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보술까?
칸나일파님의 [보수는 늘 날로 먹는다] 에 관련된 글.
앤드 그라고 지난 번 올렸던 [요즘보수]와도 쬐까 관련이 있는 글.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다. 몸에 밴다는 거, 이거 어려운 거지만 한 번 배면 빼기가 힘들다. 신새벽에 후다닥 잠이 깬 건 근래 몸에 밴 습관 때문이다. 유로 2008 경기를 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눈이 급 초롱초롱해지면서 유러피안의 라이프스타일로 돌변하는 것. 이 새벽은 경기도 없는데, 그래서 낮동안 몸을 혹사시킨 후 12시에 잠이 들었는데, 그만 어김없이 고시간이 되자 사지육신에 피가 팽글팽글 돌아가면서 뇌 신경부터 발가락 끝 말초신경까지 긴장감이 팍 도는 것이... 새벽잠 없는 건 나이탓이 아니다. 4년을 기다리며 신경썼던 습관 때문인 거다.
새벽에 일어나 책도 뒤적거리다가 윗몸일으키기도 하다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심심하던 차에 간만에 이너뉏을 뒤적거리다가 묘한 걸 발견했다. 한나라당 OK여사가 자기 홈페이지에 뭐라고 글질을 해놨다길래 시간 땜빵이나 할라고 들여다 봤더니 가관이다. "철 없는 야당에 화가 난다"고 절절히 심경을 토로한다. 등원거부하고 있는 야당이 하루 속히 원내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갈구하는 OK여사의 글을 보며 일단 피식 웃다가 눈치챈 것은 이들에게 묘한 습관이 있다는 거다. 입장에 따라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원칙.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모 시인이, 나도 참 좋아하는 시인인데, 이 시인은 애인 만나러 나가다가 사고사 당했단다. 몇 년 전에 이 시인이 애인과 나누었던 연서를 공개하니 마니 하는 것때문에 상당한 논란이 있었더랬다. 논란이 된 이유는 이 시인이 유부남이었다는 거. 그리고 그 애인이 당연하게도 혼인신고서에 함께 기록된 배우자가 아니었다는 거. 행인의 호불호를 떠나 이 시인은 사회상규상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 강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그러나 그의 예술성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이 시인과 애인의 관계를 '로맨스'로 포장한다. 이 시인의 가족들이 가지는 또다른 심정과는 별개로.
이 사회에는 이런 현상이 무수히 존재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예술가가 하면 로맨스, 장삼이사가 하면 불륜. 정치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등원 거부를 해도 지가 하면 로맨스, 타 정당이 하면 불륜. 한나라당이 하면 구국의 결단, 열린민주당이 하면 불륜. 물론 몇 년 전에는 그 반대현상이 있었고. 전과가 몇 십범이 되더라도 대통령이 되면 성공신화가 되고. 뉘미...
"촛불의 배후"를 밝히라고 국무위원들을 닥달했던 이명박이 "프로판 가스통의 배후"를 밝히라고 어청수 귓때기를 잡아당기는 일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촛불 값은 누가 댔나?"를 궁금해하던 이명박이 HID 베테랑들에 의해 시청앞 광장에 깔렸던 "베니어판 값을 누가 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외교통상의 "달인"이라고 자임했던 김종훈은 벼랑끝 외교술을 펴가며 도대체 뭘 얻어냈다는 건지 설득을 하지 못한다. "벼랑끝 외교"는 북조선 장군님 일가의 전매특허인데 이거 남한의 공무원이 가져다 써먹어도 되나? 어째 조선일보가 가만 있는지 모르겠다.
습관이란 건 무서운 거다. 얘네들의 습관은 한 개인에게 국한된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이런 집단적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는 악습의 전형을 OK여사가 그대로 보여준다. 박근혜의 영도에 따라 국가보안법 철폐 반대와 사학법 개정 반대를 내걸며 국회 등원을 거부한 채 거리로 싸돌아 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당연히 OK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그이는 왜 그따위 "철없는" 짓을 했을까나? 철딱서니 없이... 입장에 따라 똑같은 일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행동을 하는 이 습관. 문제는 이런 습관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는 "보수"라 불리운다는 점이다.
