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법이 시행되고 한 학기가 지나 새로운 학기가 되었다. 강사법은 대학에서 법적(으로만) 교원이고 직급이 강사인 사람들을 1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3년간 재임용 절차를 보장한다. 3년간 임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1년 단위로 계약하고 재임용을 할지 말지 절차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면 다시 ‘처음처럼’ 대학은 공개 모집을 하고 강사들은 모든 서류를 다시 제출하고 더러는 면접을 보고 이런다는 거다.

그래서 이제 겨우 한 학기가 지나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재계약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강사들도 보인다. 재계약이 안되면 소청심사를 청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안내 설명에는 "고등교육법 제14조에 명시된 교원이면 누구나 소청심사청구를 할 수 있습니다”고 되어 있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규정에는 소청심사 절차에 따라 심사청구부터 결정까지 최소 120일, 최대 150일 정도 걸린다. 물론 이건 대학이 소청심사결과를 수용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만약 대학이 소청심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법적 소송으로 가면 그냥 기약이 없다. 이걸 어떤 강사가 감당한다는 말인가?

여튼 현 강사법 시행 6개월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학 강사가 대학에서 수만명의 동료 시간강사들이 밀려난 대가로 법적 교원인 강사가 되었는데, 누구 말처럼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는가? 비정규교수노조가 없는 그 어느 대학에서 법적 교원인 강사의 강의료를 인상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강사들을 위한 공동연구실을 확충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법적 교원인 강사가 교원으로서 전인교원에 준하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지도 그런 권리를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저 신분이 대학 시간강사에서 강사로 직급 명칭이 바뀌었을 뿐이다. 당연히 대학에서 이전 시간강사가 처한 모순은 하나도 해소되지 못했다. 대학에서 강의하지만 전임교원이 아니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들. 그 모든 문제는 지위와 역할 사이의 모순으로 집약된다. 대학에서 전임교수와 동일하게 강의하고 연구하지만 전임교수와 같은 권한을 갖지 못한다. 거꾸로 전임교수에 대한 종속이 심화되고 전임교수들이 받는 압박을 수십배 초과하는 압박을 받는다. 연구실적이 부족하다고 해고되는 전임교원은 없다. 그러나 강사는 연구실적이 부족하면 재계약이 되지 않거나 다음 채용 절차에서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대학이 전임교원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정규직인 전임교원들의 직급은 교수, 부교수, 조교수인데, 정상적이라면 가장 아래의 조교수와 가장 위의 교수의 구성 분포가 피라미드 형이어야 한다. 조교수가 수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부교수의 수가 조교수보다 적고 ‘교수'의 수는 가장 적은 꼴이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대학의 이 구성 분포는 역피라미드 형이다 교수가 가장 많고 부교수가 그 다음이고 조교수가 가장 적다. 이건 무슨 말인가? 대학이 신규 전임교원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산대학교의 경우 대학정보고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학부와 대학원 전임교원 총수는 1,335명이다. 학부 전임교원 수는 839명이다. 학부 재학생 수는 20,346명이다. 교수 1인당 학생수는 24.25명이다. 그런데 통계의 묘가 어떤가 보면 2019년 현재 부산대의 전임교원 확보율은 81.25%라고 한다. 2019년 강사법 이전 시간강사 수는 998명이고, 겸임, 초빙 등 비전임 교수 총수는 1,703명이다. 국립대가 이 정도면 사립대는 국립대에 비해 반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게 현재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현재 국립대의 경우 ‘정교수’의 비율은 65% 내외다. 이들은 앞으로 3~5년 사이 순차적으로 퇴임한다. 대학의 전체 전임교원의 65% 정도가 정년 퇴임하는 것이다. 그러면 35% 내외의 전임교원이 남을 텐데 대학은 현상 유지를 위해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을까? 인터넷에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면 금방 나온다. 대학은 뚜렷한 대책이 없다고 한다. 왜? 돈이 드니까! 그래서 결국 현재도, 앞으로도 비정규직인 ‘법적 교원’ 강사의 수가 대체적으로 늘어날 게 뻔하다. 그러니 '법적 교원'인 그대 강사여 짤릴까 걱정하지 마시라. 절차만 보장하는 재임용에 탈락할까 안절부절하지 마시라.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의 길은 평탄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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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1 02:57 2020/03/21 02:57

강의 때문에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와 관련한 비평을 찾아 봤는데, 읽을 만한 평을 찾을 수 없다. 한국 영화비평가들의 종말이 아니라 한국에 영화 비평/평론가들이 있는지 의문이다. 씨네21에 글쓰는 평론가들의 수준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다. 이건 아마 <씨네21>이라는 잡지의 생존 전략이 야기한 사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블로그에 글을 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글쓴 사람들의 성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남성들이다. 남성 관객들은 이 영화를 그렇게 재미있어 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여성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일까?

이 영화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여성 제다이로 설정했다. 이전 시리즈에서 여성 제다이(외계의)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하찮은 캐릭터에 불과했다면 이 시리즈는 좀 다르다. 여성 제다이 '레이'가 도드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전 시리즈와 비교해서 볼 때 여성들의 역할이 특별하다.

이 시리즈에서 남성들은 사악하거나 우유부단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어리석은 인물들로 묘사되는 반면에 여성들은 단호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책임감이 있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사실 <라스트 제다이>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좀 찌질하게 표현된다. 이러니 남성 관객들이 몰입하고 동일시할 수가 없다.

감독 <라이언 존슨>의 영화들을 좀 찾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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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0 03:00 2019/09/10 03:00

나의 녀석들

일상 2019/09/08 22:59

나는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다. 사실 좋아한다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내가 밥주는 녀석들과 녀석들의 새끼가 걱정된다.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고양이 새끼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쓰이고 그 울음소리가 어미를 찾는 소리처럼 들리면 가슴이 아프다.

모든 녀석들을 다 돌볼 수는 없지만 내가 돌보지 못하는 녀석들이 거리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날은 몹시 슬픈 감정이 들어 술을 마시게 된다. 이런 자신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시에서 사는 녀석들은 사람이 먹이를 챙겨 주지 않으면 잘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녀석들에게 먹이를 챙겨 주지 않을 수 없다.

더러 주위 동료들이 나에게 왜 사람을 챙기지 않고 '쓸데없이' 고양이나 챙기느냐, 이런 소리를 한다. 물론 그 말은 그저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사람보다 고양이를 더 챙긴다.

이런 글을 읽으면 사람을 챙긴다는 건 길고양이를 챙기는 것보다 수천배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 그래서 나는 좀 더 쉬운 걸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챙기는 사람들이 사실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들이다.

 

[경찰, 현장 속으로](9) 내팽개쳐진 가엾은 어린 영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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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22:59 2019/09/08 2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