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GPT

대학과 노동 2025/06/30 02:56

성적 처리를 완전히 마쳤으니 이번 학기가 끝난 셈이다. 대학 비정규교수인 강사에게 긴 방학은 곧 긴 실업자 생활을 뜻한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힘든 나이가 되었다. 15년 전만 해도 방학 동안 고등학생 과외를 하기도 했는데, 이젠 누가 주선을 해주지도 않고 설혹 과외를 해달라고 해도 선뜻 그러자고 하기도 망설여진다. 비정규직이지만 재직 증명서를 떼서 은행에 가야 할 수도 있겠다.

매 학기 중간고사를 치고,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고, 기말고사를 친다. 한동안 중간고사를 치지 않았는데 중간고사를 치지 않아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몇 년 전부터 중간고사를 친다. 과제도 마찬가지로 평가를 위한 방편이다. 평가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대학에서 평가는 불가피하고(졸업 학점이라는 것도 있고), 시험과 과제, 출석을 점수화해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게 꼭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때론 이 평가하는 위치가 학생들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학생들은 학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취업에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여튼 이 평가와 관련하여 이번 학기 문제가 생겼다. 학생들이 ChatGPT를 자주 사용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게 실제 나에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이번 학기에 처음 ChatGPT가 대학에서 활용되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매 학기 강의 주제와 관련하여 책을 한 권 선정하고 학생들이 강제로라도 읽도록 하기 위해 책을 읽고 요약문과 감상문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과제를 낸다. 이번 학기에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2장 "숭고의 분석론"을 읽고 숭고에 대해 요약 정리하고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했다. 몇몇 학생들의 과제를 읽으면서 학부 학생들이 쓴 것치고는 꽤 잘 쓴 글이 있었다. 훌륭한 학생들이라고 생각했다.

기말시험과 함께 채점을 하면서 몇몇(이 아니라 사실 상당수) 학생들의 글이 많이 유사하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좀 지나서 이게 ChatGPT가 작성한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직접 ChatGPT에게 글을 써보라고 하니 학생들이 쓴 글과 유사한 글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책을 읽고 요약하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방식의 과제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직접 ChatGPT에게 이런 글을 한 번 써보라고 하고 결과물을 보니 놀랍다. 처음 ChatGPT가 등장했을 때는 허접한 장난 같은 글들을 긁어 와서 보여주는 수준이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깜짝 놀라겠다.

- 나 :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2장 숭고의 분석론을 중심으로 미와 숭고를 비교해서 2000자 정도로 정리해줘
- ChatGPT : 좋아요. 요청하신 대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 제2장 ‘숭고의 분석론’을 중심으로, ‘미’와 ‘숭고’의 비교를 약 2000자 분량으로 정리해 드릴게요.

칸트 『판단력 비판』: 미와 숭고 비교 — 제2장 ‘숭고의 분석론’을 중심으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미(아름다움)’와 ‘숭고(숭고함)’는 모두 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적 판단의 대상이지만, 그 성격과 작동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제2장(제26~29절)을 통해 숭고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통해 미적 판단의 한계를 넘어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 분석은 곧 미와 숭고의 대조적 관계를 명확히 한다.

먼저, 미는 형식의 합목적성에서 발생한다. 아름다움의 대상은 자연이든 예술이든, 그 형태가 우리의 상상력과 지성이 조화롭게 상응할 때 미적 쾌가 발생한다. 미는 대상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조화와 질서를 통해 즐거움을 준다. 칸트는 이를 자유미와 부착미로 구분하기도 한다. 자유미는 장식적 아름다움(꽃, 장식 문양 등)이고, 부착미는 어떤 개념적 용도와 연관된 아름다움(궁정 건축 등)이다. 공통점은 둘 다 형식의 조화를 통해 관람자에게 즉각적인 쾌를 준다는 것이다.

반면, 숭고는 무한한 것, 형식 너머의 것에서 발생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숭고를 “형식 없는 무한함의 표상”이라 설명한다. 거대한 폭풍, 끝없는 사막, 무한한 밤하늘 같은 대상은 감각적 표상 능력, 즉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다. 이때 상상력은 실패하고, 오히려 이성은 그 무한함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려고 하면서 인간 정신의 초월성을 자각한다. 즉, 숭고는 상상력의 무력함을 통해 이성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체험이다.

