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람의 열두 방향'일까
어슐러 K. 르귄, 최용준 역(2004).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북스.
SF의 고전이라는 "바람의 열두 방향"을 언젠가는 보리라 맘 먹고 있다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 마자 단숨에 샀고, 사자마자 읽어제꼈다. 아마 설 즈음인 듯하다.
그 동안 한 켠에 제껴두었다가 동생이 읽고 돌려주고 나서 블로그에 읽었다는 표시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슐러 K. 르귄의 책임을 알고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디 듣도 못한 그리폰북스라는 곳에서 발간되었는데, 시공사의 장르문학 브랜드란다. 전두환 씨 아들이 경영하는 그 회사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귄의 초창기 작품들을 모아놓은 단편소설집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작품들을 읽고 나서 감질맛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지는 줄거리를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여기에는 SF도 있지만 판타지도 있다. (판타지도 SF이던가. 이런 건 잘 모르니까...) 판타지 소설보다는 SF소설이 훨씬 더 댕긴다.
소설들 중에서는 '샘레이의 목걸이', '어둠상자', '이름의 법칙', '겨울의 왕', '아홉생명',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땅속의 별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혁명 전날'이 인상 깊었다. 잘 이해가 안되면 몇번씩 되돌아가서 읽어야 했으나, '샘레이의 목걸이'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샘레이의 목걸이'는 르귄이 1966년에 발표한 <로캐넌의 세계> 첫머리 부분이란다. 그 장편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번역이 되었는지 여부이다. 원어로도 나름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지만...
그 동안 SF를 별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SF를 읽어볼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집이다. 초창기 작품이라서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참 대단한 듯하다.
아주 인상적이었던 무슨 SF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실려있지 않다. 뭐였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모티브의 것이었는데... 한국소설이었나.
아무튼, 책 뒷표지에 보면 이런 소개가 나와 있다.
'SF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인정받는 장르 작가 르귄의 첫 단편집. 이 책에 실린 17편의 단편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색을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정통 문학의 기법으로 실현하고 있다. 인류학, 심리학, 철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30년 전에 발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르귄에게 지금의 명성을 안겨 준 세계 3대 판타지 중 하나인 '땅바다' 이야기와 '헤인' 시리즈의 원형이 되는 단편들도 실려 있다.
이런 소개를 떠나 나는 아주 재미있었다. 강추!
이 소설들에서 유려한 문장을 찾거나 교훈적인 대목을 찾는 것은 헛수고인 듯하여, 그리고 나중에 다시한번 생각해보려고 접어놓았던 부분도 찾을 수 없어서 이 정도로 그만.
오멜라스에 남는 사람들 (한겨레21 2007년05월23일 제661호,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희생양’을 테마로 한 어슐러 K.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딱 3년 전 5월에 김선일씨가 피랍되어 처형당하기 전까지의 22일 동안,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광화문에 촛불을 켜고 모여든 이들이 소리 높여 정부를 비난했지만 결국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은 서늘해졌다. 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 국익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을 포기하고 잊음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미국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 희생양을 통해 우리의 세계가 계속 안전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누군가는 그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격분하고, 또 다른 이는 누가 그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설득한다. 누구도 그에게 그 위험한 곳에 가라고 한 적이 없다고.
미국 공상과학(SF) 소설가인 어슐러 K. 르귄은 이와 같은 ‘희생양’ 테마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바람의 열두 방향>, 시공사)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을 썼다. 이야기는 극히 간단하다. 이성적이고 평화로우며 모든 이들이 사랑과 행복과 자유와 아름다움을 누리는 중용적 유토피아 ‘오멜라스’라는 곳이 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여름축제가 열리는 오멜라스의 어느 건물에는 어두운 방이 있고, 그곳에는 제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하는 백치 어린아이 하나가 갇혀 있다. 그는 끝없는 굶주림과 질병과 두려움에 영원히 시달려야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괴로움을 당해야 오멜라스의 행복과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오멜라스의 모든 아이들은 철이 들 무렵,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화를 내고 무력감에 빠지며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아이의 불행에 오멜라스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결국 체념한다. 그리고 설령 아이를 풀어준대도 달라질 게 없다고 믿는다. 어차피 아이는 너무 오랫동안 불행하게 살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멜라스가 풍요를 유지하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눈물과 분노 끝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마는 오멜라스 사람들의 이성적 치유력 덕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침묵에 잠겨 있다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밝고 유쾌한 도시를 지나 ‘그렇게 서쪽으로 북쪽으로, 산맥으로 향한다. (…)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 김선일을 포기하지 않고, 결코 우리 중 가장 작은 자를 큰 것을 위해 내어주지 않을 때, 우리가 가게 되는 이곳은 어디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아직까지 그 어둡고 알 수 없는 곳에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곳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만 가득할 뿐.
