파들은 대중들의 접근이 쉬운 경로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글로 실어 펴는 넘들이 별로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빌게이츠가 인터넷 익스플로어를 만든 이유는 누구나 그걸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데 편케하고자 함이었는데, 아, 빌게이츠는 돈벌려고 했구나, 암튼 그런데 배울만큼 배우시고 뛸만큼 뛰신 남한의 좌파들은 어째 이런 경로를 이용하는데 그리도 인색한지 모를 일이다.
예컨대 심상정은 자신의 글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레디앙에 동시에 실었다. 하긴 뭐 세 매체 다 합쳐봐야 '민주주의 2.0'과 서프라이즈를 비롯해 온갖 곳으로 다 실려가고, 그것도 모자라 언론이란 언론이 다 받아 한마디씩 덧붙여준 노무현의 글과는 파급력에서 잽이 되지 않지만. 여기서 문제는 소위 좌파들의 이야기를 누구나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좌파들이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거다.
맨날 보느니 토론회 발제문이고 조직내 문건이고 기껏해야 인터넷 언론사 기고문이나 인터뷰가 고작이다. 그런데 뭔 말은 그렇게 어렵게 써대는지 걸핏하면 각주가 달려있고, 각주를 봐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고, 기껏 좀 이해할라 싶으면 아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기자가 질문하는 바, "좌파는 왜 글을 안 쓸까"가 이번 한미 FTA 관련 노무현의 스탠딩 코메디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좌파 구찌들이 평소에도 글을 안 썼냐하면 그건 아니라고 본다. 글 많이도 써 제꼈다.
정리하자면, 그렇게 글들을 많이 내고 말도 많이 했는데 가독성은 떨어지지, 단어는 소비에트 혁명기 용어를 그냥 써, 그 주제에 글은 절라 길어, 주저리 주저리 하고 싶은 말은 왜 그리도 많으며, 대중들을 교양하려는 냄세는 퍽퍽 풍기면서 정작 대중들이 볼만한 곳에는 비치를 하지 않는 터라 이게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질 않는 거다.
최고급 재료로 토핑을 하고 동서양의 맛을 조화시키느라 스위스치즈에 돌산 갓김치까지 온갖 재료를 다 섞어 놓았는데, 정작 보니 이게 빈대떡인지 피잔지 구분도 안 되는 데다가 먹을 때는 반드시 메뉴얼에 따라 먹어야 하고 그마저도 어디서 파는지 알 수 없는데 장사가 되냐고...
근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내 글은 왜 자꾸 길어지는 거여? 썅...
행인의 [좌파가 글을 안 쓴다고??] 에 관련된 글. 지난 번 위에 트랙백 보낸 글에서, 워낙 중언부언 하다보니 놓친 것이 있는데, 마침 EM님께서 내방하시어 행인이 뭘 제꼈는지 생각나게 해주셨더랬다. 암튼 그 글에서 원래 하려 했던 말은 쉽게 이야기해 "지 자리에 맞는 글쓰기"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격문을 써야 할 사람이 논문을 쓰고 앉았고, 욕설을 올려야 할 사람이 달래는 글이나 올리고 있으면 보는 이들조차 슬슬 지겨워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