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논문을 한 편 쓰고 있었는데, 결국 지금까지도 끝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전체 글의 서문의 일부로 시작했던 부분이다.
에이젠슈테인과 들뢰즈는 비슷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 했다. 한 사람은 혁명의 시대를 살았고, 또 한 사람은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에이젠슈테인은 혁명의 와중에 스스로 혁명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점에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혁명이 에이젠슈테인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배신자들은 혁명의 동지들이었다.
들뢰즈는 어땠을까? 혁명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는 혁명의 시대를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마 들뢰즈는 새로운 혁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알랭 바디우가 '좌익의 시대'라고 규정한 68년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출판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차이'를 인정하라고 외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책의 '서문'에서 "차이가 부단한 탈중심화와 발산 운동"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서양의 역사와 서양 사유의 역사는 일정하게 동일한 트랙을 밟고 있다. 서양의 문명은 모든 차이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용해시키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다. 서양과 비서양을 문명과 반문명의 대립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서양의 관점에서는 이와 같은 ‘차이들’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를 사유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와 같은 대립 구도의 해체를 의미한다.
탈중심화는 모든 중심화된 질서와 체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관계와 관심 정도에 따라 세계를 나를 중심으로 재편한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다. 이런 점에서 알랭 바디우가 들뢰즈를 "<아나키즘의 추종자들>이라고 불렸던 집단의 철학적 배후자"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에이젠슈테인과 들뢰즈는 모두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두 사람 모두 혁명의 와중에 혁명에 고무되었지만 혁명을 끊임없이 혁신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참을 수 없는 비판을 강한 자의식과 자기애로 비켜가는 법이다.
에이젠슈테인과 마야코프스키의 전기를 함께 엮고 있는 엘스베트 볼프하임은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마야코프스키처럼 소문들에 맞서 부인하는 대신 모든 소문들을 피해가려고 애썼다. 아마도 자신의 세계적인 명성 덕에 그를 음해하려는 소문들에도 끄떡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특히 회고록에서 찰리 채플린, 제임스 조이스, 슈테판 츠바이크 또는 다른 유명한 정신분석가들과 같은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들먹인 점이 눈에 띈다. 그는 과연 그들을 모두 만났을까? 그는 스스로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정말 더웠습니다. 한낮의 온도가 36도라더군요. 사실 부산이 더워야 얼마나 덥겠냐 생각했지만, 어제, 오늘은 완전히 제 생각을 깨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작년은 어땠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내년 이맘때도 마찬가지로 오늘이 얼마나 더웠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겠지요. 감각은 언제나 현재만을 기억하나 봅니다. 차라리 현재의 상태만을 간직하는 감각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감각은 언제나 새로움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에겐 겨울이 제일 힘든 때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늘 날씨 탓인지, 이런 제 생각이 정말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이야 추우면 꼭 껴안고 자든가, 아니면 헌 홑이불이라도 둘둘말고 지내면 될테니까요. 오늘 같은 날에는 벌거벗고 선풍기 바람을 맞아도 주룩주룩 땀이 나고 머리가 하예지고 정신이 멍하고 몸은 축축 처지니 어디 사람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하아하아하아하아하아하아하아하라하아하아아아아. 뭐 요즘 에어컨 없는 집이 어디 있냐고 그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여름이 정말 지독한 계절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날씨도 이런데, 사실 전 요즘 며칠 좀 멜랑콜리합니다. 그래서 이 번주는 내도록 술과 살았습니다. 뭐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매일 맥주를 이렇게 서너 병씩 마셔보세요. 혼자 조용히 마시고 싶은데, 그러기도 힘듭니다. 아마 음악 탓도 있는 듯 합니다. 제가 한 반년 정도 매일 같은 앨범만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바로 Ryuichi Sakamoto의 "Casa"와 "A day in New York"입니다. 전 보사노바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아니, Paula Morelenbaum의 목소리에 빠진거지요. 거의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빨리 집을 구해야할 지경입니다. 매일 매일 생각합니다 어디 조그마한 방이라도 하나 구해서 나가야지. 그래야 이어폰에서 벗어나지, 하고 말입니다. 여름에는 아무리 좋은 헤드폰도 무용지물입니다. 제가 목록을 작성한 진공관 앰프와 B&W601S2를 구해서.... 아아 생각만해도 정말 행복해집니다. 빨리 논문을 끝내고 어디든 가서 돈을 벌어야 겠습니다.
앗, 날씨 이야기에서 시작했는데, 결국 제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군요. 쩝.
해서 어제는 제가 가끔 가는 조용한 Bar에 가서 아예 CD를 맡기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정말 좋더군요. 뭐 술 마실 핑계인지도 모르지만, 음악은 모름지기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들어야 하는 법이지요. 이 글을 쓰는 중에도 Casa에 있는 "Bonita"를 듣고 있습니다. 머리 속에서 비가 내립니다. 정말입니다.
...>2007-07-27 21:31
변증법에 대해 이리 저리 생각하다 오래전에 끄적거려 두었던 메모를 발견했다. 요즘은 정말로, 변증법 만큼 개취급을 당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들뢰즈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모르겠다!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 헤겔주의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인을 초월해있는 관계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가능하다. 개인과 전체, 개인과 시민사회의 매개 등등. 맑스의 비판이 올바르다면, 헤겔은 보편적인 것이 개별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에도 보편적인 것을 개별적인 존재에 선행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개별자는 보편자를 표현하는 매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헤겔과)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얼마전 MP3 플레이어를 살까해서 조카애와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하던 중, 조카애가 삼성이 좋으니 삼성 제품을 사란다. 나는 아이팟이 더 예쁘지 않으냐 그랬더니, 고등학교 2학년이나 된 애가 이왕이면 삼성 거 사는 게 애국하는 것 아니냔다. 애국? 오, 애국. 나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는데, 사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삼촌은 삼성 싫어하거든." 짧게 말하고 말았다.
애국이라......
나와 정치적인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관계하는 사람들 대부분과 달리 나는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에도 비판적이다. 단순히 이들 단체의 정치적 내용이 아니라, 이들이 일종의 권력기관이며,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의 내용이 어떠하든 이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 개인들의 구체성을 말살하고 이를 '전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옹호하기 마련이다.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사실, 이 멋진 구호가 이 지상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하나는 어디에서도 그 의미 그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언제나 권력의 문제가 개인과 개인, 구체적 개인의 실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하나의 권력은 다른 권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많은 좌파 정당이 권력을 장악한 나라들에서 여전히 자본주의 착취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니콰라과는 무장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고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끝장내지 못했던가? 이러한 물음은 결국 볼세비키가 인민의 힘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인민을 권력의 노예로 삼았던 지난 역사를 설명해준다. 권력은 끝없는 순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만약 권력 자체의 종언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국가라는, 정부라는 권력을 폐기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여전히 권력의 노예가 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멕시코의 '사빠티스타'는 권력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만약 당이나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면, 이는 개별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들의 연합체, 개별자들의 상호 의존적이면서 사적, 공적 이해가 자율적인 연대를 통해 해소되는 투쟁의 단위이어야 한다는 거다.
...>2007-07-22 22:29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 아니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