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의 칼럼

갈무리 2014/11/11 15:22
[김종철의 수하한화]희망의 정치, 개헌, ‘시민의회’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입력 : 2014-10-15 20:44:29수정 : 2014-10-15 20:51:38

“인민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그들은 선거기간 동안만 자유로울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된다.” 이것은 250년 전에 루소가 했던 유명한 말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오래된 루소의 명언보다 더 실감나는 말이 있을까?

우리는 지금 부질없는 파당적 분쟁에 골몰해 있을 때가 아니다. 사실 좌우, 보혁 다툼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기후변화와 에너지, 자원 문제, 경제사회적 불평등 등등, 지금 우리가 직면한 엄중한 상황은 그러한 낡은 대결의 논리로는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 상황은 오직 사회 속에 숨어 있는 최량의 지혜를 결집함으로써만 극복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선거기간 중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 ‘100% 국민대통합’을 지향하겠다,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 등등, 매우 듣기 좋은 말들을 되뇌며 몸을 낮춰 다가올 때, 많은 유권자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들이 죄다 헛소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것들은 ‘원칙과 신뢰’의 인간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후보가 제시하는 약속이 아닌가? 선거용일 것이라는 의심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완전히 거짓말로 끝날 것이라고 믿기는 실제로 어려웠다.


세월호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이 유가족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표하며 눈물로 사과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공언했을 때, 이것은 엄청난 재난에 대해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최고위직 공직자로서의 당연한 자세로 우리 모두는 이해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잠깐 사이에 대통령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유가족에게는 냉담해졌고, 진상규명에 관해서는 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지침’을 내려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면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비판적인 여론을 억누르는 광범한 감시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왜 이렇게 태도가 표변해버렸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집권세력이 이겼고, 이제 당분간 선거가 없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환심을 사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기는 선거 때의 약속이 선거 후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정치판의 악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정세 변화 혹은 객관적 현실의 제약 때문인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현대 대의제 정치가 거짓과 속임수를 기반으로 하는 그 본질을 갈수록 감추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에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공약 실천 문제에 관해 했다는 이명박의 말, 즉 “선거 때는 무슨 말인들 못하랴”라는 발언은 이런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이명박 정권은 극단적인 거짓과 기만, 술수로 일관했던 정권이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명박 정권은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인 타락과 부패 혹은 무능과 무책임의 정치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고통과 억울함, 불행과 갈등, ‘희망 없음의 느낌’은 본질적으로 정치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치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정치일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거나 혹은 적어도 정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살아있는 사회라야 건강한 사회,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의 실현 없이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의는 평화의 근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이 나라의 정치(나아가 세계의 주류 정치)가 평화는 정의가 아니라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검찰, 그리고 전자감시망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가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 정치다운 정치의 실종은 불가피하고, 따라서 정말 평화로운 세상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주류 정치가들은 평균적 시민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문제 해결은커녕 분쟁과 갈등을 조장하고, 갈수록 세상을 위험에 빠트리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선거제도,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정당정치의 기본구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순다수표로 당선을 결정하는 선거제도 밑에서는 ‘극장정치’에 능란한 인간, 명망가, ‘귀족’, 혹은 재력가(혹은 재력가의 후원을 받는 자)가 아닌 이상, 건전한 상식과 판단력을 지닌 보통시민이 민중의 대표로 선출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희박하고, 설령 정치판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기본적인 모순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선거제도, 이런 정당정치를 혁파하지도 못하고,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은 채 그저 비통한 심정으로 불의(不義)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참고 지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 정치가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를 위해 희망적인 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개별적인 이슈들에 치열하게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과 같은 엉터리 정치의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을 광정(匡正)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선결돼야 할 것은, 지금과 같은 엉터리 정치, 독선적 정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즉 헌법과 선거제도를 진정으로 ‘민주공화국’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고쳐야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작업을 다음 선거에서의 유불리에 부심하는 국회의원들과 직업 정치꾼들에게 맡겨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헌법과 선거법은 능동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의회’가 주체가 되어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양권모칼럼]“가장 행복한 전직 대통령”
양권모 논설위원
입력 : 2014-11-06 20:50:04수정 : 2014-11-06 20:59:22

 정말 그럴 줄 몰랐다. 퇴임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의 대변인들이 “MB가 그리워지는 날이 올 것” “불행하지 않은 첫 전직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을 때, 맹목의 충성이거나 간절한 희망사항으로 여겨졌다. 박근혜 정부 2년, 내키지 않지만 그들의 선견(?)에 고개를 끄덕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잘한 게 별로 없고 도 긴 개 긴이자, “차라리 MB가 나았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그립다’는 건 절대 아니다. ‘불행하지 않은 첫 전직 대통령’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겪은 ‘퇴임 후’와 대하면 ‘전직 대통령 이명박’은 태평세월이다. 이 전 대통령 부부는 10차례 국빈급 외유를 다녀왔다. 현직 박 대통령과 버금가는 횟수다. 청와대 경호실의 경호를 받은 국내 행사는 1924회에 달한다. ‘황제 테니스’를 치고, 전국을 누비며 측근들과 골프를 즐기고, ‘이명박 대통령의 철학과 업적을 유지·계승·발전시키는’ 기념재단 설립은 거칠 게 없다.
 