이런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라면 딱히 장르문학이니 순문학이니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이라는 SF소설의 대전제는 허무맹랑한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우리 사는 세상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강력한 전복성을 띨 수도 있다. 르귄의 이 짧고도 강렬한 소설은 장르의 미학을 통해 단숨에 우리를 ‘양심의 딜레마’라는 윤리학의 핵심으로 이끈다.
혹시 이 모티브로 더 긴 글을 읽고 싶다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가 레지스탕스 버전으로 다시 쓴 <앙티곤느>를 권한다. 우리 삶의 안전한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아찔함으로 가득하다. 이렇게라도 가끔 존재론적 질문에 대면하여 한두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마냥 위선적이거나 나쁘지만은 않을 터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오멜라스를 떠날 수 없지 않은가.
SF의 고전이라는 "바람의 열두 방향"을 언젠가는 보리라 맘 먹고 있다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 마자 단숨에 샀고, 사자마자 읽어제꼈다. 아마 설 즈음인 듯하다.
그 동안 한 켠에 제껴두었다가 동생이 읽고 돌려주고 나서 블로그에 읽었다는 표시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슐러 K. 르귄의 책임을 알고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디 듣도 못한 그리폰북스라는 곳에서 발간되었는데, 시공사의 장르문학 브랜드란다. 전두환 씨 아들이 경영하는 그 회사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귄의 초창기 작품들을 모아놓은 단편소설집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작품들을 읽고 나서 감질맛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지는 줄거리를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여기에는 SF도 있지만 판타지도 있다. (판타지도 SF이던가. 이런 건 잘 모르니까...) 판타지 소설보다는 SF소설이 훨씬 더 댕긴다.
소설들 중에서는 '샘레이의 목걸이', '어둠상자', '이름의 법칙', '겨울의 왕', '아홉생명',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땅속의 별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혁명 전날'이 인상 깊었다. 잘 이해가 안되면 몇번씩 되돌아가서 읽어야 했으나, '샘레이의 목걸이'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샘레이의 목걸이'는 르귄이 1966년에 발표한 <로캐넌의 세계> 첫머리 부분이란다. 그 장편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번역이 되었는지 여부이다. 원어로도 나름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지만...
그 동안 SF를 별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SF를 읽어볼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집이다. 초창기 작품이라서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참 대단한 듯하다.
아주 인상적이었던 무슨 SF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실려있지 않다. 뭐였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모티브의 것이었는데... 한국소설이었나.
아무튼, 책 뒷표지에 보면 이런 소개가 나와 있다.
'SF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인정받는 장르 작가 르귄의 첫 단편집. 이 책에 실린 17편의 단편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색을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정통 문학의 기법으로 실현하고 있다. 인류학, 심리학, 철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30년 전에 발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르귄에게 지금의 명성을 안겨 준 세계 3대 판타지 중 하나인 '땅바다' 이야기와 '헤인' 시리즈의 원형이 되는 단편들도 실려 있다.
이런 소개를 떠나 나는 아주 재미있었다. 강추!
이 소설들에서 유려한 문장을 찾거나 교훈적인 대목을 찾는 것은 헛수고인 듯하여, 그리고 나중에 다시한번 생각해보려고 접어놓았던 부분도 찾을 수 없어서 이 정도로 그만.
