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기 있오!

2016/09/10 16:40

[책과 삶]“지구를 소개합니다”…우주로 쏘아올린 ‘메시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091941015&code=960205#csidx58df5e8ba73e02baf1d5d8c3229f48e 

 

이 책의 서평을 읽고 나니 언젠가 본 영화가 생각난다. 지구에서 외계로 "우리 여기 있오!"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늘 있어왔다.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그 의도와 무관하게 신호를 접수할 외계인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설령 수십년, 또는 수백년 후 지구의 신호를 접수한 외계 존재가 있다하더라고 그들이 신호가 전달되는 속도만큼 속력을 낼 수 있는 우주선을 가지고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진리라면 수백년, 수십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지구를 침략할 만큼 호전적인 우주인이 문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스티브 호킹은 문명은 스스로를 파괴하기 때문에 영원한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2012년에 개봉한 <배틀쉽(Battleship)>이라는 영화는 우주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 메시지를 접수한 우주인이 지구로 침략해 온다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의 구성이나 연기나 주제는 천박하고 우습지만 인상적인 장면이 아주 짧게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우주인의 우주선은 미국 해군 함정이 자신을 공격하려고 무기를 장착하고 공격하려는 의도를 보일 때만
미해군 함정을 공격을 한다는 거다. <우주전쟁>(2005)에서 미리 지구에 숨어있던 화성인들이 어느 날 벌떡 솟구쳐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과 달리 이 우주인들은 미리 공격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방어적으로만 공격한다. 그리고 도시로 침입한 무인공격기는 도로와 자동차 등 (기계)문명의 요소가 되는 것들은 공격하지만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미해군에게 붙잡힌 우주인은 턱밑에 딱딱한 수염을 달고 있다는 것 외에는 인간과 닮았다는 거다. 두 눈과 하나의 코, 하나의 입을 가진 얼굴과 두 팔과 두 다리, 직립보행을 하고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이들이 인간과 동일한 지적 문명을 형성하고 있고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보면 인간과 유사한 진화를 거쳤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이 우주인의 회상 장면을 인서트로 보여주는데, 행성에 전쟁이 발생하고 행성의 대기에서 핵폭발과 같은 폭발을 보여준다. 몇 초되지 않는 짧은 장면이지만 이들의 행성에 (지구인들이 가장 우려하는) 핵전쟁과 같은 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어쨌든 <배틀쉽(Battleship)>에서 우주인들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구에 온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의적으로 지구에 착륙하여 방어막을 전개하고 지구의 군함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메시지를 모선/행성에 연락하기 위해 지구의 시설에 침입하고 장악한다. 이 영화에서 그들이 왜 지구에 왔는가 하는 이유는 모호하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지구를 무단으로 침입했고 이러한 침입자를 막고 지구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과 일본 자위대가 용맹하게 싸워 물리친다는 거다. 물론 이런 류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거창한 철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을 거라고 기대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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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16:40 2016/09/10 16:40

우주에도 방향이 있을까? - '우주 등방성' 밝혀졌다

http://media.daum.net/digital/others/newsview?newsid=20160910132607220

서울신문 2016.09.10. 13:26

"만약 당신이 자신의 삶이 아무런 방향성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을 우주 탓으로 돌려도 될 것 같다." 

기사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기자의 감성이 돋보인다. 다만 우주에 방향성이 없다고 우리 삶에도 방향성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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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15:49 2016/09/10 15:49

오늘은 마지막으로 노동 정책 관련하여 2번 문제에 대해 제 생각을 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전제하겠습니다.


2. 녹색당의 노동 정책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고, 노조를 보는 관점이 성장주의적인 관점이 지배적이다. 노동자와 녹색당이 친화력을 얻기 위해서 녹색당의 노동 정책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

2번 문제는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겠습니다. 
1)녹색당의 노동정책은 구체적이지 않은가? 
2)노동조합을 성장주의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가? 
3)현장 노동자 대중을 녹색당 당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녹색당의 노동 정책 방향은 무엇인가?

 

먼저, 1)의 경우 녹색당의 노동 정책은 관점에 따라 정당의 정책으로서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고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추상적이라는 표현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녹색 일자리 = 좋은 일자리>라는 항목을 보면 “녹색 일자리”는 환경과 생태, 신재생 에너지 등과 관련하여 설정하고, 녹색이지만 괜찮은 일자리와 녹색이지만 괜찮지 않은 일자리 등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점과 기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정책공약집에서 제시하고 있는 노동 정책은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측면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어야 할 중요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대선 정책공약에서 수정하고 보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녹색당의 노동 정책에서 현실 진단과 그 문제해결 방향이 좀 어긋나는 측면이 좀 문제라고 생각되고 이건 한국 정치구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진보정당이 취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지적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개혁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있는 첫 항목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노동은 인간이 살면서 꼭 필요한 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벗어나 인간의 삶과 생태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소비에 중독되고 이윤을 남기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기업과 중앙집중구조, 성장신화가 이를 견인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자본주의 체제는 원래 이렇게 굴러가는 것이고 이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라는 점에서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문제지요.

 

2)노동조합을 성장주의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가? 
어제 페북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어떤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노사관계는 근본적으로 투쟁적이기는 하지만 노사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사실 노동과 자본, 노와 사의 문제에서 노동조합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노동과 자본은 자본주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양 극입니다. 대규모 사업장이건 소규모 사업장이건 그 기업의 산업적 지위 여부를 막론하고 단체협약식에서는 항상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상호 노력한다는 인사말을 합니다. 회사가 이윤을 많이 남겨야 노동자들에게 급여도 인상할 수 있고 복지도 확대할 수 있겠지요. 그 회사가 폭탄을 만드는 회사일 수도 있겠지요. 제가 좀 극단적인 표현을 했지만 노동은 언제나 자본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자본의 목적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고 1원이라고 이윤으로 축적할 수 있으면 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자본의 속성입니다. 노동조합이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노동의 이런 측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게 세 번째 문제와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3)현장 노동자 대중을 녹색당 당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녹색당의 노동 정책 방향은 무엇인가?
한편으로, 노동자는 어떤 분야에 고용되어 있든 시민사회의 일원입니다. 노동자는 곧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민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공유하고 책임을 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자신이 속한 회사의 피고용자로서 노동현장에서 자본과의 관계에서 특수한 위치에 있습니다. 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물론 노동자들의 연대와 단결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떻게 노동조합의 투쟁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이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본 측과 정부가 노동자들의 집단적 연대와 총파업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파급효과뿐만 아니라, 총파업 그 자체만으로도 노동자들에게 승리감을 고취시켜 준다는 점에서 묵과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총파업은 잘 안 됩니다. 자본 간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뭐 여러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세상을 바꾼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총파업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 현장이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시민사회라는 보편적 위치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통해 노동조합을 지역사회와 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사드” 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성주가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핵발전소 문제도 그렇습니다.(물론 핵발전소 건설 저지 투쟁에서 노동조합(또는 지역 노동단체)와 연대 관련해서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노동자들이 녹색당을 자신의 가치와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정당으로 생각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을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보편적 이해관계에서 놓고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니 다음에 또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2016.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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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5 17:24 2016/09/05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