이제 검증할 시험대가 생겼다.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문제의 대처를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다. 실패한 자원외교는 앞으로도 7조원 이상의 뒷설거지 비용이 들어간다. 4대강 사업은 수질악화·생태계 파괴 등 환경비용을 제외하더라도 유지·보수에만 매년 5000억원 이상이 소요된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가려야 올바른 출구를 찾을 수 있다. 국회 국정조사와 함께 4대강 사업·자원외교 책임자 고발 사건의 검찰 수사가 절실한 이유다.소위 ‘노가다 정권’의 삽질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일각을 드러낸 해외자원개발 사업,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실상은 충격적이다. 해외자원개발에 40조원을 투자해 35조원을 날렸다. 대통령이 직접 나선 ‘VIP자원외교’ 35건도, 자원외교특사를 자처한 ‘만사형통’ 이상득의 야심작 ‘볼리비아 리튬 사업’ 등도 죄다 엎어졌다. 현재까지 드러난 자원외교 손실액이 56조원이다. 지난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의 무상급식 지출액이 2조3738억원이다. 23년치 무상급식 예산을 부실·부패한 정권 사업 하나로 말아먹은 셈이다.

천문학적 국고 손실만으로도 국회 국정조사가 당연하고, 관련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도 요구되지만 정부·여당은 미적댄다. 박 대통령은 소위 ‘사자방’(4대강 사업, 자원외교, 방산) 중 방산 비리 척결만을 주문하고 새누리당과 검찰도 그것에만 움직인다. 자원외교와 4대강은 이명박 정부를 상징하는 국책 사업이고, 직접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이 MB를 향한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문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는 까닭이다.

전철(前轍)이 있다. 박근혜 정부 첫 해 4대강 사업을 청산할 기회가 주어졌다. 감사원 감사로 4대강 사업이 ‘총체적 실패’로 판명나고,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대운하를 위한 전초사업으로 추진한’ 사실이 밝혀졌다. 4대강 사업 책임자 57명은 검찰에 고발당했다. 박 대통령의 의지만 있으면 4대강 숙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을 파헤치는 것은 정치보복”이라는 MB진영의 반발에 박 대통령은 너무도 쉽게 굴복했다. 감사원장만 사퇴시키고 타협했다. 국무총리실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는 사실상 찬성론자들로 구성돼 엄정한 평가를 기대하기 힘들다.

박근혜 정부 들어 MB정부의 실정과 정권 차원의 비리 의혹을 제대로 단죄한 기억이 없다. 이 전 대통령과 직결되는 사안에 이르면 이상하게 꼼짝을 못한다. 내곡동 사저 의혹에서도 당사자인 MB에 대해 서면조사조차도 벌이지 못한 검찰이다. ‘여론정치의 귀재’라는 박 대통령답지 않게, ‘인기 없는 전직 대통령’을 극구 감싸고 돈다. 왜 그럴까, 궁금하다. 무슨 ‘빚’ 때문인가. 국정원과 군, 국가보훈처 등을 동원해 ‘박근혜 당선’을 도운 게 ‘MB의 보험’이었나. 대선이 한창이던 2012년 9월2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의 이례적인 ‘2시간 독대’에서 끊기 어려운 연결고리가 생긴 것일까. 물론 모두가 정황에 따른 추측일 뿐 진실은 알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한 국책 사업에 대해 끝내 국정조사를 기피하고, 책임 규명을 외면하고, 수사를 회피한다면 결국 ‘MB 지키기’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실은 MB정부와 ‘샴쌍둥이’라는 증명서가 될 터이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이 ‘보험’과 ‘거래’였다는 의심을 합리화시킨다. “국정원 의혹과 4대강 사업, 해외자원개발 등 이명박 정권의 의혹을 털지 못하면 같이 묶여서 좌초할 것이다.”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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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1 15:22 2014/11/11 15:22

이런 저런 이유로 신문을 읽지 못했다. 그동안 뉴스에 눈과 귀를 닫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마트 기기로 접하고 신문은 헤드라인과 제목만 죽 훑는 편이었다. 오랜만에 신문을 펼쳐 글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사유와 성찰]길을 잃지 않는 사회, 길을 나서지 않는 사회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스함을(…)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 먼 곳의 불빛은 /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희덕 ‘산속에서’ 중에서) 