오멜라스에 남는 사람들 (한겨레21 2007년05월23일 제661호,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희생양’을 테마로 한 어슐러 K.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딱 3년 전 5월에 김선일씨가 피랍되어 처형당하기 전까지의 22일 동안,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광화문에 촛불을 켜고 모여든 이들이 소리 높여 정부를 비난했지만 결국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은 서늘해졌다. 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 국익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을 포기하고 잊음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미국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 희생양을 통해 우리의 세계가 계속 안전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누군가는 그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격분하고, 또 다른 이는 누가 그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설득한다. 누구도 그에게 그 위험한 곳에 가라고 한 적이 없다고.
미국 공상과학(SF) 소설가인 어슐러 K. 르귄은 이와 같은 ‘희생양’ 테마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바람의 열두 방향>, 시공사)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을 썼다. 이야기는 극히 간단하다. 이성적이고 평화로우며 모든 이들이 사랑과 행복과 자유와 아름다움을 누리는 중용적 유토피아 ‘오멜라스’라는 곳이 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여름축제가 열리는 오멜라스의 어느 건물에는 어두운 방이 있고, 그곳에는 제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하는 백치 어린아이 하나가 갇혀 있다. 그는 끝없는 굶주림과 질병과 두려움에 영원히 시달려야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괴로움을 당해야 오멜라스의 행복과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오멜라스의 모든 아이들은 철이 들 무렵,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화를 내고 무력감에 빠지며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아이의 불행에 오멜라스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결국 체념한다. 그리고 설령 아이를 풀어준대도 달라질 게 없다고 믿는다. 어차피 아이는 너무 오랫동안 불행하게 살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멜라스가 풍요를 유지하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눈물과 분노 끝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마는 오멜라스 사람들의 이성적 치유력 덕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침묵에 잠겨 있다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밝고 유쾌한 도시를 지나 ‘그렇게 서쪽으로 북쪽으로, 산맥으로 향한다. (…)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 김선일을 포기하지 않고, 결코 우리 중 가장 작은 자를 큰 것을 위해 내어주지 않을 때, 우리가 가게 되는 이곳은 어디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아직까지 그 어둡고 알 수 없는 곳에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곳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만 가득할 뿐.
이런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라면 딱히 장르문학이니 순문학이니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이라는 SF소설의 대전제는 허무맹랑한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우리 사는 세상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강력한 전복성을 띨 수도 있다. 르귄의 이 짧고도 강렬한 소설은 장르의 미학을 통해 단숨에 우리를 ‘양심의 딜레마’라는 윤리학의 핵심으로 이끈다.
혹시 이 모티브로 더 긴 글을 읽고 싶다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가 레지스탕스 버전으로 다시 쓴 <앙티곤느>를 권한다. 우리 삶의 안전한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아찔함으로 가득하다. 이렇게라도 가끔 존재론적 질문에 대면하여 한두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마냥 위선적이거나 나쁘지만은 않을 터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오멜라스를 떠날 수 없지 않은가.
NeoScrum 2007/06/05 02:33
저는 그 책에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혁명 전날'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특히 '혁명 전날'은 오도주의자들의 아나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를 그린 '빼앗긴 자들'을 읽고 나면 그 의미가 새삼 더 커지는 것 같더라구요. 혹시 '빼앗긴 자들'을 아직 못 읽어보셨다면 꼭 한번 읽어보세요. 정말 최고입니다.
새벽길 2007/06/05 07:49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혁명 전날'이 아마 17편의 글들 중에서 한국적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할 대목이 가장 많은 것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운동권이라면 말이죠.
아직 '빼앗긴 자들'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감사...
지각생 2007/06/12 13:58
"로캐넌의 세계"는 번역되서 나와 있습니다 :)
http://blog.jinbo.net/h2dj/?pid=323
새벽길 2007/06/12 21:07
저는 도서관에서 가서 르귄의 SF소설 4권을 빌렸답니다. 다행히 바람의 열 두 방향에 로캐넌의 세계가 언급된 부분이 있어서 그걸 먼저 봤더니 3권에 대한 해설이... 웬 재수? 덕분에 유배행성과 환영의 도시를 쉽게 읽을 수 있었지요. 그래도 자꾸 그 해설을 다시 뒤적였어요.
지금은 짬을 내서 틈틈히 빼앗긴 자들을 읽고 있는데, 갈수록 빠져들고 있습니다. 역시 놀라운 소설.