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선언?
행인의 [군바리여~! 촛불을 들라~!!] 에 그럭저럭 관련된 글.
1. 역사의 아이러니
세상만사를 잊고 초야에 묻혀 자빠져 쉬기로 결심한 행인의 눈과 귀에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의 모습이 전해져 온다. 사태파악을 하지 못한 2mB는 박근혜 일파의 복당을 빌미로 정치적 성동격서전법을 사용해보려 했으나, 그건 아무나 하나? 적어도 YS정도 개뻥의 달인들이나 가능한 일을 땅박스타일의 2mB가 사용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 게다가 박근혜가 그리 녹녹한 인물이었던가 말이다.
브루투스에게 한칼 맞고 자빠지던 시저가 "브루투스, 너마저"하면서 배반의 칼날을 날린 자신의 양자를 원망하는 순간, 시저의 머리 위에서는 자신으로 인해 사망한 정적 폼페이우스의 두상이 시저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 물경 2000년이 넘는 과거에 벌어진 역사의 아이러니만큼이나 현실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도 드라마틱하긴 매한가지다.
서울시장 2mB의 치적이라 자찬되고 있는 버스 준공영제, 대중교통 환승제를 이용해 아무리 멀어봐야 2000원이 되지 않는 비용을 들여, 2mB가 심혈을 기울여 완공한 명박천, 일명 청계천의 시민광장으로 몰려들어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들. 2mB가 청와대로 가는 길을 위해 다졌던 소중한 자산들 위에서 시민들은 2mB 리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조중동을 보면서 민의를 읽어왔던 2mB, 조중동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청계천의 민의를 보면서, "아, 쉬파... 저거 저러라고 만들어놓은 곳이 아닌데..."하며 한탄하고 있지는 않을까?
2. 생활정치?!
이번 촛불집회에 대한 행인의 관심은 사실 '광우병 미국산 소'가 아니다.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일군의 집단들. 바로 중고생이다. 오로지 대학가는 기계로 길러져왔던 그들이 교복자락을 흩날리며 청계천으로 달려가 손에 손에 피켓과 촛불을 들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천지개벽'하는 수준의 사건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가 지난 일주일간의 화두였다. 화두란 것이 한 순간 깨침으로 다가올진데, 그게 그리 쉽게 오는 거라면 60억 인류가 이미 성불했겠다만, 역시나 그 화두의 진의는 아직 파악되지 않는다. 오도견성의 경지는 그래서 머나먼 저쪽의 이야기다. 암튼 머리를 싸매고 그 의미를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이런 저런 글도 보고 기사도 보고 뉴스도 보곤 하지만, 그닥 충분하진 않다. 그 와중에 오늘 이런 기사를 보았다.
- [홍성태의 '세상 읽기'] 광우병 공포와 생활정치의 만개
홍성태교수는 이번 사태를 '생활정치'가 전면화된 최초의 사건이라고 선언한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주제에 대해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옳음'을 위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바로 '생활정치'의 실천이라는 취지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번 청소년들의 전면투쟁을 '생활정치'라고 해야할지도 의문이지만, 그 '최초'라는 수식어가 과연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던 4.19는 그럼 '생활정치'하고는 다른 이야길까? 홍성태교수가 그토록 놀라워했던 2002년 붉은 악마들은 정치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걸까? 홍성태 교수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발바닥에 땀나게 참여했던 탄핵반대집회의 그 수많은 인파들은 '생활정치'하고는 뭔가 다른 정치를 위해 뛴 걸까?
이건 뭔가 '생활정치' 어쩌구 하는 논리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류의 세련된 사회과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이 현상의 진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이야기를 하자니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그런 종류. 그런 차원에서 홍성태교수의 글은 걍 언론의 속성에 부합하는 적절한 오바질 정도로 비추어질 뿐이다.
3. 인간선언!
'생활정치' 같은 폼나는 수식어보다는 오히려 이번 사건은 한국의 청소년들이 드디어 스스로를 '인간'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사건이 아닌가 하는 거다. 적어도 1970년대 개발독재 이후 형성된 청소년의 인격표본, 즉 대학지향형 공부기계로서의 청소년이라는 기준이 와해되기 시작하는 징조가 아닐까 하는 거다.