정보 공간의 무한 확장 속에서 ‘현실’의 정체가 애매해지고 있다. ‘리얼리티 쇼’라는 장르가 유행하듯, 점점 더 많은 ‘실재’가 미디어 이벤트로 대체된다. 삶이 고단할수록 가상의 세계에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만연하고,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도 그런 욕구를 반영한다. 친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고 공부 스트레스에 짓눌리다가 자살한 주인공이 마법세계에 환생하여 전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거나 절대자로 변신해 복수한다는 등의 스토리가 그것이다. (‘학교폭력 성적…고통을 환상으로 풀려는 고교생’ 경향신문 8월5일자 게재) 낯선 곳을 방문하면 길을 잃기 일쑤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목적지를 찾지 못해 초조해하기도 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어둠이 내린 후의 방황은 두렵기까지 하다. 시인은 막막한 가운데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렇듯 경이로운 순간을 종종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된 시대에 그런 길 찾기는 점점 희소해지고 있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언제 어디서든 현재 지점과 이동 경로를 간편하게 검색할 수 있다. 기계의 안내만 따라가면 낯선 곳에서도 편리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 젊은이들은 그러한 정보 환경에서 성장해왔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그들을 가리켜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했다. 그들은 디지털 기기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고 문제를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그 안에 숨어 있는 위험을 회피하는 가운데 인생을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힘이 점점 박약해진다.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세대’는 다른 말로 하자면 ‘스마트폰이나 패드 없이 낯선 곳에 가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길을 가본 적이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다. 정치적 불안, 빈곤의 확대, 인간관계의 해체 그리고 만성화되는 각종 재난들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생존은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사회 자체의 앞길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저마다 안개 자욱한 미로를 탐색해야 한다. 때로는 없는 길도 뚫어야 한다.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지난달 안산의 단원고 2학년생 3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1박2일 동안 행진했다. 죽은 친구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고, 어느 구간에서는 시민들이 깔아준 노란 꽃잎들을 지르밟고 가기도 했다. 햇볕이 뜨거워 많이 힘들었지만, 행인들이 보내준 갈채에 힘입어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500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 장동원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의도에 도착한 뒤에도 행렬은 끝이 안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뒤돌아보라’고 했지요. 그걸 보고 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정말 이 아이들의 한 발걸음이 큰 발걸음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 ‘우리 사회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아이들이 직접 본 것이죠. 매일 기사에 달린 댓글만 보다가 끝이 없는 행렬을 목격한 것이죠.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7월19일자)


세월호의 참사는 우리에게 고통을 직면하는 힘을 요청하고 있다. 입시 공부와 인터넷 그리고 비좁은 또래 집단에 갇혀 지내던 아이들이 자신의 아픔에 온몸으로 함께 해주는 행렬을 목격하면서 감동했다. 그 순간의 위대한 연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와 함께 길을 찾아 나설 것인가. 지친 발걸음을 격려하는 ‘먼 곳의 불빛’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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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0 18:32 2014/08/10 18:32

 

 

녹색당은 집권을 꿈꾸지 않는 유일한 정당이라는 이필렬의 말에 공감한다. 녹색당의 목표는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언제나 중심화하는 힘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모든 힘들은 주변화된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그 자체가 폭력이며 억압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새로운 권력(집단)이 기존의 권력(집단)을 대체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서든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그 근본은 동일하다.

그런데 한 집단이 기존의 권력을 장악하여, 즉 기존의 권력을 대체할 경우 권력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집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당. 그런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존재의 정당성이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권력의 해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권력은 곧 다른 권력에 의해 대체된다. 마치 하나의 힘이 더 큰 힘에 억눌리는 것처럼 힘으로써 힘을 억압하는 악순환과 같다. 한국에서 새누리당의 권력을 새정치민주연합이 대체하고 다시 새누리당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두 권력 집단은 모두 권력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재생하기 위해 존재하는 권력 기계에 불과하다. 이런 악순환의 연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지배적인 권력 기계는 지역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이 아닌 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권력 기계가 존재한다. 지역이건 계급이건 그 집단이 권력을 지향하는 한 억압을 재생산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녹색당이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 권력 기계를 해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하나의 권력은 언제나 또 다른 권력에 의해 대체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권력의 존재양식이며 권력의 본질은 억압에 있다. 녹색당이 억압이 아닌 해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녹색이 근본적으로 생명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녹색세상]추첨 민주주의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이번 지방선거에 녹색당도 참여했다. 녹색당은 선거에 후보를 낸 여러 정당 중에서 유일하게 집권을 꿈꾸지 않는 정당일 것이다. 추첨을 통해서 대의원을 뽑기 때문이다. 추첨은 모든 추첨 대상이 주어진 일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통치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원천봉쇄하고,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집권 자체를 가능하지 않은 일로 만든다. 임기까지 짧게 제한하면,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최상의 장치도 될 수 있다. ---> 읽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04231119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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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7 19:24 2014/06/07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