칸트는 숭고를 다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눈다. 수학적 숭고는 양적 무한함(예: 무한한 우주)을 통해 발생하며, 역학적 숭고는 자연의 압도적 힘(폭풍, 벼락)을 통해 발생한다. 두 경우 모두 감각적 공포가 동반되지만, 그것은 실제로 나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만 숭고로 전화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포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힘과 무한함을 사유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라는 자각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미와 숭고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 쾌의 발생 조건, 그리고 이성이 개입하는 방식에서 확연히 갈린다. 미는 상상력과 지성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형식의 즐거움’이다. 반면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긴장 속에서 상상력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이성의 위대함을 깨닫는 체험이다. 미가 조화와 평온의 쾌라면, 숭고는 불안과 공포를 동반한 불쾌 속 쾌이다.

칸트에게 이 구분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사유하는 열쇠다. 인간은 감각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도덕적·이성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다. 미는 인간이 자연의 조화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숭고는 인간이 자연을 초월하는 정신의 자율성을 확인시킨다. 숭고는 그래서 더 깊이 윤리적이며, 도덕법칙에 대한 인간의 자각과도 연결된다. 자연은 물리적으로는 인간보다 크고 강하지만, 도덕적 법칙을 따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깨달음은 숭고의 정점이다.

정리하자면,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숭고는 모두 자연과 예술을 대하는 인간 정신의 두 가지 태도이다. 미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즐기며 상상력과 지성을 조화시키고, 숭고는 그 조화의 붕괴와 감각 능력의 한계를 통해 이성이 감각을 초월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숭고는 단순한 미적 범주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도덕적 자유와 존엄을 드러내는 철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 점이야말로 칸트가 숭고의 분석론에서 밝힌 미와 숭고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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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 20살 여자 대학생이 숭고의 분석론을 읽고 느낀 것이라 전제하고 이 학생이 쓸 수 있는 감상문을 1500자 정도로 만들어줘.
- ChatGPT : 좋아요! 그러면 20살 대학생(여학생)이 칸트 『판단력 비판』의 ‘숭고의 분석론’을 읽고 쓴 감상문을 약 1500자 분량으로 자연스럽게 작성해 드릴게요.

감상문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의 분석론’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왜 이런 어려운 개념을 굳이 설명하려 했을까?’였다.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일상에서도 자주 쓰고, 예쁜 꽃이나 그림, 노을 같은 걸 떠올리면 금방 이해된다. 그런데 ‘숭고’는 그게 아니다. 칸트는 숭고를 설명하면서 일부러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자연의 힘이나 무한한 크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무서움 속에서 오히려 인간이 가진 이성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 가장 신기했다.

나는 이번에 숭고를 읽으면서, 내 경험을 떠올려봤다. 작년에 혼자 여행 갔을 때 밤바다를 본 적이 있었다. 파도 소리가 무섭게 들리고, 끝이 안 보이는 바닷물 앞에 서 있으니 갑자기 내가 너무 작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 같은 게 있었다. 칸트의 숭고 개념은 이런 느낌을 딱 설명해준 것 같았다. 상상력은 끝없는 바다를 다 담아내지 못하지만, 내 머릿속 이성은 그 무한함을 떠올리고 사유할 수 있다는 말이 정말 흥미로웠다.

칸트는 숭고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눴는데, 수학적 숭고는 크기, 역학적 숭고는 힘을 통해 설명된다. 무한한 하늘이나 깊은 밤바다는 수학적 숭고에 가깝고, 천둥번개나 폭풍은 역학적 숭고에 가깝다. 둘 다 인간의 감각을 압도하지만, 그 압도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자신이 자연의 일부를 넘어선다고 느낀다. 그게 숭고의 묘한 매력인 것 같다. 아름다움이 조화롭고 편안하다면, 숭고는 무섭고 불편하면서도 인간 정신을 더 멀리 데려간다.

미와 숭고를 비교하면서 나는 아름다움이 주는 위안과 숭고가 주는 깨달음이 모두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예쁜 꽃을 보면서 잠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동시에 끝없는 밤하늘을 보며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칸트가 숭고를 단순한 미적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 가진 자율성과 도덕성까지 연결시킨 이유도 이해가 됐다. 아무리 큰 폭풍이 나를 덮치더라도, 내 정신은 그걸 넘어서 무한한 것을 사유할 수 있다는 자각. 이건 조금 어렵지만, 생각할수록 멋진 말 같다.

솔직히 숭고의 분석론은 읽는 내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자연을 대할 때 느껴왔던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철학적으로 풀어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큰 산이나 바다를 볼 때마다 그냥 ‘예쁘다’가 아니라 ‘내 감각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내 이성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려보고 싶다. 칸트 덕분에 세상을 조금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것 같다. 언젠가 더 깊이 읽어보고 내 삶에도 숭고한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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