70년대 고등어들의 희비와 애환을 그린 영화시리즈, '얄개' 시리즈를 기억하는 분이 있다면, 스크린 안에서 검은 교복을 입고 약간은 허접한 코메디와 우수를 함께 보여줬던 고등학생들이 지향하는 것이 뭔지를 회상할 수 있을 거다.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적절히 조응할 줄 아는 '착한' 학생들. 그게 '얄개' 시리즈의 교훈이었다. 이미 그 당시부터 정권과 '부모세대'는 고등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 아직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차세대 인공지능 정도로 생각해왔다.
그렇게 자리잡은 청소년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우리의 중고생들은 '보호'만 받으면서 '공부'만 해야하는 참으로 이상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말할 수 있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인격체'로서 한 인간이 아니라 어른말 듣고 공부 잘해서 대학을 가야하는, 컨베이어밸트 위에 올려진 조립품 같은 위치가 되어버린 거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게 자녀 또는 학생들을 위한 길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고.
이렇게 한 세대를 경유하면서 공고하게 구축된 청소년에 대한 인식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하는 대사가 있었다. 그 장면에서, 행인 내심, 오호, 이건 뭔가 좀 다를 듯 한데, 하는 생각을 했으나 왠걸, 결론에서는 역시 그 대사의 주인공이 재수학원을 다닌다. 시대는 이소룡의 시대를 넘어 성룡의 시대로 접어들었건만, 대학을 가야하는 사회적 시스템은 더욱 체계화되어갔고, 그 와중에서 주인공은 다른 넘들은 학교 잘 다녀서 금방 갈 대학을, 괜히 사고치고 개기느라 재수해서 가야하는 덜떨어진 인생이 되어버린다.
결국 한국의 청소년이 '청소년'이라는 번데기를 벗고 '인간'으로 변태하기 위해서는 일단 뭐가 되었든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하는 것이고, 보다 적절한 '인간'이 되기 위해선 대학을 가야하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었다. 그 와중에, 인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었던 청소년들은 새벽별보기 운동을 시작으로 천리마 행군하듯 책을 파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잠깐 집에 다녀오는 존재가 되었다. 이게 사람 할 짓이란 말인가...
이번 촛불집회 와중에 청소년들의 인터뷰 장면을 몇 차례 봤는데, 인상에 남는 거 몇 가지.
밤 10시가 넘어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청소년에게 집에 너무 늦게 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 청소년 왈, "학원은 12시에 끝나요. ^^"(되려 일찍 간다는 이야기겠지...)
"국민은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구요, 학생도 국민이거든요. 그러니까 학생도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는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아직 20년도 못살았는데, 앞으로 20년 동안 머리에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요?"
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아, 얘들이 애들이 아니라 다 컸구나, 혹은 아, 이 애들도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어떤 '어른'이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좀 착잡하더라. 지켜주러 가지 말고 차라리 청소년들에게 '니들이 우릴 좀 지켜줘' 하면서 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나이차이를 생각지 말고 말이다.
4. 인간선언?
그런데,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소를 수입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어디로 발전할 수 있을까? 예컨대 이 친구들이 "입시철폐!" 이런 걸 외치는 쪽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17세 선거권!" 이런 거 주장할 수 있을까?
집회장에 등장한 피켓을 보면, 몰입교육에 대한 비판도 있고 2mB 퇴장 구호도 있다. 입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여타 청소년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듯 하다. 물론 이런 현상을 두고 교육감이라는 작자들이 모여 앉아 전교조가 배후세력이라는 등의 2mB적 발언들을 하고 있나보더라. 개념은 도대체 어디다 파묻어 두고, 저런 인류들이 교육을 운운하고 있다니...
그런데 언론은 촛불집회에서 나오는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거의 비추지 않고 오직 광우병 미국소 수입 반대에만 촛점을 맞춰 보도한다. 언론에게는 교복 입고 등장한 수많은 청소년들이 단지 그림 나오는 자료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듯 하다. '군중심리'를 이야기하면서.