진보, 보수를 나누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특히 보수에게 필요한 덕목은 초지일관이라는 거다. 당연한 일이다. "보수(保守)" 하려면 한 번 세운 깃발, 지 몸뚱이 부서지기 전까진 붙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게 기본자세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극동아시아 한 구석 남한 땅 일대에 도사리고 앉아 보수질 해먹고 있는 인간들 보면 초지일관은 개뿔, 완전 변화무쌍이다. 오랑캐 들어오면 변발에, 왜놈 들어오면 창씨개명에, 로스케 들어오면 까삐탄 노릇에 양키들어오면 성조기 펄럭거리고... 이게 남한 보수의 진면목이다.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다.
구한말 일본의 조선병탄 과정에서 아편을 다량 음독하고 자결한 매천 황현은 그의 절명시에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다(亂作人間識字人)"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단지 인(仁)을 이룰 뿐 충(忠)은 아니다(只是成仁不是忠)"라며 자신이 배우고 익히며, 살아오면서 삶의 지향이 되었던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함이 자결의 이유라고 밝힌다. 적어도 "보수"라고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견지하려면 이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만 생각해보면 '초지일관'이라는 점에서 현재 남한 "보수"들의 하는 짓은 "보수" 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초지일관하게 지들 편한 대로 끼워맞추고 있으니까. 어제는 불륜이었을지언정 사정 변한 오늘은 로맨스라고 강변하면서. 매천 황현의 그 드높은 보수주의자의 기개는 온데 간데 없고, 조중동으로 민심을 읽고 부시의 사주를 받아 촛불의 배후나 캐고 다니는 덜떨어진 것들이 보수질을 한다. "영등포구민"을 "사랑"씩이나 한다는 OK여사는 지난 총선에서 영등포역 일대의 노숙자들을 정리하겠다는 용감한 발언까지 한 바가 있다. 이분의 사랑은 주민등록등본의 주소지에 여부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훌륭한 사랑이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한국사회의 언론들은 단어 사용을 좀 더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맞불'집회 한다고 가스통 들고 돌아다니는 어르신들. 이분들 집회한 내용을 기사로 쓰면서 흔히 우리 언론들이 "보수단체, 맞불집회" 뭐 이런 식으로 카피를 뽑던데, 사실 그분들이 무슨 보수단체씩이나 하고 계시겠나? 기껏 해야 관변단체지. 노인정 장기판 판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오신 그분들께 괜히 "보수"라는 무거운 책임을 언론이 심어줄 일이 아닐 듯 하다. 쉑쉬한 카피를 뽑아야 장사를 할 수 있는 언론사의 입장에서 "보수 vs 진보"라는 대결구도를 깔쌈하게 만들어놓는 것이 마케팅의 기본일지 모르겠으나, 장사에도 상도의가 있는 거다. 오죽하면 기존의 보수와는 다르다고 쌩 구라를 치면서 "뉴라이트"라고 명함뽑아 다니는 떨거지들까지 생기겠나? 이게 다 언론의 역할이 제대로 안 되서 그런 거다. 조중동만 탓할 것이 아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인터넷 언론도 죄다 "보수단체"란 말을 걍 갖다 쓰더만...
아, 글구. 거 촛불집회에 태극기는 도대체 왜 계속 가지고 나오는 걸까? 사실은 지금 촛불집회하는 사람들이 이 땅을 건전하게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는 보수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크게 소리쳐 줄 수 있는데... 보수 만세!! 이렇게 말야...
요즘 행인님의 글은 쉽고 재미있어 자주 끝까지 읽어요~^^(그럼 예전글은??^^;;)
행인부활 만세!!! ㅎ
존/ ㅎㅎ 감사합니다.(예전글은 걍 잊어버리셈. ㅠㅠ)
산오리/ 뭔지 모르지만 만세~~!! 건강하시죠?
초지일관....요즘 보수는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없어요-_-
그러게 이 땅에 제대로 된 보수가 있기나 한지...너무 급이 떨어지고 유치하고 후져요...그래서 자꾸 한국이 싫어지나봐요...
유이/ '보수' 값떨어진지 넘 오래라서요. ㅡ.ㅡ;;;
칸나일파/ 강호제현 중에 제대로 된 보수가 없겠습니까만은 제가 보수라도 이 상황에서 "나 보수야"하고 나서기 싫을 겁니다. 저 수구꼴통들이 보수라고 가만 두겠습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