언론이 '군중심리' 혹은 '괴담'을 이야기하기 전에 과연 얼마나 청소년들을 자신들과, 즉 '어른'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른 '어른'들은? 위의 어떤 사람처럼 이 청소년들을 또다른 형태의 '보호객체', 즉 이들의 집회시위를 보호해줘야할 어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애들로 보는 것은 아닐까?
세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대선과정에서 20대의 정치무관심이 맹폭을 받았지만, 그 20대가 죽으나 사나 20댄가? 지금 10대 역시 마찬가지. 세상을 바꾸는 10대들이 등장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앞으로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의 소위 '기성세대'는 10들이 성장하여 세상을 바꿀 시기쯤 상당수 북망산 등산을 하거나 혹은 그 준비를 해야할 터이다.
저 10대들이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선 첫째, 그들을 둘러싼 그들 위의 세대가 청소년들을 진짜 인간으로 인식해줘야 한다. 또 인정해줘야 한다. 둘째, 청소년 스스로가 자신이 인간임을 만천하에 선언해야 한다. 그들의 인간선언은 그들의 동생이나 조카세대, 그리고 이후 자식세대가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전초전이 될 것이다.
청소년들이 이번 광우병 미국산 소 수입반대 운동을 통해 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 특히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문제에 또다시 촛불을 들 것인지는 지켜봐야할 거다. 2mB가 갑자기 미친척 하고 30개월 이상 월령의 미국산 소 수입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지금의 열기가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겠지만, 그 열기가 또다른 사회적 이슈를 향한 열기로 승화될 수 있을런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아닌 말로 청소년들이 문제라면 정부는 수능보는 날까지만 버티면 된다. 청소년이 인간이 아닌 '입시기계'로 남아있는 한 말이다.
고로 이 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행인의 입장에서는 다만 한 가지 바램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현상의 이면에 어떤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지는 젖혀 두고, 오직 우리 청소년들이 지금까지 외계인 취급 받아왔던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진짜 '인간'의 일원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제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5. 청소년을 인간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울까
말이 쉽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청소년들을 인간'취급'하는 것이 그닥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어린 것들이~"라는 수식어는 얼마나 우리 삶에 깊숙히 파묻혀 있던가? 지들은 그 시절 안 겪은 것처럼... 몇 천년 전 피라미드 공사현장의 한 인부가 "요즘 애들은 싹퉁머리가 없어"라고 낙서해놓는 것은 소위 '기성세대'의 인식이 그리 쉽게 전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역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른'들이 먼저 우리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놀아라"
"하고 싶은 것을 해봐라"
"대학, 안 가도 된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도 해보는 거다. 대학에 애프터서비스를 운운하는 기업인들에게 "사원 교육은 니들 돈 들여 해라!"라고 항의도 좀 해보고, 이랜드 불매운동 하듯이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도 해보자. 기껏해봐야 오퍼레이터를 모집하면서도 모집요강에 "대졸"자 뽑는다고 하는 기업에 대해선 집단적으로 항의도 해보자. 이건 좀 어려울라나?
칼퇴근 좀 해보자고 소리쳐 보자. 하루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너무한가?) 뭐 이런 주장도 가능할 거다. "우리는 잔업수당이 아니라 칼퇴근을 원한다"라고 이야기하기엔 아직도 우리 생활이 먹고 살기 빠듯할 정도로 빡빡한가?
그러고 보니 실상은 우리 사회의 '어른'들 역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정말 우리 사회는 세대의 구별 없이, 누구나 모두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실천해야할 상황인 듯 하다. '인간'다운 삶은 뭘까를 먼저 고민하고, 그 고민이 있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을 '인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어야 청소년들 또한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라나?
어쨌건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한다. '청소년'들 덕분에 특히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교복입고 청계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청소년'들은 새로운 전환기를 준비하고 있는 행인에게 커다란 고민을 안겨준 스승이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행인의 [인간선언?] 과 그럭저럭 관련이 있다면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글. 1. 낙서 근처 공립도서관 건물 밖 등나무 그늘에 놓여 있는 벤치 등받이에 이런 낙서가 있다. "나는 학교라는 감옥에서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졸업이라는 출감을 기다린다" 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낙서가 가지는 즉흥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 문장이 그런 곳에 쓱싹 씌여질 수 있었던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